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욥33:14
요절: 욥33:14
성령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면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에 관한 이야기는 ‘신비주의’나 ‘은사주의’자들이 열렬히 추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성경적 진리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말을 잘 할 수 있는 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잘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입술의 할례, 귀의 할례,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분이시요, 우리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들을 뿐 아니라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말씀을 증거하겠습니다. 잘 알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듣는 것에 주의하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듣는 너희가 더 많은 것을 받으리니] (막4:23~24)라고 하셨습니다. “듣는 것”(what ye hear)- 무엇을 듣는가?에 주의해야 합니다. 동일한 문맥에서 누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주의하라. 이는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있는 줄로 여기는 그것까지도 빼앗길 것임이라, 하시니라.](눅8:18). 어떻게 듣는가?(how ye hear). 무엇을 듣고, 어떻게 듣는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진리(롬10:17)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듣는데 실패하면 모든 것에 실패합니다.
성령은 교회에게 말씀하시고, 성도 각자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이신 주님과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들으라고 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계2:7,11,17,29,3:6,13,22). 성령께서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가 아니라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시고 계심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시는 분 역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이 성령의 작품이란 사실을 이미 증거 한 적이 있습니다. 주의 대언자들은 모두 성령이 임해서 대언을 했습니다. 이는 단지 성령의 영감이나 감동을 받은 정도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직접 주의 영을 대언해 말했습니다. 다윗은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주]의 영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니 그분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삼하23:2). 성령은 주의 영이시며, 곧 주님 자신이십니다. 삼위일체를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성경 곳곳에 드러난 이런 증거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은 주의 영을 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은 구약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신약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말하기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으니 이는 너희 생각 속에 일어나는 일들을 내가 다 알기 때문이라.](겔11:5). 에스겔은 분명히 “[주]의 영께서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라고 증거 했지만 곧 이어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고 첨언합니다. 이 한 구절 속에서 [주]의 영이 곧 주님 자신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가만히 거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소위 신비한 체험을 했다거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나름대로 신언(神言)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영음(영적인 음성,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간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체험을 모두 거부하고 배척하지는 않지만 성경에 근거한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체험은 극히 꺼립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는 분들의 말을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성령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이 수두룩하게 나옵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중에,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때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체험이 성경적으로 정확히 일치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내적 증거와 일치하면 놀라운 체험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은 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임합니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한 설교, 전파, 기도 등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들을 때 역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도 많이 설교되고 있지만 진실로 중요한 한 가지는 여러분이 성령이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제대로 듣는 것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계2:7,11,17,29,3:6,13,22). 성령은 교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당연히 성도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죄인들에게도 선포합니다. 문제는 들을 줄 아는 귀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면 여러분의 삶은 많이 변화되었을 것입니다. 주일에 맥없이 와서 앉아 있다가 힘없이 돌아가는 그런 삶의 반복은 없을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자들이 때로 영화관에서 영화 한 편 보고 나오는 사람들보다 더 반응이 없는 것은 그들이 아무 것도 듣지 못했음을 몸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오기 전에, “오늘 성령께서 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세요. 깨닫는 마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와야 합니다. 이 설교는 누구를 겨냥한 설교인가? 이런 분석을 하는 사람은 지금 마귀가 그 마음 속에 설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듣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을 향해 하는 설교입니다. 오늘은 누구를 엄청 공격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오늘도 나를 작살내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듣는 대신 ‘음성 변조’에 능한 마귀의 음성을 듣고 일어납니다. 설교자는 여러분의 귀에 설교하지만 그것이 마음에 전달될 때는 수십 번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누가 말씀해 주는가? 에 따라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령이 내 마음에 말씀해 주시는가? 마귀가 내 마음에 말씀해 주시는가? 누구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가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의 책임입니다.
