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엡5:18
요절: 엡5:18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태어났습니다. 성령은 중생의 주체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시고 영원히 거주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주님의 소유임을 인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시는 중보자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성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적,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면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의식을 하든 하지 못하든, 알든 알지 못하든 이것은 성경적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그는 이 사실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믿고,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성령 안에서 살며 걷는 성도는 극히 적습니다. 성령으로 이미 침례 받았고, 성령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심을 아는 여러분들에게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엡5:18). 주님은 왜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는 어떤 성도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믿고, 순종하며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에 대한 잘못된 가르침이 교회 내에 팽배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이 방언을 말하는 것인 줄 알고, 어떤 이는 놀라운 환상이나 무아지경에 이르는 입신(入神)인 줄로 압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속을 들여다보는 투시나 신언(神言)이나 예언을 하게 될 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모두 에베소서 5장을 펴 보십시오. 주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에베소서 5:18의 명령을 주신 이유는 모두 5:16에 걸려 있습니다. [시간을 되찾으라. 이는 날들이 악하기 때문이니라.](엡5:16). 이것이 현 시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입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날들(days)’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시간을 되찾으라. 날들이 악하기 때문에 시간을 되찾으라는 것입니다. 둘째,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엡5:17). 이 역시 날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過度)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이 역시 날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날들이 천년 왕국의 날들이라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 세대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며, 심히 비뚤어진 세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을 거슬러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왜 성령 충만을 구하고, 성령의 권능을 구하는가? 먼저 그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구하는 것을 주시지만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무슨 일이든 쉽게 할 수 있고, 전도도 잘하고, 지혜가 넘치고, 사람들로부터 멋진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이란 칭찬과 찬사를 들을 줄로 생각해서 성령 충만을 구한다면 한참 잘못 생각하고,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의 모델을 오순절에 있었던 ‘하루에 3,000명을 회심시킨 베드로’로 잡은 사람들은 사도행전 7장의 성령 충만한 스데반에게 주어진 결과에 매우 당황해 합니다. [믿음과 권능이 충만](행6:8)했던 스데반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강력한 복음 선포와 누구도 감히 모방할 수 없는 위대한 설교를 했지만 청중들 가운데 ‘한 명’도 구령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 구절을 읽고 당황한 성경 주석가들과 엉터리 설교자들은 스데반의 설교가 청년 사울의 가슴을 갈라놓았고, 후에 사도 바울로 회심하는 씨앗이 뿌려진 것이라는 추측과 엉성한 주석을 달며 애써 의미를 부여하고 좋게 해석해 주려고 하기도 합니다. 성령 충만했던 한 순교자의 사역 결과가 너무나 비참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라면 너무나 슬프고 애통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지 않았다면 모여 있는 사람들과 부드럽게 대화하면서, 최대한 상대를 존중하면서, 사람들을 자극하지 않고, 그들의 반응을 보아가면서 설교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했던 결과 그는 담대하게 직설적으로 죄를 지적하고, 격한 설교를 했으며, 분노한 군중들을 더욱 자극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예는 허다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는 교회를 부흥시키기도 하지만 완전히 깨 먹기도 잘합니다. 미국의 2 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미국이 자랑하는 지성이요, 미국 교회가 배출한 최고의 설교자라 불리었지만 그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설교했을 때 성도들은 그를 싫어해서 자신이 목회하던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덴마크의 국부(國父)라 불리는 그룬트비는 성령으로 충만한 설교를 하다가 교계에서 미움을 받아 역시 쫓겨났습니다. 중국에서 배출된 최고의 설교자요, 성령으로 충만했던 웟치만 니는 자신이 설립했던 교회의 목사직에서 쫓겨나 6년이나 설교를 하지 못했습니다. 영국의 전설적 부흥사였던 조지 휫필드는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엄청난 부흥’을 몰고 다녔지만 미국에서 부흥 집회를 하고 돌아갔을 때 영국 교회는 아무도 그에게 강단을 내 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예는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찰스 피니는 ‘성도들이 만약 성령 충만의 결과를 미리 제대로 알게 된다면 아무도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만약 성령으로 충만한 결과를 달콤하고, 마냥 좋은 무엇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결과가 당혹스럽기만 할지 모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번에 가는 교회의 목사님은 제발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목사님이어야 할 텐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는 자신의 생활을 모조리 틀렸다고 부정할 것이며, 삶의 방향을 뜯어 고치라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하고 있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할 것이고, 하기 싫은 일은 하라고 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목사는 성도들의 일상 생활에 대해서 조금도 간섭하려 하지 않지만 성령 충만한 목사는 반드시 무엇인가 말을 합니다. 나를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는 것은 하나도 없고, 회개하라고 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얼굴에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주고, 위로해 주고 잘 했다고 해 주는 분이 좋지, 회개하고 주님께 헌신하라는 목사를 좋아하는 성도다운 성도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는 몇 이나 되겠습니까? 전에 존 R 라이스 목사님은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초청한 목사님이 설교를 너무 싫어해서 난감해 했습니다. 