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엡5:9
성령의 열매(fruit) 중 여섯 번째인 선함(goodness)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성/령의 열매가 모든 선함과 의와 진리 안에 있기 때문이라.)](엡5:9). 성령의 열매는 모든 선함과 의와 진리 안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착하다, 선하다는 개념은 하나님의 의와 표준에 맞추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자신의 기준에 따른 것이거나 사회 통념에 따라 말하는 선(善)함입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주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으리이까? 하니] (막10:17) 물었을 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선함이란 오직 주님께서 하나님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어휘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한 이가 없음을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서로 서로 비교해서 누구는 착하다, 순수하다, 경건하다, 선하다, 의롭다, 거룩하다 는 등의 칭찬을 주고받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들끼리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는 아무도 선한 이가 없습니다.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롬3:12/시14:1). 이것이 주님이 내리신 평가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아무도 의로운 이가 없습니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사람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3:10).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사람이 보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선함을 외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끼리 외치는 소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저마다 자기의 선함을 외치거늘 누가 신실한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요?](잠20:6).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서로 서로 비교해서 스스로를 기준으로 판단하지는 않습니까? 자기들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착한 도둑, 순한 깡패, 양심적인 테러범이란 말도 성립됩니다. 조직 폭력배들은 같은 동료들끼리 “저 녀석은 너무 착하고 순진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 자신을 기준으로 했을 때는 사람을 때리고 패는 정도는 착하고 순진한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극단적인 예인 것 같지만 그 세계는 그 세계에서의 기준으로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합니다. 자신들의 기준에서 양심적이다, 착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추천하는 자들과 감히 한 패가 되거나 혹은 그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오직 그들은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판단하며 자기들 가운데서 자기들을 비교하니 지혜가 없는 자들이로다.](고후10:12).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기준, 성경이 기준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사람을 판단하고 보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자칫 그럴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내 혼아, 네가 [주]께 아뢰기를, 주는 나의 {주}시오니 나의 선함이 주께는 미치지 못하오나](시16:2). 우리는 모두 자신의 선함이 별것 아니며, 자신의 의로움이 모두 더러운 걸레 같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합니다(사64:6).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정확히 직시했습니다.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롬7:18a).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 ‘선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은 지극히 선하십니다. 선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갈5:22, 엡5:9). 선함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성령의 열매 없이 사람들이 스스로 선한 체 하는 것은 위선이며, 가식일 뿐입니다. 때로 철저한 교육과 훈계를 통해서 또는 훈련과 수련을 통해서 절도 있고, 품위 있고, 교양 있고, 고상한 언행을 한다고 해서 그가 선한 사람이란 뜻은 아닙니다. 왕자로 태어나 왕실에서 어릴 때부터 왕도 교육을 받았다고 합시다. 예를 들어 지금 영국 왕실에 가족들이 선한 사람들입니까? 사우디나 요르단이나 태국, 일본과 같이 입헌 군주제의 왕실에서 자란 왕족들은 선한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철저한 종교인들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종교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입니까? 아무도 선뜻 “그러하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좀 더 품위 있게 행동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선함’의 열매를 맺었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선함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보실 때 여전히 “사악하다, 더럽다, 부족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함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것이 주님의 성품이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맺으시는 열매임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리적 지식으로는 아무도 선함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신학적, 종교적 이해를 하고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여러분 안에 사랑, 기쁨, 평강,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과 같은 성령의 열매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 없이 성령에 대해서 토론하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일은 우리에게 그다지 어색한 일도 아닐 정도입니다. 여전히 악함과 불법과 불의 가운데서 [선함]에 대해서 논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기뻐서, 좋아서, 가족 관계이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 한 두 번은 참아 줄 수도 있고, 손해를 보아가면서도 잘 해 줄 수 있습니다. 후일을 기대하면서 선을 베풀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의 열매로서 [선함]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선함]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마5:44). 주님께서 누구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까?