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엡4:30
요절: 엡4:30
우리는 성령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해 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과의 관계성을 알 수 있습니다. 상관이나 사장에게 대하는 것과 동료를 대하는 것과 부하를 대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주인을 대하는 것과 가족을 대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때로 우리는 전혀 낯선 사람을 대할 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시하거나 무관심할 수 있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 때 우리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에 대해서 바르게 알아야 우리는 성령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을 수 있고,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그 안에 성령이 내주(內住)해 계십니다.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믿는 자들에게 보내 주신 약속이며, 위로자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이며, 상담자이시며,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합당한 경배를 드리도록 도우시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 있도록 중보하시며,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주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성령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 없다면 성령과 동거하고 있지만 바른 관계성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집에 어머니가 암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새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줌마라고 부르지도 않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명령했지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한 집에는 살지만 아주 애매한 관계가 계속되었습니다. 새 어머니는 동거(同居)하였지만 결코 어머니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새 어머니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기로 하고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머니 역시 아들로 인정하고 친 어머니 못지않게 잘 대해 주었고 좋은 관계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로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진정으로 아들과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법적으로는 이미 전에 어머니가 되었고, 들어와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존중할 때부터입니다.
오늘날 성도들 역시 성령에 대해서 이와 비슷합니다. 성령과 동거(同居)는 하고 있지만 성령을 내 영과 몸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성령을 대할 때 마치 사이 나쁜 계모를 대하듯 합니다. 그렇다고 성령이 떠나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계시지만 주인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아무 활동을 하실 수 없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주인으로 오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의 자녀들 안에 영원토록 거하시며 가르치고, 인도하며, 훈육하고, 책망하고, 바로잡고, 징계하도록 보내셨습니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는 어머니의 역할을 하십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시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성령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십니다. 여러분이 성령과 동거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인정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분과 깊은 인격적 관계성을 맺어야만 합니다.
저는 이 시간 잠깐 가정에서 자매의 역할, 어머니의 역할과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비교해 드리겠습니다. 이는 자매들이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야 하는가? 란 질문에 충분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는 훌륭한 위로자입니다. 지치고 낙심한 남편에게 아내만큼 훌륭한 위로자는 없습니다. 기(氣)가 꺾인 아이들에게 어머니를 대신할 수 있는 위로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는 위로자 성령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가정에서 기쁨을 줍니다. 어머니가 없는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썰렁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는 교회는 찬바람이 돕니다. 여자는 기쁨을 주는 성령을 예표합니다. 여자는 훌륭한 교사입니다. 자녀들에게 어머니만큼 훌륭한 선생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령보다 더 훌륭한 교사는 없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고, 아버지에게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오늘날 콩가루 집안에 아낙네들은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릅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고, 순종하도록 합니다.
여자는 가정에서 참으로 많은 일을 하지만 별로 감사와 찬양을 받지 못합니다. 일을 해도 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눈에 띄지 않게 일하지만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여자입니다. 이것 역시 성도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과 비슷합니다. 여자가 자기를 드러내느라 남편(아버지)이 드러나지 않으면 그 여자는 어리석은 여자입니다. 남편 대신 자신을 드러내고, 아이를 키우는 대신 자신을 성장시키고 개발하는데 주력하는 여자는 한심한 여자들입니다. 성령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을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현명한 여자는 남편과 자녀들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합니다. 오늘날 이런 역할을 스스로 포기하는 여자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지만 여자는 분명 성령의 예표로서 영광스런 역할이 주어져 있습니다. 남녀평등이니, 여자의 지위를 찾자느니 하는 등의 세상 가르침이 가정에 들어오고, 교회 역시 자연스럽게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성경적 진리를 가리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자매들은 자신들의 성경적 지위와 역할을 분명하게 알고 행하실 때 큰 은혜와 복이 있을 것입니다. 잠언 31장에 나오는 덕스런 여인은 성령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며, 성령은 주님이십니다. 