이유인즉 존 R 라이스 목사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도들과 교회의 죄를 지적했기 때문입니다(미3:8). 그 목사님은 집회가 끝난 이후로 다시는 성령 충만한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지 않으리라 작정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사는 날들은 참으로 악합니다. 음란합니다.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할 시간들을 모두 자신의 정욕과 욕심에 이끌리는 대로 사용해 버리고, 낭비해 버립니다. 시간을 되찾으라는 말씀은 잊어 버리고, 모든 시간을 자신을 위해 다 써버립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대신 핑계거리나 찾고, 자기를 방어할 논리나 찾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변명합니다. 성령으로 충만 하는 대신 술에 취합니다. 이 세상의 음녀가 주는 각종 음행의 잔, 명예의 잔, 재물의 잔, 진노의 잔을 받아 마셔서 비틀거리도록 취해 있습니다. 거의 인사불성(人事不省)의 수준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주의 잔 대신 마귀의 잔을 받아 마시지 말라는 말씀입니다(고전10:21).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는 성경의 명령은 ‘복음을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하라’, ‘주를 위해 기쁘게 죽임을 당할 준비를 갖추라’고 읽으시면 제대로 이해하고 읽은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말씀을 듣고, 읽을 때, ‘죽을 준비하라는 말씀이구나, 욕 얻어먹을 준비하라는 말씀이구나, 마귀에게 시험을 받고 시달림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구나, 곧 시련이 닥치겠구나!’ 라는 뜻으로 먼저 머리에 떠오르면 제대로 떠 오른 것입니다. 침례인 요한이 왜 감옥에 갇히고,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까? 성령을 소멸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역시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그렇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했고, 오늘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을 전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이기적이어서 주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더러움과 불순한 동기, 잘못 구하는 것들을 모두 깨닫게 하시고 성경적 의도와 목적대로 구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요,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이요, 폼이 나는 그런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아무리 기도해도 성령 충만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주와 복음을 증거하기(witnessing)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과 성령의 권능을 구하는 것은 이 악한 현 세상에, 잃어버린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들은 권능을 가지고 증거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매 큰 은혜가 그들 모두에게 임하니라.](행4:33). 사도 바울 역시 자신의 복음 선포는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행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능력 있는 표적과 이적을 통해서나 하나님의 영의 권능으로 이루신 것이니 이로써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 근방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만히 선포하였노라.](롬15:19).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삼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고, 증거자로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 마음이 없다면 아예 성령 충만을 구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내가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리라’ 결단하였다면 담대히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실 것을 구하십시오.
일꾼에게 일을 시키려면 미리 필요한 물자와 재료와 정보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를 증거자로 삼으시고 세상에 보내실 때 필요한 지혜와 능력과 권세를 주시며,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는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커피나 마시며 노닥거리고, 자기 일만 할 사람에게 증거의 능력을 주실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둘째, 혼을 이겨오게 하기 위해서(winning)입니다. 혼을 이겨 오는 데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창조의 권능만큼이나 큰 권능이 필요합니다. 오히려 더 큰 권능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말씀 한 마디로 창조하신 주님이시지만 죄인들을 향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으로 빠져드는 혼을 건져서 이겨오는 일은 천지 창조만큼이나 크고 놀라운 권능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말이나 지혜나 능력으로 결코 혼을 이겨 올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권능을 실증(實證)함으로 한 것이니](고전2:4). 성도들이 모두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갖는다면 반드시 구령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혼들을 이겨 오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잠11:30). 성령 충만했던 사람들 중에 전도자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은 신학자가 아니라 모두 부흥사들이요, 전도 사역에 매진했던 사람들임을 교회사가 생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도서관에 앉아 책을 뒤지고, 토론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자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잃어버린 혼들을 이겨 오기 위해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령 충만’을 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책상에서 성경 공부를 하면서 배우는 지식보다 현장에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읊었던 성경 구절들이 훨씬 더 살아있고 강력하다는 사실은 해 본 사람은 누구나 다 아는 체험입니다. 주님의 성령은 교실에서 임하지 않고, 잃어버린 혼들 앞에서 복음을 증거 하는 그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혼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하고, 혼을 구원하기 위해 말씀을 공부하고, 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혜를 구할 때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주님이 주시는 성령으로 충만케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열매를 맺고, 더욱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Bearing more fruits).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성령으로 열매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만 맺힙니다. 특히 영적이고,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성령의 열매는 성령으로 충만히 채움 받지 않고는 도무지 맺히지를 않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일은 결코 단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형성되는 산고의 수고를 겪어야만 합니다(갈4:19).