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복하거나 저주하거나 짜증을 내거나 피하거나 다른 어떤 방법을 사용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하겠지만 불신자들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의 형제들 간에 다투고, 쓴 뿌리를 품고, 비난하고, 갈등하고, 미워하며, 파당을 짓고, 분열을 일삼는 일이 허다하게 있고, 우리를 진정으로 힘들고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에 내 자신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한다고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럴 때 선함의 열매를 맺은 형제들이 그런 사람들을 향해 사랑하고, 축복하고, 선을 행하고,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자주 보는 한 가지 현상은 형제들 간에 무슨 문제가 터지면 좀처럼 화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만나서 술을 한 잔 마시든지, 터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잘도 해결하는 문제를 형제들이라고 하는 성도들은 좀처럼 용서하고 화해하는 일이 드뭅니다. 원수를 사랑하기는 고사하고 형제도 사랑하지 못합니다.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는 일은 아예 기대할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라는 말씀은 “우리가 천사입니까?”라고 주님께 되물을 정도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맺히는 ‘선함’이란 바로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란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께 “선함”의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구하면 주님은 즉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간구이기 때문에 지체 없이 응답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맺으시는 “모든 선함”이 가득 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즉시 누군가가 여러분을 미워한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싫어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미워하는 형제나 자매나 목사님이나 아니면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선함’의 열매를 맺게 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해 주신 것입니다. “자, 네가 기도하기에 내가 너를 미워하는 자들을 몇 보낸다. 그들에게 선함을 베풀어 보아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인자한 미소,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상으로 품위에게 행동하고 말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려고 결단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일어난 순간에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분 좋게 기도하고, 은혜 충만한 찬양과 성도들과의 거룩한 교제를 한 후에 찾아오는 이런 시험은 마귀가 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기도할 때, 찬양하고 교제할 때 주셨던 마음의 기쁨과 평강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에 대한 응답인 것입니다. 이 점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예배와 기도와 찬양으로 충만했다면 왜 주님께서 충만을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를 향해 다가오는 마귀의 불붙은 화살을 그 충만함으로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선함과 부드러움이 있다면 그것으로 정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향해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거나 반대로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쓴 뿌리를 품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교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선함이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신을 미워하고 폄하하고 저주하고 비판하고 욕하는 자들을 향해 선을 베푸는 것이 성령의 열매로써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 미성숙, 육신적인 성향으로 인해 형제된 성도들을 따스한 형제애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나 적으로 만들어 버린 일이 꽤 많이 있습니다. 20년이 넘는 신앙생활 동안 저와 관계가 멀어진 형제들이 매우 많고, 상처를 주고받은 형제들이 많습니다. 저는 언제나 ‘진리를 말해 주었을 뿐이다.’라며 양심에 별로 거리낌이 없습니다. 설령 상처를 받았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분을 품지 말고 용서하라.”고 해 버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저에게는 아직도 단호하게 저를 용서해 주기를 거부하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 몇은 지금도 어디선가 열심히 저를 험담하고 비방하고 저주하고 욕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주님이 제게 기도 응답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마5:44). 그리고 제 안에 과연 그런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점검해 볼 기회가 됩니다.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원수가 있고,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몇 있다는 것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닙니다. 제 안에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있다면 그들을 진리로 사랑할 것입니다. 복을 빌어 주고, 선을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것이 이전과 달라진 점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는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만나지만 사실은 용서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인 ‘선함’은 그런 자들에게 더 잘 해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의 선하심]은 죄인들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합니다. [혹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함을 알지 못한 채 네가 그분의 선하심과 관대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2:4). 자, 주목해서 보십시오. 주님의 심판이나 공의가 사람을 회개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의로운 심판이 매우 중요하지만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우리는 지옥의 죄인들이 지옥의 고통 속에서도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확인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인도하고 회개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열매인 [선함]으로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날카로운 성경 지식이나 탁월한 언변이나 다른 무엇으로 누구를 인도하려 하면 거의 실패합니다. 이미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오래 참음, 하나님의 친절 등이 드러나 보일 때 죄인들은 회개에 이르게 됩니다.
