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롬8:26-27
요절: 롬8:26-27
오늘은 성령과 기도에 대해서 증거 하겠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도우시며, 우리 속에서 중보 기도를 담당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27).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둘째,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 셋째,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 넷째,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신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의 사역입니다.
우리는 기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합니다(엡6:18). 이 셋은 기도에서 항상 함께 묶여 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구한다거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께 구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구하는 것 등은 모두 잘못된 기도입니다. 생각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지만 기도는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가르치고 증거했습니다. 오늘은 성령과 기도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연약함이란 육신의 연약함 특히 기도에 관련해서 연약한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같이 노는 일이나 죄를 짓는 일은 밤을 새우는 일도 어렵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는데 기도를 하는 일은 한 시간은 고사하고 몇 십분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30분 정도 기도하고 나면 피곤이 몰려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며,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기도만 하려면 잠이 쏟아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공부를 하는 일이나 책을 읽는 일에는 밤을 새우는 사람도 기도는 그렇게 못합니다. 죄인들은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는 일에는 몇 날 몇 일을 거뜬히 하지만 기도는 5분도 채 못합니다. 사람들의 육신은 기도하는데 너무나 약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요즘 매일 저녁 기도모임을 하는데 거의 다 나가떨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Survival Prayer Meeting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에게 승리와 보상이 주어질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이 사역을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기도하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을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빠져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잠자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참으로 영은 원하되 육이 약하도다, 하시고](마26:41). 성령은 기도를 잘 하지 못하는 육신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삼손을 보십시오. 육신의 힘은 천하 장사였지만 연속되는 시험과 유혹이 몰려와도 기도할 줄을 몰랐습니다. 악을 이길 능력이 없고, 피할 줄도 몰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신의 연약함입니다.
성령님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의 기도를 도우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간단하고 쉽게 기도할 수 있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도는 지극히 육신적이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구하기도 합니다. 살로메는 주님을 믿고 헌신적으로 섬긴 여인이었지만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구했습니다. 그녀의 아들이 그 유명한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이들은 주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지 우리에게 해 주시기 원하옵나이다, 하매](막10:35). 이들은 원하는 것을 구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왔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바른 자세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자세로 주님 앞에 나와 필요를 구하고, 원하는 것을 구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문제 없습니다. 그 때 주님은 물으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하시니](막10:36). 주님은 지금도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올 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주님은 무엇 때문에 자꾸 와서 귀찮게 하느냐? 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무엇을 구하러 오는 자들에게 늘 그들의 필요를 물어 보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주님이 이렇게 물으면 마음속에 있는 소원이나 긴급한 필요를 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엉뚱하게 구하는 수도 있고, 욕심에 따라 구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구했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께서 영광 중에 계실 때에 우리를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하거늘](막10:37). 이들은 정말 원하는 것, 간절한 소원을 구했습니다. 이들의 심중에 깊이 담아 둔 소원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넘어서 구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기도를 돕지 않는다면 우리는 함께 기도할 때 서로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정욕대로 구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떤 것은 경쟁률이 치열한 기도 제목이 될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막10:38a). 이 말씀은 이들이 잘못 구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구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런 기도를 일컬어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런 기도를 바로 잡아 주십니다.
바른 기도 생활은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도무지 불가능할 것입니다. 바른 마음으로 바른 것을 구하는 것이 기도 응답의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라면 100% 응답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때 기도는 응답됩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들으시는 것이라.](요일5:14).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는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주어야 할지 /너는/ 구하라](왕상3:5) 하셨습니다. 그 때 솔로몬은 자신의 무지와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한 후에 [그러므로 깨닫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나로 하여금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b)라고 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야고보와 요한과 달리 제대로 구했습니다. 주님은 그의 기도를 매우 기쁘게 여겼습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주}께서 그 말을 기쁘게 여기시니라.] (왕상3:10). 제대로 된 기도는 주님을 기쁘게 합니다. 바른 것을 구할 때 주님은 주시면서 기뻐하십니다. [사악한 자의 희생물은 [주]께 가증한 것이나 곧바른 자의 기도는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니라.](잠15:8). 우리가 기도할 때 마땅히 구해야 할 것들,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곧 바른 기도가 되도록 도우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되도록 도우십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가 되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이것은 기도를 위한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십니다.
제대로 구할 때, 필요를 구할 때 주님은 들어 주시지만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이루려는 기도를 할 때 주님은 그 영혼에 메마름을 보내십니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이 요구한 것을 주셨으되 그들의 혼은 야위게 하셨도다.] (시106:15).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 구한 결과입니다.
