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의 열매(2)
말씀. 빌1:11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은 단순한 설교나 사상이나 깨우침이 아니라 삶에서 그대로 주님의 생명이 열매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 새끼를 낳지 못하는 짐승들, 싹이 피고 꽃이 아름답지만 쭉정이만 가득한 참깨와 콩이 밭에 있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들에 나가 보았는데 열매가 맺히지를 않고, 여물지를 않고, 모두 쭉정이라면 미치지 않을 농부가 누구겠습니까? 어떤 농부도 자신의 땅에 심은 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을 기분 좋게 볼 수 없습니다. 농부의 목적이 열매를 맺게 하고,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데 있듯이 우리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해 많은 애를 쓰십니다(사5:3-5). 하나님은 농부이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라.](요15:1). 농부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는 오래 참고 인내합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찍어 내 버립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나니](마7:19). 주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열매 맺는 가지가 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에게 행하실 일들에 대해서 경고해 주셨습니다. [내 안에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거하시고 열매를 맺는 모든 가지는 깨끗하게 하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느니라.](요15:2)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맺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이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의 엄중한 경고를 받아서 열매 맺는 생명, 열매 맺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살펴 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하시지만 가장 놀라운 일은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는 다는 사실입니다. 결혼한 부부들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아내 된 자매가 남편의 씨를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자식을 낳는 일은 자매들의 특권 중의 특권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위대한 남자도 결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이든 신약의 사도들이든 하늘의 천사들이든 그 누구도 생명의 열매를 맺고 낳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아내 된 자매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자매들은 성령의 예표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받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합니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1:23). 말씀은 씨앗입니다. 성령은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우리 안에 새 사람 즉 새 생명을 낳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 속에는 모두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새 사람이 있습니다(엡4:24, 골3:10, *고후4:16).

우리가 지금부터 다루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 속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이 아니라 우리의 영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의 성장과 양육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 사람이 아니라 새 사람의 성장에 관심이 있습니다. 육신은 썩어 없어질 사람이지만 속사람은 영원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태어난 새 사람이 우리의 말과 행동과 모든 것의 주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주님의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우리의 형상은 모두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본성이 나의 본성이요, 아담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는 육체의 겉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말과 생각, 행동이 아담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저는 제 자식을 통해 저의 과거를 봅니다. 저의 어릴 적 모습이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 하는 행동을 통해 어릴 때의 나의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의 형상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악된 본성, 이기적인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담이 930년을 살았는데 그가 만약 지금까지 살아 있어서 나를 본다면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하는 것이나 욕심을 부리는 것이나 악한 생각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전에 먼저 처리할 것들을 처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죽음에 넘겨져야 할 것, 십자가에 못 박힐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옛 사람의 특징을 보십시오.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4:22). 사도 바울은 옛 사람에게 조금도 점수를 주지 않습니다. “속이는 것을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골로새서 3:5-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곧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자녀들에게 임하느니라.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걸었으나 이제는 너희도 이 모든 것을 내어 버리라. 곧 분노와 진노와 악의와 신성 모독과 너희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대화라.](골3:5~8).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옛 사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이 지금도 이러하다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숨겨도 이것은 오래 숨길 수 없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해서 그 안에 뼈들이 썩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없듯이 사람은 종교로 위장하고, 도덕성으로 포장하고, 인격 수양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자신을 가릴 수 없습니다. 설령 몇 사람의 눈은 가릴 수 있어도 주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옛 사람은 벗어 버려야합니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골3:9). 옛 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하고, 옛 사람을 입고 있는 채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속한 사람인지, 영에 속한 사람인지는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느냐?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느냐? 얼마나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으냐? 이런 것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열매로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 열매로 나무의 종류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 그 질(質)을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열매를 많이 맺느냐 적게 맺느냐 수량을 통해서 나무를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결론은 나무는 열매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맺는 열매를 통해 서만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면 성령의 사람입니다. 성숙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가 지금 하루에 몇 시간을 기도하고, 하루에 몇 페이지를 성경을 읽고, 얼마나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외치고 얼마든지 주님을 찬양할 수 있지만 주님은 말이 아니라 그들의 열매를 보시고, 열매를 받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들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1:11). 의의 열매들이 가득할 때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는 것이지 열매가 없는데 어떻게 영광과 찬양을 돌립니까?

