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과 아들의 형상
말씀. 롬8:28-29


모든 작품은 작가의 솜씨 뿐 아니라 그의 철학, 정신, 혼이 깃들어 있습니다. 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무엇을 그 속에 투영하고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돈벌이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있고,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냥 대량으로 복제를 하는 것도 있지만 그런 것은 제품이라고 하지 작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만든 제품이 아니라 작품입니다. 작품은 작가의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로 표현되지 않으면 부수어 버리고 새로 만듭니다. 그러나 작품이라고 만들어진 것들은 자신의 분신(分身)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그림이든 조각이든 건축물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작품의 세계를 통해 작가를 들여다봅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우리는 주님의 작품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자신의 모든 것을 심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흙으로 우리를 빚으셨고, 자신의 영을 불어 넣으심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오 [주]여, 그러나 이제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우리의 토기장이시오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64:8). 이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에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작품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하늘들 곧 주의 손가락으로 지으신 작품과 주께서 규정하신 달과 별들을 내가 깊이 생각하오니](시8:3),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들도 주의 손이 이루신 작품이니이다.](시102:25). 우리가 자연을 보는 것은 주님의 작품을 보는 것입니다. 밤 하늘의 별이나 달, 낮의 구름이나 산과 들, 바다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주님이 친히 빚으신 작품이기에 그 속에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깃들어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20에서 [이는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神格)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그 만드신 것들로 깨달아 알 수 있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나니](롬1:20)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빚으신 최고의 작품은 단연 인간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완벽하게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만드실 때부터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形像)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창1:26-27). 인간의 지위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왕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 받았고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습이란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음이니라.](창9:6).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사실이 가장 기초이며, 근본입니다. 이보다 인간을 더 존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학대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의 창조주요, 지으신 분이시란 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만드신 이를 모욕하는 자요, 재앙들을 즐거워하는 자는 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17:5). 가난한 자라고, 병자라고, 약자라고 사람을 조롱하고 놀리는 것은 주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을 멸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귀머거리, 눈먼 자 등 모든 장애인들을 만드신 분도 역시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만들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자나 귀먹은 자나 보는 자나 눈먼 자를 만들었느냐? 나 [주]가 아니냐?] (출4:11). 장애인들은 창조주의 실패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병자들도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날 때부터 소경된 자도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거나 조롱하거나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람의 혀가 하는 짓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며 또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사람들을 저주하느니라.](약3:9).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외모로 판단하거나 멸시하는 일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자신의 거룩한 영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니라.](살전4:8). 이런 점에서 우리는 누구도 무시하거나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하며, 저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문제임을 늘 기억하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담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 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이 백삼십 년을 살면서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창5:3). 아담 이후로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되찾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사람의 육신의 모양을 입으시고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고, 누구이신가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시지만 특히 하나님의 형상이심을 말씀해 줍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4).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도록 엄히 금하신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형상은 조각이나 그림이나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도 창조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야만 합니다.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오](골1:15a),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히1:3).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이 아들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은 그대로 두시고 우리 속에 영을 창조하십니다. 우리 속에 새 사람을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영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우리는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첫 사람 아담의 모습이나 똑 같습니다. 우리의 형상은 죄로 영이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새 사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4). 이런 일은 언제 일어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입니다. 믿는 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10).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구원은 시작이지 완성이 아닙니다. 구원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낳으신 것으로 끝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은 새롭게 태어난 자신의 자녀들을 양육하시기 시작합니다. 때로 세상에는 낳아준 어머니와 길러준 어머니의 다툼이 있습니다. 그래서 친권자 소송을 하기도 하고 누가 진정한 부모냐를 재판정으로 가져갑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낳은 정이냐? 기른 정이냐? 그러나 이보다 더 무식한 판결이 없습니다. 둘 다 아닙니다. 부모란 낳고 길러야 부모입니다. 낳기만 하고 버려두면 부모가 아닙니다. 낳지도 않고 기르기만 해도 부모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를 기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바울은 분명히 “나의 어린 자녀들아”라고 말합니다. 불신자들을 상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안에는 그리스도가 형성되어 있습니까? 어떤 이는 구원받은 즉시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는 것 아닌가요? 라고 반문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성도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기까지 다시 산고를 겪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답게, 하나님의 아들답게 성장해야 합니다. 산고(産苦)의 고통이란 것이 적은 고통이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들 안에는 그리스도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비극이 여기에 있습니다. 분명히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의 모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도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없습니다. 빛도 없습니다. 영생을 지녔다고 하는데 도무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니면 지금은 잠자는 중이지 ‘믿음의 활동’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는 전에 분유를 먹는 어린 곰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냥꾼에게 잡혀 온 곰인데 따로 먹일 것이 없어서 그냥 분유를 주었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젖병을 능숙하게 물고 죽죽 빨아 먹는 곰을 보면서 참으로 황망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자연 농원에 놀러 갔는데 건빵을 받아먹는 덩치 큰 곰을 보았습니다. 곰으로 태어났지만 곰다운 면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육사에게 길들여지면서 야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던져 주는 먹이만 먹다 보니 사냥할 이유도 없고, 힘도 잃어 버렸습니다. 이들은 산에 풀어 주어도 사람을 따라 내려옵니다. 그것이 더 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교인들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성령으로, 말씀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올무에 사로 잡혀 마귀가 이끄는 대로 삽니다. 마귀가 던져 주는 것과 세상이 주는 것을 다 받아먹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거듭난 성도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아들의 형상과 완전히 일치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어떤 이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라는 말씀을 가지고 성령을 점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성령의 인도함이란 우리의 모든 환경을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도록 빚어나가시는 방향으로 이끄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사역입니다. 어떤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들의 형상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대적과 원수들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저는 이곳에서 여러 사람을 용서했습니다. 여러 사람을 용서했다는 말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용서했다고 믿지만 어떤 경우에는 속에서 꿈틀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신 것은 우리에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늘 관계가 좋은 사람, 서로 잘 대해주고, 잘 통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사랑이 발휘될 수 없습니다. 나를 음해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자극하는 그런 밥맛없는 사람들을 곁에 붙여 주시거나 그런 사람들 속으로 인도해 주시고 자 “내가 너에게 사랑을 부어 주었으니 이제 한번 나타내 보아라. 그 사랑으로 살아 보아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저는 정말 그런 경험이 많습니다.