주님의 선하심이 내 안에 선함이란 열매로 맺힌다면 우리는 놀라운 일들을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선하심이 하는 일들을 살펴 보십시오.
주님의 선하심이 죄인들을 가르칩니다. [[주]는 선하시고 곧바르시나니 그러므로 죄인들을 그 길로 가르치시리로다.](시25:8). 여러분이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을 인도하고 회개케 하는 것은 주님의 선하심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용서와 긍휼이 바로 주님의 선하심입니다. [이는, {주}여, 주께서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이니이다.](시86:5).
우리는 이제 신학적인 지식이 아닌 마음에 주님의 선함을 소유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주님의 선함을 통해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안후에야 선함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오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4:8). 주목해서 보십시오. ‘[주]의 선하심’입니다. 모든 열매가 그러하지만 주체가 분명합니다. 우리의 선함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선함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의 선하심’입니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다면 우리는 그 열매를 맺어서 그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성도들이 겪는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듣고 말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들 자신이 전혀 체험해 보지 못한 것이란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고 말하지만 그들 속에는 십자가를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전혀 마음에 부어진 경험이 없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해서 듣고 말하지만 자신을 향해 주님이 심히 오래 참으심을 보이신 사실에 대해서 별로 체험적이지 못합니다. 기쁨, 평강, 은혜 등등에 대해서 너무나 많이 듣고, 자주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들 안에 그런 것을 체험하고 실제로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가? 하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듣고 말하지만 그들 자신이 맛보고 안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제 삶에서 능력으로 열매로 전혀 드러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는 일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 환란과 시련을 통한 연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기독교란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한 성품과 능력이 나의 소유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시34:8). “맛보고 알지어다.” 이는 체험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인 ‘선함’을 소유하게 됩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선함을 보이시며, 선하심으로 만족케 하십니다. [또 내가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혼을 흡족하게 할 것이요, 내 백성은 나의 선함으로 만족하게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14).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성품입니다. 주님은 악인들에게도 동일하게 해와 비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고, 모른다 해도 주님은 여전히 선하게 대하시고 계십니다. 오래 참고 계십니다. 친절하게 대해 주고 계십니다. 덕분에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 징계가 없고, 심판이 없을 줄로 생각할 정도입니다. 다윗은 노래하기를, [내 평생에 선하심과 긍휼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주]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23:6)라고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을 찬양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우리를 선하게 대해 주시고 계십니다.
①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만족하려면 먼저 주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오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위하여 주께서 쌓아 두신 주의 선하심 곧 사람들의 아들들 앞에서 주를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베푸신 그 선하심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시31:19). 주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위하여 선을 쌓아두시고 베푸십니다. 주님을 신뢰할 때 주님이 얼마나 선하신지 우리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주]는 선하시고 고난의 날에 강한 요새가 되시며 그분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1:7).
②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려면 주님을 기다리고 찾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과 자신을 찾는 혼에게 선하시도다.](애3:25). 주님을 기다리시고, 찾으십시오. 매사에 매 순간에 그렇게 하십시오. 주님은 그런 혼들에게 선하심을 보이십니다.
③ 마음이 깨끗할 때 주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곧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도다.](시73:1). 주님께서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의 물로 자신을 씻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일에 지체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고백하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십니다(요일1:9).
