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엡5:18
요절: 엡5:18
성령으로 가득 채움을 받으라는 것이 성경의 명령입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성령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過度)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이 대조적으로 사용되어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성령 충만과 술 취함은 매우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술을 한 잔, 두 잔 마신 것과 많이 마셔서 완전히 취한 상태는 상당히 다릅니다. 한두 잔 마시다가 약간 더 마셔서 취기가 올라오고, 입에서 냄새가 나고, 기분이 막 좋아지는 상태가 됩니다. 술을 조금 마신 사람은 표시가 나지 않을 수 있지만 술에 취한 사람은 금방 표시가 납니다. 일단 냄새가 납니다. 마찬 가지로 성령이 충만하지 않는 사람은 표시가 나지 않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동합니다. 술을 한두 잔 마신 사람은 말을 제대로 하지만 술에 취한 사람은 의식과 의지의 통제를 벗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충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대로 의지의 통제를 받아 말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의식과 의지의 통제를 벗어나 담대히 말합니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전파했을 때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술에 취한 것과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매우 비슷합니다. spirit은 영입니다. 술 취함도 spirit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가? 술로 충만한가? 어쨌든 이 둘은 우리 속에 채워지기만 하면 뭔가 일을 냅니다. 주님께서 술취함과 성령 충만을 댓구로 사용하신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술로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식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둘째, 술로 충만한 사람은 평소에 지니지 못한 담대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소심함이나 두려움을 벗어 던져 버리고 담대해집니다. 사람들 앞에서나 평소 두려워했던 사람 앞에서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파합니다.
셋째, 술로 충만한 사람은 술로 인해 자신의 삶과 가정의 생활이 큰 영향을 받습니다. 매일 술로 충만한 사람들의 가정은 온전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성령으로 인해 자신의 삶과 가정의 가족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습니다. 술을 마시지만 가정이 평안한 것은 술을 덜 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가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은 아직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넷째, 술로 충만한 사람은 또 다른 술친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과 늘 어울려서 또 다시 채움을 받습니다. 내가 친구에게 영향을 주어서 술로 채워주거나, 다른 친구가 멀쩡한 나를 술로 채워주어 함께 술로 충만히 채워집니다. 술 못 마시면 술고래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또 다른 성령 충만한 친구를 만듭니다. 서로 서로 교제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성령 충만한 사람과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섯째, 늘 술에 취해 있는 사람은 그 주변의 사람들이 그에 대해서 잘 압니다. 마찬가지로 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그 주변 사람들이 그를 잘 알게 됩니다. 술 주정뱅이가 술을 먹지 않고 맨 정신으로 있으면 주위에서 놀랍니다. “어, 오늘은 술 안 마셨네.” 이렇게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늘 성령 충만한 성도가 전도를 하지 않거나 딴 짓 하고 있으면 주위에서 더 놀랍니다.
여섯째, 술에 취하는 사람은 단골 술집이 있습니다. 진정한 술꾼은 돈이 없어도 술을 마실 단골 술집이 있어서 거기에서 가득 채움을 받습니다. 자신이 늘 가던 술집이 이사를 가거나 문을 닫으면 매우 아쉬워하고 안타까워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늘 성령으로 채움을 받는 자신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교회에서 말씀으로 채움받고, 성령으로 채움받습니다.
일곱째, 술에 취한 사람의 말은 보통 사람들이 잘 알아 듣지 못합니다. 같이 술이 한 잔 들어가야 알아 듣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말씀, 설교는 성령이 없는 사람은 잘 알아듣지 못합니다.
