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5: 23-30
요절: 출애굽기 25: 30
지성소에 두어야 할
것들을 만든 후에 이제 주님은 성소에 둘 것들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성소에는 등잔대, 전시하는 빵이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는 /그들이/ 성막을 만들었음이라.
첫째 성막은 그 안에 등잔대와 상과 전시하는 빵이 있으며
성소라 일컬음을 받고](히9: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휘장이 있었고,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일년에 단 한 번 이상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오직
둘째 /성막/에는 대제사장이 홀로 해마다 한 번씩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잘못으로 인하여 /주께/ 드리는 피 없이는
들어가지 아니하였나니](히9:7). 반면 성소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순번을 정해서 매일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지성소가 우리의 영에 해당하는 부분이라면
성소는 우리의 혼에 해당합니다.
주님께서는 성소에 둘
상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상을
펼칩니다. 산에서는 바위를 밥상으로 삼아서 밥을 먹고,
강에서는 야외용 자리를 가져가서 밥상을 펼칩니다. 잔치
집이 아니더라도 어느 집에나 늘 펴져 있는 것이 바로
식탁입니다. 주님이 만들게 하신 것은 회의용 테이블이
아니라 식탁용 테이블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상을 펴지 않습니다. 주님이 펴 주신 상에는
감히 올라 오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수로페니키아 여인을
연상시킵니다. [그분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하시매
그녀가 이르되, 주여, 참으로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마15:26-27).
주님은 자녀들이 아닌 개들에게 상을 펴지 않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러분을 만나 성경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안다고 떠들 때 주의해서 보십시오.
그들이 아는 것은 어떻게 아는 것인가? 개들처럼 어디서
주워 먹은 것입니다. 그들은 주워들은 풍월로 몇 마디
지껄이는 것이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개들처럼 주인 되신 주님의 면전에서, 주님의 상에서
빵을 먹지 못하고 던져 주는 부스러기를 먹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더 먹으려고 하지도 않으며,
상에서 떨어지는 것이 마치 전부인 줄로 압니다. 얼마 전에
어떤 형제를 만나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 순수한 말씀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데, 비슷한 것 같지만 자꾸 부딪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형제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성경
지식을 기초로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라고 했더니, 배웠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라고 했더니 성경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틈을 타서 "그 내용은
당신이 보는 성경에 없는데 어떻게 성경에서 배울 수
있습니까?"라고 했더니, 있다고 우겼습니다. 저는 그
형제가 알고 있는 많은 지식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없고, 오직 킹제임스 성경에만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면서
"형제가 아는 지식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은
것입니다. 형제의 믿음과 영적 지식은 킹제임스 성경의
유산이요, 킹제임스 성경의 부스러기들을 먹은 것입니다.
이제 상에 올라와서 먹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간절히
권면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
자신 앞에 펼쳐 놓은 상에서 배부르게 영적 양식을 먹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허기져 있지 않습니까?
성소의 테이블은 항상
주님 앞에 있습니다. 먼저 30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그 상
위에 전시하는 빵을 두되 항상 내 앞에 둘지니라.](30).
빵은 주님 앞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소의 테이블 위에는 12개의 빵을 놓았습니다. 빵의 개수는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수와 일치합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만들게 하신 것은 주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을 먹이시고,
원수들 앞에서 상을 차리셨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은 40년간 광야에서 주님이 주시는 식탁을 통해
양식을 공급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는 사람이
신들을 위해 상을 차립니다. 그리고 산해진미를 차리고,
정성을 다해 공양을 바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교도들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상을
차리셨습니다.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입니다
.
우리는 여기서 성막을 만드는 순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언약궤를 만들었고, 그 다음에 긍휼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제 전시하는 빵을 두는 상을
만듭니다. 언약궤와 긍휼의 자리는 지성소에 있는 것이고,
상은 성소에 있습니다. 지성소는 영에 해당하는 부분이고,
성소는 혼에 해당합니다. 중요도는 언제나 영, 혼, 육의
순서입니다. 하나님의 일, 영적인 가치는 혼적인 것보다
훨씬 중요하며, 혼적인 가치는 육적인 가치보다 우선합니다.
