말씀: 벧전3:16
사람은 누구나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의 정체를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양심은 마음에 속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양심을 혼의 영역이냐? 영의 영역이냐? 로 오랫동안 논쟁해 왔습니다. 양심은 문명인이나 미개인이나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양심이 무엇인가? 명확한 정의가 없다 보니 어떤 이는 “양심은 생각하는 필터이다”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양심은 내재적인 지식, 의식이다. 양심은 개인의 행동의 도덕성을 판단할 수 있는 기능이다.”(옥스퍼드 사전)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선악 간에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의 심성이다.”란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심은 선악의 절대 기준은 될 수 없습니다. 양심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의 양심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습니다. 바른 것이지만 잘못으로 알고 있는 경우에도 양심은 가책을 받습니다. 양심은 결코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거울 역할을 합니다.
양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2:15을 보십시오.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거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 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 보이느니라.)](롬2:15). 양심의 역할은 증거합니다. “자기 양심이 증거하며”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십시오. 이는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아니하노라. 내 양심도 성령님 안에서 나를 증거하거니와](롬9:1).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양심이 자신의 진실을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양심의 기능은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한 구절을 더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할 때에 단순함과 하나님께서 주신 진실함으로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였으며 또한 너희를 향하여는 더욱더 그리하였노니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요 또 우리 양심이 증거하는 바라.](고후1:12). “양심이 증거한다.” 이것은 성경의 일관적 증언이며, 가르침입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의 말이나 글로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양심이 자신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이야말로 영혼의 나침반과 같은 것이며, 측량기와 같습니다. 양심은 반응합니다. [이것과 동일한 모형 곧 침례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를 구원하니 (이것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응답하는 것이라.)](벧전3:21). 침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응답이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반응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일을 하는 중에 아니면 한 직후에 양심의 반응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억누를 수도 있고, 꺼림칙하게 간직할 수도 있고, 즉시 고칠 수도 있습니다. 양심의 반응에 대한 태도는 각 사람마다 다릅니다. 양심은 일단 우리 마음속에 죄가 들어올 때 불안함이나 흥분, 걱정이나 공포 등의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것이 죄요, 불의한 일이요, 불법임을 가르쳐 줍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으로 죄를 규정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도둑질, 간음, 거짓말이 죄인 줄 압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지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는 거의 작동을 하지 못합니다. 또 사회적 관습, 전통, 사람들 사이에 굳어져 버린 죄악들에 대해서는 전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불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양심이 더럽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양심의 한계입니다. 누가 말하기를 “양심은 거울과 같아서 보여 주기는 하나 씻어 주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 양심은 증거를 하긴 하지만 힘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양심도 성경적 지식, 영적 지식,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양심이 있지만 사람마다 동일한 양심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심 자체가 절대적 기준이 될 수도 없습니다. 이교도들은 우상에게 절을 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죄인들의 양심은 매우 연약하며, 더럽혀져 있으며, 악합니다.
양심의 종류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① 선한 양심 - 선한 양심을 가지면 양심이 말하는대로 살아도 무방합니다. 양심은 살아있고, 성장하고 발달합니다. 부드럽고도 민감한 양심을 가짐으로써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것은 너희를 가리켜 악을 행하는 자라 비방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한 행실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16). 바울 사도 역시 평생은 ‘선한 양심을 다해’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이 공회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 날까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다하여 살아왔노라, 하거늘](행23:1). 하나님 앞에서 양심이 선하면 훌륭한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고 합니다. [믿음과 선한 양심을 붙들라. 어떤 자들이 이 선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모든 일에 정직하게 살려면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일에 정직하게 살고자 하므로 선한 양심을 가진 줄 확신하기 때문이라.](히13:18).
② 거리낌 없는 양심- 이것은 담대함을 얻기 위한 기본적인 양심입니다. [이 소망 속에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스스로 힘쓰나이다.](행24:16). 무엇을 숨기거나 가리는 사람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 거리낌없는 양심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의 양심을 가리는 일이나 대적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양심에 갈등을 겪는 일이나 자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일이라면 믿음이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이 없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늘 주님 앞에서 회개하는 삶, 자신을 성찰하고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③ 약한 양심 - 마음이 여린 사람이 있듯이 양심이 약하고 여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갓 거듭난 성도들은 양심이 약합니다. 양심이 살아나긴 했어도 매우 약합니다. 영적 지식이 들어가고, 말씀을 통해 판단력이 생길 때까지 양심은 사람들이나 환경에 지배를 받거나 상항에 좌우됩니다. 고린도전서 8장에는 이런 예가 나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니 이는 어떤 사람들이 이 시각까지도 우상을 의식하며 우상에게 바친 것으로 여기고 먹으므로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러워졌기 때문이니라.](고전8:7). 약한 양심은 쉽게 더럽혀집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보고 따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속적인 성경 공부와 체험을 통해서 진리의 지식을 배우고, 스스로 영적 판단력이 생기면 양심은 강해집니다. 약한 양심은 쉽게 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이와 같이 형제들에게 범죄하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면 그리스도께 범죄하는 것이니라.](고전8:12). 형제들의 약한 양심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불신자들은 악한 양심의 소유자들이고, 어린 형제들은 약한 양심의 소유자들입니다. 영적 지식으로 어린 형제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인데 이것이 ‘그리스도께 범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말했을 뿐이고, 믿고 확신한대로 행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범죄’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형제들의 믿음과 덕을 세워주는 일이 아니라면 바른 성경적 지식이라 해도 죄를 짓는 수단이 됨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랑으로 말해야 합니다.
