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의 열매(03)- 사랑
말씀. 로마서 5:5


성령의 열매로 언급된 첫 번째 항목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에 대한 말은 넘치지만 명확한 정의가 없는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저마다 사랑을 외칩니다. 노래 가사, 소설,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등 전 분야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표본으로 드는 예들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거나 ‘신분을 뛰어 넘는 연인의 사랑’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사랑은 아버지가 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생자 이삭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어 하나님께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완성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7, 17:5)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나를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자신의 독생자를 주실 만큼 사랑하십니다(요3:16). 주님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고, 죽으심에 이를 만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이 사랑을 성경은 완전한 사랑, 거룩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부어주신 사랑, 성령의 열매로 맺으시는 사랑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몇 가지가 부어져 있습니다. 성령이 부어져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평안이 주어져 있고, 하나님의 기쁨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 가운데는 자신 안에 이런 것이 주어져 있는 줄 알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두 구절을 봅니다. 디도서 3:6과 로마서 5:5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믿는 순간 주님이 부어 주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 영원히 거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하실 것은 ‘성령은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이 성령이 임하는 일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할 때 성령은 부어집니다. 로마서 5:5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 (롬5:5). 성령에 의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집니다. 정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이 부어지고, 성령이 부어질 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다.’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미 하나님이 부어 주신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누구의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상이나 사람이 가진 사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의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 연인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본래 우리 안에 있던 것이 개발되거나 터져 나온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에 부어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shed-뿌려지다] (롬5:5). 성령님에 의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뿌려집니다.

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이 사랑은 누구도 끊을 수 없고, 무엇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롬8:38-39). 이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에는 결코 두려움이 없고 완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4:18a). 하나님의 사랑은 불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이 내 안에 뿌려지고 거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②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밤에 천사나 누가 꿈에 나타나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말해 줍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성도들을 자주 만납니다. 사랑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알고 믿는 것입니다.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느끼려 하지 말고 믿으려고 하셔야 합니다. 믿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해서 들으면 됩니다(롬10:17). 마음에 확신이 생기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나타났으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요일4:9).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면 그는 절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③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낸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과 권위와 거룩함을 드러내셨지만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권능은 각종 이적과 표적으로 충분히 입증되었고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성 역시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에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갈보리 십자가에서만 제시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당당히 제시하시느니라.](롬5:8). 우리 교회 소식은 교회 소식지나 주보, 인터넷을 통해 나갑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제시되어 있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여기 저기 그것을 전파하고 보여 줌으로써 세상에 드러납니다.

④ 사랑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역시 갈보리 십자가에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신 것이라.](요일4:10). 모든 길은 갈보리 십자가로 통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거룩함과 용서와 긍휼과 은혜와 모든 것을 다 만나게 됩니다.

