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남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평양노회가 어제 주 목사의 목사직을 67년 만에 복권(復權)시켰다. 경기 남양주 동화고교에서 열린 ‘한국 교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관련해 하나님께 드리는 평양노회의 참회예배’에서다. 평양노회는 ‘참회고백서’를 내고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일제에 항거했던 주 목사를 목사의 직에서 파면했던 죄악상을 참회하며 고백한다”고 했다.
▶“이제야 할아버님이 다시 정식으로 목사가 되셨다. 감사하고 기쁘다.” 주 목사의 손자인 주승중 장신대 교수는 주 목사의 복권에 67년 세월이 걸린 것이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던 다른 목사님들이 이제는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했다. “가족들은 평양노회가 잘못을 뉘우치고 바로잡기를 기다려 왔는데 이제야 이뤄졌다”고 반겼다.
▶주 목사는 일본과 맞설 팔자를 타고났다. 고향인 경남 창원 웅천부터가 임진왜란 때 왜장(倭將)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3년 가까이 ‘웅천영(熊川營)’을 치고 앉아 갖은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한(恨)의 고장’이다. 주 목사는 웅천에 온 춘원 이광수로부터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애국자 교육을 받으라”는 강연을 듣고 오산학교에 진학했다. 그의 오산학교 은사가 고당(古堂) 조만식이었다. 주 목사는 1936년 마산까지 찾아온 고당의 권유를 받고 경남 마산 문창교회에서 평양 산정현교회로 옮겼다.
▶1940년 네번째로 투옥된 주 목사는 발톱이 모두 뭉개지는 고문을 당하고도 “육체의 재앙을 피하려고 우상 앞에 엎딜 수는 없다”고 버텼다. 그는 1944년 47세에 감옥에서 순교했다.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한둘쯤 있을 법하지만 그렇지 않다. “주 목사가 생전에 가장 싫어한 것이 우상화”라며 유가족들이 한사코 손을 내저었기 때문이다. 오는 21일이 주 목사 62주기(周忌)다. 늦었지만 진심 어린 평양노회의 참회야말로 어떤 기념물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헌화(獻花)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