사도행전 2장과 7장에는 동일한 성령 충만을 받고, 강력한 설교를 했지만 결과는 정 반대로 나타난 기사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3,000명을 구령하고 침례를 주었지만 스데반은 한 명도 구령하지 못한 채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둘 다 성령 충만했습니다. 둘 다 성경적인 설교였습니다. 듣는 사람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이한 결과가 나왔습니까? 청중이 어떻게 들었는가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동일한 내용, 동일한 십자가와 부활, 동일한 죄를 책망했지만 한 쪽은 들었고 한 쪽은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들은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성령의 음성을 듣지 않았던 사람은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잭 하일스 목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할 때쯤 어떤 교회에서 청빙 초청이 들어왔습니다. 교인 100%가 모두 찬성했으니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에 다른 교회에서 청빙 초청이 들어왔습니다. 교인들이 투표해서 한 표 차이로 간신히 당신을 초청하기로 결정 났으니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어느 교회를 가야 하겠습니까?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주일에 설교를 듣는 중에 목사님이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비논리적인 일도 하기를 원하십니다’란 말을 했습니다. 잭 하일스 형제는 이 말씀이 성령께서 자신에게 주는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표 차이로 자신을 초청하기로 한 교회에 가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매주 설교나 성경 공부 시간에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성령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는 중에 성령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이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이르시되, 보라, 세 사람이 너를 찾으니](행10:19). 이것은 환청이나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내면의 목소리(inner voice)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들었습니다. 잠시 후에 성령께서 말씀하신대로 정확하게 일치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점괘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령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음성이 아니라 성령의 명이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게 명하사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 하시기에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행11:12).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조명을 받는 일은 사도시대로 모두 끝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있습니다. 앞으로도 말씀하십니다. 성령은 벙어리가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 주님과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전혀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설교하는 목회자에게만 성령 충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듣는 청중들 역시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잘 듣기 위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학식 있는 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하여금 피곤한 자에게 때에 맞는 말을 할 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일깨우시되 나의 귀를 일깨우사 학식 있는 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는도다.](사50:4).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리 말해 주고, 가르쳐도 소귀에 경 읽기 식으로 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말씀을 주시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대언자보다 거짓 대언자들의 말을 더 잘 들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문제는 듣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고를 주어야 그들이 듣겠느냐? 보라, 그들의 귀가 할례받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도다. 보라, [주]의 말이 그들에게는 치욕거리가 되며 그들이 그 말을 기뻐하지 아니하는도다.](렘6:10). 할례를 받지 못한 귀는 마치 귀마개를 한 귀처럼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세미한 음성입니다. 그래서 들리지를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듭 말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시고 참으로 거듭 말씀하시되 사람이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로다.](욥33:14). 그러나 들리지를 않습니다.
스데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는 긴긴 설교를 하였지만 그들이 전혀 듣지 못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청중들의 반응이 분노로 타오르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행7:51).여러분의 귀는 잘 들립니까? 정말 잘 듣는 사람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고 내가 두 번 들은 것이 이것이니 곧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는 것이라.] (시62:11). 이는 귀로 한번 듣고, 마음으로 또 한 번 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음성을 백번도 들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들은 말씀을 다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계속해서 마음속에 울림이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세미하지만 할례 받은 귀와 할례 받은 마음 속으로 들어올 때는 단단히 박힌 못과 같이 들어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 번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하다가, 잠을 자다가, 어떤 때는 샤워를 하다가도 듣습니다. 제가 마음 속에 깊이 생각하는 것들, 고민하는 것들은 거의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능력 있는 일들을 네게 보이리라.] (렘33:3). 주님께 물으면 주님은 대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때로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지만 반드시 묻고, 구한 내용에 대해서 대답을 주십니다. 문제는 구하지 않는 것이요, 부르지 않는 것이요, 묻지 않는 것입니다.
의인 중의 의인으로 꼽히는 욥을 보십시오. 그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말을 모두 들으시고, 그 음성을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비록 내가 /그분을/ 부르므로 그분께서 내게 응답하셨을지라도 그분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니](욥9:16). 이것은 커다란 불신입니다. 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그리하시고 주께서 부르소서. 내가 응답하리이다. 아니면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옵시고 주께서는 내게 응답하옵소서.](욥13:22). [주께서는 /나를/ 부르시겠고 나는 주께 응답하리니 주께서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원하시리이다.](욥14:15). 욥은 하나님이 직접 응답하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웬일입니까? 주님은 회오리바람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을 부르셨고, 물으셨고, 대답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욥이 한 말대로 다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평소에 말을 하는 것들을 주님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다 들으십니다. 다 기록하십니다. 말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우리끼리 하는 대화라고 해도 주님은 들으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응답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께서 말씀하시되,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거니와 너희가 내 귀에 말한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평소에 여러분이 누구와 누구에 대해서 대화할 때 주의해야 합니다. 뒤에서 끼리끼리 모여서 험담을 하고, 비방을 하고 두려움 없이 떠들 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귀에 말한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 이들은 하나님의 귀에다 대고 말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격론이 붙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부부 지간에 대화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찔림이나 두려움이 임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귀는 청력 테스트를 받아 보아야 합니다.
