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11) - 부드러움말씀. 시18:35
성령의 열매(fruit)중 다섯 번째로 언급된 [부드러움(gentleness)]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부분이 개역 성경에는 자비(mercy)라고 되어 있어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자비는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자비는 긍휼이란 의미입니다. 긍휼은 열매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부드러움은 우리 안에 성령께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열매가 다르다는 것은 나무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개역 성경과 킹제임스 성경은 무엇이 다른가? 그 맺으시는 열매가 다릅니다. 이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열매로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아닌 것이 열매로 들어가 있고, 정작 성령의 열매는 빠져 있다면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자비]가 아니라 [부드러움]입니다. 성도들은 [오직 부드러워야 한다](딛3:2)고 말씀합니다.
부드러움의 반대는 뻣뻣함입니다. 완악함(harden)입니다. 완고함도 거의 비슷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매우 싫어하시는 것이 뻣뻣함, 완악함, 완고함입니다. [[주]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보라,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출32:9).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드러움이 없음을 엄히 책망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뻣뻣한 자들과는 동행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네 한가운데서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목이 뻣뻣한 백성이므로 내가 길에서 너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라, 하시니라.](출33:3). 함께 가지 않으실 뿐 아니라 진멸할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보통 심각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멸하시는 백성은 뻣뻣한 백성이란 것입니다. 부드러움이 없다는 것은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란 점입니다. 주님은 엄히 경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의 포피(包皮)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뻣뻣하게 하지 말지니](신10:16).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뻣뻣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시75:5).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마음이 뻣뻣하다는 말입니다. [이는 그들이 뻔뻔하고 마음이 뻣뻣한 자손들이기 때문이라.](겔2:4a).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마음이 부드러워 본 적이 없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새 포도즙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했던 것도 이들에게는 새로운 가르침이 전혀 들어갈 여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전했을 때를 보십시오. 그들은 목이 뻣뻣했습니다.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님을 거역하되 너희 조상들이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는도다.](행7:51). 덕분에 성령 충만한 복음 선포였지만 그들은 전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의 부드러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굳어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 것입니다. 간이 굳어지면 간경화입니다. 동맥이 굳어지면 동맥 경화라고 합니다. 경화 현상이 오면 몸은 심각한 장애를 일으킵니다. 혈관이 굳어지거나 살이 굳어지거나 근육이 굳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죽습니다. 어느 부위가 굳어진다는 말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습니다. 몸이 굳어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라] 이는 매우 엄중한 경고입니다.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는 특히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격노하게 하던 때와 같이 또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頑惡)하게 하지 말라.](히3:8). 지금은 죄의 속임수를 통해 성도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기 쉽습니다. 탐욕의 우상, 물질의 숭배, 죄의 속임수, 정욕 등 갖가지 일들이 마음을 완악하게 합니다. 굳어진 근육을 풀기 위해 운동이 필요하듯이 마음 역시 형제들과 서로 교제하며 권면함으로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풀어 주어야 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에 하나라도 죄의 속임수를 통하여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완악--harden/딱딱해지는 것, 굳어지는 것.
사람들은 강함을 좋아 합니다. 부드러움은 약함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약함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이란 말에서 ‘신사’(gentle man)가 나옵니다. 성령의 열매인 부드러움이 없으면 누구도 신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아무에게나 신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사란 여자들에게 잘해 주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부드러운 성품이 성령을 통해 내 안에 맺어질 때 신사(gentle man)가 됩니다. 성령의 열매 없는 신사란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습니다. 긴 소매를 지닌 좋은 옷을 입고 존경받기를 바라는 바리새인들처럼 양복을 잘 차려 입고 근엄한 목소리를 내면서 미소를 짓는 남자가 신사로 대접받기는 합니다만 주님께서는 옷이나 얼굴 표정이나 목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속 중심부와 마음을 살피십니다.
