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의 열매(04)- 사랑
말씀. 로마서 5:5



성령께서 우리를 자라게 하시고 맺으실 첫 번째 열매인 [사랑]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사랑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또 사랑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요, 명령은 이것이니 곧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안에서 걸으라 하는 것이라.](요이1:6). 사랑이란 ‘우리가 그분의 명령대로 걷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내리는 사랑의 정의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사랑의 성경적 정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걷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까? 주님의 명령대로 걷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롬5:5), 하나님의 화평(요14), 주의 기쁨(느8), 하나님의 친절(시117:2)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우리 안에 주셔서 우리의 말과 행위가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과 향기와 빛과 맛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원수로 여기는 사람에게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견딜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당할 때 평안하고 기쁨을 유지하라고 하십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친절할 때 우리의 육신은 즉시 말과 행동으로 맞받아치거나 후일을 기약해 두었다가 반드시 갚아 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상황에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욕하는 사람, 나를 핍박하고 불친절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나에게 관심을 두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질을 내고, 분노하고, 마음이 끓고, 그 사람을 향해 불친절할 때 하나님은 나를 자극한 그 사람에게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왜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느냐? 왜 불친절하냐?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키워보셨을 것입니다. 자녀들은 싸우면서 큽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누가 잘못했는지를 가린 후에 잘못한 아이를 혼내지만 잘못하지 않고 맞받아 친 아이도 혼냅니다. 왜 좀 더 참지 못했느냐? 더 큰 녀석이 왜 똑같이 행동했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부모가 보기에는 자극한 아이는 철이 없어서, 어려서 그렇다고 보지만 똑같이 반응을 하고, 자극을 받은 큰 아이는 더 큰 문제로 보입니다. 학교의 선생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형제들이 다툽니다. 서로 자극적인 언사가 오고 갑니다. 욕도 나옵니다. 분명히 나는 잘못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한 대 맞받아 쳤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 못된 놈이 자꾸 너를 괴롭히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왜 못 참느냐? 왜 친절하지 못하느냐? 왜 부드럽게 온유하지 못하느냐?” 이렇게 나를 책망하십니다. 정말 황당하지만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평안과 기쁨으로 마음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친절과 선함과 온유함으로 형제를 대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음과 절제를 발휘해서 똑 같은 반응을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친절할 수 없고, 참을 수 없고, 선을 베풀 수 없고, 평안과 기쁨이 사라져 버린다면 하나님은 그 상황과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전적으로 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의 열매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이 하는 짓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아버지를 닮았느냐? 어머니를 닮았느냐? 그런 말을 듣거나 할 것입니다. 성질 급한 것은 자기 아버지와 똑 같아!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성도들이 분노를 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욕설을 할 때 하나님은 ‘자기 애비가 하는 짓을 그대로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때 자기 아비는 거짓의 아버지 마귀를 말하며(요8:44), 육신의 아버지(옛 사람) 아담을 말합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고 사랑하고 친절하고 선하고 온유하며 절제할 때 하나님은 “자기 아비를 꼭 닮았군!”하십니다. 이 때 자기 아비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모든 영들의 아버지시오, 빛들의 아버지시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무엇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아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고 누구를 닮습니까? 아버지의 모든 성품을 요약해 놓은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 9가지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성경에서 [아버지께서....하신 것 같이....하라]고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봅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5:48). 기준은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너희 아버지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것같이 너희도 긍휼을 베풀라.](눅6:36).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표준이요, 우리는 늘 아버지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음이니라.](벧전1:16).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성품을 그대로 본받아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상냥한 마음을 품으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하라.](엡4:32/골3:13참조).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하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누가 잘못했느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심판석에서 이루어질 일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은 “네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했느냐?”만 물어 보십니다. 누가 잘못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나의 정당성을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잘못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아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고 너는 아버지처럼 거룩하라. 아버지처럼 긍휼을 베풀라. 아버지처럼 완전하라. 아버지처럼 용서하라... 그렇게 말씀하시고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에 찔림을 주시고 책망을 하십니다. 바로 잡으시려고 하십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내 사랑 안에 거하라.] (요15:9).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실 때 아버지께서 자신을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사랑하라는 계명은 구약에서도 많이 있었지만 ‘새 명령’이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란 말씀은 신약에서 새롭게 보여지고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구약에서 보여 지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사랑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대로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새 명령]이라고 합니다.

