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를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에스겔 44:23).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중요한 직무입니다. 제사장들은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이,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분별하게 해야 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은 영적 성장과 성숙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라나지 않으면 그 판단력은 형편없게 됩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들의 것이기 때문이니 그들은 곧 /그것을/ 사용하여 자기 감각들을 단련시킴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5:14). 어린 아이들은 의의 말씀에 능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합니다. 호(好), 불호(不好)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의의 판단이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었을 때 자신이 어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분별력을 구했습니다. [과연 누가 주의 이 큰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그러므로 깨닫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나로 하여금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하니라.](왕상3:9). 우리 역시 이런 영적 분별력을 갖출 수 있도록 영적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야 합니다.
저는 목자로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기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삶의 오락, 유희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산이나 바다, 강이나 공원 등으로 자주 여행을 즐기고, 영화나 연극이나 가요를 즐기는 사람들, 야구나 농구, 당구, 축구 등과 같은 스포츠를 즐기고, 사기도박은 아니지만 명절에 친척들이나 가족들과 화투 놀이, 카드놀이, 포커 등을 즐기는 그런 성도들, 인터넷으로 게임을 하는 성도들에 대해 그것을 절제하고 하지 말도록 설교하는 일이 자주 반발을 삽니다. 영화관에 가는 것이 뭐가 나쁘냐? “그것은 문화다. 예술이다. 취미 생활이다. 여가 선용이다. 삶의 재충전이다.” 등등의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어떤 성도는 “목사 자기는 애들에게 DVD 빌려다 보여 주면서 그게 영화관 가는 것과 뭐가 다르냐?” 이런 반발과 시비를 합니다. 저는 영화, 연극, 노래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거나 전적으로 금지해야 한다는 금욕주의를 주창하지 않습니다. 어떤 스포츠는 저도 엄청 좋아 합니다. 대부분의 게임은 싫어하는 체질이지만 바둑은 좋아합니다. 제가 어떤 성도에게 포커나 카드 놀이하는 것을 책망하면 그가 반골 기질에다 삐딱한 성품의 소유자라면 회개하는 대신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명할 구실을 찾기 위해 목사를 씹을 것입니다. 목사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목사와 자신의 관계가 아니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판단하고 말씀 앞에서 성찰하면 그만입니다. 어떤 사람과 사람, 성도와 비교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선과 악, 곧은 것과 굽은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해야 할 일과 말아야 할 일 등에 대한 분별력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때에 대한 분별력도 필요합니다(전3:1~8). 때를 분별할 수 있으면 최고의 지혜자라고 단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룩한 것과 더러운 것,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어떻게 구별합니까? 분명한 기준이 필요합니다.
저는 한 때 교회 청년들이 주일 예배를 마치고 볼링장이나 당구장, 커피숍에 가는 것까지도 반대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어떤 녀석은 "술집에 술만 팝니까? 음료수도 있습니다."라고 하고, 어떤 형제는 “만화방에 만화만 있는 게 아니라 소설도 있고 수필도 있고 잡지도 있어요.”라며 항변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영화, 연극, 가요, 뮤지컬, 스포츠, 게임, 여행, T.V 드라마, 등산, 낚시, 골프 등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육신의 쾌락과 정욕에 따른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스포츠 게임의 결승전이나 월드컵 중계를 보느라 하나님 앞에서 결단한 기도와 말씀을 중단하고, 교회에 정해진 예배 시간에 참석하지 못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못하게 되면 그것은 죄입니다. T. V 연속극의 중요 장면을 놓치기 싫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 일은 한번만 양심의 찔림을 무시하면 몸과 마음이 함께 평안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반복이 되고, 일상 생활이 되어 버립니다.
이 시대는 각종 오락이 너무나 발달해 있고, 유혹거리가 너무 많기 때문에 본성에 잠재된 쾌락을 언제 어디서나 즐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문화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며, 문화 생활이 영적 생활보다 중요한 줄로 압니다. 그래서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는 선택의 순간에 금방 드러납니다. 쾌락을 즐길 일이 있으면 영적인 일들은 사정없이 뒤로 미루어 버리고, 취소해 버리고 미루는 이는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스포츠 중계를 교회 기도 모임보다 더 사랑하고, 등산이나 여행을 주일 예배보다 더 사랑하고, 육신의 정욕을 하나님의 진리보다 더 사랑합니다. 선택의 순간에는 누구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배신하며 고집이 세며 높은 마음을 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쾌락들을 더 사랑하며](딤후3:4). 이것은 말세의 특징이요, 표적 중의 하나입니다. 모세는 선택의 순간에 제대로 선택을 했지만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히11:25)- 대부분의 성도는 모세와는 정반대로 선택합니다. 자신이 놀러 가는 일은 영적 자유이고 집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율법주의인 줄로 착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모이기를 힘쓰라"고 했지 '놀러가기에 힘쓰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락을 구하지 말라. 쾌락을 추구하지 말라. 대신 성경은 주의 기쁨, 영적 희락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의와 희락과 평강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런데 영적 즐거움, 기쁨을 전혀 모르는 이들은 세상의 오락과 죄의 쾌락, 육체적 향락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란 말인가? 솔직히 말해 먹고 마시는 즐거움, 보는 즐거움, 듣는 즐거움, 함께 노는 즐거움이 얼마나 큽니까? 돈도 있고, 시간도 있고, 함께 즐길 사람도 있다면 이런 유혹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가족과 오순도순 모여 영화관에 가는 것이 교회 가는 것보다 즐거운 분들이 있을 것이고, 주말에 함께 여행하는 것이 더 낫다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단지 취미요, 여가 선용일 뿐이지 죄가 아니라는 분들은 그대로 즐기십시오. 목사 자기는 매일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양하고 전도만 하며 살지 않으면서 왜 우리에게 이런 강요를 하는가? 불만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말만 되면 등산이나 낚시를 즐기고, 골프를 치러가는 이에게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면 차라리 교회를 포기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5:5에 [너희가 땅에서 쾌락 가운데 살며 방탕함에 빠져 살육하는 날에서와 같이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5:5)고 합니다. 이런 삶이 자신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늘날 이곳 미국처럼 개인 생활이 철저하고 중산층 정도의 수입만 되어도 대부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쾌락에 빠져 염려 없이 지내며 마음 속으로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앉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알지 아니하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이 말을 들을지어다.](사47:8). 이들은 지극히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추구하며 교회가 자신을 간섭하지 않고, 보장해 주기를 원합니다. *사58:3, 13참조. 쾌락을 사랑하는 이는 100년을 성경 공부를 해도 그의 마음 속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쾌락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숨(영감)을 다 막아버리기 때문입니다(눅8:14, 마13:22). *삶의 염려, 재물의 속임수, 쾌락- 숨을 막는 3대 요소이다.
출처: 말씀침례교회 구약 개론/에스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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