이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성령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창1:2),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창2:7). 성령은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33:4). 이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을 하나님이 아닌 그 무엇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의 주님 되심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3:17). 성령은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아들의 영, 주의 영으로 불리시지만 '그 주님(The Lord)'이십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The Lord)라고 불렀던 것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성령은 삼위일체로서 한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에게 성령은 하나님으로서의 지위와 신성과 인격을 대접받지 못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성령님이 주요, 하나님이시라면 성령은 마땅히 우리의 주와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받고, 섬김을 받고, 찬양을 받고, 감사와 존귀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고 물과 같고, 불과 같다는 식의 그 속성적 묘사로 인해 많은 성도들에게 은사, 능력, 권능 등의 source 정도로 이해되고 마는 것은 교회의 비극이며, 손실입니다. 성령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믿는 성도들의 몸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우리 몸은 성령님의 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볼 때 성령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이시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성령의 전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하건 간에 우리는 성경의 구절과 구절을 비교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믿습니다. 저는 지금 매 시간마다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는 것이 성령에 대해 가장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이며,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하나님 아닌 그 무엇, 그 누구로 규정하고 명명한다 해도 그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성령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 안에 계신 하나님이시요, 주이신 성령님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는 순간 우리는 성령님을 믿고, 순종하며, 경배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들에게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고 죄를 짓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조심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 [/성/령을 억누르지 말라.](살전5:19). 성령은 우리 영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잘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성도들은 자신 안에 계신 성령을 마치 없는 듯이 무시하며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는 자들 가운데 자신 안에 성령이 계심에도 없는 듯이 살고 있거나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 집에 시골에 혼자 사시던 아버지를 모시고 왔습니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집 안에 조용히 계실 뿐입니다. 아들이 내어 준 방에서 조용히 책을 보시고, 신문을 보시고, 가끔 밖으로 산책을 나갔다 오실 뿐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집안에 제일 연장자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존재감이 없습니다. 아들 내외는 직장 일로 바쁘고, 손주들은 학교 다니느라 바쁩니다. 아무도 집에 있는 할아버지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일요일에나 좀 대화를 나누고 의식합니다. 특별한 명절에나 같이 나가서 놀기도 하고 식사 대접도 합니다. 그리고 다시 평일이 되면 할아버지는 외롭습니다. 아무도 말을 걸지도 않고, 의논하지도 않고, 묻고 교제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할아버지의 식사를 챙겨 드리고, 신경이 쓰인다고 귀찮아하기도 합니다. 특히 잔소리를 한 마디라도 들으면 짜증을 내고 성질을 냅니다. 할아버지가 집에 없을 때가 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예를 들어 본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 계신 성령은 마치 시골에서 올라와 계시는 늙은 할아버지 같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성령은 매우 섬세하면서도 지성과 의지와 감성을 모두 소유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자신을 거스리는 말과 생각, 행동 등에 쉽게 억눌림을 당하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육신의 정욕대로 살 때 소멸되고 맙니다. 불이 꺼지듯이 그렇게 꺼집니다. 성령은 물질이 아니지만 마치 바람과 같고, 등불과 같아서 소멸합니다. 성령은 자신을 주인, 하나님으로 믿고 인정하지 않는 성도들의 몸 안에서 별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자신을 제쳐두고 일하는 성도들에게 소외를 당할 때 억눌림을 당하며, 소멸됩니다. 여러분이 성령을 나의 주인으로 합당한 대우를 할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십니다.
둘째, 성령을 슬프시게 하지 말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듯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죄악과 불신, 불순종에 슬픔을 느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救贖)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여러분의 어머니는 자녀들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을 때 슬픔을 느끼듯이 성령님 역시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 동일한 감정을 느끼십니다. 하나님대신 육신을 신뢰할 때, 세상을 사랑할 때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깊은 슬픔을 느끼십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슬프게 해서는 안되는 것과 같이 여러분은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을 슬프시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럽고 추한 생각은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완악한 마음, 악한 생각, 더러운 말, 농담 등이 입으로 나올 때 내 안에 계신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성인 영화관에 앉아 있고, 술집 바에 앉아 있고, 잡지나 뒤적일 때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한 것들에 집착하고 연루되는 모든 일에 대해 슬퍼하십니다.