[내 명령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15:12). 그냥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준과 정도가 제시되었습니다. 방법도 정해졌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누구를 사랑해 보았고, 무엇인가를 사랑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해 보았습니까? 그렇게 해 보았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첫째,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10). 구약의 모든 율법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율법은 사랑으로 성취됩니다. 사랑하면 모든 율법은 자동적으로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사랑 안에는 모든 율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은 사랑하면 다 해결됩니다.

둘째, 사랑은 덕을 세운다. [...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고전8:1b). 지식과 사랑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지식은 우쭐대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워줍니다. 저는 지금까지 바른 성경으로 바른 성경 지식만 전수해 주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전적으로 당사자의 책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식은 아무도 세워 주지 못했습니다. 세워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저는 지식을 매우 강조하고 좋아합니다. 성경 지식을 찾고 탐구하기를 마치 금광을 찾는 노다지꾼 같이 하며, 산삼을 찾아 나서는 심마니처럼 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더욱 갈증을 느끼는 한 가지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개인을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교회를 세웁니다.

셋째,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대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언어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있다 해도 사라지리니](고전13:8).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변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넷째,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이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덧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골3:14). 사랑이 없으면 아무도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묶어서 완전하게 하는 띠입니다. 우리는 믿음, 지식, 덕, 절제, 온유, 오래 참음, 친절 등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과 열매들을 압니다. 이 모든 것은 다 묶어서 완전하게 하는 띠가 바로 사랑이란 것입니다. 영적 지식은 매우 소중하고 귀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매우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맙니다. 믿음은 매우 소중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갈5:6), 사랑으로 섬기는 섬김(갈5:13), 사랑의 수고(히6:10) 등 모두 사랑에 걸려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하고(요15:9),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야 하며(엡3:17),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고(엡4:12),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엡4:15), 사랑 안에서 세움을 입고(엡4:16), 사랑 안에서 걷고(엡5:2), 사랑 안에서 서로 결합하고(골2:2), 사랑 안에서 형제들을 매우 귀중히 여기며(살전5:13), 사랑 안에서 들은 바 건전한 말씀의 틀을 굳게 잡고(딤후1:13), 사랑 안에서 큰 기쁨과 안위를 얻고(몬1:7), 사랑 안에서 너희 자신을 지키라(유1:21)고 합니다. 사랑과 걸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을 완전하게 하는 띠라고 말합니다.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불완전한 것이요, 미완성입니다. 사랑이 들어가야 완전이 되고, 완성품이 됩니다.