열매는 일의 결과가 아니라 생명의 현상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서 나를 가지로 삼아 맺힙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나무요,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한 경고가 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일 뿐이요, 비없는 구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열매없는 나무, 열매없는 사람에 대해 주님이 얼마나 엄히 경고하시는가 보면 두렵고 떨릴 정도입니다.
◇ 침례인 요한의 증거 -[또한 도끼가 이제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느니라.](마3:10).
◇ 산상 수훈에서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증거 -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사람들이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 모으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썩은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악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또 썩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지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마7:16~20).
◇ 십자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내 안에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모든 가지는 아버지께서 제거하시고 열매를 맺는 모든 가지는 깨끗하게 하사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느니라.](요15:2).
어떤 사람은 말씀이 아무리 뿌려져도 마귀에게 다 빼앗기고, 수분이 없어서 자라나지 못하고,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말씀이 자라지를 못합니다. 들어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감사와 찬양과 같은 입술의 열매도 없고, 평안과 기쁨 같은 마음의 열매도 없고, 선함과 의와 진리 같은 성령의 열매도 없다면 이는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열매를 맺고, 더 풍성히 맺기 위해서 성령으로 침례를 주신 주님께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기를 구해야만 합니다. 열매 없는 나무가 농부에게 쓸모없는 나무이듯이, 성령의 열매 없는 성도는 하나님 앞에 쓸모없는 성도입니다.
넷째, 교회의 덕을 세우게 하기 위해서(Edifying)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교회의 덕을 세우도록 영적 선물(은사)을 주시고, 직분을 주십니다. 성령의 은사는 자기 유익을 구하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에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교회에 덕을 세우고, 교회를 섬기려고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엡4:12). 이 말씀의 전후 문맥을 살펴보시면 주님께서 은사를 주신 이유(엡4:6)에 대한 말씀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각양 좋은 은사들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데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영적인 은사들에 열심이 있은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나기를 구하라.](고전14:12). 교회를 세우는데 쓰이지 않는 영적 은사는 복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재앙입니다. 빛이 변하여 번개가 되듯이, 영적 지식 역시 잘못 사용하면 그렇습니다. 때로 성경을 조금 알고, 배웠다는 사람들 중에 교회를 비판하고 멸시하는 일을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채 자아로 충만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될 지경입니다. 영적 지식은 사람을 우쭐하게 만듭니다(고전8:1). 지식은 반드시 덕위에 있어야 하고, 절제 아래 놓여야 합니다(벧후 1:5). 그렇지 않으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고, 파당을 만들며, 입만 살아 있는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성령을 충만케 하시는 이유는 교회를 세우고 섬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전혀 없다면 성령 충만은 꿈도 꾸지 마십시오.
다섯째, 형제들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serving)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섬김 받고 싶어 하지 섬기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노리고 있거나 얻을 것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섬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섬기는 일은 우리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하신 이유는 형제들을 섬기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막10:45).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 주셨고, 우리에게 그 본을 따라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려면 반드시 본성을 부인하고,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기고, 자기 배를 섬기며, 우상을 섬기고, 재물을 섬깁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영이 뜨거운 가운데 주를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기를 기뻐합니다. [각각 은사(恩賜)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서로 그 은사를 써서 섬기라.](벧전4:10). 성령의 은사는 섬기라고 주신 것이요, 성령 충만은 은사를 최대한 잘 활용할 수 있게 합니다.