불경건하고 거룩하지 못한 모든 것들은 주님을 슬프시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오직 너희를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같이 너희도 온갖 행실에서 거룩할지니 이는 기록된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하셨음이니라.](벧전1:15-16). 성령께서는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셨지 우리 몸을 놀이터나 여관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거룩함으로 부르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정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요,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음이니](살전4:7). 부정함에 연루되고, 부정한 것을 보고 만지고 좋아한다면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우리는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었습니다(엡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4). 만약 여러분이 거룩함을 멀리한다면 평생 부모를 슬프게 하는 못난 자식과 같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슬프시게만 할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자녀들을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슬프시게 하는 자녀들을 가만히 내 버려 두시지만 않습니다. 매질을 해서라도 돌이키게 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진실로 그들은 잠시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시나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히12:10). 여러분에게 지금 힘든 일들이 있다면 몸과 마음속에 있는 부정함을 제거하시려는 주님의 단련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의 징계는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믿고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대표하는 성품은 단연 ‘거룩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주님의 성품을 따라 거룩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따를지니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 거룩함을 추구하는 자들은 성령을 기쁘시게 하지만 부정함, 불경건, 불의를 사랑할 때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셋째, 성령을 괴롭게 하지 말라. [그러나 그들이 반역하여 그분의 거룩한 영을 괴롭게 하였으므로 그분께서 돌이키사 그들의 원수가 되어 친히 그들과 싸우셨느니라.](사63:10). 반역은 성령을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반역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반역은 성령을 괴롭게 하는 공격적 행위요, 가학적인 일입니다. 어느 나라나 형법 중에 가장 크고 무거운 죄는 반역죄입니다. 왕조 시대에는 반역죄는 9족을 멸했습니다. 반역이란 믿고 순종해야 할 백성이 덤벼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왕은 원수와 싸우지 못하고 반란자들을 먼저 진압해야 합니다. 반역에는 자식도 없습니다. 역사를 보면 반역에 연루된 자는 친족이 아니라 그 자식이라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반역했을 때 원수들과 싸우신 것이 아니라 반역자들과 싸우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나는 불신과 불순종한 적도 있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잘 못한 죄는 있지만 주께 반역한 적은 없다고 안심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반역은 역천(逆天)의 죄입니다.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그런 죄를 도모한 적도 없고, 동참한 적도 없다면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역의 의미를 좀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 다른 제단을 쌓는 것을 반역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함으로써 ‘반역하는 자녀들’이란 선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주님대신 맘몬이란 우상을 숭배할 때, 탐심이란 우상을 섬길 때 여러분은 하나님을 반역한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법을 떠나 다른 법을 따를 때 그를 반역자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따르는 법이 여러분의 주인입니다. 미국 법을 따르면 미국 시민이지만 러시아 법을 따르면 러시아 시민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따르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령의 법을 따르면 성령에게서 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죄의 법, 사망의 법을 따르면 그것이 바로 반역입니다. [이는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녀들이요, [주]의 법을 들으려 하지 아니하는 자녀들이니라.](사30:9).
여러분은 성령께 반역한 죄가 없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장 괴로워하는 일이 반역임을 기억하십시오. 이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거슬리고 반역할 때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대언자들을 거역하고 그들을 죽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자, 그를 죽이고 그의 상속을 가로채자, 하고 이에 그를 붙잡아 포도원 밖으로 내쫓고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오면 그 농부들에게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그 사악한 자들을 무참히 멸하고 자기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주리라, 하니] (마21:38~41). 무참히 멸하십니다. 유산을 노리고 아버지를 죽이는 일만이 반역이 아닙니다.