영적 가치를 중요시 하던
시대에서 혼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문주의(Humanism)과
철학, 교육 등은 사람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혼적(정신적) 가치보다 육신적 가치(물질적 가치)를
더 중요시 여김으로써 돈 벌이, 밥 벌이에만 혈안이 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의 정신,
세상의 영과는 동화되지 말고, 십자가의 좁은 길을 걸으며
영적 가치를 쫓아,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세상과 일치된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과 일치하고, 세상과
동화되고, 세상과 친구됨으로써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
고사하고 버려진 소금, 기름 없는 등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고,
세상의 철학과 세상 정욕과 가치관을 단호히 거부했는데,
이는 세상 신을 거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를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롯은 소돔을 향해 장막을 쳤고, 결국 그 도시에서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왔을 때 아브라함은
장막에서 맞았지만 롯은 집에서 맞았습니다. (창18:1,19:1비교).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상을 받아 먹기보다 스스로 벌어서
먹기를 원했던 롯이 아브라함보다 풍요로운 삶을
살았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평생 동안 모은
재산, 애써 얻은 명성은 모두 불타고, 한 줌 재 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상속받고자 열심이었던 야곱의
영적 가치에 대한 추구와 허기진 배를 채우는데 마음이
다급했던 에서의 육신적 가치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의 신본주의와 사울의 인본주의가 바로 이 차이입니다.
하나님은 상(테이블)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광야에서도 식탁을 차리시며,
원수들의 눈 앞에서도 상을 차리십니다. 주님은 잔을 넘치게
하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들의
눈앞에서 내 앞에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하나님께서는
상을 펴시는 분이시며, 그 위에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
주십니다. 여러분은 롯과 같이 결코 재물을 쫓아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주님이 베푸시는 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소에 둘 상을 만들게 하시고, 그
위에 12개의 빵을 두 줄로 가지런히 두게 하신 것은 이들에게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상에 올려 놓을 음식이
없다는 문제로 주님께 불평하고 투덜대었던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상을 준비할 수 있으리요? 하였거니와](시78:19).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풍족하게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식탁을 베푸시는 분이라면 이곳 미국에서 먹을 것을 쫓아
사는 성도들이야 말로 소돔을 향해 장막을 쳤다가 그곳으로
가서 살아 버렸던 롯이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또한 시팀나무로 상을 만들되 그 길이가 이 큐빗, 넓이가 일
큐빗, 높이가 일 큐빗 반이 되게 하고] (23). 상을 만드는
것은 언약 궤를 만드는 것과 재료과 방법이 같습니다. 시팀
나무로 만들고, 금으로 입힙니다. 높이는 언약 궤와 같은데
나머지는 작습니다. 상이 언약 궤와 높이가 같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아들로, 친구로 맞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벗이라 부르셨듯이, 제자들을 친구라 하셨습니다. 이사야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씨야,](사41:8)라고 하셨고, [주는
우리의 하나님 곧 전에 이 땅의 거주민들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이 땅을 주의 벗 아브라함의
씨에게 영원히 주신 분이 아니니이까?](대하20:7)라고
불렸습니다. 주인과 종은 같은 상에서 앉아 먹지고 못합니다.
신하와 임금은 같은 상이나 같은 높이, 같은 크기의 상에서
먹지 못합니다. 높은 지위에 앉은 사람은 높은 위치에
앉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상의 높이를 언약궤의 높이와
같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친구로, 아들로 받아 주십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친구라 불림을 받을 수 있었습니까?
말씀을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이것을 그에게 의로
인정하셨느니라, 말씀하시는 성경 기록이 성취되었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을 받았느니라](약2:23). 우리는
모두 아브라함의 자녀들로서 동일한 부름을 받습니다.