④ 곧바르게 걷는 자들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오 너 야곱의 집이라 이름하는 자야, [주]의 영이 제약을 받으시냐? 이 일들이 야곱이 행한 바냐? 내 말들이 곧바르게 걷는 자에게 선을 베풀지 아니하냐?](미2:7). 말씀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곧바르게 걸을 때 선을 베푸는 주어가 무엇입니까? [내 말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곧 바르게 걷는 자들에게 유익을 미치며, 선을 베풉니다. 말씀을 듣고 공부한다해도 곧바르게 걷지 않으면 말씀이 그 사람에게 유익을 미치지 못합니다. 주님 역시 마음이 곧바른 자에게 선을 베푸십니다. [오 [주]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올바른 자들에게 선을 베푸소서.](시125:4). 우리는 모두 주께서 선을 베푸시는 것을 알고 그것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경험해 본 선함이 아니라면 주님의 선하심에 대한 추억이 없을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일에 주님의 선하심에 대한 간증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그들이 주의 큰 선하심에 대한 추억을 풍성히 말하며 주의 의로우심을 노래하리이다.](시145:7). 성도의 인생은 풍성한 간증이 넘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기적이 상식이 되고, 불가능이 가능이 되고, 무(無)가 유(有)가 되고, 재앙이 변하여 축복이 되는 그런 선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풍성히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말할 것이 없고, 노래할 것이 없다면 현재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 잘못된 삶이라 단정해도 전혀 이상이 없습니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간증과 체험의 종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일하시고, 베푸시고, 인도하시며, 가르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그런 역사를 체험할 때마다 찬양하고 고백하고 말하게 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에 따라 내가 [주]의 인자(仁慈)와 [주]의 찬양을 말하며 자신의 긍휼에 따라, 자신의 많은 인자하심에 따라 [주]께서 이스라엘의 집에게 베푸신바 큰 선하심을 말하리니](사63:7). 하나님이 베푸신 [큰 선하심]을 말해 보십시오. 지난 살아온 날들, 지난 해, 지난 달, 지난 주, 어제 주님이 내게 베푸신 큰 선하심이 무엇인지 말해 보십시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마땅히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주의 큰 선하심을 즐겼지만 선함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그들이 견고한 도시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으로 가득한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올리브원과 많은 과일 나무를 소유하여 배불리 먹어 살이 찌고 주의 큰 선하심을 즐겼사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히려 순종하지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 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라고 증거하는 대언자들을 죽여 큰 진노를 일으켰나이다.](느9:25~26). 주의 큰 선하심을 즐긴 사람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불순종과 거역이었습니다. 말씀(주의 율법)을 등 뒤에 두었습니다. 회개하라는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대언자들을 죽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베푸신 선함을 어떻게 배반했는지 분명하게 가르치고 또 가르쳤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왕국과 주께서 자기들에게 베푸신 큰 선하심과 자기들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느9:35). 우리는 현재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베푸신 큰 선하심을 누려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라면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들은 먼저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베푸신 선하심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성도들이라면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합니다. 지금 그렇지 못하다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은 우리 안에 [선함]의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마음의 성품과 입술의 말과 삶의 행동으로 생각의 가치관으로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가르쳐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논할 뿐 우리 안에 동일한 선함이 없다면 우리는 실체가 없는 이론, 능력이 없는 말, 열매가 없는 나무처럼 아무 것도 아닙니다. 때로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런 평판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요,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로서 맺은 선함이 아니라면 우리의 선함은 환경이나 사람에 따라서 완전히 다르게 반응하게 되며 일관성도 지속성도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적인 삶을 살 수도 있고, 여전히 육신적인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주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세상 사람들과 어떤 차이도 보일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죽어서 저 하늘에 가게 될 것이고, 주일에 교회를 다니고, 성경 공부 반에도 참여하겠지만 우리를 통해 주님이 드러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기도도 할 줄 알고, 찬양도 부를 줄 압니다. 그러나 마음은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무엇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열매가 없고, 변화가 없고, 성장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은 이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타고난 성품 그대로 살면서 약간씩 변화를 주려고 하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못 박혀야 하고, 육신은 죽음 외에 어떤 다른 것도 필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무엇인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살면 평소에는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건이 터지면 여전히 원수 맺는 사람이 생기고, 갈등 관계가 형성되고, 쓴 뿌리가 마음에 생깁니다. 