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느8:10
성령의 열매(fruit) 가운데 두 번째는 ‘기쁨’(JOY-희락/Delight)입니다. 우리는 기쁨이 인간의 감정의 일부가 아닌 성령의 열매란 점에 놀랄 정도입니다. 기쁨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는 우리의 기쁨, 사람의 기쁨이 아니라, “주의 기쁨”, “나(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 “성령의 기쁨”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기쁨을 우리 안에 두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성령을 통해서 [주의 기쁨]을 가지고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주의 기쁨]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성령께서 열매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은 주님의 기쁨을 가진 사람들이 늘 그 기쁨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항상 웃고 지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웃음이 기쁨인 줄 압니다. 기쁨과 웃음은 달라서, 기쁨은 본질이고 웃음은 현상입니다. 웃는다고 다 기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기쁨이 감정, 감각의 현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기쁨은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시고 두신 곳이 에덴입니다. 에덴이란 ‘기쁨’이란 뜻이고 에덴의 동산은 ‘기쁨의 동산/정원’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이 에덴에서 사는 것이며, 그것은 기쁨의 세상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에덴을 잃었고, 기쁨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리적으로, 지리적으로, 육체적으로는 에덴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마음속은 에덴에서의 희락을 완전히 회복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15:11).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주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우리 안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자신의 평안을 우리에게 주시고, 자신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사랑을 우리 안으로, 자신의 능력을 우리 안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 안으로 옮겨 두시고자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며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어디로 이사를 갈 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옮겨 놓으려 할 것입니다. 심지어 자녀가 출가를 하거나 집을 떠날 때도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다 챙겨 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기쁨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아시고 충만하게 해 주셨습니다. 악한 현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돈이나 능력이나 비상한 두뇌나 어떤 조직의 힘보다 [주의 평안과 기쁨]이 더 필요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의 기쁨이 우리 안에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육신의 본성대로 살면서 약간씩 숨길 것은 숨기고, 가릴 것은 가리면서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기쁜 일만 계속 일어나면 언제나 기뻐할 수 있겠지만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늘 좋은 일만 터지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자들에게 오는 시험은 신자들에게 옵니다. 교회 다니기 전에 있던 문제는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있습니다. 신자가 된 후 오히려 이전에는 겪지 못했던 마귀의 시험과 불같은 믿음의 시련과 죄의 유혹과 육신의 정욕과 하나님의 징계나 매질도 경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살전5:16)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기쁨, 성령의 기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내 안에 기쁨이 없다면 항상 기뻐하는 것은 고사하고 잠깐도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나오는 기쁨(희락)은 감정적 느낌이 아닙니다. 항상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띠고 싱글벙글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우리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장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기뻐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요, 열매입니다. 로마서 5:2-3을 보십시오. [또 우리가 그분을 통해 지금 서 있는 이 은혜 안에 믿음으로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느니라.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롬5:2-3). 2절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소망을 기뻐하는 것은 당연하고 쉽습니다. 은혜를 입으면 누구나 마음에 기쁨이 차오릅니다. 그러나 3절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할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도 기뻐하나니...”란 말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환란을 누가 기뻐합니까? 여러분이나 저나 늘 겪는 일이지만 웃고 즐기며 기뻐하다가도 언뜻 들려오는 한 마디에도 분위기는 착 가라앉고 기쁨은 다 사라지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입니까? “좋다가 말았네!, 괜히 좋아했네.”라는 말들을 해 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환란과 시련을 기뻐할 수 있는 기쁨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가 받은 주의 기쁨은 환경에 따라, 감정적 기복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도 기뻐하는 그런 기쁨은 주님의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령께 자신을 내어 드린다면 성령이 여러분 안에 맺으실 열매입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벧전4:13a). 