위선자들, 거짓말쟁이들, 험담하는 자들, 비방자들 앞에서 설교하게 하시고, 곧 뒤에서 욕을 얻어먹게 하십니다. 그런 후에 그들이 놀랍게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곧 교회를 비난하고 수군덕거리다가 목사를 욕하다가 교회를 떠나 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자, 용서해 주어 보아라.” 이것이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말씀을 주십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4:32). 하나님은 제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고 제 안에 아들의 형상을 빚어나가시기를 원합니다. 실패하면 또 주십니다. 통과할 때까지 주십니다. 여러분은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회피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을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아직도 더 많은 설교, 더 많은 성경공부,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오해, 더 많은 비방, 더 많은 박해와 모욕, 더 많은 갈등도 여전히 더욱 많이 필요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나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을 돌이키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 속에서 그런 것을 드러내 보이도록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질 좋은 잠수복을 받았다면 곧 물에 들어 갈 일이 있겠구나 생각해야 하고, 불에도 타지 않는 좋은 방화복을 받았다면 불 속에 들어갈 일이 생기겠구나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주님의 평강, 하나님의 기쁨이 넘치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곧 이어 수치와 모욕과 박해들 속으로 초대한다는 주님의 초청장입니다. 그런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이 드러나 보입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그저 하늘나라에 가도록 하신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구원을 받으면 영생을 얻지만 그것이 구원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 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이 말씀은 참으로 많이 인용되는 만큼이나 왜곡 되이 해석되는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Happy ending이 되었다, 인생 역전이 되었다,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득을 경건이라고 생각하고 잘되는 것이 선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선을 이루었다’는 뜻이 그런 말씀인 줄로 알아서 해석하고 기쁘게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나신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 목적이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보다 더 큰 구원의 목적은 없습니다.

에베소서를 봅시다.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엡4:13). 완전한 사람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주님과 같은 모습, 같은 형상이 되는가 아닌가에 있지 여러분의 직업이 무엇인가? 연봉은 얼마인가? 학교는 어디를 들어갔고, 어디를 졸업했는가? 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여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안에 아들의 형상을 빚으시고, 완전한 사람을 이루는데 모든 관심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을 따라 살고, 영이요 생명인 말씀을 따라 살면 우리는 점점 주님을 닮게 됩니다. 주님의 모습을 하게 됩니다. 주님의 인격을 갖추게 됩니다. 이것은 성장이라고 하기도 하고, 변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후3:18). 성령께서는 우리를 “아들의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환경 속에 던져두십니다. 거기서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너무 싫어하는 환경일 수 있습니다. 쾌적한 교회, 좋은 집,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크면 잘 자랄 수 있을 것 같은데 뒷골목 슬럼가와 같은 모습의 교회에 던져두십니다. 좋은 집, 좋은 부모,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꼭 훌륭하게 자라는 것이 아닌 것처럼 대형 교회, 멋진 목사 밑에 가면 영적 성장이 있고 제대로 열매 맺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 거성이라 불리는 사람들 중에 큰 교회 출신은 거의 없습니다. 모두 작은 교회 출신입니다. 아이들 반이 없어서 어린 애들이 성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고 성경 공부를 하는 그런 교회 아이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유아부, 어린이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따로 마련된 교회 다니는 아이들 치고 믿음 좋은 예를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척박한 곳에 두시면 그 환경이 내게는 최선, 최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믿음은 시설과 분위기 좋은 환경에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필름과 같아서 어두운 곳에서 인화되어 밝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냅니다.

