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의 열매(09)- 오래참음
말씀. 골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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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중 네 번째는 [오래 참음]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은 우리 마음속에 형성되는 개인적이고 내적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 마음속에 차고 넘칠 때 일상의 모든 삶이 다 영적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안에서 모든 것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눅17:21). [의와 희락과 평강](롬14:17)은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이미 경험하고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영적인 일]이라고 해서 항상 기쁘고 즐겁고 평안이 넘치는 그런 것이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영적 삶이란 때로는 참아야 하며, 견뎌야 하고, 절제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대적해야 합니다. 당연히 희생과 고통이 따릅니다. 성령의 열매란 우리 안에 성령께서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맺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적인 활동이나 일에서만 성령의 열매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일에서부터 모든 일은 다 성령의 열매를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사랑, 희락, 평강, 오래 참음은 우리의 일상사에서 언제나 절실히 필요한 것들입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학교에서도 절실히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는 오래 참음이 필요 없습니까? 같은 믿음, 같은 주님을 섬기는 형제들의 모임이라지만 오래 참을 일이 더 많습니다.

영적 생활이란 교회에 오고, 찬송을 부르고, 전도를 나가고, 기도회를 갖는 것, 금식이나 어떤 집회를 갖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 바로 영적 생활입니다. 주부가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나 남편이 일터에서 일을 하는 것이나 목사가 앉아서 설교 준비를 하는 것이나 다 동일한 일입니다. 어떤 일은 거룩하고 어떤 일은 속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충만한 기쁨과 강 같은 평안을 지닌 채 설거지를 하는 일이 한숨을 내쉬며, 짜증과 불평 가운데 설교를 작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가 하는 일이 성령 안에서 행하는 일이요, 성령을 쫓아서 영적인 생각을 하며, 성령 안에서 살 때 그를 영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갈5:25).

여러분은 성령의 열매로서 주어지는 [기쁨]과 육신이 주는 쾌락(기쁨)을 날카롭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화평)과 세상이 주는 평안(편안함)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영적인 변명, 종교적인 변명을 일삼으며 육신의 기쁨, 죄의 쾌락들(히11:25), 정욕들을 즐기는 것을 자주 봅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다 보니 사람들은 웃음을 찾아 영화나 유머나 개그나 코메디나 소설이나 도박이나 술이나 스포츠나 여행이나 캠핑을 즐깁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그들은 삶의 의미도 즐거움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내 영 안에 하나님의 기쁨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내 육신을 통해 내 속에 그런 것들을 가져오려고 합니다. 마음의 평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강을 깨는 무엇이 생기면 내가 피하거나 그 사건이나 그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평강이 없기 때문에 나의 속을 불안케 하고, 고민케 하는 것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결코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은 내 속에 있어야 할 것들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외부의 환경이나 사건이나 사람들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를 맺고 있다면 환경, 사건,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크리스천은 무균 실에 있어야 할 환자가 아닙니다. 몸 안에 저항력이 없는 환자는 감염을 막기 위해 사람들과 접촉을 못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과 물, 숨 쉬는 공기도 그에게는 공포와 죽음의 장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몸 안에 있어야 할 충분한 저항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크리스천들에게 세상과 완전히 떨어져서 등진 삶을 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넉넉히 살아남는 강인한 체질의 소유자들이 되도록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마귀의 올무와 유혹, 죄의 쾌락이 넘실대는 이 세상에서 넉넉히 이겨 나가도록 하십니다.

무균 실에서 환자를 고쳐서 정상적으로 세상에서 살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공기를 다 정화하고, 세상의 모든 마실 물을 끓여 놓고, 세상의 모든 음식을 다 살균 처리하고, 모든 식기를 다 무균 처리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몸 안에, 그 사람의 피 속에 저항력과 면역력을 길러 주는 치료를 해야 합니다. 조금씩 소량의 균을 넣어서 병균과 싸우는 항체를 생성해 주는 것입니다. 백혈구의 수를 증가 시켜 주어야 합니다. 마찬 가지로 하나님은 거듭난 성도들에게 조금씩 죄악과 불법과 여러 가지 유혹들을 허락하심으로 그것들과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몸 안에는 강한 믿음과 성령의 열매들이 맺어지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참으로 듣기만 해도 아름답습니다. [사랑, 희락(joy), 화평, 오래 참음, 부드러움, 선함, 믿음, 온유, 절제](갈5:22~23)로 기록된 이 아홉 가지는 누구나 갖추고 싶어 하는 성품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령의 열매는 우리 본성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훈련이나 교육이나 수행이나 철학적 깨우침 등으로 후천적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행위나 오랜 세월의 명상을 통해 갖출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14:6)를 내 안에 영접함으로 새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골2:9)이 우리의 몸을 통해 즉 말과 행위와 삶과 인격으로 드러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요3:3-8) 즉 새 생명, 새 성품이 주어지지 않고는 결코 꿈도 꿀 수 없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하긴 합니다.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진품이 있고 모조품이 있듯이 영적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 있고, 육신의 행위인 모조품의 사랑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내가 무엇을 받았기에 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이미 선포하셨고 친히 몸소 우리를 향해 보여 주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진품이요,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인데 우리 역시 이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새 명령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과 혀로써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리로써 사랑하고 형제를 위하여 생명을 내어 놓는 사랑(요일3:16)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평소에는 구분이 가지 않지만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할 때 진짜와 가짜는 구분이 갑니다.