여섯째,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을 실천하게 하기 위해서(Loving)입니다. 사랑은 성경의 가장 중요한 교리요,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라고 사랑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음이니] (롬5:5). 사랑받으라고 사랑을 부어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라고 사랑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사랑’을 부어 주셨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면 여러분은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희생과 눈물과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 주신 사랑이 아니라면 자기 가족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유대인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틴데일은 자신을 장작 더미 위에 묶어 두고 불을 지피는 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영국 여왕의 눈을 뜨게 해 주소서’란 그의 마지막 기도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원수를 향해 보여 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은 사람은 말과 행동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큰 사랑, 완전한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이(轉移)됩니다. 우리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조건없이 전달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됩니다.
일곱째, 하나님을 잘 알게 하기 위해서(Knowing)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사람이 성령에 대해서는 아는 것과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성령을 아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이는 경험으로 아는 것과 이론으로 아는 것의 차이보다 더 큽니다. 현대 교회의 치명적인 약점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해 이론적으로 규명하여 아는 것은 빈틈이 없고 매우 뛰어나지만 그에 비해 실제적인 경험과 능력으로 알지 못하며 체험적이지 못합니다.
한 밤 중에 호랑이를 맞부딪혀 본 경험의 소유자와 백과 사전에서 글과 사진으로만 본 호랑이와는 그 지식이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인쇄술의 발달과 교육 환경이 좋아진 현 사회에서는 많은 신앙 서적과 설교집이 있습니다. 신학교들은 물론이요, 성경 공부 교재들이 넘칩니다. 덕분에 누구든지 원하기만 한다면 이론적인 지식은 이전 어느 시대보다 더 쉽게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체험과 능력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진리의 지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는 상태에서 배운 지식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참다운 지식과 인격적인 교제와 체험을 통한 앎이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무의미한 삶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 때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우리 {주}를 아는 것을 통하여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을지어다.](벧후1:2).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때 그는 강하여 공적을 세웁니다. [... 오직 자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공적을 세우리라.](단11:32). 우리 주님은 다음 말씀을 여러 차례 인용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번제 헌물보다 나으니라.](호6:6).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론과 논리를 훨씬 능가하는 살아있는 체험으로 아는 지식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해서(about)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안다(know)는 말의 성경적 의미를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있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요17:3). 주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호4:6).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 우리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에 관해서(about) 아는 지식은 힘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아는 지식은 세상의 어떤 지식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모든 것을 확실히 손실로 여김은 그리스도 예수 내 {주}를 아는 지식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이라. 내가 그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들을 단지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8). 사도 바울이 가진 지식도 주님을 아는 지식과 비교했을 때 배설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런 배설물을 얻기 위해 시간을 다 버리고,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마귀가 주는 잔을 마심으로 비틀거립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은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자라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벧후3:18).
여덟째, 마귀와 세상과 죄를 이기게 하기 위해서(overcoming) 성령을 충만케 하십니다. 하나님은 마귀와 마귀의 일들을 멸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이 승리하신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이겨 놓은 승리도 이기지 못하고 패배합니다. 마귀는 이미 우리 주님께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울부짖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 돌아다닙니다(벧전5:8).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멀리서 불화살을 쏘아댑니다. 성도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해 버리고 도망해 버립니다.
믿음과 기도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마귀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이 있다는 것만으로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죄와 육신과 세상을 이기는 능력은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승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15:57).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감사하노라.](고후2:14).
아홉째,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고, 순종해서 살아 보게 하기 위해서(Living)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단지 교훈과 훈계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한 번 살아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살아 보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하신 것은 성경대로 살아 보라는 뜻이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상 아홉 가지가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기를 구하는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충만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살아온 그대로 앞으로 살 수 있을 것이며, 오랜 교회 생활을 통해서 경륜이 쌓이고 점점 더 노련미가 쌓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령과 무관하게,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살아온 영적 신앙생활에 불편이 없었다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좀 더 세련되고 멋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적당히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주님께 성령 충만을 구한다고 해서 충만함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야 합니다. 구원은 받았다 할지라도 성령을 억누르고, 근심케 하고, 슬프시게 하며, 성령을 제약하는 자들이 모여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한심하고 망령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