⑤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밝히 드러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어떤 사람의 사랑을 깨달으려면 친교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 알고 이해하는 사이가 되거나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아무 관계도 없는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을 깨달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어떻게 깨닫습니까?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므로 우리가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나니](요일3:16a). 이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음으로 깨닫되 갈보리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신 그 사실로써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 주목하십시오. 사람들은 그냥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 부모의 사랑, 친구의 사랑... 무슨 무슨 사랑이라고 해봐야 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논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진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뜨겁다가도 식어지고, 상황에 따라서 변하여 미움이 되고, 분노가 되고, 시기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주님은 말세의 특징 중의 하나가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법이 성행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 부부 지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지간이나 친구 간에도 사랑은 식어지고 있습니다. 대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 등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 잘하고 있으며 점점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육신의 열매이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보솔의 아들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벧후2:15)했다가 망했습니다. 삼손은 여자를 사랑했다가 망했습니다. 사람들마다 자신이 뜨겁게 사랑하는 것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런 사랑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 성령의 은사나 열매가 아니어도 이미 세상에는 충분히 넘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거듭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지 않아도 이미 다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불같이 뜨거운 열정적인 사랑에 자신을 한번 던져 보고 싶어 합니다. 때로 그 대상이 고상하여 조국이나 학문이나 회사나 가족 추구하는 이념이나 믿는바 자신의 종교를 위해서 한 몸을 바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들을 때도 우리는 가슴이 숙연해지고 아련한 감동이 마음에 밀려오곤 합니다. 이런 것들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으시는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열매로 맺으시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요일4:8,16)고 말씀합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자신의 성품(벧후1:4)을 이식하여 드러나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사람의 육신 안에서 자생(自生)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부어져야만 가능한 것입니다(롬5:5). 사랑은 성령의 은사이기도 하고, 열매이기도 합니다. 사랑은 오직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의 조화로운 역사를 통해서 우리 안에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사랑은 무엇인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누구의 열매라고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행동이 아니라 생명의 탄생과 같은 ‘열매’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성령께서 말씀의 씨앗을 받아 우리 마음 속에 자라나게 함으로 맺어지는 그런 열매입니다. 생명의 역사란 것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성령의 감정이나 성령의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낳으신 새 생명처럼 우리 안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안에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그 안에 성령이 있어야 성령께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성령의 열매를 언급하시기 전에 먼저 육신의 행위들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먼저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말하기 전에 육신적이란 말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色慾)과 우상 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같이 미리 말하노니,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갈5:19~21).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여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들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이런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육신의 행위들을 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행위들은 성령의 열매와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육신의 행위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도 거의 매일 발견되는 것들입니다. 나는 간음도 하지 않고, 음행도 하지 않는다, 부정하지도 않고, 색욕도 없고, 우상 숭배나 마법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 다시 한 번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육신적이란 것은 몸의 행동 이전에 마음입니다. 간음, 음행, 색욕, 부정함 등은 현대의 문화입니다. 영화, 소설, 인터넷 등은 온통 이런 것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즐기는 성도들은 문화생활을 즐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간음, 음행, 색욕, 부정함’에 동참하는 사람들이며, 마음속에 은밀히 그런 것들을 즐기는 사람들입니다. 왜 영화를 보러 갑니까? 간단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은밀히 육신의 정욕을 대리 만족하기 위함입니다. 목사들 중에서도 영화관에 발길을 끊지 못하고, 자기는 독특한 예술적 영화를 본다며 컬트 무비만을 고집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시간만 나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보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다큐멘터리나 역사물 등을 보는 것까지야 무엇이라고 말 못하겠지만 은밀한 동기를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영화를 보면서 “나도 저런 불같은 사랑을 해 보았으면...”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것이 바로 간음이요, 색욕이요, 음행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이 내 안에 없을 때 내 육신은 성경 대신 영화관에서, 소설에서, 어떤 놀이에서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스포츠에 광분하고 오락을 즐기고 여행을 다니고 놀러 다니는 것을 즐깁니까? 주일에 가족이 함께 교회 가는 것보다 산으로 바다로 캠핑을 떠나는 것이 즐거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안에 성령의 열매인 희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의 기쁨(the joy of the LORD)이 없기 때문입니다(느8:10). 성령님의 기쁨(*살전1:6)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에서 희락을 찾고 즐거움을 누리려는 것입니다. 본질이 없는 사람들은 겉껍데기로 대신하면서 이런 것을 즐기지도 못하는 한심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자녀인 에서가 약속의 자녀인 이삭을 조롱하고 놀렸듯이 육신적인 성도들은 성령의 열매가 아닌 모조품의 사랑, 모조품의 희락, 모조품의 기쁨, 모조품의 평안을 가지고 참된 사랑과 희락과 기쁨과 평안을 소유한 영적인 성도들을 놀리고 조롱합니다. 여러분들은 말씀이 주는 기쁨이 큽니까? 여행을 가서 자연을 감상하며 불고기 구워먹는 기쁨이 큽니까? 만약 전자라면 본질을 잡은 것입니다. 후자라면 지금 이 자리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주의 법이 나의 기쁨이요, 말씀을 듣는 것이 노략물을 얻는 기쁨보다 큰 것이란 시편 기자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일 때 우리는 육신적인 생각과 삶을 벗어 버릴 수 있습니다. 이 화창한 날씨에 강이나 바다로 놀러 다니는 한심한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십시오.

갈라디아서 5:20절을 보십시오. [우상숭배와 마법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emulation)과] 육신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대신 우상을 숭배합니다. 꼭 어떤 조각이나 신상이나 제사를 지내야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탐욕이 있으면 그것이 우상 숭배입니다(골3:5). 마법/마술은 취미나 스포츠가 아니라 육신의 행위입니다. 증오와 불화도 육신의 행위입니다. 여러분이 20-30년 신앙생활을 했다하더라도 누구에 대해 증오가 있고, 누구와 불화가 있다면 여전히 육신적인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높임을 받고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을지라도 하나님은 [육신적인 성도]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부 지간, 부자지간, 사제지간, 친구 간에, 목자와 양 사이에 왜 불화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사이 좋게 지내고 싶은데 “저 놈이....삐딱하게 군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나는 기쁘고, 즐겁게, 평안하게 사랑하고 싶은데 당사자가 문제라고 말합니다. “나는 네가 해 주는 대로 다 해준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지!” 이런 식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육신의 행위들입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나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 주님이 주신 평안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안에 열매로 맺힙니다. 주님의 평안을 받으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불안하거나 염려하거나 근심하는 일이 없습니다. 불화는 평화/평안/평강의 결여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은 큰 평강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그 사람과 나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문제이며, 내 안에 계신 성령과의 문제란 점을 인식하십시오.