열매는 땀과 피로 이루어내는 일(work)이 아닙니다. 열매는 생명의 결과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내 마음에 말씀의 씨앗을 받아 성령께서 맺어내시는 열매입니다. 우리 몸은 가지일 뿐입니다. 마음이 말씀의 씨앗을 잘 받아 간직하면 성령께서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말씀의 씨앗을 받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성령이실지라도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거하지 않는 이상 우리 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아무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란 밭에 말씀을 간직하면 성령께서는 100배라도 열매를 맺게 하실 수 있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었느니라.](마13:8). 이 말씀은 우리가 더 이상 저주받은 땅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며, 얼마든지 좋은 열매를 많이 낼 수 있음을 말씀해 줍니다.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땅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깨닫고, 열매를 내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열매를 맺게하는 과정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 속에 씨를 받은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고 또 열매를 맺는 자니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를 내느니라, 하시더라.](마13:23). 말씀을 듣는 일은 우리가 할 일입니다. 깨닫고 열매를 맺는 일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하실 일입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이 땅은 저주를 받아서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로 저주받은 땅에 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 역시 저주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본성(本性)은 저주받은 이 땅과 같이 악합니다. 좋은 열매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저주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저주에서 풀렸습니다. 도리어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들 위에 임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을 통하여 /성/령을 약속으로 받게 하려 함이라.](갈3:13-14).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아담을 통해 받은 저주가 사라지고, 아브라함 위에 임한 주의 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더 이상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악독과 저주를 내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감사와 찬양과 복을 내는 존재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이 사실을 저와 여러분에게 선명하게 보여 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겔 36장과 11장을 보겠습니다. [그때에 내가 정결한 물을 너희 위에 뿌려 너희를 정결하게 하되 너희의 모든 더러움과 모든 우상으로부터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너희에게 살같이 /연한/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하여금 내 법규 안에서 걷게 하리니 너희가 내 법도를 지켜 행하리라.] (겔36:25~27).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은 우리 마음과 영을 새것으로 교체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현재 우리 안에 성취된 일입니다. 새 마음과 새 영을 받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 한다면 무화과 나무에서 올리브를 따려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은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 주신 후에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한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그들의 육신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같이 /연한/ 마음을 주어](겔11:9). 여러분이 새 집을 지으려면 먼저 헌 집을 부수고 건축 자재물들을 모두 치운 후에 새로운 재료들을 가지고 와서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 안에 옛 사람, 옛 성품을 제거하시고 영을 새롭게 해 주신 후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 주님이 하시는 일은 또 있습니다. 물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밭에 뿌려진 씨앗은 수분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말씀의 씨앗 역시 그러합니다. 주님은 수분이 열매 맺는 일에 얼마나 중요한 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수분이 부족하므로 곧 시들어 버렸고](눅8:6). 수분 부족! 이것은 치명타입니다. 물만 끌어 올 수 있으면 거기는 생명이 살 수 있고, 마을이 형성되고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물은 모든 생명의 필수 요소입니다. 물이 부족하면 아무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는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땅을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풀을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니와 만일 가시와 찔레를 내면 버림을 받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살라 질 것임이라.](히6:7~8).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좋은 밭이 되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모든 일을 다 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이 내려 주시는 비를 받아 합당한 풀을 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교회를 다니지만 하는 짓은 세상 양아치들이 하는 짓거리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주님은 경고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경고를 받으십시오. 여러분의 마음 속에 가시와 찔레가 나오고 있다면 버림을 받고 저주함에 가깝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로서 지옥 불에 타지는 않습니다만 그리스도의 심판석 역시 불 심판이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금, 은, 보석이 아니면 다 타 버립니다.

주님이 땅에 내리시는 비가 무엇입니까?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 말씀이 비요, 이슬이요, 가는 비요, 소나기입니다. 여러분이 아침, 저녁으로 이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내 안에 생수의 강이 흐를만큼 충분한 양의 비와 이슬과 소나기를 내려 주시기를 소망하십시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강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강가는 수분의 부족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는 강가에 심은 나무가 제 철에 열매를 맺으며 또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무슨 일을 하든지 다 형통하리로다.](시1:3).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의 사막을 여행했는데, 이런 와중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퍼진 것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주]께서 심으신 알로에나무 같고 물가의 백향목 같도다.](민24:6).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복된 모습입니다. [이는 그가 물가에 심은 나무 같아서 그 뿌리를 강가에 뻗치고 더위가 오는 때를 보지 아니하며 그 잎이 푸르르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으며 열매맺는 일을 그치지 아니할 것임이라.](렘17:8). 왜 그렇습니까? 바로 앞 절을 보십시오. 주를 신뢰하고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주]를 신뢰하며 [주]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렘17:7). 우리는 이로써 성령의 열매를 맺는 비결이 말씀 묵상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는 이 전에 수분에 대해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오늘 다시 한번 요약해 드리겠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말씀의 물입니다(신32:2). 모세는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고 주의 말씀의 은혜를 읊었습니다. 물 없이는 살 수 없고, 물 없이는 깨끗할 수 없습니다(엡5:26). 이 물이 없이는 믿음이 생기지도 않습니다.

