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누구에게 평강을 주시는가?
➊ 주를 굳게 의지하는 자입니다.
[주께서는 마음으로 주를 굳게 의지하는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하기 때문이니이다.](사26:3). 평강은 곧 신뢰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신뢰할 때 마음은 완전한 평강으로 지켜질 것입니다. 요동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어떤 때 마음속에 토네이도가 일고 노한 파도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어김없이 내 마음이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을 보거나 환경을 볼 때입니다. 주의 기록된 말씀 대신 자기 혼자만의 생각 속에 갇히고 상념에 잠기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내 마음 속으로 찾아 들면 어느새 마음 속의 노도같은 광풍과 파도는 잠잠해 지고 금방 고요해 지는 그런 평강을 누립니다. 청심환을 먹거나 신경 안정제가 주는 평강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는 평강이 참된 평강입니다.
➋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 평안이 있습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을 실족하게 할 것이 없으리로다.](시119:165).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때 마음 속에는 ‘큰 평안’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신문 기자들이 써 놓은 기사들, 뉴스 앵커들이 말하는 세상 소식, 전문가들의 견해, 이웃들의 말이 더 크게 들리기 시작할 때 마음 속 평강은 풀의 꽃처럼 말라 버리고,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이는 누구나 흔히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여러분 안에 큰 평안을 얻고 싶다면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말하기를, [내 아들아, 내 법을 잊지 말고 네 마음으로 하여금 내 명령들을 지키게 할지어다. 이는 그것들이 네게 긴 날들과 오래 사는 것과 화평을 더할 것임이라.] (잠3:1~2). 말씀은 화평을 더합니다.
➌ 주께 가르침을 받을 때 화평이 있습니다.
[네 자녀들이 다 [주]께 가르침을 받으리니 네 자녀들에게는 큰 평강이 있을 것이며](사54:13). 이는 소위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직통 계시, 영안이 열림, 영 체험 등과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자녀를 진리로 가르치십니다. 때로는 매를 들고 징계하시며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대장으로서 하나님의 군대요, 그리스도의 군사 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순종과 복종을 배우도록 하십니다. 이런 과정을 온전히 감당할 때 [의의 화평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혼이 안식을 찾으리니](마11:29). *내게 배우라. 누구라도 배우지 않고 온전해 질 수 없습니다. 생명은 배움이 아니라 탄생으로 되는 것이지만 제자는 배움과 훈련으로 됩니다.
➍ 주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라.
[네가 내 명령들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하였더라면 네 화평이 강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사48:18).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말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에게, 선생님이 학생에게, 코치가 선수들에게, 왕이 신하에게, 주인이 종에게 ‘말을 잘 듣는다’고 말하면 그는 잘 순종한다는 뜻이고, ‘말을 안 듣는다.’고 하면 ‘불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귀를 기울이라는 것은 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누구를 책망할 때,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면 그는 불순종, 불이행, 반항, 권위를 업신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종이 주인에게 평생토록 귀속될 때 재판관에게로 가서 귀를 뚫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출21:6, 신15:17). 종의 귀를 뚫는 것은 주인이 말하는 바를 듣고 순종하겠다는 표시입니다. 입술이나 혀를 뚫지 않고, 코를 뚫지 않고 귀를 뚫는 것은 종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설교로 듣기는 하지만 몸으로, 행위로 순종하지 않을 때 주님은 그에게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명령들에 귀를 기울이면 화평이 강 같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➎ 의를 행할 때 화평이 임합니다.
[의의 일은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확실한 안전이니라.](사32:17). 주님은 성도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마6:33)고 하셨습니다. 의가 없는 화평은 거짓 평안입니다. 마귀는 세상에 거짓 평안을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있어야 마음이 평안하고 어떤 이는 인정을 받아야 마음이 평안합니다. 대중 가수들은 자신이 부른 노래가 얼마나 팔렸는지, 자신이 노래를 부를 때 몇 명의 사람이 모였는지에 따라 기쁨과 실망이 교차합니다. 그들은 음반 판매 수나 사람들의 인기도에 촉각을 세우며 불안한 나날을 보냅니다. 학문적 업적이나 명성을 얻은 학자들, 교수들은 자기 분야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거나 자신의 오류를 비평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렵고 그런 일에 평안을 잃어버립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자신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마음이 평안하지 못합니다. 권세자들은 자신보다 더 높은 권세자들과 함께 있을 때 불안해합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무엇을 소유함으로써 평안을 얻고자 하지만 그 평안은 항상 비교 대상이 있고, 비교 우위에 있는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열등감과 수치를 느낄 때가 허다합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자신의 교회가 크고 성도가 많을 때는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성도가 거의 없고 적은 교회의 목회자들은 마치 무슨 죄를 지은 죄인들처럼 엎드리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이 ‘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 육신의 일은 잘하면 교만이요 잘못하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불리는 절망입니다. 교만과 열등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과 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평가에 초연하며 평안합니다. [의의 일은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확실한 안전이니라.](사32:17)고 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긍휼과 진리, 의와 화평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늘 함께 다니며 하나가 떨어져서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義)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85:10). 의와 화평!
➏ 성령 충만하십시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갈5:22). 화평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맺으시는 열매입니다. 열매는 씨앗이 있고, 자라는 나무가 있습니다. 열매는 생명의 결과이지 일이나 행위의 결과가 아닙니다. 영이요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밭에 뿌려지고 자랄 때 비로소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꾸준히 거해야 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같이 너희도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고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이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나니 이는 나 없이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라.](요15:4-5). 주님 안에 꾸준히 거할 때 성령의 열매인 화평이 우리 속에 풍성히 맺히게 됩니다.
-산상수훈 : 화평케 하는 자들 중에서 발췌-
글.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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