매사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성령님을 의지해서 계획하고 행하는 일이면 주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왕따 시켜 버리고, 성령님의 존재나 계획 등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신의 계획이라면 그것은 반역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화 있을진저, 반역하는 자녀들이여! 그들이 계획을 세우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덮개로 덮으나 내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니 그들이 죄에 죄를 더하는도다.](사30:1). 여러분이 이런 반역을 할 때 성령께서는 크게 괴로워하십니다. 자녀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반역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을 낳아주신 성령께 반역한다는 것은 시대의 패륜아(悖倫兒)라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괴롭게 하는 일은 언제입니까? 자식 때문에 괴로워 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부모를 괴롭힌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과거나 현재를 돌아보시면 이 진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 친구들이나 부모를 괴롭게 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괴롭게 한 적도 있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반역자들을 원수로 여기시고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넷째, 성령을 무시하지 말라. 누구나 무시를 받는 일은 불쾌합니다. 존귀와 합당한 영광을 받으셔야 할 성령을 무시하는 일은 오늘날 교회가 흔히 저지르는 죄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정함에 이르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요, 거룩함에 이르도록 부르셨음이니 그러므로 무시하는 자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자신의 거룩한 영을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니라.] (살전4:7~8). 우리가 거룩함을 버리고 부정함에 이를 때, 자신을 더럽힐 때 성령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생각합니까? 주님은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들이 우리를 더럽힌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잔과 대접은 물론이요, 손과 발을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음식을 정결하게 먹었습니다. 누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날에는 눈을 부라리며 엄중하게 꾸짖고 혼을 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을 정말 더럽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무지(無知)했습니다.
①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色慾), 악한 눈, 신성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기 때문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0~23). 진정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속에서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란 점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령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② 우리를 더럽히는 또 한 가지는 우리의 혀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법의 세계라. 이와 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자기도 지옥 불로 불타느니라.](약3:6). 혀를 잘못 쓰면 그는 온 몸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성령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③ 우리를 더럽히는 또 한 가지는 쓴 뿌리입니다. [/너희는/ 부지런히 살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하고 쓴 뿌리가 돋아나 너희를 괴롭게 하거나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더럽게 되지 않도록 할지니](히12:15). 쓴 뿌리는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모두 더럽히는 강한 전이성(轉移性)을 띠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쓴 뿌리는 성령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④ 마지막으로 신약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것은 음행입니다. [결혼은 모든 것 가운데 존귀한 것이요, 잠자리는 더럽히지 말아야 하거니와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리라.](히13:4). 구약 성도들에게 금, 은, 돌, 나무로 만든 우상 숭배만큼 흔한 죄가 신약 성도들에게는 음행입니다. 영화, 잡지, 인터넷, 신문, 소설, 만화 등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음행이야 말로 몸과 혼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몸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음행은 몸 안에다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음행은 성령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죄를 지을 때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은 무시를 받게 되고, 멸시를 당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주요, 하나님으로 알고 믿는 다면 자신을 더럽히는 일에 연루되지 말아야 합니다.
다섯째, 성령을 제약하지 말라. [오 너 야곱의 집이라 이름하는 자야, [주]의 영이 제약을 받으시냐? 이 일들이 야곱이 행한 바냐? 내 말들이 곧바르게 걷는 자에게 선을 베풀지 아니하냐?](미2:7). 성령은 그 지혜와 능력과 모든 면에서 한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시, 공간을 초월하십니다. 성령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십니다. 시편 기자가 시편 139편에 주님의 편재하심에 대해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이 주님이 바로 성령님이심을 밝혔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리이까? 내가 주의 눈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주께서 거기 계시오며 지옥에 내 침상을 펼지라도, 보소서, 주께서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아침의 날개들을 취하여 바다 맨 끝 지역들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7-10). 성령은 제약을 받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어디에 거한다 할지라도 성령은 거기에 계십니다. 바울이 난판한 배 속에 있을 때 그곳에 나타나신 분은 주의 천사였습니다. 엘리야가 로뎀 나무 아래에서 홀로 있을 때 음식과 물을 가지고 찾아오신 분도 주의 천사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불타는 용광로 속에 있을 때 그 불길 속에 심방오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여러분이 있을 수 있는 곳에 주님이 오실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이요,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600만의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가?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들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셨습니다.