눈먼 두 사람의 기사를 알 것입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런데, 보라, 눈먼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거늘 무리가 그들을 꾸짖어 잠잠하라 하나 그들이 더욱 소리를 지르며 이르되, 오 {주}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더라.](마20:30~31). 무리들은 이들을 제지하고 시끄럽다고 했습니다. 꾸짖었습니다. 잠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이 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멈추어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하매] (마20:32~33). 주님은 이들이 왜 소리를 지르며, 부르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고 물어 보십니다. 그리고 그 답변을 들어 보십니다. 눈먼 두 사람은 즉시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라고 구했고 주님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 주셨습니다. 이런 기사를 접할 때면 오늘날 성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 곁으로 주님이 한 번만이라도 걸어가신다면 나도 그렇게 한번 소리 질러 필요를 구해보고, 소원을 아뢰어 보겠다!”,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물었듯이 내게도 한 번만 물어 봐 주시면 구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의 거리나 이곳 어디를 지나다니지 않으시고, 꿈에도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아쉬워할 것 없습니다.
대신 주님은 믿는 자들의 영 안에 거하시고 계십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경들처럼 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주님께 충분히 모든 필요를 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여러분은 이 음성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까? 주님께서 귀를 열어 주시고, 주의 음성을 듣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행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제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엡3:20). 구약의 솔로몬이나 복음서의 제자들을 부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26-27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27). 성령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계시해 주시고, 그 뜻대로 구하도록 하십니다. 기도를 쉬지 않고, 열심히,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은 바른 기도란 전제하에서만 좋은 것입니다. 말씀을 기초로 하지 않는 기도는 가증한 기도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 기도마저도 가증한 것이 되느니라.](잠28:9). 이런 기도는 기도하면 할수록 그 기도마저도 죄가 됩니다. [그가 심판 받을 때에 정죄 받게 하시고 그의 기도가 죄가 되게 하시며](시109:7).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할 바를 알려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허공을 맴도는 의미 없는 소리이거나 가증한 것이거나 죄가 되는 기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는 기도를 들어 보면 기도가 아닌 것들이 수두룩합니다. 만약 저 하늘에도 쓰레기장이 있다면 성도들이 올려 드리는 대부분의 기도는 주님 앞에 있는 제단 위의 금향로가 아니라 그대로 쓰레기장으로 직행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말로, 깨달은 말로 기도하시기를 빕니다. 성령께서는 이런 것들을 우리 속에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반드시 깨닫는 말로 기도해야 합니다. 소위 방언 기도란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기도해도 피곤하지 않고 많이 기도할 수 있다고 자랑합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로 기도를 하고는 하나님과 직통 교제를 했다, 나의 영이 기도했다는 식으로 위안을 삼고 기뻐하는데 이는 가당찮은 이야기입니다. 영이 기도하고 지각이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기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한 말을 내가 알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바보는 없습니다. 사람에게 하는 말이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든 우리는 깨닫는 말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해하면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리라.](고전14:19).
성령께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바른 기도를 하도록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과 반대로 구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구하라고 하는 것들은 하나도 구하지 않고, 구하지 말라는 것들은 열심히 구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마6:33). 우리 자신이 추수의 일꾼이 되어야 하며, 또한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구해야 합니다. 이 교회에 양떼들이 불어나도록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 새 힘을 얻게 하시기를 구하라(롬15:32)고 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든 영혼들, 피곤한 삶의 연속이라면 새 힘을 얻게 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소생하는 힘을 얻게 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것을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자기 것을 구하지 말고 각각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구하라.](고전10:24). 때로 내 생각과 판단대로 어떤 형제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기도가 막힐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것을 기도하지 말라고 막으심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런 때는 성령께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알도록 의지하고 구하십시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저는 때로 어떤 형제를 보면 ‘요나’가 생각나고, 어떤 형제를 보면 ‘모압’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저의 판단이나 생각이 모두 성경적이고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분을 위해 기도하다 보면 목에까지 올라온 말들이 다시 내려가고 입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나올 때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기도를 막으시고, 기도를 인도하십니다.