성령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음성을 들으시고 대답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부르짖고, 묻고, 구하고, 말하면 됩니다. 그 때 주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오 [주]여, 내 목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내게 긍휼을 베푸사 응답하소서.](시27:7). 이는 단지 기도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과 일상적인 대화인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신비주의가 아닙니다. 저는 교회 문제가 자꾸 터지고 사람들이 나가게 되자 주님께 물었습니다. “문제가 뭡니까? 깨닫게 해 주십시오.” 주님의 응답은 금방 왔습니다. “밥에 돌이 몇 개 들어 있어서 그렇다.” 저는 부엌의 전기밥솥 옆에서 이 소리를 들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몇 일 전에는 심야에 라면을 끓이고 있었습니다. 2주째 매일 기도회를 하고, 말씀을 준비하고 개인적인 기도 시간을 따로 또 가지다 보니 몸이 몹시 피곤했습니다. 그 때 개스 렌지에 올려 놓은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은 아직 아무 변화도 없고 조금만 지나면 끓을 것 같은 순간 말씀이 임했습니다. “여기서 불을 끄면 어떻게 되겠느냐?” 물은 끓지 않고 라면도 끓일 수 없습니다. "계속 켜 두면 어떻게 되느냐?" 곧 물이 끓습니다. 저는 성령의 음성임을 즉각 알아 차렸습니다. “기도회의 불을 계속 지피면 얼마 있지 않아서 물은 반드시 끓는다. 여기서 멈추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는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성령의 음성은 생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임합니다.
몇 일 전에는 아들 동주가 초에 불을 붙여서 노래를 부르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조르니까 귀찮아서 동주 엄마가 장식용 초에 불을 붙이고 동주와 제미마는 즐겁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는 잠깐 그 장면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말씀이 임했습니다. “심지를 태우지 말고, 심지를 타고 올라온 기름을 태워야 한다.” 이것은 성령의 음성이었습니다. 심지를 태우면 몇 초도 타지 못하고 꺼져 버립니다. 심지에 묻어 있는 기름이 타면 심지는 타지 않습니다. 기름이 공급되는 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 때 저는 몇 주 전에 암송했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유니콘의 뿔같이 높이시리니 내가 신선한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으리이다.](시92:10). 말씀이 계속 연결되었습니다. “내 안에 기름부음만 계속된다면 등불을 타오르게 할 수 있겠구나”(눅12:35). 주님께서 등불이 어둡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셨는데(눅11:35) 기름부음을 받아 일을 해야겠구나! 란 깨우침이 있었습니다. 내 몸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내 몸은 심지처럼 내어 드리고, 타는 것은 성령의 기름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작은 사건에서 늘 말씀해 주시고, 음성을 주셨고, 저는 들었습니다. 말씀과 정확히 일치하는 진리였기에 의심하지 않고 성령께서 나의 마음에 말씀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가 장황하게 최근 제가 겪었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성령의 음성이 있고, 대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음성을 알아 들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나의 고난의 날에 내가 주를 부르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시86:7). 주님은 화답하십니다. [그가 나를 부르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고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91:15). 여러분은 자녀를 키워보셨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귀는 항상 자녀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어디에서 자기 아이 우는 소리, 넘어지는 소리가 나면 얼른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귀는 여러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아이가 커가면서 달려가는 빈도는 점점 적어집니다. 아이는 이제 자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다 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내가 고통 중에 [주]께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118:5). 이것은 다윗의 간증입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기도한다는 말을 쓰지 말고 “부르짖었다. 불렀다. 물었다. 구했다” 등과 같은 일상용어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기도했더니란 말 대신에 자신이 평소에 쓰는 그대로의 용어를 쓰듯이 여러분도 주님과 이런 대화를 하십시오. 그런 용어들이 모두 신학적 용어는 아니지만 성경적 용어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오늘은 제가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 구했더니, 주님께 물었더니, 주님께 부르짖었더니....등은 얼마나 친숙합니까? 그 때 주님은 응답하십니다. [내가 부르짖은 날에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기력을 주사 내 혼을 강하게 하셨나이다.](시138:3). 주님은 마음속에 깨우쳐 주십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자녀들과 대화를 하듯이, 친구들과 대화를 하듯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과 대화를 하십니다. 일방통행 식의 지시와 명령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란 것도 사실은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간청, 간구, 중보 등이 모두 무엇인가를 아뢰고, 알려 드리는 대화입니다. 성령께서도 대화를 즐기십니다.