기쁨 역시 그러합니다. 주의 기쁨과 육신의 기쁨이 있습니다. 주의 기쁨은 말씀을 듣는데서 옵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내 안에 흐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처럼 지속적입니다. 말 그대로 [항상]입니다. 반면 육신의 기쁨은 환경이 주도합니다. ‘웃다가 울다가’, ‘좋았다 나빴다’를 반복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밖에 있는 무엇이 나를 주장하며 완전히 지배합니다. 여러분 안에 주님의 기쁨이 있다면 우리는 주님을 기뻐하고, 진리를 기뻐하고, 형제들의 성장을 기뻐하고, 믿음의 소식들을 기뻐하며, 환란 중에서 그것을 믿음의 시련인 줄로 알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합니다. 반면 주님의 기쁨이 아닌 모조품의 기쁨을 가지고 있으면 농담이나 웃기는 이야기나 예상외의 수입이나 뜻밖의 횡재나 기대했던 무엇이 이루어진 일 등에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기쁨은 어떤 기쁨입니까? 주를 위해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받는 일을 기뻐한다면 여러분이 가진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감정에 따라 기분에 따라 환경에 따라 오락가락하며 변하고, 있다가 사라지는 기쁨이라면 여러분의 기쁨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 육신에서 나온 모조품입니다.

화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강이 있고 거짓 평안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평강은 큰 평안이요(시119:165, 사54:13), 완전한 평강(사26:3)입니다. 반면 거짓 평안은 평소에는 문제없습니다. 유쾌하고 상냥하고 평소에는 항상 눈웃음을 짓고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냅니다. 성령의 열매로서 참 평강과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예절과 교육으로 꾸민 모조품의 평강은 일이 터져 보면 금방 구분이 갑니다. 때로 성도들 중에 평소에 사람 좋은 척, 믿음 좋은 척 뽐내다가 설교에 자기 이야기 비슷한 것만 스쳐지나가도 신경이 곤두서고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해서 몇 일간 끙끙대다 교회를 떠나거나 교회나 목사를 욕하거나, 자신을 변명하는 등 평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바빠집니다. 전화기를 들고 이리 저리 통화도 해야 하고, 또 따로 만나서 이야기도 해야 하기 때문에 분주(busybody)합니다. 그 때 성령의 열매로서의 평강과 거짓 평안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목사는 의식도 못하는 설교를 혼자서 끙끙대며 찧고 까불다가 마귀의 올무에 걸려 나가떨어집니다. 그런 사건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받는 비난이나 오해에 약한 사람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과 영광을 구하는 지극히 세속적이요 육신적인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초연한 사람들은 비난에도 초연합니다. 마음의 평강은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교회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문제가 터져보면 그가 가진 평강이 참 평강인지 거짓인지는 수면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자신 안에 있던 평강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닌 사람들은 참고 견디지를 못합니다. 기쁨도 평강도 모두 깨어집니다. “나를 흔들지 말라. 내가 탄 배를 흔들지 말라.” 이것이 오늘날 목회자들의 금언이요, 교회 생활의 철칙이요, 인간관계의 처세술입니다. 흔들면 밑에 깔려 있던 찌꺼기들이 나오고, 파내면 속에 있던 썩은 뼈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환란이 임할 때, 자신이 오해를 받을 때 여러분의 마음이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고요하고 평안하다면 그 평강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오래 참음 역시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있고 모조품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로 맺히는 오래 참음이 있고, 육신적 성품으로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디는 것이 있습니다. 참고 또 참는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상처가 되고, 한(恨)이 되고, 화병(火病)이 되고, 우울증이 되는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로서 오래 참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 때문에, 자식 때문에, 자신의 출세나 성공 때문에 다른 무엇 때문에 참고 또 참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 참는 사람은 대인 관계가 좋고,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구분하십시오. 속으로만 삭이는 것이 오래 참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래 참음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는 타고난 성품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성격이 급해서 잘 못 참아!”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일이 터지고 나서 좀 더 참을 것을 하고 후회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참지 못해서 이혼을 하고, 참지 못해서 계약을 파기하고, 참지 못해서 직장을 그만두고, 참지 못해서 싸움을 하고 다툽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내에 대한 격언은 수도 없이 쏟아 냅니다. 어느 나라나 인내에 대한 속담과 금언을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인내 없이는 승리 없다!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다. 모든 것은 쉬워지기 전에 어려웠다 등등 별별 격언이 많습니다. 오래 참지 못하면 약속의 성취를 맛볼 수 없습니다. 참지 못하면 고난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고난이 없으면 성장도 열매도 없습니다.