육신의 행위 중에 경쟁(emulation)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경쟁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경쟁이 잘못된 것인가? 건전한 경쟁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경쟁이란 말은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고 너무 형편없다고 실망해서 소유나 인격이나 모든 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다른 어떤 사람처럼 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 사는 것처럼 한 번 살아보고 싶고, 다른 사람이 입는 것처럼 한 번 입어보고, 먹어 보고, 그렇게 흉내 내 보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경쟁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나 누구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고 하루를 살아도 남들 사는 것처럼, 남들 먹고 입는 것처럼 한번 살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 그것을 ‘경쟁’이라고 말하는데 여러분 안에 남의 것에 대한 부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바로 육신의 행위들이란 것입니다. 부러움, 시기, 질투가 다 여기서 나옵니다. 이는 주님이 주신 만족이 마음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나의 유업으로 삼는 사람은 세상의 어떤 것에 부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친구가 100만 불짜리 집을 샀던지 좋은 차를 뽑았든지 그 자녀들이 어떤 좋은 대학을 들어갔는지에 신경이 쓰이지 않습니다. 육신이 자극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에 신경이 쓰이고, 내 안에 동기 부여가 된다면 그 순간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믿음, 절제, 부드러움, 온유 등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행위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성령의 열매가 내 마음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스려서 이런 것들을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오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자신을 부인하고 성령께 복종시켜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맡길 때만 맺힙니다.