맥주 한두 잔 음료수처럼 마시는 사람은 술기운을 빌어서 무엇을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괜히 음주 운전했다고 걸려서 벌금이나 냅니다. 성도가 성경 한 두 구절 외운 것으로는 기독교인 흉내만 내는 것으로 욕을 먹을 뿐입니다.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으로 살지 못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안에 내주하시며 영원히 거하십니다.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신다는 것이 성령 충만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는 타이어에 바람이 팽팽하게 가득 차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컵에 물이 가득 들어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성령이 있다는 것과 가득 차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성령으로 채움을 받으라는 것은 가득 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충만(充滿)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세상적인 예가 술 취함입니다. 술은 입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가서 정신을 혼미하게 하며, 몸을 통제합니다. 반면 성령은 영을 가득 채워서 정신을 맑게 하고, 우리의 몸을 통제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해지는 것은 단 한 번의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4에서 베드로는 성령 충만했지만 4:8에서 다시 충만했고, 4:31에서 또 다시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성령으로 가득 채워지는 일은 지속적이며, 일상에서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술에 취하려면 술을 많이 마시면 됩니다. 성령으로 채움 받는 방법 역시 동일합니다. 성령을 많이 마시면 됩니다. 성령의 물을 마음껏 마시면 성령으로 채움을 받게 됩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너는/ 네 물 저장고에서 물을 마시며 네 우물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네 샘들이 널리 퍼지며 여러 거리에서 강물이 되게 하되] (잠5:15~16)라고 합니다.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누구든지 와서 마시면 됩니다. 값없이 마시면 됩니다. 주님은 모든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시며, 초청하십니다. 성령을 물처럼 마시라고 하십니다. 술을 마시지 말고 성령을 마시라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으로 채움을 받아 성령에 취하십시오. [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고 와서 포도즙과 젖을 사라.] (사55:1). 성경에서 물, 샘, 강은 일반적으로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은 돈을 내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누구나 와서 마실 수 있습니다. [그 명절의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이 말한 것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요7:37-38).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은 와서 마시는 것입니다. 배가 터지도록 마십시오. 그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은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며, 사모하고, 목이 마르도록 갈급해 하는 혼들에게 주어집니다. 물이 말라 버린 샘이나 가뭄에 물이 바닥이 난 호수나 강을 본 적이 있습니까? 고기들은 죽어서 냄새를 풍기고, 각종 오물들이 다 드러납니다. 강물이 넘칠 때는 아름다웠던 모습이 물이 없으면 흉하기가 그지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은 성령이 충만할 때만 인간다운 아름다움이 있지 성령이 소멸되고, 말씀이 바닥나면 사역자라 하더라도 마귀적인 모습만 나옵니다. 강물에는 물이 유입되는 원천지가 있습니다. 그것을 수원(水源)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라 버리면 강도 마릅니다. 우물도 마찬가지고, 호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에게 이런 수원지(水源池)는 우리 주님 자신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샘에 물을 주시고, 강물이 흐르도록 하시는 분은 주님이 물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보십시오. [이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음이니 곧 그들이 생수의 샘인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물 저장고들을 판 것인데 그것들은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저장고니라.](렘2:13). 생수의 샘을 버리고 물 저장고(호수)를 팠다면 이는 무엇인가 큰 착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꾸준히 공급해 주시는 공급자를 버리고 스스로 독립하겠다고 하면 그는 현명한 자가 아니라 바보입니다. 누군가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교회 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가정생활, 학교생활, 사업 터를 잘 꾸리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저장할 저장고를 파는 것이 아니라 생수의 샘으로부터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채움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 모든 생활의 비결입니다. 생수의 샘인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물을 마시지 않고 세상 지혜와 사람들의 조언과 자기 명철을 의지할 때 그는 생수의 샘을 버리고 스스로 물 저장고를 파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더 좋은 직장, 더 나은 삶, 그 무엇을 위해 생수의 샘을 버리고 스스로 물 저장고를 파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방법을 찾고,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방법은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환경을 바꾸고, 남을 바꾸는 것보다 자신이 바뀌는 것이 더 낫습니다.