지금까지 이 교회는 저의 미성숙한 목양으로 인해 진리의 지식을 강조하고 열렬히 추구했습니다. 저는 좀 더 많은 지식을 전수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부를 설교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강한 부담이 늘 제 마음 속에 있었습니다. 양들은 자라든지 말든지, 먹든지 못 먹든지 계속해서 전하고 또 전했습니다. 구약 개론, 신약 개론은 진행 중에 있는 그런 작품들입니다. 그런 영적 지식들은 성도들 중 누구도 세워주지 못했습니다. 완전하게 하는 띠는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무엇보다도 서로 뜨겁게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4:8). * 참조/ [미움은 다툼들을 일으키거니와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느니라.](잠10:12). 주의하십시오. 사랑은 죄를 보고도 모른 채하거나 덮어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죄를 꾸짖지도 않고, 책망하지도 않고 눈감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나 이해한다면 성경을 멋대로 읽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피가 흐른 그 갈보리의 사랑은 모든 죄를 덮습니다. 우리가 그 사랑으로 형제들의 죄를 덮으라는 것입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누구나 다 짓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고 갈보리로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용서가 있고, 씻음이 있고, 새로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죄를 지은 형제들을 갈보리 십자가로 인도하여 거기서 씻음 받게 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 때 형제들이 지은 모든 죄를 다 덮어 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 구절을 오용해서 ‘사랑은 모든 죄를 덮는다.’고 했는데 자꾸 나의 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서 책망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는 잘못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나게 되나니 이는 무엇이든지 밝히 드러나게 하는 것은 다 빛이기 때문이라.](엡5:13). 책망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형제 사랑입니다. 목자의 역할은 양들을 사랑으로 먹이고 감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꾸짖어 건전한 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건전한 자가 되게 하여](딛1:13). 만약 설교에서 자신에게 걸림이 되는 것이 있으면 회개하시면 됩니다. 아무도 욕하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책망과 비난은 다릅니다. 꾸짖음과 험담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환경이나 사람들을 통해 어려움이나 갈등을 겪게 하십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놀라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섯째,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일4:8). 믿음이나 사랑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서도 하나님을 알 수 없지만 성경을 공부했지만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10년 20년 30년을 성경을 뒤지고 또 뒤져도 그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성경을 100독 이상 한 사람이 아니라 [서로 사랑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적게 읽거나 읽어도 소용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많이 읽으십시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 읽기만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니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 읽은 회수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비례한다면 저는 정말 탑 랭킹에 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한계에 부딪히거나 막힐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왜 내가 전하는 설교, 강의, 성경 공부를 통해서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을까? 고민이 참 많았습니다. 성경 지식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여러 번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계속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다 내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모르는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해야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싶습니까? 뜨겁게 서로 사랑하십시오.

일곱째, 사랑의 위치...십자가에 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로 삼으신 것이라.](요일4:10). 사람들은 어디서 사랑을 찾습니까? 연극, 영화, 전설, 신화, 문학 등 사람들이 지어낸 각종 창작물에서 사랑을 찾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런 데서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진리를 찾는 구도자들이 무엇이 아닌 누구를 찾아야 하듯이 사랑을 찾는 사람들은 갈보리 십자가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거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이 가슴 속으로, 마음 깊은 곳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여러분이 갈보리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통째로 여러분 가슴 속으로 옮겨 놓은 것과 같습니다.

사랑을 어떻게 할 것인가? 피차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고 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의 어감과 어휘적 개념은 너무나 변질되어서 그것이 사랑인지 정욕(lust)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사랑의 속성은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펴 놓으십시오. 사도 바울은 최상의 은사들에 대해서 설명하며 은사로서의 사랑이 무엇인지 말해 줍니다. 노래로도 많이 불렸던 위대한 사랑장을 펴 보십시오. [내가 사람들의 언어와 천사들의 언어로 말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대언하는 은사가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알며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를 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1-3). 성도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언어와 천사들의 언어’로 말하기를 원합니다. 천상의 언어라고 하면 그것이 황홀한 시나 노래일 수도 있고, 멋진 대사일 수도 있습니다. 알 수 없는 방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 더불어 있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천사들의 언어라 할지라도 졸지에 소리나는 징과 울리는 꽹과리가 되어 버립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대언하는 은사’를 원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예언의 파노라마를 쫙 꿰뚫고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원할 것입니다. 모든 신비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비들을 말합니다. 모든 지식은 오늘날 지성인들이 열광하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 역시 성도들이 뜨겁게 사모하는 것입니다. 대언, 신비와 지식, 믿음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나는 0(無)입니다. 적은 지시도 아닌 모든 지식을 갖추었다 해도 지식만 있으면 나는 0(無)입니다.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를 먹이고”란 말을 보십시오. 