[다툼, 폭동, 이단 파당, 시기]와 같은 것 역시 육신의 행위들입니다. 누구와 말로 다투지 않더라도 마음속에 다툼이 일어나고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고, 어떤 사람에 대해 시기심이 생긴다면 그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이지 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마음속에서 여러 사람들과 말다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육신적이란 증거입니다. 남은 무엇이라고 말하든 간에 성령께서는 지적해 주십니다. “너는 육신적이다!” 성경의 완벽한 증언입니다. 육신적인 사람이란 구원은 받았지만 아직도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 사람이란 말과 다름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투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이 다투는 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우상 숭배와 육신적인 성도가 하는 우상 숭배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의 시기와 육신적인 성도의 시기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오히려 육신적인 성도들의 육신적인 모습은 불신자들마저도 더럽다고 혐오할 지경으로 더럽고 추합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면서 마음에는 여전히 이런 것이 나옵니까? 절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로마서 8:5-8을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거니와 /성/령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그런즉 육신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바울 사도에 따르면 “육신을 따르는 자”가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무엇을 하든간에 육신을 따르면 그는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육신적이란 것이 뭐 잘못되었느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육신적이란 말은 하나님의 대적자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복종할 수도 없는 자란 무서운 말입니다. 육신을 따라서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읽고, 음악이 좋아서 교회 성가대를 하고, 교회에서 사람을 사귀다 보니 이것저것 직분도 많고 어떤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고사하고 육신대로 교회에서 남들이 하는 것을 다 따라서 하고, 더 열심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유익과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불법, 편법, 위법, 약간의 손질은 거뜬히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이곳 이민 교회 성도들의 실정입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서도 주님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말씀에 대한 떨림이나 존중 없이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들 모르는 것 하나 더 아는 기쁨으로 성경을 공부하는 이도 있고, 양심의 위안을 삼고 이것이라도 부지런히 하자는 마음에서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을 따라 하는 것이지 성령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내 삶의 법이요, 원칙이요, 원리요, 이 말씀에 따라 내가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은 채 읽는 성경이라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욕구를 채워줄 뿐입니다. 성경 공부나 예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경배보다 자신이 만족하는 경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찬양이 아니라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찬양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는 육신적입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교회 선택 역시 자신들의 욕구를 채워 줄 교회를 찾습니다. 그 교회가 어떤 성경을 쓰고, 어떤 교리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추구하는가? 그런 것 대신에 수가 얼마나 되고, 건물은 얼마나 좋은가? 시스템은 잘 되어 있는가? 이런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육신이 만족하면 완벽한 예배, 좋은 교회라고 합니다. 자신들이 만족하지 못하면 교회도 설교도 다 싫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육신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누구든지 [육신을 따르는 자]라면 그는 무엇을 해도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그가 목사이든 선교사이든 장로이든 집사이든 성경 교사이든 간에 현재 육신을 따르고 있다면 그는 육신적인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순장을 하든, 목장을 하든, 선교 부장을 하든 “육신을 따르면” 그는 육신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신은 열정적인 종교인을 만들어 주며, 최선을 다해 맡은 일들을 하고, 무엇이나 멋지게 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며, 자아의 성취와 만족감을 위해 일합니다. 그렇게 해서 뛰어난 일을 했다할지라도 그것은 육신이 한 일이지 성령의 열매는 아닙니다. 육신은 자신의 무엇을 위해 일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합니다. 육신은 무엇을 얻기를 원하지만 성령은 내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육신의 관심 대상은 자신과 자신에게 속한 것이 전부입니다. 성령의 관심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육신을 따르는가? 성령을 따르는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데 이것을 육신적인 생각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영적 생각과 정 반대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뿐더러 복종할 수도 없습니다. 육신의 정체를 아십니까? 성령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자입니다. 하나님은 원수 마귀보다 우리의 육신을 더욱 미워하시며, 원수로 여기십니다. 그래서 육신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시고 다시는 쳐다보지도 않으십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육신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육신적입니다. 육신적인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생명과 평안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대적하며,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립니다.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갈5:17). 저는 여러분의 믿음을 폄하하거나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육신적이라는 것은 누구의 평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육신을 따르면 그것이 바로 육신적입니다. 여러분이 육신적인지 영적인지는 교회의 연수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직분으로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 공부를 몇 년 했다는 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년을 성경 공부해도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은 얼마든지 육신적일 수 있고 죽을 때까지 육신적으로 살다 죽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자신을 주님께 내어 드린 적이 없고, 성령의 징계와 통제를 받아 본 경험이 없다면 열매를 맺은 경험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이 말씀을 선포하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들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어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인가 주를 위해 해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주님께 내어 드리고 주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우리 안에 일하시고, 열매를 맺도록 내어 드리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와 같은 열매를 맺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여러분을 어느 날 갑자기 성인 군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힘든 삶을 강요할 것입니다. 참기 힘든 상황에서 참으라는 말보다 고역이 없습니다. 견딜 수 없는데 견디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 주셨던 그런 사랑, 용서, 기도 등이 우리의 삶에서 평생 어쩌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일상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열매 맺는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부어졌다고 해서 매일 ‘기쁘다, 즐겁다, 기분 좋다’ 하며 사는 것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이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루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겉모습, 행동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마음에서, 진심으로 그러한 것을 성령의 열매를 맺은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 일은 우리 자신의 노력과 수행과 금욕과 고행과 어떤 신학적 지식의 습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꾸준히 거함으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 생명의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성령을 따르리라. 성령 안에서 걸으리라. 성령의 요구에 순종하리라.”와 같이 성도의 적극적인 결단과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때 주님은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며, 의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는 것이 아니리요? 이는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하였다, 하고 다른 이는 말하기를, 나는 아볼로에게 속하였다, 하기 때문이니 /어찌/ 너희가 육신에 속한 자가 아니리요?] (고전3:3~4). 이들이 구원받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들은 분명히 구원받은 성도들이며, 은사들이 풍성했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적이었습니다. 육신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고 성도들의 모습이라면 “육신에 속한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성도들이 자기주장을 내세우기 위해서 다른 형제들을 험담하고 비방하고 심지어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개똥철학과 신학으로 무장한 형제들에게 성경을 가르쳐 놓으면 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마치 강도에게 최고의 도검을 선물한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 지식은 검을 사용하는 검법과 같습니다. 육신적인 성도들은 말씀을 배워서 자기변명과 합리화에 써 먹고, 남을 비방하고 험담하고 헐뜯는데 써버립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몰랐던 구절을 좀 더 알았다고 성장한 줄로 압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얼마나 헐벗고, 눈멀고, 비참한지는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조금만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것은 아니다!”, “나는 열매가 없구나!”라고 알아야 하는데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스스로 자족하며, 우쭐대며 삽니다. 자아가 상하는 일이 생기면 상대가 누구든 물어뜯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상태를 체크해 보라고 자주 자아를 건드리십니다. 그 때 자아가 날카롭게 반응하고 움직이면 ‘나의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살아 있구나!’ 깨달으셔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죽은 자아는 말도 없고, 반응도 없습니다.