다시 로마서 8:28-2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8-29).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하는 일들, 실수들, 허물들, 범죄 등등을 바꾸어서 선(善)이 되게 하신다.”는 식으로 해석해 버리면 안 됩니다.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는데 쓰거나 변명을 하는데 쓰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과 밖에 있는 모든 일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 즉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어나가시는데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은 결론, 결과가 다 좋게 끝난다, 결국은 그 일이 인생 역전,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성경을 헛 읽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은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사용하시는데, 그것이 바로‘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게,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풍성한 생명을 얻는 것(요10:10), 가지가 더 많은 열매를 맺는 것(요15:8) 등이 신앙 성장과 성숙을 통해 우리를 평안하고 행복하게 하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건들을 아들의 형상과 일치시키는데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고, 세상을 환히 비출 수 있는 빛이 되게 하고, 소금과 같이 맛이 나게 하며, 누구도 읽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서신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단련되려면 누구나 불같은 시련이 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터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과 기도로만 충분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적보다는 사람을 사용하시며, 환경을 사용하십니다. 용광로 속에 던져 놓으시고 불 가운데 주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하시며, 물을 통과하며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고, 불같은 시련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게 하시고, 매를 맞고 수치를 당할 때 주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당하는 수치로 인해 기뻐하게 하십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이루시고자 하는 아들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수치를 기쁨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고, 사람들로부터도 영광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일들을 [아들의 형상]으로 빚으시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매일 짜증나는 일이 있으면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조용하고 온유한 영’을 지니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드러나는 기회로 만들어 주십니다. 통제 불가능한 일, 나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연속으로 터질 때면 주님은 그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데, 믿음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두려움 없이 평안하게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게 하십니다.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빚어 가시고, 그리스도의 성품, 능력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안이 나를 다스리도록 하십니다. 염려를 맡기도록 하십니다. 이런 것이 바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적 의미입니다.

성령의 사역 역시 이런 것입니다. 환난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4:8~9). 사람들은 고난이 없고, 괴로움이 없고, 난처한 일이 없고, 핍박이 없고, 거꾸러뜨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 안에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름 받은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 외에 다른 것에 결코 더 큰 관심을 두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사랑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불평대신 만족할 수 있고, 슬픔과 애통함 대신 기뻐할 수 있고, 자신이 입는 상처에 대해 오래참고 인내하며 매 순간 절제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이루시는 일들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사업터와 가정과 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합당한 목적에 따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썩어 없어지나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도다.](고후4:16). 겉 사람은 좋은 침대를 구하지만 속사람은 단잠을 구하라고 합니다. 겉 사람은 좋은 집을 구하라고 하지만 속사람은 거룩함과 평안이 거하는 홈(home)을 구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자기가 다룰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을 원치 않습니다. 불편이나 나를 욕하는 사람을 원치 않습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 같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도로 오기를 원하지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부부가 오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역시 교회가 나와 우리 가족에게 무엇인가 유익한 것을 제공해 주기를 원하지 희생과 헌신을 위해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교회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도들이 나와 이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고 잘 해 줄 것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개판치는 그런 성도들에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하고 섬기고 용서하고 잘 해 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핵심입니다. 환경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나는 그런 환경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사는가? 주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 의 문제입니다. 만약 이런 경우에 맞받아 쳐 싸워버리면 그 상황에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문제라고 하십니다.