실재로 이런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훌륭하다고 칭찬을 합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란 말은 재산을 내어 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체가 사랑은 아니란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둘을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재산을 바쳐 가난한 자를 먹이는 것이 사랑이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지금 성경은 그렇게 할지라도 사랑이 없을 수가 있고,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도 없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에 선뜻 동의하지 못하시거나 머리를 갸웃 거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자신의 재산과 몸을 내어 줄 수 있는 존재입니다. 구약에 보면 몰렉의 신에게 자식을 인신 공양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지만 불당이나 사원이나 학교나 고아원이나 방송국에서 전 재산을 갖다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까? 주의하십시오. 교회에 기부를 하고, 기도원이나 선교 센터를 짓는데 거의 전 재산을 기부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사랑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그는 아무 유익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말로 유익이 없다고 번역한 말은 I am nothing입니다. 나는 0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계 장부에는 받을 상금이 적히는 것이 아니라 0라고 적힌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 안에 본성적으로 가진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과 돈과 불의와 쾌락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거룩함과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거룩함과 결합된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진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진리의 사랑을 받아 진리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의 사랑은 자기가 주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불법, 불의, 죄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불법과 불의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랑입니다. 악을 미워할 줄 모른다면 그는 사랑할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에 열심인 유대인들을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너희 속에 없음을 내가 아노라.](요5:42).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야 말로 모든 사랑의 근거이며, 기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열매로 맺으시는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성령께서 친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맺으신 것이기에 이 사랑은 인위적이거나 훈련이나 연습으로 된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사랑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주님의 말씀으로 인해서라면 어떤 고난과 박해도 기쁨으로 기꺼이 감당하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발견하고 이 사랑을 받아서 이렇게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매몰차게 걷어 차 버립니다. 사랑은 희생이 필요한 것이요, 자기 부인이 필요한 것이란 것을 알 때 사랑은 아침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매우 감상적입니다. 그러나 실제 사랑은 이성적이며 의지적이며 고통과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우쭐대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동하지 아니하며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4~7). 여기서 감정적인 요소는 거의 없습니다. 본문을 주의해서 보면 [사랑은...이다.]란 말보다 [사랑은 ---아니한다]란 말이 더 많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자랑하지 않는다. 우쭐대지 않는다. 무례히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쉽게 성내지 않는다.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 불법을 기뻐하지 않는다.” 온통 “---를 아니하며”로 나옵니다. 육신적 본성을 거스르고,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란 것입니다. 타고난 본성과 기질대로 살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람의 육신은 누구나 시기하며, 자랑하고 싶어 하고, 우쭐대며, 무례하고, 자기 것을 추구하며, 쉽게 성을 내고, 악을 생각하고, 불법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의 열매로 내 안에 맺어질 때 그런 육신적인 성품들은 사라지고 대신 “오래 참고, 친절하며, 진리를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와 같은 성품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사람은 오래 참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습니다. 사람은 친절하지 못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상대에 따라서 친절한 경우는 있지만 조금만 틀어지면 성질이 나고 욕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합니다. [사람을 향하신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이 나타나사](딛3:4)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에게 친절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사랑’이란 열매를 맺기 전까지 우리는 친절은 고사하고 욕이 나오고,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다. 겉보기에는 싹싹해 보이지만 자기 혼자만 남거나 부부만 남아 보십시오. 헐뜯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저의 집사람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당신도 전에 그 사람 욕했어요!” 그렇게 말해 줍니다. 위에 계신 주님 외에 곁에서 들었던 증인이 있습니다. 저는 잘 생각도 안 나는데 분명하게 증언을 해 줍니다. 한마디로 사람들 앞과 나 혼자 있을 때 달랐던 것입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다르고, 행동과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서나 언제나 누구에게나 친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진리를 기뻐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진리를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육신은 단 하나도 참지 못하고 분노하거나 불평합니다.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굴욕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육신은 모든 것을 의심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소망합니다. 육신은 현재 눈에 보이는 것만 찾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육신은 아무 것도 견디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들어오면 따로 수양을 하지 않아도 인격의 완성자가 됩니다.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 는 말로 자신을 변증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로 드러나 보이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우쭐대지 않고 무례히 행동하지 않고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않고 쉽게 성내지 않고 악을 생각하지 않고 불법을 기뻐하지 않으며” 산다면 그는 이미 안에 사랑의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드러내 보이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문제이지 성경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세대주의를 아는 것이나 신구약을 통달하고 예언을 줄줄이 꿰는 문제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자랑하지 않고, 우쭐대지 않는 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고, 무슨 직분을 맡았는가와는 별로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워낙 자랑할 것이 없었던지 자신이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것을 자랑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사랑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했다는 것을 자신의 입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쭐대지 않는 것도 사랑의 역할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우쭐대게 합니다(고전8:1). 