켄터키 주 플랭크푸트 시에서 탄광 매몰 사건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죽고 9일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광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헬멧에는 석탄 조각으로 쓴 글씨가 있었습니다. 기자들이 달려들어 무슨 글자인가 보았는데, “나는 죽었노라. 구원받았노라”는 글귀였습니다. 한 기자가 9일동안 매몰된 탄광 속에서 무엇을 했는지 묻자 대답하기를, “우리는 노래를 불렀소” 라는 놀라운 답변을 했습니다. 무슨 노래를 불렀느냐고 묻자, “놀라워라, 주 은혜로 날 구원했으니, 내 잃어버린 생명을 이제야 찾았네, 앞 못보고 캄캄한 곳 갇혀 살았지만, 나 주님 만나는 순간, 나 보게 되었네.” 이들이 지하 깊은 탄광 속에서 흑암과 추위와 배고픔과 주님을 만나 찬양을 불렀던 것입니다. 주의 영은 지하 수백 미터의 매몰된 탄광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해 주고, 참 빛을 주셨던 것입니다. 주의 영은 제약이 없습니다. 주의 말씀 역시 제약이 없습니다.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이 복음으로 인하여 내가 행악자처럼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당하였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느니라.] (딤후2:9). 자신은 매였지만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주의 영이 제약을 받지 않듯이, 주의 말씀은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감옥에서도, 병원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살아 역사하며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제약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불신자요, 불신의 환경에 살고 있다 할지라도 주의 영은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주님을 제한하고 제약했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뒤로 돌이켜 하나님을 시험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제한하였도다.](시78:41).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제한하고 성령을 제약하는 일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사고와 이성과 경험의 틀 속에서 주님을 제한하게 됩니다. 주님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고 권능이 크시며 그분의 명철(明哲)은 무한하시도다.](시147:5). 무한하시고, 제한이 없으신 주님을 묶어 버리는 것이 바로 불신입니다.
여섯째, 성령을 거역하지 말라.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행7:51). 말씀을 믿지 않을 때 성령을 거역하는 자가 됩니다. 주의 대언자들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믿지 않는 일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를 제대로 듣지 않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죄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설교 시간에 졸면서 말씀을 비판적으로 듣고, 설교를 씹습니다(backbite). 말씀에 대해 쓴 뿌리를 품고 불순종하는 것은 성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침례인 요한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은 바리새인들을 요한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요, 성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에게서 침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므로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거절하더라.](눅7:30). 전도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일 역시 성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일은 반역입니다. 불신이야 말로 성령님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일곱째, 성령을 시험하지 말라. 누구에게 의심받는 일이나 시험받는 일은 매우 기분 나쁜 일입니다. 더욱이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험을 받을 때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가 서로 합의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묻은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은즉 또한 너를 메고 나가리라, 하니] (행5:9). 양심을 속이고 위선을 부리는 일은 성령을 시험하는 죄입니다. 아나니야와 삽비라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의 믿음과 헌신을 보고 그와 같은 영성과 존경을 받고 싶어 위선과 속임수로 흉내를 내었는데 이는 사람을 속인 죄가 아니라 성령을 시험한 죄였습니다. 성도들이 흔히 짓는 위선과 거짓, 사람들 앞에 높임을 받고자하는 것이 성령을 시험하는 죄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너희가 맛사에서 그분을 시험한 것같이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신6:16)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이대며 시험해 보게 했지만 주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 또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7b). 성령은 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나 성령을 시험하는 것이나 동일한 죄입니다.