둘째, 성령의 물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이것은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주께서/ 아직 성령님을 주시지 아니하셨음이더라.)](요7:38-39). 성령이 내 안에 없는데 어떻게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물이 없다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인생의 항해 길에 띄운 배는 성령의 물길 위에서 소망의 닻을 달아야만 진리의 항구에 도달하게 되어있습니다.

셋째, 기도의 땀입니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눅22:44). 주님이 흘린 이 기도의 땀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 흘려야 할 기도의 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로 온 몸을 적셨을 때 역사의 물줄기는 바뀌었습니다.

넷째, 회개의 눈물입니다. [내가 신음하므로 피곤하며 밤새도록 내 잠자리를 띄우고 눈물로 내 침상을 적시나이다.](시6:6). 눈에서 흐르는 회개의 눈물이 가슴에서 솟아 오르는 정욕의 불길을 완전히 끌 수 있습니다.

다섯째, 섬기는 물입니다(요13:4-5). [너희 {주}와 선생인 내가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내가 본을 보였음이니라.](요13:14~15).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이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눈을 들지 못하는 심정으로 와서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기는 곳>이지 섬김 받으려고 설쳐서는 안됩니다. [선한 일들로 인하여 좋은 평판이 있어 혹은 자녀들을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들을 묵게 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어 주며 혹은 고난받는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부지런히 행하는 자라야 하리라.](딤전5:10).

여섯째, 모든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입니다. 물로 씻겨질 수 없는 것은 피로 씻어야 합니다. 죄는 피로만 씻겨집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집니다. [또 신실한 증인이시요, 죽은 자들 중에서 처음 나신 분이시며 땅의 왕들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 저는 오늘도 주님 앞에, 사람들 앞에서 여러 가지 생각나는 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씻어줄 주님의 피도 있습니다. 어떤 형제들을 볼 때면 절망스러울 정도로 죄악된 삶을 삽니다. 그러나 그는 죄인 줄도 모르고 삽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죄를 보면서도 동시에 십자가에서 흘린 주님의 피를 봅니다. 그 피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하고 영원한 피임을 믿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어린 양의 피로 씻음 받아야만 합니다. 피로 씻음받는 방법은 주님 앞에 죄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9). 그리고 빛 가운데 걷는 것입니다. 매일 죄를 짓고 고백하고 또 죄를 짓고 용서를 비는 일의 반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용서를 구한 후에는 빛 가운데 걸어야 합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점점 성숙하게 됩니다.

주님은 물(수분)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이 물은 땅에서 솟아나는 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주시는 물입니다. 주님이 부어 주시는 물이 있습니다. [이는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부어 주며 마른 땅에 큰 물들을 내고 내 영을 네 씨에게 내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줄 것임이니 그들이 풀 가운데 있는 것같이 솟아나며 수로(水路) 옆의 버드나무같이 솟아나리라.](사44:3~4). 놀라운 성장과 열매를 맺는 일은 예수를 믿는데서 출발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 성령만 추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 하는 길, 성령으로 열매를 맺는 길은 성령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에게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지(요7:38), 성령을 믿을 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오해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은사주의자들이 그렇게 방언을 한다, 병을 고친다, 통역을 한다, 예언을 한다는 등의 말을 하지만 정작 성령의 열매를 거의 볼 수 없는 것은 이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예수님을 보는 대신 성령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며, 그분만을 신뢰하게 하고,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을 형성되도록 하십니다.