주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생수의 근원이란 생수이신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란 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시고, 채우십니다. [오 [주]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여, 주를 버리는 자들은 다 부끄러움을 당하며 나를 떠나는 자들은 땅에 기록되리니 이는 그들이 생수의 근원이신 [주]를 버렸음이니이다.](렘17:13). 생수의 근원을 버린 채 생수를 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주님은 비를 내려 주시듯이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는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부어 주며 마른 땅에 큰 물들을 내고 내 영을 네 씨에게 내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줄 것임이니](사44:3).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이 목이 말라 기갈이 들리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부르셔서 마시라고 하십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다 이루어졌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내가 목마른 자에게 생명수의 샘에서 값없이 주리라.](계21:6). 얼마나 간단한 일입니까? 주님은 생명수의 샘에서 물을 주시고, 우리 안에 영원히 솟아오르는 샘을 주십니다. 자격 요건이 없습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하시더라.](계22:17).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방법은 와서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라, 오라 초청하십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이 샘의 근원은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왕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정결한 강을 내게 보여 주니라.](계22:1).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은 사도들이나 대언자들이나 위대한 부흥사들이나 받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누구든지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성령을 간구하며, 성령 충만을 갈구하고 있습니까? ‘믿는 것으로 족하다. 더 이상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사람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 보지 않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채움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더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눅11:1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을 언급하는 구절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직 성령으로 채움 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모른다는 것은 아니다’란 뜻입니다. 영적 세계에는 ‘모른다. 불확실하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면 확실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약 2달간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나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내가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고 증거했습니다. 저도 제 안에 무슨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또 네게 [주]의 영께서 임하시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대언을 하고 다른 사람으로 변하리라.] (삼상10:6). 성령이 임했을 때 사울은 다른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들은 모두 위대한 전도자요, 능력 있는 주의 일꾼으로 변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완전히 변했습니다. 성령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2개월이 지나고 입시가 가까워 오면서 교회 집회를 소홀히 하고, 목사님의 권면을 몇 가지 불순종하면서 성령이 점점 소멸되어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후로 저는 그 때처럼 성령이 충만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다 선교회에 가서 말씀을 공부하면서 그 해 여름 수련회에서 다시 한번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강도가 약했습니다. 이는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다 회개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회개의 소감도 발표했지만 하나님 앞에 헌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사법 고시나 외무 고시를 공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시 공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는 선교사로 헌신할 것처럼 말하고, 뒤에서는 딴 생각을 품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저희 선교회에는 교수도 많고, 판 검사, 의사도 많아서 더욱 이런데 욕심을 부렸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성령을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너무나 영이 갈급해지고, 답답해서 주님께 성경을 더 배우고 공부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신학도 배웠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을 받지 못했습니다. 책도 읽고, 전도도 하고, 신학도 하고, 열심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했지만 저는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유익하고 좋은 책도 몇 권 번역했습니다. 전국 순회 설교도 했습니다. 전라도, 경상남도 골짜기에까지 가서 거리 설교도 해 보았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을 배울 때 머리는 확 깨이는 체험이 있고, “이것이다!” 강한 확신도 있고, 목회에 대한 소명도 받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적은 없습니다. 제가 성경에서 가장 갈급하게 체험하고 싶었던 구절은 요한복음 4:14절이었습니다.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솟아나는 우물이 되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하리라.](요4:14). 솔직히 고백하건데 저는 이 구절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설교해 줄 수 있는 설교자를 10년 이상 찾았습니다. 인터넷에서, 설교집에서, 남의 교회 설교에서도 늘 이 본문의 설교를 제일 먼저 찾아서 들어 보곤 했지만 제 안에는 결코 목마르지 않는 샘은 없었습니다. 저는 늘 목이 말랐습니다. 주님께 이 구절을 들이 밀며 참으로 많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해결함을 받지 못하고, 이 문제를 그대로 안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 지식은 가르칠 수 있었지만 열매를 맺는 성도를 양육해 내지 못했습니다.
제 안에는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성취에 대한 열등감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명문대를 나오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그럴듯한 무슨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나 자기 앞에서나 내세울 것이나 자랑할 만한 것도 없고, 누구처럼 교수라도 하다가 목회를 해야 말에 씨가 먹힐 것 같고, 솔직히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제 친구들이나 선배들은 미국 가서 제일 먼저 박사 학위부터 따라고 충고합니다. 그런데 사정이 학위는 고사하고 비자 문제조차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꼴 같지도 않는 교인들에게 무시 받을 때면 정말 기분이 더러웠습니다. 저는 열등감, 비교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절대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이것은 저의 체험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겉모습은 늘 교만하고 잘난체하는 것으로 드러나는데 킹제임스 성경 100독을 해도 그는 성령 충만하지 못할 것임을 장담합니다. 저는 이곳에서도 지지라도 못난 몇 사람이 잘 난체 하느라 성령을 소멸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저의 옛 모습입니다. 열심을 부리고, 열정을 불태우지만 그것은 인간적 열정이지 성령 충만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4년 전 미국에 왔을 때도 저의 목마름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습니다. 생수의 샘이 열린 것은 2년 전 일입니다. 그 때부터 모든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사라졌습니다. 교회도 성도들, 제 가족들은 물론이요, 제 자신도 제 눈에는 아주 작게 보였습니다. 주님 한 분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이 이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 이전보다 훨씬 더 크고 강한 능력을 부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기도합니다.