여덟째, 성령을 모독하지 말라.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하리라.](눅12:10). 주님을 믿지 않고 주님의 일을 사탄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이 죄는 바리새인들이 지었던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부르는 것은 다 성령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이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모든 죄가 용서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 죄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되며, 믿지 않는 죄까지 추가 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은 사람은 성령을 대적하여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은 없습니다.
아홉째,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여러분이 자녀를 걱정하고 근심하듯이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항상 마음 속으로 잘못하여 내 길들을 알지 못하였다, 하였노라.](히3:10). 주님은 걱정도 없고, 항상 웃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자녀들이 주의 길을 알지 못하고 잘못하고 범죄 할 때 근심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로 인해 근심하는 근심과 동일한 근심을 주님께서도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자녀를 믿지 못해서 근심하고, 미래를 알지 못해서 근심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런 근심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으로 잘못하여 주님의 길을 알지 못하는 자녀들로 인해 근심하십니다. 얼마나 더 맞으려고 저러나! 하시며 근심하시는 것입니다. 대언자 이사야는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슬프다/, 죄많은 민족이요, 불법을 짊어진 백성이요, 악을 행하는 자들의 씨요, 부패시키는 자식들이로다. 그들이 [주]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분노를 일으키며 뒤로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많이 맞으려 하느냐? 너희가 더욱더 반역하려 하는도다. /너희의/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기진(氣盡)하였으며](사1:4~5). 주님은 때리시면서도 근심하십니다. 그들의 상처 난 부위를 보시는 아비의 심정이 바로 주님의 심정입니다. 주님을 근심케 하는 자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광야의 백성들은 40년간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 40년 동안 주님의 마음은 평안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40년을 근심하셨습니다. [그러면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누구로 인하여 근심하셨느냐? 범죄하여 그 사체(死體)가 광야에 쓰러진 자들이 아니냐?](히3:17). 맞는 자녀의 종아리보다 때리는 부모의 가슴이 더 깊이 멍드는 법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없는 어른들이 애 때린다고 욕하지만 애를 때리는 아비는 사실 자신을 때리는 것입니다. 애를 때리지 않는 부모는 자기를 끔찍이 아끼는 이기주의자들입니다. 주님이 죄를 범하는 자녀들을 때리면서도 근심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열 번째, 성령을 시기하게 하지 말라. [너희는, 우리 안에 거하는 영께서 시기하기까지 간절히 바란다, 하신 성경 기록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4:5). 이 말씀은 간음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을 향해 하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성도가 세상과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일은 영적 간음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불타는 질투로 시기하십니다.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닌 다른 누구, 다른 무엇을 사랑할 때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한 사랑은 질투하는 사랑입니다. [간음하는 남자들과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느니라.] (약4:4).
우리는 구원받는 순간 성령으로 가득 채워집니다. [또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그 성령님을 풍성히 부어 주셨으니](딛3:6). 갓 거듭나는 순간 영이 채움 받지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처음 구원받았던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성령님을 풍성이 부어 주셨고, 하나님의 사랑이 넓게 부어진 체험이 있을 것입니다(롬5:5). 주님은 구원받는 순간 우리에게 영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성령을 슬프시게 하고, 성령을 거역하고, 성령을 근심케 하므로 성령을 소멸시키지 않았습니까? 성령과 동거하는데 만족하지 말고 성령님을 주요, 하나님이요, 주인으로 모시고 순종하며 살기 바랍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며,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은 지혜와 지각, 능력과 명철 등과 같은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면 외에도 어느 누구보다도 섬세한 감수성과 예민한 감정을 지니신 하나님이심을 잘 인지하셔야 합니다.
누구를 슬프게 하는 것,
근심을 끼치는 일, 거역하는 일, 모독하는 일, 멸시하는 일,
반역하는 일, 시험하는 일, 무시하는 일, 제한하고 제약하는 일, 억누르는 일 등은 죄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며, 힘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그렇게
대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례하고도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
모두 성령 안에서 살고 걸으며 성령의 교제와 위로 가운데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성령론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