잠언에 이르기를, [진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큰 명철(明哲)이 있는 자로되 영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찬양하는 자니라.](잠14:29)고 했습니다. [네 영이 조급하여 분노하지 말라. 이는 분노가 어리석은 자들의 품에 머무르기 때문이니라.](전7:9). 조급한 자는 어리석은 자요, 조급함은 어리석음을 나타낸 결과입니다. 생각이 조급하든 말이 조급하든 영이 조급하든 조급한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 부활이 없다고 하는 자들을 성경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영이 조급하다는 것은 주님이 없다고 떠드는 자들을 찬양하는 자들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어리석은 자에게 더 소망이 있느니라.](잠29:20)고 합니다. 조급한 자에게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오래 참음]이란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오래 참아야 할 일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에겐 고통입니다. 오래 참음은 환란의 부산물이요, 결과입니다. 용서는 참으로 위대한 말이지만 용서를 구해야 할 일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래 참음]이란 것 역시 고통과 고난을 동반합니다. 잠시 참는 일도 어려운데 오래 참으라니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란 생각이 듭니다. 이는 하나님, 사람, 일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결국 ‘오래 참는 사람’이란 말과도 통합니다. 믿음의 사람들 중에 단 번에 돌변하여 성숙한 사람이 된 예는 없습니다. 모두 고통과 시련이라는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기까지는 25년을 참아야 했습니다. 이삭은 자식을 얻기 위해 기도했는데 장장 20년이란 세월을 구했습니다(창26:26). 모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처했지만 진정으로 부름을 받아 구원자로 등장하는데는 40년이란 오랜 세월의 기다림과 오래 참음이 필요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짓는 동안 120년이란 심판의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오래 참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통입니다. 영어로 longsuffering은 요즘 의미로 해석하면 ‘오랜 고통’이 됩니다. 고어적 의미로는 ‘오랫동안 허락’(*suffer의 고어적 의미는 let이다)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면 누구나 우울증이나 정신병에 걸리고 맙니다. 그리고 삶의 절망을 하거나 낙담하다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 적응하여 살려고 합니다. 처세술에서 즐겨 쓰는 말 가운데 하나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고 합니다. 적응해서 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참을 수 있습니까? 사건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일은 평생도 참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은 단 1초도 참지 못합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평생을 참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단 한 순간도 참지 못합니다. 힘이 없고 돈이 없고 어쩔 수 없이 참는 것도 참는 것이긴 하지만 [성령의 열매]로 맺혀진 ‘오래 참음’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이기에 참고 사는 경우는 많습니다.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만 참는다는 부인들이 아이들 결혼시킨 후에는 곧 바로 이혼해 버립니다. 그동안 참았는데 더는 못 참는다고 황혼에 이혼을 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만 참는다며 살다 장례식 하는 날부터 다투기 시작해서 계속해서 싸우는 이웃만도 못한 형제들이 수두룩합니다. 제가 한 통계를 보았는데 다섯 가정의 장례식 중에 세 가정은 문상객들의 눈을 피해 형제들 간에 싸움을 한다고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나름대로 ‘언제까지는 참지만 더는 못 참는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없는 성도들은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육신적이기 때문에 자아(自我)가 상하고 모욕 받고 수치를 당하는 일은 참지 못합니다. 예의바른 척 하고 고상한 체 하며 살다가 누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인정받지 못할 때 전혀 참지 못합니다. 믿음 좋고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란 소리를 듣다가 싫은 소리 한 마디 들으면 그는 참지 못합니다. 따지자니 힘이 없고, 덤벼들자니 소용없을 것 같아 참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이 잘 참는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환경이나 지위가 바뀌었을 경우에도 참을 것인가? 생각하면 답이 나옵니다. 참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참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닙니다. 그것은 참는 것도 아닙니다. 밖으로 직접 표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억누르는 것이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 참는다는 것은 내가 그 사람, 그 사건, 가해자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13:4)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님에 의해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롬5:5)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첫 번째 요소가 ‘오래 참음’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오래 참지 못하는 것은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오래 참음입니다. 죄인들의 타락과 죄를 보시며 돌이키고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음입니다. 오래 참음은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우리에게 맺히는 열매라고 해서 때로 자신이 맺은 열매인 줄로 알면 안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나에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 안에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과 능력](벧후1:4-5)을 부어 주심으로 맺으시는 열매이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성령을 거역하지 않고, 슬프시게 하지 않고, 제한하지 않고, 억누르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께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오래 참는 것이 미덕(美德)이 아닙니다. 지금은 ‘속도의 시대’라고 할 만큼 속도가 중요합니다. 무엇이든지 빠른 것을 선호합니다. 출·퇴근길에 차가 막혀 보십시오. 집에서 컴퓨터를 하는데 인터넷의 속도가 느려 보십시오. 젊은이들은 광분하거나 입에서 불평이 쏟아져 나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오래 참고 견디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오래 참는 훈련도 교육도 받지 못합니다. [오래 참음]은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 맺으시는 열매란 점에 주목 하십시오.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오래 참음과 성령의 열매로서 맺어지는 [오래 참음]의 분명한 차이를 주목해서 보아야 합니다.