왜 기뻐하라고요?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이것이 기뻐하라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뻐하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는 현재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기쁨은 감정적 차원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깊은 속사람 안에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이런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정상인으로서 모욕당하는 것이 기쁘다면 그는 미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육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처리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통제 아래 있음이 확실합니다. 성령 충만했을 때 사도들과 제자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냥 단순히 기쁜 정도가 아니라 [이루 말할 수 없고 영광이 가득한 기쁨으로 기뻐하니](벧전1:8)라고 할 정도의 기쁨을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쁨을 소유하고 싶지 않습니까? 이런 기쁨이 내 안에 강처럼 흐를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어서라도 얻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이 시간 솔직히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기쁨에 찬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미건조한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얼마나 성경을 읽었고, 교회를 오래 동안 다녔고, 어떤 신학을 가졌는지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 안에 지금 [주의 기쁨]이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기쁨이 없다면 그는 현재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매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신앙 경력이나 교회에서 맡은 직분, 그가 하는 사역이나 이룬 성취 등을 가지고 ‘영적이다, 믿음이 좋다, 신실하다’ 등을 판단하지만 주님은 사람들처럼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오직 열매를 보시고 판단하십니다(마12:33). 기쁨(희락)의 열매가 있으면 좋은 나무입니다. 기쁨의 열매가 없으면 부패한 나무요,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기분 나쁘게 들리실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인 기쁨이 없다면 여러분의 신앙 경력, 어떤 직분, 지금까지 한 일 등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려움이나 시련이 터지면 즉시 해결할 방법을 찾습니다. 그것은 기도일 수도 있고, 금식일 수도 있고, 서원일 수도 있고, 아니면 주님 앞에서 앞으로는 어떻게 살겠다는 결단일 수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흔히 하는 방법입니다. 믿음으로 효과적이고도 뜨겁게 기도해서 사건 사고를 일거에 해결해 버리고, 상황이 역전되고, 일이 일사천리로 풀리는 경험을 기대합니다. 그렇게 되면 간증거리도 생기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어떻게 기도했고, 어떻게 믿었더니 승리했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해 보셨겠지만 일은 그렇게 잘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일이나 사건, 환경을 해결해 주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보게 하시고, 마음속부터 좀 해결해 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주신 기쁨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하시고 그것을 찾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평안이나 기쁨에 대해서 생각할 때면, 통증을 일으키는 썩은 치아를 뽑듯이 문제를 뽑아 버리고 거기에 약을 투여해 주고, 대체물을 넣어 주심으로 완결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쁨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내 인생의 모든 시련에 대해 그냥 그대로 두시고 내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인 오래 참음, 인내, 평강, 기쁨을 주셔서 그런 환경과 사건에 대한 이성적, 감정적 반응을 뛰어넘게 하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참된 쉼과 기쁨을 누려 보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단련을 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말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다운 아들로 만들어 가십니다.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7:24-25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하리라.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그 집이 무너지지 아니하리니 그 까닭은 그것을 반석 위에 세웠기 때문이라.](마7:24-25).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세운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반석 위에 세운 집에는 비가 안 내리고, 홍수가 안 닥치고, 바람이 안 불어서 무너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을 지혜로운 자라고 하시며 그들에게는 비나 홍수나 바람이 불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셨다면 반석 위가 아니라 모래 위에 지어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그렇게 이해하고 믿고 싶어 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의 일상에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열심히 교회도 나오고, 기도회도 나오고, 함께 하자는 프로그램들을 잘 소화합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일이 닥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기쁨도 평안도 모두 잃어버린 듯합니다. “어떻게 빨리 일이 해결돼서 평안과 기쁨을 되찾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물론 일이 해결되면 평안과 기쁨을 회복하겠지만 성경은 그것을 열매라고 하지 않습니다. 환란 가운데 기뻐하는 것, 시험 가운데 기뻐하는 것, 고난의 참여자가 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고린도후서 4:8-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을 지닌 성도의 삶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1). 