성도들이 교회를 나오고, 설교를 듣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도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우리 마음 속에 여러 가지 씨앗이 함께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밭을 가꾸시고, 정결하게 하사, 좋은 씨를 뿌리시고, 물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그의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가매 잎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마13:25~26). 누군가 몰래 다른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땅의 영양분이나 수분을 나누어 가지게 되고,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에 제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됩니다. 마귀는 졸지도 쉬지도 않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성도들의 마음 밭에 악한 씨앗을 뿌림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친구를 통해서도 뿌립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시겠지만 저는 어떤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고 잘 받은 사람들을 만나서 기분 좋게 헤어지고 그 몇 일 뒤에 기대감을 가지고 다시 찾아 갔다가 낭패를 당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교회를 오겠습니다.”란 말을 듣고 기분 좋게 기도 제목에 이름 올려 놓고 기도한 후에 다시 찾아갔을 때 영 딴 소리가 돌아 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터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보내 말씀의 씨를 뿌린 것처럼 마귀 역시 즉시 자신의 일꾼들을 보내서 씨를 뿌린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성도들이 마귀의 일꾼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멀쩡하게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에게 자신의 개똥철학과 자기 생각을 전파합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지 기도회를 갈 필요가 없느니, 예배는 생활 가운데서 어디서나 드리는 것이지 주일 예배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느니 하면서 어린 형제, 자매들을 시험에 들게 합니다.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기도회에 더 잘 나옵니다. 생활 가운데 어디서나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자들은 주일 예배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들은 형제들의 모임을 뜨겁게 사모하며 일주일 중에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교제하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기쁜 일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귀 노릇하는 성도들은 자기도 안하는 짓거리만 골라서 진리의 지식을 아는 양 악한 씨를 뿌립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악한 사귐이 없어야 합니다. 악한 사귐은 선한 행실을 부패시킵니다.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은 이런 모든 일에서 철저한 분리를 전제로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십시오.

성령의 열매 맺는 일은 우리 마음속에 찾아 들어오는 세속화의 물결을 이겨내야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속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에 점령되어 있다면 성령은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합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씨를 받은 자 또한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로 인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맺지 못하는 자라.](마13:22). 이 세상의 염려는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재물의 속임수 역시 믿음을 갉아먹는 녹과 같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탐심으로 인해 성도들은 교회를 오래 다녀도, 성경 공부를 오래 했음에도 불구하고믿음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나아가다가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완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라.](눅8:14). 누가복음에는 쾌락이란 말이 하나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오늘날을 특징지어 주는 말은 자본주의, 쾌락주의입니다. 이 둘은 모두 열매 맺는 일을 방해하는 원수 마귀의 문화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영적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영적 의무를 수행하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열매를 주시지 않습니다. 산모가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해서도 신경 쓰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음식을 가려서 먹고, 위험을 피하고, 더러운 것들을 보거나 듣지 않고,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등 매우 세세한 일까지 주의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시는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매우 민감하시며, 지극히 거룩하십니다. 성도들이 불순종하고 불신 가운데 있을 때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의무를 준수하지 않을 때 징계와 벌을 내리십니다. [[주]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치되 너희 손으로 수고한 모든 것을 마름병과 곰팡이와 우박으로 쳤느니라. 그런데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서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이제 이 날부터 거슬러 올라가 깊이 생각하되 구월 이십사일 곧 [주]의 /성/전의 기초를 놓던 날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깊이 생각할지니라.](학2:17~18). 주님은 이들에게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날짜를 짚어 주시면서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마름병, 곰팡이, 우박이 자연 재해가 아니라 주님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매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시고, 열매를 빼앗을 수도 있으신 분이십니다. 모두 자기 할 일만 바빴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 건축을 하다 중단해 버렸고, 십일조를 내는 일도 중단함으로써 레위 지파들은 들에 나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제사장 직무를 포기하고 남의 소작농이 되고, 일당 품팔이를 했습니다. [내가 또 /사람들이/ 레위 사람들의 몫을 주지 아니하였음을 알게 되었나니 이는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음이더라.](느13:10).