올해 성령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저는 그동안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면서 성령이 하나님이시란 것과 주님이시란 사실에 대해서 매우 소홀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는 비단 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요, 모든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거의 모든 신자는 성령을 받았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주인 노릇을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의지를 무시하고, 눌러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완전히 억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고 명령했습니다. 불을 꺼뜨리듯이, 풍선의 바람을 빼듯이 그렇게 성령을 소멸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가 보면 아버지는 명목상 가장일 뿐 아내에게 완전히 억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억눌림을 당합니다. 아버지는 아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명목상 하나님이시며, 보호자이시고, 위로자이시지만 그 권위와 권세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존경받지 못한 채로 계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콩가루 집안을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콩가루 교회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는 것은 성령을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인도함을 받고 살라는 것입니다. 마치 현관에 들어 온 손님이 안방으로 들어갈 수 없고, 주방에도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계시기는 하지만 우리 마음을 다 주장하지 못하시고, 지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는 의지를 내어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주인이시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자신을 내어 드릴 때 성령이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여러분은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내어 드렸습니까? 산 제물로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이 성령 충만의 첫 걸음입니다. 여러분의 의지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살고 있습니까? 자기 본위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성령 충만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열매를 맺기 위해서, 마귀를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서도 성령 충만이 필요하고, 설교를 잘 듣기 위해서도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내게 문제가 있고, 가정에 문제가 있고, 교회에 문제가 있고, 어딘가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성령 충만이 죄 없는 완전함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 충만이 만사형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대언자들의 말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회심하고 부흥했던 것은 아닙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그를 돌로 쳐서 죽여 버렸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기록은 어디도 없습니다. 챨스 피니는 말하기를 사람들이 성령 충만의 결과를 제대로 안다면 그는 그날부터 성령 충만을 절대 구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는 성령 충만하게 되면 ‘너무나 행복하고도 황홀한 경험이나 상태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입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아무런 슬픔이나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실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성령 충만했던 사도들과 대언자들이 얼마나 자주 고통과 고난을 당했으며 많은 슬픔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입장에서 볼 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참으로 골칫거리일 수도 있습니다."(Charles Finney).
우리는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침례인 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눅1:15) 엘리사벳 역시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눅1:41). 사가랴 역시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눅1:67). 예수님 역시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눅1:67, 4:1). 사도들과 제자들 역시 성령님으로 충만했습니다(행2:4).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을 통해 말씀이 선포되고, 능력과 기적이 일어났지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 후에 그를 사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주의 일을 수행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성령으로 가득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빈 통과 같습니다. 계속 비어 두면 마귀들이 찾아옵니다. 말씀으로 충만해지고, 은혜로 충만해 지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만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기도입니다. [그들이 기도하기를 마치매 함께 모인 곳이 흔들리더니 모두가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니라.](행4:31). 기도를 마쳤을 때 그들은 성령님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이들은 이미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또 경험한 것입니다. 성령 침례와 달리 성령 충만은 날마다 새롭게 받을 수 있습니다. 매 순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을 구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받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되더라.](행13:52). 이들 역시 이전에 성령 충만을 경험했지만 다시 성령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은 계속적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의 원천지라면 우리는 통로입니다. 우리 안에 지속적으로 성령과 말씀이 임해야만 합니다.
성령 충만은 여러 가지 현상으로 드러납니다.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9).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이란 지혜 충만, 기쁨 충만, 은혜 충만, 소망의 충만, 능력의 충만 등 모든 충만함을 말합니다. 나는 현재 빈약함을 느끼고,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것은 단지 느낌이 아니라 현실이요,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보십시오. 성령의 은사들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의 열매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혜와 능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얼굴을 보십시오.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얼굴입니까? 근심과 불만이 가득한 얼굴입니까?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이상한 현상이 지금 이 교회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현재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령 충만입니다. 변화입니다. 우리는 변화 받아야 합니다.
저는 금요일 저녁 기도 모임 때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참석하지 않는 분들을 위해서 한 소절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모압을 보십시오. [모압은 어린 시절부터 편안히 지냈고 자기의 술 찌꺼기 위에 자리를 잡았으며 /사람들이/ 모압을 비우려고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도 아니하였고 모압이 포로가 되지도 아니하였으므로 그 안에 그 맛이 남아 있고 그 냄새도 변하지 아니하였도다.](렘48:11). 오늘날 모압과 같은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닌지 10년이 지나도 변화가 없습니다. 말투, 가치관, 인격, 가족, 교회 등이 항상 그대로입니다. 이것은 신실함이 아니라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성장과 변화가 없는 것은 죄악입니다. 모압처럼 어린 시절부터 편안히 지내고, 여기 저기 옮겨지지 않고, 포로가 되지 않는 그런 생활을 지속한 사람들은 변화가 없습니다. 일상의 반복만 있을 뿐 성장도 변화도 없습니다.”(부흥90-첫날 설교에서).