부드러움은 약함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입니다. 영적 진리를 통해서 고침을 받을 수 있고, 바로 잡힐 수 있는 것이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의 반대말은 딱딱함인데 성경에는 이를 [완고함, 완악]이라고 말합니다. 목이 곧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자들은 바로 잡힐 수가 없습니다. 가죽은 질기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부드럽지 않는 가죽은 계속해서 부드럽게 될 때까지 손질을 합니다. 쇠는 단단하지만 녹여서 부드럽게 되어야만 무엇을 만들 수 있습니다. 부드러운 상태가 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바위는 갈아서 부드럽게 한 후에야 다시 무엇에 쓰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육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부드러움을 유지하지 않고 뭉쳐 있으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몸의 움직임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집니다. 자세를 교정하려해도 부드러움이 핵심입니다. 허리가 유연하고 동작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부드러움 속에서만 폭발적인 힘이 나옵니다. 부드러움 속에서 강력한 함이 나옵니다. 육체의 힘이나 영적인 힘은 동일한 원리입니다. 마음의 부드러움이 없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힘, 성령의 권능, 말씀의 강력한 힘은 부드러움에서 나옵니다.
[부드럽다]는 것은 자연스럽다는 뜻입니다. 이는 힘이 없다거나 약하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드러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몸이든 마음이든 부드러워야 합니다. 토지는 부드러워야 씨를 받아서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비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딱딱한 땅은 갈아엎어야 합니다. 부드러운 땅이 아니면 씨를 뿌려도 뿌리가 내릴 수 없습니다. [[주]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너희의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말라.](렘4:3). 묵은 땅은 딱딱해진 땅을 말합니다. 땅은 마음에 비유된다는 점에서 우리 마음 역시 부드럽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로 거두며 너희의 묵은 땅을 부술지니 이는 지금이 곧 [주]를 찾을 때이기 때문이라. 마침내 그분께서 오사 의를 비같이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 이 역시 동일한 말씀입니다. 묵은 땅과 같은 마음은 반드시 부수어야 합니다.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힙니다. 수련이나 고행이나 금욕과 같은 종교 행위로는 마음이 부드러워지지 않습니다. 부드러움(gentleness)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부드러움의 열매를 맺으시도록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을 쫓아서 행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영적인 생각을 할 때 마음에는 생명과 평안이 임합니다. 건전한 생각의 영을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 우리는 조급하지 않고, 격노하지 않고, 쓴 뿌리를 품지 않고, 다투거나 원수 맺음 없이 [성령의 부드러움]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부드러움은 위로부터 난 것입니다. 땅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순수하고 다음으로 평화스럽고 부드럽고 대하기 쉬우며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고 차별과 위선이 없나니](약3:17). 반면 완고함, 완악함, 목이 뻣뻣한 것 등은 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 땅에서 난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것은 순수하고 평화롭고 부드럽습니다. 주의 진리, 성령의 은사, 성령의 열매 등 위로부터 난 것은 예외 없이 다 부드럽습니다. 딱딱한 것은 위에서 난 것이 아니며, 육에서 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갈5:22).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부드러움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주님의 부드러움이 자신을 크게 만들었다고 고백합니다. [또 주께서 주의 구원의 방패를 내게 주시며 주의 온유함(gentleness)이 나를 크게 만들었사오며](삼하22:36/시18:35). 여기서 ‘주의 온유함’(부드러움/gentleness)은 부드러움입니다. [주의 부드러움]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의 부드러움입니다. ‘우리 자신의 부드러움’이 아니라 ‘주의 부드러움’입니다. 주님은 강하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부드러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는 것이 주의 은혜이듯이 우리를 크게 만드는 것은 주님의 부드러움입니다. 때로 성도들은 부서지고, 낮아지고, 깎여져서 이제는 부드러워졌다는 간증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이 그렇게 느낀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오직 성령을 통해 주님 자신의 부드러움을 우리를 통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개혁되고, 변하고, 달라졌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죽음에 처해지고,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더 많이 나타나시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자전거를 타서 중학교 3년을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매일 4Km를 자전거로 다니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길이 좋지 않았습니다. 오토바이를 살 생각은 못하니까 발로 밟지 않고 모터를 이용해서 달리는 자전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났습니다. 속도도 제법 잘 났을 뿐 아니라 힘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발로 페달을 밟는 것과 가장 큰 차이는 일정한 속도로 빠르게 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힘에 따라서 빨리 달릴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습니다. 일정한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특히 약간이라도 오르막길이면 내려서 걸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터를 장착한 자전거는 잘 달렸습니다. 페달이 있지만 밟을 필요가 없이 발은 그냥 편안히 올려만 놓고 있으면 됩니다. 페달을 있는 힘껏 밟아 봐야 의미가 없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발의 근육을 단련한 것이 아니라 아예 모터를 전환한 것입니다. 자전거의 바퀴, 핸들, 자리 등 외양이나 모든 것은 그대로인데 바퀴에 전달되는 동력 전달 방식이 다릅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의 정신력이나 도덕성이나 마음을 수련해서 변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리막길에서는 편하고, 평지에서는 그럭저럭 잘 갑니다. 