오늘날 이곳 LA 지역에 많은 개척 교회들의 목사들이 이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청소기를 대여해서 청소하는 사람, 페인트 보조, 일당 품팔이를 일주일 동안 하다 겨우 겨우 설교 준비해서 주일에 선포하고 또 다시 일터로 나갑니다. 영적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더 많은 소출, 더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영적 의무를 제대로 수행할 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강도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내 /것/을 강도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강도질하였나이까? 하나니 이것은 곧 십일조와 헌물이니라. 너희가 저주로 저주를 받았나니 이는 너희 곧 이 온 민족이 내 것을 강도질하였음이라.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가져다가 창고에 들여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쏟아 붓되 받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8~10). 십일조와 헌물은 구약 성도들에게 의무였고, 율법이었습니다. 그것을 행하지 않으면 저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율법이 아니라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법입니다. 이미 레위기에서 엄중하게 이 일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레26:14-20). [너희가 헛되이 힘을 쓸 것이라. 이는 땅이 그 소출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가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할 것임이라.](레26:20). 성도들은 모두 영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구약 성도들은 십일조와 헌물, 안식일 준수와 같은 기본적인 의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의무를 준행하지 않으면 어떤 열매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신약 성도들 역시 영적 제사장으로써 영적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 성도들이 성전에 성전 세금을 내고, 십일조와 헌물을 내듯이 우리는 영적 희생물을 드려야 합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우리의 지위가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다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드려야 합니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이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롬12:1). 주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물로 드렸기 때문에(고전5:7, 엡5:2) 우리 역시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려야 합니다. 결혼하면 아내는 더 이상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듯이 구원받은 성도 역시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드려야 할 희생물은 찬양, 선을 행함,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계속해서 찬양의 희생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것은 그분의 이름에 감사를 드리는 우리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하는 것과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이 같은 희생을 매우 기뻐하시기 때문이니라.](히13:15~16). 여기서 우리는 세 가지 의무를 봅니다. 이것들은 주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희생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과 달리 ‘나누어주는 것’의 의무를 봅니다. 주님은 이것을 심히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것은 달콤한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요,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무엇인가를 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큰 복입니다. 나누어 주는 것을 잊지 말라. 이것은 영적 제사장으로서 저와 여러분의 의무이며, 주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희생물임을 알고 감사함으로 행해야 합니다.

신약 성도들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열매가 없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나누어주는 일에 너무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인색함은 주님의 성품이 아닙니다. 주님은 무엇이나 풍성하고 넘치는 분이십니다. 초대 교회가 강성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나누어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 소유와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대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행2:4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음이더라.](행4:35).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심히, 매우 기뻐하시는 희생물들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초대 교회 교인들처럼 공동 생활을 하지 않더라도 동일한 의무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 [선을 행하게 하며 선한 일들에 부요하고 베풀기를 좋아하고 기꺼이 나누어 주게 하라.](딤전6:18). 이것이 오늘날 성도들이 행할 영적 의무입니다. 여러분이 일하는 목적이 이런 것이라면 최소한 경기에 영향을 받아 굶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일터는 고역스런 노동 현장이 아니라 영광스런 사역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직업, 일은 그 자체가 신성한 주님의 사역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일꾼은 곧 사역자입니다. 일터는 사역지가 됩니다. 이렇게 일을 해서 주님이 하라고 하는 일을 할 수 있고, 선을 행할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주님이 심히 기뻐하시는 희생물을 드리게 되는데 그보다 더 큰 사역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사역자들입니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고 놀아서는 안됩니다. 일을 하기 싫어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이 자신이 하는 일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사역자로서 행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 때에 영적인 권능과 지혜가 일터에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하는 이런 일이 성령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령의 지혜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싶으신 분들은 새롭게 성경적 노동관을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보다 가정에서, 가정에서 보다는 일터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성령의 열매를 가장 많이 맺어야 할 곳은 여러분이 일하는 일터, 직장, 사업터, 학교 등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야 하는 곳은 일터입니다.