7절에 나오는 “이 보배”란 성령을 말합니다. 질그릇은 우리 몸입니다. 성령을 소유한 바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8-9절을 보면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고, 난처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고후4:8-9)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반석 위에 자신의 집을 세운 성도들의 삶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홍수가 부딪힌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 일행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8~9)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안에 하나님의 뛰어난 권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각을 초월하는 평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망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환경이 바뀌고, 일이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그 가운데서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이 해결됨으로 평안하고 기쁘다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필요 없이 우리 옆이나 앞, 뒤에 서 계서도 충분합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겪었던 일을 보십시오.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감옥에서 그들은 기도하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르니 죄수들이 듣더라.] (행16:25). 이 때 찬양을 불렀다고 하지만 그 앞 구절을 보면 심하게 매질을 당하고 발에는 차꼬가 채워진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행16:22-24). 채찍에 맞으면 살이 찢어지고 뼈를 깎아내는 그런 고통이 동반됩니다. 밤에 신음 소리를 내어야 정상일 것 같은 ‘바울과 실라’는 도리어 기쁨으로 찬양을 불렀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속히 감옥에서 나가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기도한 후에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들이 불평하거나 걱정하거나 염려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채찍에 맞은 고통과 차꼬에 채인 불편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인 기쁨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의 기쁨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정확히 마음 속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에는 내 안에 성령의 기쁨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명령입니다. 기뻐하는 것은 속에 들어 있는 [주의 기쁨]을 표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 기쁨을 두시는데 이 기쁨은 매우 큰 기쁨입니다. 불과 물을 통과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주의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고, 사람이 나누어 줄 수도 없고 오직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열매로 맺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기쁨을 주심으로 이 세상을 희락 가운데 살아가도록 명하시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시편 4:7에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포도즙이 불어날 때의 /기쁨/ 보다 더 크니이다.](시4:7)고 말합니다. 잘 보십시오. “주께서 내 마음 속에 두신 기쁨”이라고 합니다. 이 기쁨의 출처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기쁨은 잠시 웃고 마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기쁨입니다. 에베소서 1:9에 [자신의 크신 기쁨 곧 친히 자신 속에서 작정하신 그 기쁨을 따라 자신의 뜻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게 하셨으니](엡1:9). “자신의 크신 기쁨”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코메디언이나 개그맨이 아닙니다. 우리를 웃기시려고 애쓰시는 분이 아닙니다. 웃기는 말이나 동작으로, 또는 좋은 일이나 선물을 주어서 기쁨을 주려는 것은 사람들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크신 기쁨”을 우리 안에 심어주고, 나누어 주어서 그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면서 동시에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내 기쁨(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성령을 통해 자신의 기쁨을 우리에게 부어 주셔서 충만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게 되면 우리 속에는 어떤 다른 것이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이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성령의 기쁨으로 살아야 하며, 이 기쁨은 점점 넘쳐나게 하심으로 육신의 행위들을 모두 자연스럽게 이겨내도록 하십니다. 이전에는 죄를 이기려 애썼다면 이제는 죄가 생각나지도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불법이나 불의가 기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게 됩니다. 내 마음이 미워하는 것들이라면 그것들이 나를 유혹할 수 없습니다. 유혹은 끌려야 넘어가지 싫어하고 기뻐하지 않으면 넘어가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기쁨을 얻지 못하면 사람들은 다른 대체물로서 인위적이고, 모조품의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것은 오락일 수도 있고, 소위 문화생활이라며 연극, 뮤지컬, 영화, 인터넷, T.V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여행을 통해 기쁨을 얻고자 하고, 어떤 이는 문학이나 철학에 심취함으로 지적인 쾌락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나마 고상한 것을 추구하지만 술, 마약, 도박, 섹스 등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죄의 쾌락(히11:25). 왜 이런 것들에 마음이 끌리고 끊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성령의 기쁨이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있으면 육신의 모든 행위들은 저절로 끊어지고 사라져 버립니다.