책을 좀 읽고,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잡으면 대부분 우쭐대기 마련입니다. 우쭐대는 것은 사랑의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저의 간증이며, 체험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수없이 보아온 체험입니다. 저는 성경을 좀 안다고 엄청 우쭐댄 적이 많습니다. 저는 지금도 성경 지식으로는 [나는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고후11:5)란 바울 사도 마냥 시건방진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시기하지 않는 것도 육신의 본성을 부인해야 합니다. 자랑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라 모두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것들입니다. 무례히 행동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성격상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것과 사랑으로 무례히 행하지 않는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앞에서 표현하지는 않지만 매우 오만하고 무례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아연실색할 것들입니다. 사랑은 남이 잘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이란 단지 남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핍박하고 모욕하는 그런 남을 말합니다. 그런 자들이 잘 되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기도할 것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상황과 여건들, 사람들이 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연단과 시험을 위한 것들이며,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는 주님의 선한 손길이란 사실을 아십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준비 하셨을 때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구원하시도록 마음을 열고 주님을 믿었던 순간 즉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도록 허락하는 그 순간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때가 되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죄인들을 구원하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시듯이 우리들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실 준비가 늘 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 자신이 육신의 죄들을 내버리고 돌이켜(회개하여)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면(헌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어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와 구원을 요청할 때 구원을 주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더 이상 육신의 모습으로 육신의 행위대로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고 헌신된 삶, 영적인 열매맺는 삶을 살리라 결단하고 주님께 자신을 맡긴다면 기꺼히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열매맺는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들의 의지적 결정, 결단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죄악된 습관을 끊고 싶으면 마음 속으로 진정 주님께 그것을 기도하고 결단하는 순간 끊어집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으리라는 결단을 할 때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바로 그 순간 승리가 주어집니다. 진정으로 죄를 미워하고 내 안에 솟아나는 육신의 행위들을 미워하고 성령의 열매를 소망한다면 자신의 무능함과 무지함을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그 순간이 바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부터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제가 이렇게 성령의 열매인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지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이것은 헛된 메아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설교가 되고 맙니다. 말쟁이의 말 외에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성령의 열매를 어떻게 맺는지 알지 못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소원하고 결단한다면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해 주십니다(롬8:27). 진정한 소원이 중요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싶고, 선한 사람, 온유한 사람, 친절한 사람, 오래 참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성령께서는 일하십니다. 만약 그런 의지가 없다면 여러분은 아무리 노력해도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거짓 영접, 거짓 믿음이 거짓 구원을 낳듯이, 위선과 거짓으로 드리는 결단과 헌신은 위선의 열매 밖에 얻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사람은 매우 많습니다. 저는 다른 것은 별로 개의치 않고 잘 참는데 성경이나 교회를 욕하는 것, 제 설교에 대해 씹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순간적으로 용암이 분출되어 올라 옵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어제까지 친형제보다 친했다 하더라도 인연 끊고 맙니다. 내가 목사만 아니라면 한 대 갈겨 주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주님은 제게 “네가 갈겨 주고 싶은 그들을 위해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정말 싸가지 없는 놈들과 년들도 많습니다.”라고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네가 말한 그 놈들과 년들을 위해 나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음 속에서 판단하고 비판하고 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은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고 온 생명을 주신 사람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저는 그들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정말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제가 스스로 제게 놀랐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제 안에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가족이 없이 고아처럼 자라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서 사랑을 잘 모른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누구도 사랑을 알고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정에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갈보리 십자가에서 발견하고 거기서 내 안에 쏟아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마음먹는 만큼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면 주님께서 알아서 일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완수하실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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