-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영적인 은사들에 열심이 있은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고전14:12). 어떤 능력이든 지혜든 돈이든 재능이든 교회를 세우는 일에 쓰인 것이 아니라면 육신적인 것이며, 마귀적인 것입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을 못하는 사람들은 이미 세워진 교회에 가면 됩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순종하든지 불순종하든지는 여러분의 의지입니다. 여러분이 이 일을 싫어하면 주님은 그에게 주신 사명의 촛대를 옮기셔서 여러분을 대신할 누구를 그 자리에 채워주십니다. 교회의 성도가 떠나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제가 교회의 머리가 아니기 때문이요, 이 교회는 조직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는 주님께서 때가 될 때까지 역동적으로 훈련하시고, 인내와 오래 참음으로 믿음의 Time test를 통과한 사람들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으실 것입니다.
- 주님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아울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말씀 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골4:3a).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자들은 하지 말아야 할 말들만 쏟아 냅니다. 밖에서 죄인들에게 말 한마디 못 여는 자들이 교회 안에서나 자기들끼리 모여 수군덕거리는 일은 전문적으로 하는 법입니다. 어디서라도 말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성령께서는 마땅히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 주님은 지혜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이런 것을 구하도록 우리 안에서 도우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분명히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지만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들을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십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 가운데 죽으셨듯이,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중보하십니다. 기도의 중보 사역은 결코 기쁘고 즐거운 사역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고통스런 사역입니다. ‘말할 수 없는 신음이’ 동반되는 그런 사역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그렇습니다. 기도는 중한 노동입니다. 기도를 많이 해 보신 분들은 다 체험적으로 느끼고 경험한 이야기들이지만 중보기도 30분하는 것이 성경 읽기나 성경 공부 몇 시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기도는 입술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짐을 내 혼에 품고, 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애가 타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며, 힘들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사역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서 억눌리기도 하시고, 슬픔을 당하기도 하시며, 제한받으시기도 하고, 거스르고 반역하는 자들과 모욕하는 자들 안에 영원히 거하시면서 그런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고통스런 사역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중보하십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7).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아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하여 중보하십니다. 우리의 기도 사역은 반드시 성령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전력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은혜의 영이요, 간구하는 영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슥12:10a). 성령께서 임했다는 것은 곧 간구하는 영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강력한 기도의 조력자요, 인도자를 받은 것입니다. 간구하는 영을 받을 때 우리는 기도의 사역자가 됩니다. 입술로 드리는 말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희생물이 됩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향을 올려 드림같이 되며 나의 손을 들어올림이 저녁 희생물을 /올려 드림/같이 되게 하소서.](시141:2). 다윗은 자신의 기도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 향을 올려 드림 같고, 저녁 희생물 같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해 주님이 부어주시는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을 거듭나게 하신 분은 은혜의 영이시요, 간구하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믿음의 영이시기에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 지혜의 영이시기에 지혜를 주시고,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이시므로 능력과 지혜와 건전한 생각을 주심같이 은혜의 영이요, 간구의 영이시기에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뜨겁게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깨어 기도하게 하십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는 기도라면 우리의 기도는 말쟁이의 말과 같이 허공을 맴도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연극배우들이 대본의 대사를 연습하는 것처럼 기도를 연습하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부은바 되었기에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기도요, 주 앞에 드려지는 향이요, 저녁 희생물 같이 됩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향이요, 희생물입니다. [그분께서 그 책을 취하시매 네 짐승과 스물네 장로가 저마다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들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리니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계5:8).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이라고 말하는데 우리의 기도가 희생물임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향이란 사실입니다. 우상들에게 제물을 드리는 자들은 실제 향나무를 깎아서 향을 피우지만 성도들은 기도의 향을 피웁니다. [또 다른 천사가 금 향로를 가지고 와서 제단 앞에 서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 향을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왕좌 앞에 있는 금 제단 위에 드리게 하려 함이더라.](계8:3).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향이란 사실을 깊이 인식하십시오. 성령께서 간구의 영이 되심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도를 더욱 단련하고 정련해야 합니다. 때로는 무지한 기도요, 두 마음을 품은 채 하는 정함이 없는 기도요, 말씀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기도요, 믿음이 없이 드려지는 기도요, 자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구하는 기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구속자(救贖者)이신 [주]여, 내 입의 말과 내 마음의 묵상(默想)이 주의 눈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묵상이 되고, 그것이 생각과 가치관이 되고 나의 신앙 인격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입술은 단지 말하는 묵상의 결과를 주님 앞에 드리고, 마음 속에 가득한 것을 내어 드리는 도구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런 기도를 믿음의 기도라고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여 내 마음에 형성되어 있는 것 -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롬10:17). 