하지만 오르막이 다가오고, 어려운 길이 나오면서 숨이 차면 원래의 본성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힘을 주시고, 일하시면 우리는 평안히 쉬어도 항상 일정하게 동일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오르막이 나오고, 어려운 코스가 나오고, 내 몸에 힘이 없어도 나의 발로 밟아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똑같이 달립니다. 모터사이클과 자전거로 달리는 것의 차이가 바로 성령으로 사는 삶과 우리 육신의 힘으로 사는 삶의 차이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동력은 우리의 육신의 손·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땅에서 나는 육신의 음식이 아닌 주님으로부터 나는 영적인 음식에서 힘이 나옵니다. 주님은 힘의 근원을 바꾸셨습니다. 생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 몸은 이전과 달리 하늘에서 나는 생명, 위로부터 나는 힘, 말씀을 통해서 나는 힘을 받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의 편리를 위해서 기계의 힘을 의존하고 사용할 줄 알지만 영적인 삶을 위해서 성령을 의존하고 하나님의 힘을 사용하는 법은 거의 알지 못함으로 마음이 쉽게 지치고 낙심하는 것을 봅니다. 주님께서 이 시간 우리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 힘, 우리의 지혜를 내려놓고 우리 안에 사시는 주님을 힘입어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야 합니다. 딱딱하고 완고한 것은 거역하는 죄나 마술하는 죄와 같다고 합니다. 사무엘은 부드럽지 못한 완고한 것이 불법과 우상 숭배와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마술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불법과 우상 숭배와 같기 때문이니이다. 왕이 [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그분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더라.](삼상15:23). 완고하다는 것은 딱딱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완고함이 있습니다. 아무리 착해 보이고, 부드러워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보통 고집 센 사람이 아닌 그런 경우를 만납니다. 인간적으로는 순해 보입니다. 흔히 순둥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결코 순하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십시오. 2-3살만 되어도 고집을 피우고 딱딱함이 보입니다. 완고함이 잘 드러납니다. 이는 인간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모두 완고하고 완악합니다. 목이 곧고 마음이 딱딱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완고한가 하면 수시로 하나님을 이용해 먹으려는 속성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꺼이 종으로 부리려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를 이겨 먹으려 하고, 못된 아이들이 선생님을 꺾으려 하듯이 부하가 상관을 부려먹으려 하는 것은 마치 꼬리가 머리를 움직이려는 것보다 더 미련한 짓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런 예는 허다합니다.
성령의 열매인 ‘부드러움’은 [주의 부드러움, 그리스도의 부드러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매우 완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집이 세고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열매를 맺었을 때 자신의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주님의 성품을 힘입어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화된 성품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고후10:1a). 그는 육신적인 고린도 교인들, 범죄와 불순종이 난무하는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온유함, 그리스도의 부드러움을 힘입어’서 간청하고 권면했습니다. 목자가 양들을 대할 때, 성도가 성도를 대할 때 가져야 할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이 점이 매우 중요함을 절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을 모두 귀히 여기지만 [부드러움]이 아니라 육신적으로 딱딱하게 대함으로써 상처를 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부드러움이 없이 대하면 아이들은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부드러움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을 맛본 사람들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드러움]이 내 안에 형성되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옛 사람을 모두 처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이요(고전1:18,24) 하나님의 지혜(고전1:24)이시기에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안에 전달해 줍니다(고전2:16). 성령은 우리를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하며, 그 십자가를 마음에 품고 살게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우리 중심에 모실 때 우리 속에 자리 잡는 성품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 온유, 부드러움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요, 서로를 돌보려는 마음이며, 짐을 나누어지려는 마음이요, 받기보다 주려는 마음이요, 섬김 받지 않고 섬기려 하는 마음이요, 상냥하고 친절한 마음입니다. [주의 부드러움]이 우리의 부드러움이 될 때 그는 어떤 고상한 예절 교육이나 교양과 품위와 절도를 배운 사람보다 훨씬 더 신사답고 고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천박한 사람들이 아니며, 상스럽고, 비속하고, 허황되고, 저급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부드러움]은 종의 자세입니다. 종은 주인에게 딱딱해서는 안 됩니다. 감히 딱딱할 수도 없지만 딱딱하게 굴었다가는 벌을 받거나 훈계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종입니다. 주의 종이 부드럽지 않으면 주님은 먼저 버릇을 고쳐 놓고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이 완고하고 완악한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종들이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종은 결코 다투지 아니하며 오직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인내하며](딤후2:24). 종은 주인을 닮습니다. 특히 주의 종이라 자처하는 목회자들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인들은 각별히 이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드러우라는 말씀은 신자,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하는 말씀입니다. 부드럽지 못하면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오직 부드러워야 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말다툼하는 자가 되지 말며 오직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3:2).