1년 전이나 2년 전이나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은 고사하고 그 비슷한 것으로도 채움 받지 못한 채 살아가다 결국 바닥을 드러낸 것입니다. 가뭄에 연못의 밑바닥이 드러나고, 강물이 말라 밑바닥이 드러나듯이 처음에는 킹제임스 성경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기쁘게 왔지만 매주 생수의 강물이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그 안에 없는 관계로 다 말라 버렸습니다. 빨리 마른 사람은 1년 오래 가는 사람은 약 3년 정도입니다. 말라 비틀어져 버려 이제는 바닥이 다 드러났습니다. 믿음의 바닥이 드러났고, 인격의 바닥이 다 드러나 버렸습니다. 말씀으로 가득 채움받지 않고, 성령으로 가득 채움 받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인간성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모두 채움 받도록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도 채움을 받지 못하면 조만간 다 바닥을 드러낼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떠난 사람들보다 인간성이 좋고, 믿음이 좋아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뭔가 남아 있고, 견딜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성령으로 가득 채움받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결국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하는 데만 성령 충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에서는 설교를 잘 듣기 위해서도 성령 충만이 필수적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한 성도는 성령 충만한 설교가 귀에 거슬리고, 마음에도 거슬리며, 열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채움을 받으면 말씀의 은혜는 더욱 넘쳐나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십시오.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성령으로 채움을 받지 못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줄 아는 것 까지도 빼앗기게 됩니다. 무엇이든 풍성하게 받아서 넘치게 되셔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고, 말씀으로 충만하게 되고, 은혜로 충만하고, 위로가 충만하고, 확신이 충만하고, 은사가 풍성하고, 열매가 넘치는 그런 삶을 살아 보십시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過度)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모두 성령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교제 가운데, 성령을 위하여 뿌리는 삶,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는 삶,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등 모두 성령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지 못한 사람의 영은 피가 부족한 몸과 같습니다.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무질서, 분열, 싸움, 상호 비방, 질투와 각종 소문과 유언비어에 시달리게 됩니다. 설교하는 목사로부터 모든 성도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거듭난 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성령으로 충만해 본 경험이 있고, 변화를 경험해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심각한 정도가 아니라 재앙입니다. 성령을 모두 소멸해 두고 방치해 버린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은 바람에 나무 가지가 흔들리듯이 쉽게 분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소망의 하나님께서 믿음 안에서 모든 기쁨과 평강으로 너희를 충만하게 하사 성령님의 권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15:13). 성령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이 없고, 기쁨과 평강이 넘치며, 소망이 넘칩니다. 이런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런 것이 없다면 내가 현재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주님이 성령으로 나를 채워 주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부음을 받습니까?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성경도 읽고 믿습니다. 교회도 다닙니다. 그런데 성령은 있다고 믿고, 말만 할 뿐 있는지 없는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이런 상태의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미 믿는 성도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방법을 일러 주셨습니다. 잠언 1:23입니다.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잠1:23). 주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듣고 돌이키면 주님은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사울 왕처럼 반역자가 되거나 가인처럼 도망자가 되거나 방랑자가 됩니다. 크리스찬 집시들이 되어서 떠돌이 교인이 됩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잠1:23). 이 약속을 붙들고 회개하십시오. 성령께서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입니다. 이미 믿음을 지닌 교회, 믿는 성도들이 들어야 할 음성은 [회개하라!, 내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입니다. 그 때 주님은 성령을 부어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알려 주신다고 하십니다. 회개하지 않는 성도는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책망과 욕도 구분하지 못하며, 꾸짖음과 씹는 것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책망과 꾸짖음도 누구를 까는 것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의사의 메스와 강도의 칼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는 지금 ‘부흥 기도회’를 매일 저녁 열고 있습니다. 모두 동참하셔서, 선포되는 책망을 듣고 돌이키십시오. 성령으로 충만하도록 기도하십시오. 욥처럼 변화를 기다리십시오. [사람이 죽으면 다시 살리이까? 나를 위하여 정하신 시간의 모든 날을 내가 기다리되 변화가 내게 이를 때까지 기다리겠나이다.](욥14:14). 우리에게 변화가 있으면, 가정이 변화가 있고, 가정이 변화가 있으면 교회가 변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지 않으면 여러분과 늘 접하고 있고, 가장 곁에 있는 가족은 변하지 않습니다. 가족이 변화되지 않으면 교회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변화를 받도록 기도합시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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