매우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 역시 오랫동안 육신에 속한 삶을 살며 영적인 체 가장한 적이 있습니다. 육신적인 행위들이 나올 때면 저는 실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실수가 아니라 육신의 행위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목회를 하면서도 저는 여러 번 실수를 반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가 아니라 육신의 행위였습니다. 어는 날 저는 이런 것들이 저의 실수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육신의 행위였다는 점을 알았습니다. 제 자신이 육신적이기 때문에 생긴 문제요, 결과란 점을 자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성격 문제로 돌리고, 실수로 돌리고 순간적인 감정의 흥분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적이어서 그렇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분열, 파괴, 험담, 욕설, 비방....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이런 일들이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육신적이란 뜻입니다. 이는 마귀적이란 말과 별 차이가 없는 말입니다.

육신적인 성도는 자아가 상하는 것, 모독 받는 것,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속이 뒤집어지고, 울부짖는 개처럼 날뛰지만 하나님이 모독 받는 것, 하나님의 교회가 무시 받고 멸시당하는 것, 성경의 교리와 권위가 짓밟히는 것 등에 대해서는 태연스럽습니다. 영적인 성도들은 자신이 욕먹고, 비방을 듣는 것, 무시당하는 것에는 초연합니다. 대신 하나님과 그분의 교회, 그분의 말씀이 비방을 받거나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에는 거룩한 분노를 폭발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냉철하게 관찰해 보십시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말씀을 두고 판단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영적입니까? 여전히 육신적입니까?

우리가 만약 육신적이라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스스로 이 문제에 매달려 보아야 더욱 혼란케 할 뿐입니다. 이런 육신의 일들은 육신적 생각이 빚어낸다는 사실을 알고, 오직 성령께 우리 자신을 굴복하여 내어드릴 때 성령께서 일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승리는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에 단숨에 옵니다. 사람들은 “내가 참는다. 참아!” 하면서 어느 정도 성질을 참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육신적 노력으로 육신의 행위들을 계속해서 이겨내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육은 무익하니라](요3:6, 6:63)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일들은 오직 성령의 열매들이 우리 안에 가득할 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지역에는 ‘솔직하고 직선적이어서 말을 다해야 성질이 풀린다. 대신 뒤끝이 없다고 자랑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자랑거리는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보다야 앞에서 다 말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뒤에서 충분히 수군거린 후에 그것으로 속이 만족하지 못해서 앞에서 한 번 더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함을 내세워 뒤에서 수군거렸으면서도 “나는 뒤에서 말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하지”라며 자신을 감추고 또 말합니다. 참으로 육신의 더러움 그 자체입니다. 자신의 속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와 분노를 다 쏟아 낸 다음에는 ‘이제 다 풀렸어! 잊어 버려!’ 하는 식입니다. 알고 보면 뒤에서만 수군거리는 사람보다 한 번 더 욕한 것인데 그들은 뒤에서만 수군거리는 사람을 비겁하다며 그들마저 욕해 버립니다. 이것이 육신이 하는 일이요, 육신의 자랑이요, 육신의 지혜입니다. 육신은 양이 차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그 양을 채우려 합니다. 분이 덜 풀리면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폭발을 시킵니다. 대상을 바꾸어서라도 그렇게 합니다. 그것이 육신입니다. 성경을 공부했느니, 교회를 다니느니 어쩌느니 하는 것은 이런 순간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믿음, 화평, 기쁨, 온유, 선함, 양선과 같은 것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런 열매는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주님께 드리는 전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롬12:1-2). 핵심은 성도들의 의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달콤하고 행복하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우리 주님과 같은 삶, 사도들의 삶, 믿음의 선배들이 살았던 삶과 같은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란 점을 알고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불 속에 던져지고, 사자 굴에 던져지고, 채찍에 맞고, 비난과 모욕을 일상의 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해 성령의 열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결단하고 구하십시오. 평안히 불 속에 들어가기 위해, 기쁨으로 매를 맞기 위해, 나를 욕하는 어떤 사람을 위해 복을 빌며 기도하기 위해서 나는 성령의 열매가 필요하다고 생각 드시면 주님께 자신을 드리고 주님께서 이 일을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만약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너무나 멋있고 고상하고 좋아 보여서 이것만 있으면 사람들에게서 믿음의 완성자, 인격의 완성자란 칭찬을 받고 싶어 구한다면 그는 여전히 육신적인 욕망에 따라 자기 유익을 따라 구하는 육신적인 성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영적인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성도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열매는 자라야 맺힙니다. 새싹이 열매를 맺는 법은 없습니다. 열매는 나무가 자랐을 때 맺힙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자라나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는 그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고전3:1). 육신적, 영적이란 말은 행실의 문제 이전에 성장이 더 근본 문제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성장을 이루어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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