주님께서 주셔서 번 돈을 나눈다는 것은 사랑의 가장 확실한 표현입니다. 사랑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눔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오늘날 같이 돈이 신이 된 세상에서 가장 사람들이 열광하고 감동하는 것은 ‘나눔’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나누어 주면 줄수록 복을 주시고,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번성케 하시고, 증가시켜 주십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그가 널리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지속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씨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시는 분께서 이제 너희 양식으로 빵도 주시고 너희가 뿌린 씨도 번성하게 하시며 너희의 의의 열매도 늘어나게 하시리니)](고후9:9-10/시112:9인용). 복 받는 비결은 어리석은 부자처럼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널리 흩어서 나누어주는 것이란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다 믿음도 파산 나고, 재산도 날아가는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나누어 줌으로써 하나님을 심히 기쁘시게 하고, 영적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다하고, 이웃에서 선을 베풀고, 부(副)하게 되는 복을 얻습니다. [후하게 주는 혼(魂)은 풍부하게 될 것이요, 물을 대는 자는 자기도 물을 받게 되리라.](잠11:25).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하면 결코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는 이유 역시 성도들이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도 필요한 용도를 /채워 주기/ 위해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 그리하여야 그들이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딛3:14). 성령의 열매라고 해서 전적으로 영적이고 내적인 것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열매는 현실에서, 몸으로 행동으로 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줄 수 있는 재물이 없어도 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는 줄을 아시면서도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들이 떠날 필요가 없나니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매](마14:16). 우리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합니다. 이는 당연히 영적인 빵과 영적인 음료를 말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조차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과 음료는 있습니다. 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요21:15), [내 양들을 먹이라](요21:16), [내 양들을 먹이라.](요21:17)고 세 차례나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가르침에 따라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성전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 거지에게 준 것이 무엇입니까?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그는 능력과 권능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어야 할 영적 선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가서 영적인 선물을 나누어주기를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는 돈이 없었지만 줄 것이 많았습니다. [내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은 너희에게 어떤 영적 선물을 나누어 주어 너희를 굳게 세우고자 함이니](롬1:11). 낙담한 자에게는 말씀을 통해 위로를 주고, 절망한 자에게는 산 소망을 주고, 힘든 자에게는 참 쉼을 주고, 지친 자에게는 용기를 주고, 의심하는 자에게는 확신을 주고, 힘이 없는 자에게는 능력을, 무지한 자에게는 지혜와 명철을 주고, 가난 한 자에게는 풍성한 영적인 복을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우는 자의 위로와 가난한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이요, 포로된 자의 해방자요(자유를 주시는 분), 약한 자의 강함이요, 눈먼 자의 보임이며, 병든 자의 치료자시요, 죽은 자의 부활이시고, 우리의 생명되십니다. 추하고 더러운 자에게 정결함을 주시고, 죽을 자들에게 생명 되시고, 기도할 때 중보자가 되시고, 우리의 화평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함으로써 모든 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제가 이 시간 몇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도 사랑하고 있습니까? 저는 최근에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제 자신이 그렇게 비참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비참한 일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성령께서 저를 통제함을 알았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마5:44). 여기서 딱 한 단어 “위하여”란 말이 제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저는 원수들, 저주하는 자들, 미워하는 자들, 앙심을 품고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서(about, as to, concerning)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위하여”(for)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위하여” 기도했을 때 놀라운 은혜와 평안과 기쁨이 차는 체험을 했습니다. 성령을 거역하는 일, 말씀을 대적하는 일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 뿐 아니라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 옵니다. 내가 누구를 미워하면 미움의 최대 피해자는 상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저주하는 말을 하거나 험담, 비평을 하고 판단을 하면 그 최대의 피해자는 내 자신입니다. 묻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지금 현재 여러분을 통제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환경과 가족들이나 어떤 주변 사람들과 상관없이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환경과 어떤 사람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속적인, 항구적인 평안을 지니고 있습니까? 상황과 사람들의 말에 관계없이 평안하다면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주님이 주신 평강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에 나를 인도해 가시고, 어떤 어려움을 닥치게 하셔도 여전히 오래참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맺어야 합니다. ‘선함’은 어떻습니까? 기분에 따라, 사람에 따라, 외모에 따라 차별하지 않고 잘 대해 줍니까? 그렇지 않다면 ‘선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자기 기분에 따라 말이 부드러워지고, 인상이 좋다가 기분이 틀어지면 아무에게나 화를 내지는 않습니까? 믿음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항상 주님과 주의 말씀만 붙들고 신뢰하고 있다면 좋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헛살고 있다고 생각하시고 열매를 맺도록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온유함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주님께 공손히 복종하고 계시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온유함이란 주님이 구부리시면 구부려지고, 주님이 똑바로 펴면 펴지는 그런 성품을 말합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에도 공손하게 복종하는 것을 온유함이라고 합니다. 뻣뻣한 자들은 구부러지지도 펴지지도 않습니다. 절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순간순간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말이 함부로 나오고 생각이 마구 날뛴다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성령께 더욱 자신을 내어 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우리 위에 두시기를 원합니다. 환란과 풀무의 시련이라도 거뜬히 감내하기를 원합니다.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만 있다면 거뜬히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번 5월 한 달동안 모든 시간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해서만 말씀을 살펴 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저와 여러분이 모두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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