이제 다시 성경 속의 성령에 대해서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성령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자 곧 성령께서 하신 말씀을 분명히 증거 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동의하지 아니하고 떠날 때에 바울이 한 마디 말을 하되, 성령님께서 대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우리 조상들에게 잘 말씀하셨도다.](행28:25). 대언자들에게 주의 영이 임하고, 주의 말씀이 임했던 것은 모두 성령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외에도 우리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수없이 목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는 너희가 마땅히 무슨 말을 할지 성령님께서 그 시각에 너희에게 가르치실 것임이라, 하시니라.](눅12:12). 성령님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정확하게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와 복음으로 인해 재판받거나 심문을 받을 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령님께서 해야 할 말을 가르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교회가 사역자를 세울 때도 친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행13:2). 선교사를 세우고, 교회의 감독을 세우는 일은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시고, 친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흔히 강단의 권위, 목자의 권위라고 말할 때 그 권위는 인간적인 leadership이나 Charisma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부르시고, 택하시고, 세우셨다는 성경적 사실에 기인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나니](행20:28). 어떤 이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고, 하나님의 양떼는 하나님이 먹이신다고 말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도록 누군가를 부르시고, ‘감독’으로 세우신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복음 전도자, 목사와 교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따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요, 성령님께서 말씀해 주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을 소명(calling)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교 사역에 모두 관여하셨습니다. 전도자 빌립에게는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때에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르시되, 가까이 가서 이 병거에 합류하라, 하시거늘](행8:29).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아시아에서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이제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다닌 뒤에 성령님께서 아시아에서 말씀을 선포하지 못하게 하시더라.](행16:6).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하다 말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자 결심을 했을 때 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르러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발을 묶고 이르기를, 성령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의 임자를 이같이 묶어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신다, 하거늘](행21:11). 성령께서는 선교 사역의 주체가 되시며,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역시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로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하고, 가르치며 말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고전2:13). 철학 용어나 어떤 전문 용어를 배워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용어나 유행을 타는 현대적 용어들을 사용하지 말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어휘)를 사용해야 합니다. 때로 어떤 분들은 성경의 어휘들이 너무 신학적이고 딱딱하니 현대어로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 변개입니다. 성령이 가르치신 말은 영이요, 생명이지만 사람들이 만든 어휘 속에는 이해와 전달력은 좋지만 하나님의 영감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때로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는 이유로 말씀을 임의로 바꾸거나 대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날도 성령님의 음성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이르시는 바와 같이, 오늘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게 하던 때와 같이 또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頑惡)하게 하지 말라.] (히3:7~8). 여러분은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듣습니까? 설교를 통해서, 성경을 읽을 때, 기도를 하면서, 일상 생활 가운데서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 성령은 증언하시며, 증거 하십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성령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거해 주십니다. 여러분이 이 증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분은 물과 피로 오신 분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요, 물과 피로 오셨고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이시니 그 까닭은 /성/령께서 진리이시기 때문이라.](요일5:6).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
◇ 성령께서는 기도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 신음하며...성령은 묵언(?言) 기도, 침묵 기도가 아니라 말씀을 하시면서 기도하십니다.
◇ 성령께서는 계시해 주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이는 /성/령께서 참으로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기 때문이라.](고전2:10).
◇ 성령께서는 경고하십니다.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딤전4:1).
◇ 성령께서는 증거를 확증하십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나서 내게 이르시되, 기록하라.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께서 이르시되, 그러하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게 하려 함이니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뒤따르리로다, 하시더라.](계14:13). 누군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곧 이어 성령께서 그 증거를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상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귀를 지으신 분이시기에 들으시고, 눈을 만드신 분이시게 다 보시며, 입을 주신 분이시기에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 말씀을 들으시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성령의 교제](빌2:1)는 저절로 가능해 질 것입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 귀로 들리는 설교자의 육성을 성령을 통해 마음에 들리게 될 때 잠자던 영혼은 깨어나고, 교회와 인생에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미리 피할 수 있게 되며,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많은 영적인 복들을 충만하게 경험하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계속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육에 속한 귀, 육신에 속한 마음은 설교자의 설교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결코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거듭 말해 주셔도 알지 못합니다. 반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셔도 두 번 듣는 그런 민감함이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영의 일을 받지 못합니다.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영에 속한 사람이 되지 못할 때 이해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이들은 이해는 잘 못하는 대신 오해는 너무 잘합니다. 깨닫지를 못하는 대신 왜곡하는 데는 전문가를 능가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들을 귀를 주시고, 깨닫는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