상의 길이가 이 큐빗이란
것은 교제의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둘이란 수는 합심,
동역, 함께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함께 걷겠느냐?] (암3:3)란
말에서처럼 둘은 한 마음, 한 몸을 가리키는 경우인데 상의
길이가 두 큐빗이란 의미는 주님과 우리가 함께 걷고, 친교(親交)한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너비는 일 큐빗인데 일은 단일성,
통일성을 의미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금은
주님의 신성을 상징하고 나무는 주님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언약궤와 빵을 두는 상은 둘 다 육신을 입으신 우리 주님을
그대로 예표합니다. 성막의 모든 기구들이 다 주님을 한
가지 이상씩 예표하는 의미가 있는데, 빵을 놓은 상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빵을 가지고 오신
분이십니다. [35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생명의 빵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결코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8내가
곧 그 생명의 빵이로다.](요6:35,48)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생명의 빵으로서 우리의 영적 양식이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상이 되십니다. 주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빵과 포도즙을
나누셨습니다. 새 언약을 세우시며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만찬을 통해 주님을 기억하도록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잔을 성경은 주의 잔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주의 상이 나옵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마귀들의
잔을 /겸하여/ 마실 수 없으며 {주}의 상과 마귀들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없느니라.] (고전10:21). 주님의
상이란 바로 주님을 기억하며 먹는 빵을 먹는 상입니다.
주님의 상이란 우리에게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상이요, 우리에게 교제를 나누는
상입니다. 식탁은 단지 배를 채우는 장소만이 아니라 친교의
장입니다. 주님의 잔, 주님의 상은 주님과 우리가 친교하는
교제의 장소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는 어느
나라나 다 마찬가지인데, 우리 주님 역시 이 방식을 자주
사용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晩餐)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계3:20).
주님의 상에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특권입니까? 사람들은 세상에서
명망 있는 사람, 좀 권세 있는 사람과 한끼 식사를 하는 것도
매우 영광으로 알고 자랑합니다. 요즘 미국에서는 매우
유명한 스타와 한끼 식사하는데, 적게는 몇 만불에서 많게는
몇 백만 불까지 가격을 매겨서 선착순으로 신청자를 받아
기금을 모으는 그런 프로그램이 자주 마련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돈을 받지 않으시고 식사에 초청하십니다. 이것이
성소에 놓인 상의 의미입니다. 성경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사무엘하 9장을 보십시오.
왕이 된 다윗은 사울의 집에서 종이었던 시바에게 묻습니다.
[다윗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으로 인하여 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리라, 하니라.](9:1). 다윗은 먼저 사울의 집에 은혜를
베풀고자 작정했고, 선포했습니다. 사울의 집에서 먼저
도움을 청하거나 은혜를 구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는 은혜 베풀 자를 찾고 계십니다. [왕이 이르되,
사울의 집에 아직까지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친절을 베풀고자 하노라, 하니 시바가
왕께 이르되, 요나단에게 아들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저나이다, 하매](삼하9:3). 몸이 불구인 요나단의 아들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다윗은 즉시 데려 오게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역적의 집안이라 찾아내어 죽이려 할텐데
다윗은 원수의 집안의 아들을 찾아 내어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이때에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 얼굴을 대고 엎드려 경의를
표하니 다윗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하매 그가 대답하되,
보소서, 주의 종이니이다, 하니라.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이는 내가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인하여
반드시 네게 친절을 베풀 것임이라. 내가 네 조상 사울의 온
땅을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계속해서 내 상에서 빵을
먹을지니라, 하니 ](삼하9:6~7). 다윗은 '너는 계속해서 내
상에서 빵을 먹을지니라'고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왕의
상에서 빵을 먹었습니다. 단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베푼 은혜입니다. 왕의
상에서 빵을 먹게 했다는 것은 왕자와 같은 대우를 해
주었음을 의미합니다. [므비보셋에 관하여는 왕이
이르기를, 그가 왕자들 가운데 하나처럼 내 상에서 먹으리라,
하였더라.](삼하9:11b). 이것이 바로 주님의 상에서 음식을
먹는 성도들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대우하십니다.