[오래 참음]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지혜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참으셔야 할 일이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약자(弱者)의 논리요, 패배자의 변명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승리자의 노래요, 강한 자의 여유입니다. 하나님보다 강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처럼 영화롭게 승리하신 분이 있습니까? 여러분, 참는 사람은 약자나 패배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누구에 대해서 참아 준다는 것은 그 사람을 품고 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지금은 참지만 기회를 노리는 것이 참는 것은 아닙니다.

잘 들어 보십시오. 자식이 아버지를 참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을 참는 것이 아닙니다. 부하가 상사를 참는 것이 아닙니다. 신하가 왕을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굴복하는 것이며, 눌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의 권위 아래 있다면 참을 것이 아니라 권위 아래 복종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참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요, 권위이기에 복종합니다. 남편이 하는 말이 옳아서, 남편이 내리는 결정이 좋고 마음에 쏙 들어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남편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복종입니다. 신하는 왕이 내린 결정이기에, 부하는 상사가 내린 결정이기에, 자녀는 아버지가 내린 결정이기에 그 권위에 복종하고 따릅니다. 이것은 복종/순종의 문제입니다. 교인은 목자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존경과 사랑으로 복종하면 최상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복종해도 잘 하는 일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런 복종은 ‘오래 참음’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래 참음이란 사람들이 쓰는 의미와는 정반대입니다. 상사가 부하를 오래 참습니다. 부하에게 요구되는 성품이 복종이고, 상사에게 요구되는 성품은 오래 참음입니다. 실수와 허물을 감싸주고, 세워주고 기다려 주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불순종과 일탈을 일삼을 때 용서하고 변화와 성장의 때까지 돕고 기다려 주는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부모가 아이들에 대해 오래 참습니다. 아이들이 자랄 때까지, 부모의 마음과 뜻을 이해해 줄 때까지 20년이고 30년이고 참습니다. 어떤 때는 죽을 때까지도 참고 또 참습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오래 참습니다. 불순종하고 거스르며 반역하는 아내 된 자매를 보면서 평생을 참고 사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보의 삶이 아닙니다. 오래 참고 사는 것은 승리자의 삶입니다. 오래 참는 것은 주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오래 참습니다. 오래 참지 않으면 누구도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래 참지 않고 제대로 양육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오래 참으라고 해서 오래 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오래 참음을 맛보면 자연스럽게 오래 참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긍휼을 얻었나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내 안에서 심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앞으로 그분을 믿어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게 될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6)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서 심히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불신과 불순종과 반역과 일탈의 순간에도 주님은 곧 바로 심판하시지 않으시고 참으십니다.