성령은 믿음의 은사를 나누어 주시며, 성령의 열매로 맺게 하시기도 하는데 이 모든 것이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은사로서든 열매로서든 성령은 우리 안에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강하게 하심으로 믿음의 기도를 하도록 도우십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키며(약5:15), 믿음의 기도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 너머로 옮겨 가라, 하면 옮겨 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리라.] (마17:20b, 마21:21). 이런 믿음의 기도는 전적으로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음을 도우시고, 말씀을 흥황하게 하며, 강력하게 자라게 하시며, 세력을 얻게 하심으로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고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중보 기도는 죄 사함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욥과 그 두 친구를 향해 번제 헌물을 바치게 함과 동시에 욥이 그들을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제 수소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 헌물을 드리라. 그리하면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며 너희의 어리석은 행위대로 너희를 처리하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내 종 욥과 같이 나에 대하여 옳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욥42:8). 번제 헌물을 드리면서 동시에 그들을 위해 기도할 때 주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욥은 근거 없이 자신을 비판하고 헐뜯던 친구들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중보 기도를 담당했습니다. [욥이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주]께서 욥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그에게 이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시므로] (욥42:10). 그 때에 욥은 마귀의 올무에서 풀려났습니다(딤전3:7,6:9). 마귀에게 사로잡혔던 결박을 풀어 버렸습니다(딤후2:26). 주님이 언제 욥을 풀어 주셨습니까? 자신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헐뜯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였습니다. 중보 기도는 곧 자신의 영적 회복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는 기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간구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엡6:18). 기도를 하는데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기도이든 간에 우리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기도의 자세는 “감사함으로, 깨어서, 믿음으로, 뜨겁게, 효과적으로, 중단 없이(쉬지 말고)”입니다. 그럼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란 어떤 기도입니까?
이는 유다서 1:20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유1:20). 성령은 우리의 기도의 조력자이실 뿐 아니라 기도의 인도자이십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에게도 완전히 뜬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전혀 개념을 잡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저는 최근에 성도들이 믿음이 전혀 자라지 않는 이유 중 한 가지를 알았습니다. 성경의 기본 용어, 매우 자주 사용되고 일반적으로 설교되어지는 기본 어휘들에 대해서 지각의 열매를 전혀 맺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이런 말씀에 대해서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고, 남에게 이해시켜 주지도 못하며, 설명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하는 기도가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인지 자신도 모릅니다. 지각(understanding)의 열매, 즉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어떤 열매도 없습니다.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이어야 열매를 맺는데, 좋은 밭이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를 맺습니다(마13:23). 듣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듣고 깨닫고]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방언으로 기도하라고 이해하거나 가르치는 자들은 생각해 볼 가치도 없는 주장으로 일단 제쳐 둡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고, 실천하고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씀은 기도의 핵심 강령입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란 말은 영적 생명과 삶의 기본 원리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의 질과 승패와 열매를 결정해 준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란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령 안에서 걸으라, 성령 안에서 살라는 말씀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살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갈5:25). 성령 안에서 걷고, 사는 것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란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합니까? 우리는 모든 일을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하듯이, 모든 일을 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해야 합니다. 성령은 기록된 성경 말씀으로 우리 안에서 조명해 주시고,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해 주시고, 깨우쳐 주시고, 때로는 책망해 주시고, 바로 잡아 주십니다. 때로는 막으시고, 금지하십니다. 때로는 부담을 주시고, 명령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걸으시며, 강력하게 활동하십니다. 이런 모든 성령의 인도하심을 그대로 인정하고 순복하며 주의 뜻이 무엇인지 지적으로 이해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성령 안에서 산다, 성령 안에서 걷는다고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성령의 일을 생각하며(롬8:5)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갈4:18) 주님이 주신 건전한 생각의 영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고(엡4:23), 생각이 변화를 받아서(롬12:2)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거나 슬프시게 하거나 거스르거나 반역하거나 제한하거나 억누르지 말고 충만함을 입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생각 없이 기도했고 어쩌다 응답되는 기도도 있었고, 안되는 기도도 있었다는 식의 기도 생활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이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성령을 우리 안에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존귀와 영광을 돌립시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주제별(글) > 성령을 알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과 아들의 형상 (0) | 2006.02.01 |
---|---|
성령의 인도하심 (0) | 2006.01.27 |
성령의 기름부음 (0) | 2006.01.25 |
말씀하시는 성령 (0) | 2005.11.29 |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이유 (0) | 2005.1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