주님은 성령의 생수를 기쁨의 강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기름진 것으로 넘치도록 만족할 것이요, 주께서 주의 기쁨의 강물을 그들에게 마시게 하시리이다.](시36:8). 성령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이런 [주의 기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기쁨에 대해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을 현재 내 속에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염려가 여러분을 붙들고 있습니까? 주의 기쁨의 강물이 내 안에서 흘러넘치고 있습니까? 만약 현재 이 시각 여러분이 어떤 사람으로 인해, 아니면 어떤 사건이나 일이나 그 무엇으로 인해 걱정과 염려 가운데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 안에서 육신의 행위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과 공상들, 상상들이 이리 저리 떠돌아 다니고 있다면 육신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기쁨의 강물”들을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기쁨이 충만(充滿)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믿음 안에서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권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돈도 없고, 건강도 좋지 않고, 사업도 엉망이고, 무엇 하나 정상이 없어 보이는데 기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뻐합니다. 기쁨이라고 해서 우리는 울지도 못하고, 애통하지도 못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를 압도하는 슬픔과 비극이 일어날지언정 그 속에서 평안과 기쁨을 유지하며 이겨 나가는 그런 기쁨입니다. 열매로 주어지는 기쁨은 그냥 거저 얻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슬픔을 통과한 후에 솟아난 기쁨이요, 고통을 통과한 후에 얻어지는 기쁨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연단되어서 열매로 나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박국 대언자는 처음에 주님께 불만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왜 주님께서 앗시리아를 통해 이스라엘을 치시는가? 따졌습니다. 그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눈물과 근심과 탄식과 애통만이 있었습니다. 대언자로서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면 그는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심지어 시편 기자들이나 눈물 없이 쓴 성경이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 눈물과 고통을 겪으면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입니다. 하박국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직 의인은 자기 믿음으로 살리라](합2:4)는 말씀을 들은 후에 근심과 고통을 모두 날려 보내고 기쁨에 차 노래를 불렀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서 양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떼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 (합3:17~18). 환경이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정이 나아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하박국이 얻은 기쁨이 얼마나 크고 풍성했던지 그 무엇도 그 기쁨을 앗아 갈 수 없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기뻐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런 기쁨의 비결은 주님과의 친교와 믿음의 회복에서 온 것입니다.
마음에 흘러넘치는 그런 기쁨은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접하는 가족들, 친구들, 동료들에게 전달되고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과 기쁨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얻고 싶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방법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시위대 현장을 지나다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평생 처음 철장 안에 갇히게 되었고, 수치와 모욕을 엄청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혼자 기쁘게 찬양을 불렀습니다. 같이 있던 죄수들이 “목사님은 억울하지도 않아요? 뭐가 그리 좋아서 노래를 불러요?”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운이 없었다. 재수가 없었다. 세상이 어찌 이 모양인가!” 하며 불평하거나 뭔가 잘못되어 일이 커질까봐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에 차 있었습니다. 그의 찬양 소리에 옆방에 있던 죄수들 중에 누가 “좀 더 큰 소리로 불러 주세요. 지금 받아 적고 있어요.”란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 찬양 소리에 옆방의 죄수 중에 하나가 어릴 때 교회를 다녔다가 실족했었는데 다시 신앙을 회복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감옥에서 실의와 낙담과 절망 가운데 잡혀 왔던 많은 사람들이 기쁘게 찬양을 부르는 목사님의 찬송으로 인해 훗날 신앙을 가지게 되었노라며 찾아 온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찬송가 가사를 듣고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기쁨을 유지하는 [놀라운 기쁨]에 감동을 받고, 압도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뻐한다면 그것은 바로 간증이 되고, 능력이 되고, 생명을 얻는 열매가 되며, 주님을 증거 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오늘날 교회 성도들의 얼굴을 보면 그들 마음 속에 참된 기쁨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을 보아도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매우 힘들게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초신자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심한 환란과 박해를 이겨낸 모범적인 교회로 나옵니다. 어떻게 단시간에 어린 신자들이 불같은 시련을 이기는 믿음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까? 이유는 그들이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많은 박해 속에서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으니](살전1:6).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이것이 핵심입니다. 기쁨은 환란과 박해를 이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제자들이 말씀을 선포할 때 나타나는 증거는 단연 기쁨이었습니다. [그 도시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8:8).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더라.](행13:52). 복음을 받고, 말씀을 받으면 기쁨이 생기게 됩니다. 생명의 길을 안 사람의 얼굴이 무덤덤하고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생명을 길을 알 때 기쁨은 충만해지는 법입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들을 내게 알게 하셨으니 주의 얼굴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음이니라.](행2:28).