④ 순수한 양심- 우리의 죄가 씻음 받은 날 우리의 영이 거듭날 뿐 아니라 혼이 씻음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양심은 정결하게 됩니다. 순수한 말씀을 믿을 때 양심 역시 순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내가 밤낮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너를 기억하므로 내 선조 때부터 순수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딤후1:3). 디모데는 순수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순수한 양심은 집사와 감독의 자격 요건이기도 합니다. [순수한 양심 속에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자라야 할지니라.](딤전3:9).
⑤ 화인(火印)/인두로 지진 양심- 이 양심은 죄로 인해 완전히 무디어진 양심이며, 죄에 대한 감각이 없는 양심입니다. 이단 교리를 따르는 자들은 대부분 양심이 지져진 자들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이들은 위선으로 거짓말을 하며 자기 양심을 뜨거운 인두로 지진 자들이라.](딤전4:2).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확신합니다. 성경적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 확신입니다. 믿음이 아니라 신념입니다.
⑥ 더럽혀진 양심 - 양심은 맨발로 맨 바닥을 걸을 때 묻는 먼지만큼이나 쉽게 더럽혀집니다. 양심을 정결하게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늘 누더기처럼 더러운 양심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가장 양심이 더럽히는 것은 ‘불신’입니다. 믿지 않는 불신앙은 양심을 쉽게 죄로 더럽힙니다. [순수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나 더럽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순수한 것이 없고 오히려 그들의 생각과 양심마저도 더럽혀져 있느니라.](딛1:15). 그래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보혈과 말씀의 물, 회개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⑦ 악한 양심 - 모든 불신자들은 악한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한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 바뀌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문제는 신자들이 악한 양심을 가진 경우입니다. 이는 거짓과 불법에 자신을 내어 준 결과입니다. 양심은 더럽혀질 때 씻지 않고, 계속해서 죄에 거할 때 양심은 더 무디어지고 완전히 화인(火印)맞은 양심이 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드러내는 수단임을 배웠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설득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께 밝히 드러났으니 또 너희 양심에도 밝히 드러난 줄로 확신하노라.](고후5:11).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자기 양심에 가책을 받아 나이가 가장 많은 자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매 오직 예수님만 남고 그 여자는 한가운데 서 있더라.](요8:9). 주님은 정죄하는 무리들을 향해 율법대로 하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잠들어 있던 양심을 건드리셨습니다. 양심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나고, 예민해지고, 깨어납니다. 매일 읽는 성경 말씀은 마음과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물입니다. 계명의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이 명령의 목적은 순수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1:5). 우리 몸 속에는 피와 물이 같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보혈과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씻어내어 주님 앞에서 깨끗하고 순수한 양심을 갖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기록된 성경 말씀이 없는 사람이 사회적 기준, 사람들이 정해 놓은 윤리적 기준에서는 정말 티없이 맑고 순결한 양심의 소유자들일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양심은 여전히 더럽고 악한 양심에 지나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입니다.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예절이나 인성 교육이나 극기 훈련이나 정신력 강화나 철학이나 종교적 명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을 깨끗하게 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9:14). 그리스도의 피가 없는 종교 행위로 양심의 가책을 덜어내고 완화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피만이 마음의 악한 양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양심은 종교적 기능, 영적 역할도 합니다. 그러나 양심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은 양심에 관한 한 완전하지 못했습니다. [이 성막은 현재 곧 이때까지의 모형이라. 그 안에서 예물과 희생물을 드렸어도 그런 것들이 양심에 관한 한 섬기는 자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나니](히9:9). 율법적 제사로는 사람들의 양심이 완전해 질 수 없었습니다. 양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깨끗해지고 정결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선한 양심, 순수한 양심, 거리낌 없는 양심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보혈로 우리를 씻어 주시도록 모든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갖고 주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깨끗한 양심을 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 암송할 말씀: 벧전3:16, 딤전1:5
☜ 생각해 볼 문제:
- 양심이란 무엇인가?
-
양심의 종류에 대해서 기술해 보시오.
-
- 양심을 선하고 순수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적어 보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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