말씀을 보내시고, 위로하시고, 징계도 보내시고, 돌이키시고, 바로 잡으시면서 참으십니다. 주님께서 오래 참으심을 보이실 때 그것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롬2:4, 9:22). 주님은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시고, 말씀을 보내 주셨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이 날에 이르기까지 내가 너희에게 나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날마다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고 보내었으나] (렘7:25). 이는 회개하고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주의 용서와 긍휼과 은혜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주]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자신의 거하는 곳을 불쌍히 여기사 자신의 사자(使者)들을 통하여 백성에게 /말씀을/ 보내고 늦기 전에 일어나 보내셨으나](대하36:15). 주님은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향해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힘이 없어서 참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명이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참으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래 참는 것은 혼을 얻기 위함입니다. 형제를 얻고, 자식을 얻고, 친구를 얻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십니다. [[주]께서 그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주]로다. 긍휼이 많고 은혜롭고 오래 참고 선함과 진리가 풍성한 [주] 하나님이로다.](출34:6). 오래 참으심이 없다면 어떤 사람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전도자들은 모두 오래 참아야 합니다. 죄인들이 구원받는 순간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며 돌이키기를 기다립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식으로 말해 봐야 싸늘한 냉소와 조롱만이 돌아오더라도 참습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그 혼이 구원받는 그 순간까지 참습니다.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향해 그렇게 참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는 오래 참고 긍휼이 많아 불법과 범죄를 용서하나](민14:18a)라고 말씀합니다. [그러하오나, 오 {주}여, 주는 동정심이 많으시며 은혜로우시며 오래 참으시며 긍휼과 진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오래 참음은 영적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성품입니다.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성품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오래 참음(longsuffering)은 약자로서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디는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참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오래 참음은 견딤, 인내, 절제를 다 포함합니다. 형제들은 서로 서로 복종해야 하는 관계인 동시에 서로를 향해 오래 참아 주어야 하는 관계입니다. 교회 내에서 누가 더 믿음 좋은가?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영적인가? 를 평하라면 가장 오래 참는 사람이 가장 믿음이 좋은 사람입니다. 참아 주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승리를 쟁취한 사람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모두 믿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두 번 마주치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이지만 참을 일은 더 많습니다. 이상하게도 교회 내에서는 분란과 갈등과 성냄과 시기와 다툼이 많습니다. 대부분 육신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대인 관계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행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며](엡4:2).

이미 말씀 드렸듯이 여러분이 누구를 향해 용서하고 참아 주는 일은 약자이거나 패배자여서가 아닙니다. 주님의 성품과 능력이 내 안에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육신은 벌을 주라, 따질 것은 따지라, 본때를 보여 주라, 사과를 받으라고 충동질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성령은 용서하라, 참으라, 사랑하라, 친절하라고 하십니다. 어떤 형제가 너무나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주님 앞에 “주님, 제게 인내의 열매를 주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인내는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환난의 부산물이다. 환난을 통해 네게 주어지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 제게 몇 가지 고통을 좀 없애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아니다. 그 고통들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너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주님이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은 과연 저를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 나는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죽었다. 나의 생명을 너에게 주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 사랑이냐?”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를 사랑하고,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고, 긍휼을 베푸신 것처럼 긍휼을 베풀고, 오래 참으시는 것처럼 오래 참으라는 것입니다. 특히 형제라 불리는 자들 사이에는 더욱 그러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요,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로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과 친절과 겸손한 마음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누가 누구와 다툴 일이 있거든 서로 참고 서로 용서하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2-13). 이런 사랑이 없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성도의 삶이란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받아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대로 드러내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달이 햇빛을 받아 어두운 밤에 빛을 비추듯이 교회는 의의 태양이신 주님을 비추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오래 참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실 때만 가능합니다. [그분의 영광스런 권능에 따라 모든 강력으로 강건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1:11). 잘 보십시오. 어떻게 참는다고 합니까? 이를 악물고 참습니까?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참습니까?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기쁨으로 참습니다. 전도하러 나가 보십시오. 조롱하는 무리들을 만납니다. 저는 성경책을 펴 주었다가 느닷없이 손으로 밑에서 위로 성경을 치는 바람에 책을 주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성경 책 속에 끼워져 있던 여러 장의 종이들이 사방으로 날려 버렸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았습니다. 전혀 성질이 나지 않았습니다. 창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 안에 주님의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 채찍으로 많이 맞았습니다. 감옥에도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원망하거나 저주한 것이 아니라 기쁘게 즐겁게 수치와 모욕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인하여 수치 당하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진 것을 기뻐하며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사랑, 기쁨, 평강, 부드러움, 선함, 친절 등은 모두 오래 참음이 바탕이 됩니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내 안에 내가 아닌 주님이 사시고, 성령께서 강력한 권능으로 나를 강건하게 하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들이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풍성이 거하도록(골3:16)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이 자유로운 행로를 얻어서 자라나는 것이 부흥이요, 성장이요, 변화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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