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아무렇지도 않았습니까? 이는 단순히 감정적인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와 믿고 영접한 사람들이 있는 현장은 기쁨의 현장입니다. 충만한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이 땅에만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도 기쁨이 넘칩니다. 복음 선포의 현장에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종교 행위이지 성령의 역사하심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제자들이나 그 도시가 기뻐했던 것은 누가 잘되고, 누가 이겼고, 어느 집에 잔치가 열려서가 아니라 순전히 말씀이 선포되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말씀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기쁨은 넘치게 됩니다. [주의 증거들은 또한 나의 기쁨이요, 나의 모사(謀士)이니이다.](시119:24), [주의 긍휼이 내 위에 임하게 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이는 주의 법이 나의 기쁨이기 때문이니이다.](시119:77). 그래서 성경 공부만 좋아하는 분들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면 말씀을 들어도 전혀 기쁨이 없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마음속이 성령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가득 차 있고, 육신에 점령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주일 예배나 기도 모임에 오기 전에, 오면서, 또는 이곳에 와서 즉시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은혜를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기쁨이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예배 전에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때로 설교에서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왜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말씀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귀를 가려줄 말을 해 주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자,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유대 역사 중에 가장 위대한 왕이요, 믿음의 사람으로 추앙받지만 사실 그는 평생 고난의 행군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고난을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그는 고백하기를, [주의 법이 나의 기쁨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나의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시119:92)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오직 말씀이 주는 기쁨으로 인해 고난 중에 멸망하지 않고 새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나 도망자로 피해 다닐 때나 언제나 주의 말씀으로 인해 얻는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길만한 기쁨을 말씀에서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근심과 고통 중에도 늘 말씀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근심과 고통이 나를 붙잡았사오나 주의 명령들은 나의 기쁨이니이다.](시119:143). 다윗에게도 근심과 고통이 늘 따라 다녔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다만 그런 근심과 고통을 이겨낼 기쁨이 내 안에 있는가? 하는 문제가 핵심입니다. 말씀을 붙잡는 일,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이야 말로 근심과 고통을 능히 이겨내는 기쁨입니다. 주님은 근심, 고통을 제거하는 대신 더 큰 기쁨으로 그것을 이겨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곳에는 정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와 간증을 들어보면 하나같이 성경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마음의 기쁨과 평강으로 이겨낸 것이 간증일진대 그런 것은 거의 없고, 주님께서 사건을 자연스럽게, 무리 없이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에 넘치는 평안이 찾아오고, 기쁨이 잔잔히 흘렀다는 그런 말을 들어 보기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참된 영적 평안이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는 절대로 [근심과 고통, 넘어짐이나 고난이나 난처한 일이나 핍박이나 거꾸러뜨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행여나 그런 것이 있더라도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마귀들의 교리요, 사상일 뿐입니다. 진정한 기쁨을 얻고 싶습니까? 말씀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으십시오. [내가 주의 증거들을 영원한 유산으로 삼았사오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내 마음의 기쁨이기 때문이니이다.](시119:111). 말씀을 배우는 일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영이요, 생명이신 말씀을 통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십시오. 말씀이 기쁨이 되면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이 모두 기쁨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는 일이 기쁨이 아니라면 마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십시오.
내 안에 기쁨이 없다면 이는 연료가 떨어진 차로 대륙을 횡단하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짓입니다. 힘이 없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기쁨이야말로 영적인 힘(strength)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또한 근심하지 말지니 이는 [주]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기 때문이니라, 하고](느8:10b) *the Joy of the LORD-주의 기쁨. 주의 기쁨이 우리의 힘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힘은 주의 기쁨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몸에 힘이 없으면 몸으로 하는 일이 다 귀찮습니다. 앉고 일어서는 것도 힘들고 싫습니다. 영에 힘이 없으면 어떤 영적인 일도 다 싫고 귀찮아집니다. 때로 육신의 힘으로 영적인 사역에 기웃거려 보기도 하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바닥이 나고 맙니다. 기쁨이 있다면 그 기쁨이 영적인 힘이 됩니다.
주님께서 믿는 성도들 안에 기쁨의 강을 흘러 나게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메말라 있다면 문제를 찾아보십시오. 죄가 샘을 막고 있을 것입니다. 죄는 평강과 기쁨을 사라지게 합니다. 이런 때는 진심으로 회개하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구하면 됩니다.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주의 자유로운 영으로 나를 붙드소서.](시51:12). 우리는 회개를 통해 주님의 기쁨을 내 마음 속에 계속해서 흘러가게 할 수 있습니다.
자 모두 주의 기쁨을 회복합시다. 기쁨의 열매를 맺고 주를 기뻐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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