자신에게 잘 해 주는 사람들에게만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마음과 표정이 굳어지고 말투가 딱딱해집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태연하게 가릴 수도 있고, 자연스럽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위선이요, 가장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드럽고 상냥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계신 주의 부드러움, 주의 친절이 나를 통해 드러나야만 합니다. 완악함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부드러움은 그리스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이제 옛 사람, 이전 사람에게 속했던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오직 새롭게 지음 받은 새 사람을 입고 주님의 성품이 우리의 성품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 힘으로는 이룰 수 없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십자가의 피로 더러움을 씻으시고, 말씀의 물로 정결하게 하시며 새로운 성품을 점점 자라나게 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령께서 이 일을 우리 안에 완수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소원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안에 주님이 살아 계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하면 곧 바로 ‘부드러운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 상냥한 사람들’이란 이미지가 확 풍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어릴 적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들이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옆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를 다녔는데 그 동네 사람들은 우리 동네 사람들과 인상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어른들이 어린 애들에게 부드러웠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저희 동네나 다른 동네 어른들은 무섭기도 하고, 욕도 잘하고, 말이 매우 거칠었는데 반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상냥하고 친절했습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의 부드러움을 소유하고 있었고, 하나님의 친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전쟁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매우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까지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이르되, 요나단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저나이다, 하매](삼하9:3). 그는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들을 찾아 ‘하나님의 친절’을 베풀기를 원했습니다. 역적의 아들이니 원수의 집안이니 찾아서 다 없애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친절’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친절’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자신의 친절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친절을 많이 체험해서 그 친절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 친절을 실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주의 부드러움, 주의 친절, 주의 사랑, 주의 오래 참으심, 주의 평강, 주의 기쁨 등 주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음으로써만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맺는 열매로써 우리는 주님을 드러낼 수 있고, 성령의 나타나심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친절]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 친절을 받아 형제들과 세상을 향해 드러내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도 자신에게 없는 것을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 없는 것은 드러내려 해도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친절은 ‘긍휼이 풍성하신 주의 친절’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친절 곧 긍휼이 풍성하신 주의 친절이 크시고 [주]의 진리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이로다. 너희는 [주]를 찬양하라.](시117:2). 친절, 상냥, 부드러움은 거의 비슷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의 부드러움, 주님의 친절, 주의 상냥하심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람들이 주의 부드러움을 잘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십자가의 거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나타났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는 어리석게 보이고, 거칠게 보이고, 저주로 보이는 것이기에 아무도 거기서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 친절, 부드러움은 모두 거기가 출발점입니다. [사람을 향하신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의 친절과 사랑이 나타나사](딛3:4). [하나님의 친절]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친절은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육신적인 모든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것은 십자가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과 피는 우리의 영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의 탄생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권능이 거기에 있듯이 하나님의 친절과 오래 참음, 하나님의 부드러움 역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안에 전달됩니다. 종교인들은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달콤함을 찬양하고 노래하지만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분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오직 그분만을 노래하고 그분만을 자랑합니다. 도무지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십자가이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드러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갈보리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부드러움이 우리에게 보여 집니다. 우리는 갈보리의 십자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주님의 어떠하심을 찾고, 구한다면 결코 찾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드럽게 대했다, 부드럽게 말했다, 부드럽게 행동했다는 식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이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드러운 사람이 부드럽게 행동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위선이나 가식이 아니지만 완악한 사람이 부드럽게 하는 것은 마치 목소리를 변조하거나 흉내낸 이리처럼 어색하고 이상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부드러운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오직 너희 가운데서 부드러운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아이들을 돌보듯 하였으니](살전2:7). 우리 역시 부드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인격적인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자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간구하고 은혜를 구합시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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