저는 군대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군대 소집 명령을 받고 춘천으로 갔습니다. 이제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군인이 되기 위한 훈련과 교육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군복, 군화를 지급받고, 군번과 총도 받았습니다. 나는 군인인 줄 알고 있는데도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너희는 대한민국의 군인이다”를 반복해서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조금만 이동해도 계속 군가를 부르게 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교육 과정이 끝날 즈음에는 모습도 목소리도 걷는 걸음까지도 군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습니다. 군인이 되어야 훈련을 통해 군인이 될 수 있고, 경찰이 되어야 경찰다운 경찰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회사에 취직을 하면 바로 직원이 됩니다. 직원이 된 것은 이제 시작입니다. 사원 교육은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장사꾼이 되든지 공무원이 되든지 의사가 되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 자격증을 따면 의사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사다운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보다 더욱 많이 공부하고 수련 과정을 경험해야 합니다.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것이 끝인 줄 압니다. 변화되어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모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사람 구실을 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추 잡아도 15-20년의 교육과 양육이 필요합니다. 저절로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man(사람)이 man(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태어나야 하지만 태어난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갓 거듭난 성도는 영적 아이들입니다. 계속 자라나야 합니다. 그들이 갓난아이는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야 하고, 어린 아이가 되어야 하고, 아이가 되고, 젊은이가 되고, 어른이 되고, 장로가 되고, 나이든 자가 됩니다. 갓난아이에서 젊은이까지는 집중적인 양육, 돌봄이 필요합니다. 경험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집입니다. 목자는 교회에서 어미와 아비입니다. 교회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일은 집이 싫다는 불량배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목자가 싫다는 것은 어미, 아비를 싫다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것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학교 싫다는 아이가 공부를 잘 하는 법이 거의 없고, 집이 싫다고 가출하는 아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없듯이 교회 싫다는 성도가 제대로 성장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미 교회 싫다고 떠난 성도가 22명이나 됩니다.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지만 떠난 사람들을 생각만 해서는 안 됩니다. 냉정하게 분석하고 정확하게 처방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통해 더욱 견고해지고,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아들의 형상을 이루어 주시고, 일치하게 하심을 깨닫고 더욱 감사하며 찬양하고 우리 속에 주님의 신성한 성품과 능력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후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고 그대로 살아 가는데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말씀드린 성령의 인도하심, 즉 모든 환경 속에서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목자의 역할입니다.

교회에서는 영적 스승을 넘어서는 영적 어미/아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갓 태어난 아이들을 유모처럼 기르고 돌보아 줄 그런 영적 어미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일은 매우 고통스럽고, 쓰라린 경험을 동반합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우리 속에 아들의 형상이 형성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누군가 기도로 수고하고, 말씀을 먹이고,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성도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돌보았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다정하게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혼까지도 너희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소중한 자들이기 때문이라.] (살전2:7~8). 바울은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했다고 말합니다. 다정하게 사모했다고 합니다. 복음만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자신의 혼까지도 기꺼이 나누어 주고자 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구령한 혼들을 ‘우리에게 소중한 자’라고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자식들을 향한 부모의 심정은 언제나 같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자식을 가져본 부모들이라면 다 알 것입니다. 아이는 태어나면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양육해 주어야 합니다. 성장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절대적으로 돌봄이 필요합니다. 그들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자라는 줄로 알면 크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저절로 자라는 줄 알면 안 됩니다. 모태에서 난 아이는 어쨌든 사람입니다. 그 점은 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영접할 때 누구라도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요, 어린 아이입니다. 젖을 필요로 합니다. 먹여 주어야 합니다.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영적 갓난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일은 육신의 아이를 먹이고 돌보는 일보다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밖에 있는 일들 외에도 날마다 내게 닥치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아니하더냐?] (고후11:28~29). 이것이 아이를 기르는 유모의 심정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어미는 더 아픕니다. 아이가 자빠지면 부모는 가슴이 무너집니다.

바울은 유모로서 양육한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또한 아비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에게 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언정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4:15). 그는 단지 성경 교사가 아니라 영적 아버지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아비였고(딤후1:2), 빌레몬의 영적 아비였습니다. [결박 중에 낳은 나의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청하노라.](몬1:10). 아버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자식이 자라서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을 때까지 가르치고, 보호하고, 이끌어 주며, 때로는 강하게 징계합니다. 매질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입니다. [이는 {주}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기 때문이라, 하셨으니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아들로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누구나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아들이 아니니라.](히12:6-8). 징계를 하는 이유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요, 받아들이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화평의 열매를 맺기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돌봄, 징계, 양육이 없이 복음만 들었다고 해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9). 이 일은 영적 아버지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목자는 어미와 아비의 모든 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목자인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언제나 순종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십시오. 저 역시 여러분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고, 양육하고, 매질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 땅에서 아들의 형상과 일치한다면 주님 오시는 그날에는 몸만 갈아입음으로써 완전히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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