나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에게는 부러움과 질투와 시기가 생기고, 경쟁이 일어납니다. 나보다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해 줄 수 있고, 나보다 못난 사람에게는 동정심이나 긍휼을 베풀어 줄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이 [하나님의 선함]은 아닙니다. 선함은 동일하게 항상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영적 지식, 믿는 성경적 진리는 열매로 맺히고, 실행으로 옮겨질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단지 교리로 아는 지식과 체험과 본질로 아는 지식의 차이는 생명과 죽음의 차이만큼이나 큽니다. [착하게 살라, 선한 일을 하라, 마음이 선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삼척동자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이며, 어느 종교에서나 다 가르치는 기본 교리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르침이 사람을 선하게 만들어 주거나 마음에 선한 양심을 심어 주거나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공자의 성선설(性善說)의 가르침을 받고, 어릴 때부터 도덕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고 해서 내 마음의 심성이 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유교 교육을 받은 거짓말쟁이, 삼강오륜을 아는 살인자, 유학에 밝은 위선자가 되는 것이 전부입니다. 교육받은 도둑이나 무식한 도둑이나 매 한가지이듯이 우리의 마음은 사상이나 종교 교육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슬람이나 불교나 철학교육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인성 교육, 감성 교육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교육받은 죄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것은 이런 현상이 이교도들이나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 만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의 모습이 침례 받은 악인들, 성경을 든 죄인들, 교회 다니는 불한당들, 기도하는 양심 불량자들이 매우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모르고 무지한 가운데 제 멋대로 하는 죄인과 성경을 알지만 자기 멋대로 사는 죄인들의 차이는 죽은 후나 저 하늘에서는 차이가 나겠지만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 다니며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육신적인 성도들은 도리어 죄인들이 결코 할 수 없는 죄를 많이 짓는데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교리를 모독’ 받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이 이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역사와 예언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신비들을 부지런히 배우고 가르칠 뿐 여러분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꾸어 줄 수 있는 무엇이 없다면 이 교회는 성경을 가르치는 종교 강좌나 성경을 교양으로 배우는 그런 단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저는 여러분이 성경을 더 많이 읽기를 촉구하고, 더 잘 모이고, 더 많이 기도하기를 강조할 것이고, 무엇이든 더 열심히 하자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와 결단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교회를 다니는 거짓말쟁이요, 위선자요, 불법과 악행을 일삼는 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성경을 못 배운 거짓말쟁이나 성경을 믿고 공부하는 거짓말쟁이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였던 찰스 피니는 말하기를, “성경을 가르치기만 하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악하며, 배우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살아 보고자 하는 노력만 있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성령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자요, 모든 문제의 방법이요,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요14:6). 우리의 문제 역시 그렇습니다. 일반 교육이나 상식이나 철학, 종교와 달리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성경 지식은 단지 이론적 지식이나 삶의 참고 사항이 아니라 이 말씀을 마음을 다해 믿음으로 받을 때 말씀을 실천으로 옮길 힘과 능력, 지혜를 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듣고, 배우는 말씀은 마음으로 믿고 순종할 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는 말씀을 자라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말씀을 배워서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과 주님의 강력한 권능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고 말씀을 마음에 간직할 때 성령은 그 말씀의 권능을 우리 안에 열매로 맺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항상 있습니다. 다윗이 노래하기를, [하나님의 선하심은 항상 있도다.](시52:1b)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만으로도 주의 선하심을 압니다. [...또 주의 이름이 주의 성도들 앞에서 선하시므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52:9b). 주님께서 선하심을 보이시고 베푸심으로 인해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의 선하심을 볼 줄 믿지 않는다면 단 하루도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주]의 선하심을 볼 줄을 믿지 아니하였으면 기진(氣盡)하였으리이다.](시27:13). 우리는 모두 동일합니다. 다만 주의 선하심을 맛보고 사는가? 그렇지 않는가? 에 따라서 풍성하고 기름진 삶을 살든가 그렇지 않는 삶을 사는가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맺으실 [선함]을 사모하고 구하십시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열매를 맺은 우리 자신보다 주님께서 더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며, 뜻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주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고, 주님께서 열매를 맺으시도록 구한다면 선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언제나 ‘하나님의 선함’으로 살아갈 힘과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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