여호야긴 왕을 한 번
보십시오. 그는 일찍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왔던 왕입니다(왕하24:12). 그는 오랫동안 고생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년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긴이 포로로 잡혀간 지 삼십칠년째 되는 해 곧 바빌론
왕 에빌므로닥이 통치하기 시작한 해 십이월 곧 그 달
이십칠일에 그가 유다 왕 여호야긴을 감옥에서 내어 그의
머리를 들게 하고 그에게 친절하게 말하며 그의 왕좌를
자기와 함께 바빌론에 있는 왕들의 왕좌보다 높이고 그가
입은 죄수의 의복을 갈아 입히니 그가 평생토록 항상 왕
앞에서 빵을 먹었고 그의 쓸 것은 왕이 계속해서 그에게
주되 날마다 정한 비율로 평생토록 주었더라.](왕하25:27~30).
감옥에서 숨을 거둘 줄 알았던 포로 여호야긴이 왕 앞에서
빵을 먹었습니다. 성소의 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속적인 회복의 은혜를 베풀 것임을 가르쳐 줍니다.
24-25절입니다. [순금으로
그것을 입히고 거기에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그 상에
돌아가며 손바닥 넓이만 한 턱을 만들고 그 턱에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24-25). 상의 사방으로 돌아가면 금테를
입혔는데, 금테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a crown of gold' 즉 금
왕관이란 뜻입니다. 주님은 영광의 왕이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분이십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이
예수님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사 천사들보다 조금
낮아지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2:9).
11절에서 보았던 언약궤의
금테(crown)는 하나님 아버지의 왕관입니다. 주의 상(식탁)
위에 있는 금테(crown)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왕관입니다.
출애굽기 30:3의 제단 위에 씌운 금테(crown)는 성령의
왕관입니다. 우리는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왕관을 보는데,
성막의 제작 과정에 나타난 삼위일체의 진리입니다. 언약궤
위의 금테는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보여
주고, 주의 상 위에 있는 금테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며, 제단 위에 있는 금테는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중보하시는(롬8:26) 성령의 사역을 보여 줍니다.
상의 모퉁이에 턱을 둔
것은 보호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운반할 때도 상에
가지런히 놓인 빵은 밖으로 흐르거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상은 금테(금 왕관)로 온 사방이 둘러 졌다는 사실은 주님의
영광과 권능이 늘 우리를 두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상에 돌아가면 손바닥 넓이만한 턱을 만들었다는
것은 주님의 손에서 아무도 무엇을 빼앗아 갈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요한복음 10:28에 이르기를,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요10:28).
상에 두른 둘레들은 성도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나타냅니다. 둘레(border)란 말은 경계선을 의미하는데 주님이
정하신 경계에는 아무도 넘나들 수 없는 것입니다.
26-27절입니다. [그 상에
금 고리 네 개를 만들어 그 네 발 위에 있는 네 모퉁이에
달되 턱을 마주보게 달아서 상을 나르는 막대들을 놓을
자리가 되게 하라. 또 너는 시팀나무로 /운반/ 막대들을
만들어 금으로 입히고 그것들로 상을 나르게 할지니라](25-27).
상의 제작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특징적인
것은 상의 네 발 위에 있는 모퉁이에 턱을 만들고, 거기에
고리를 달아서 운반할 수 있는 운반용 상이었다는 점과, 상
모퉁이에 턱을 마주 보게 달아서 상을 나르는 막대를
놓았다는 것이 일반 상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광야의 성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움직일 때마다 이동해야
하는 이동식 성막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을
순례하는 순례자들입니다. 성막의 상이 있는 한 우리의
필요는 채워지며, 주님과 우리의 교제는 결코 단절되지
않습니다.
29절입니다. [너는 그
상의 접시와 숟가락과 덮는 데 쓰는 덮개와 대접을 만들되
순금으로 만들지니라.](29). 접시는 제사장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빵을 가져와서 먹는 그릇이었음은
자명합니다. 숟가락과 덮개는 향료와 연관이 있습니다.
대접들은 '음료 헌물'을 드릴 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기명들은 우리가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 때 쓰는
기명들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빵과 잔(대접)은 주님의
살과 피를 나타내는 것은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이 베푸시는 빵과 잔을 통해 살고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한 성도들은 영적 양식보다 육신적 양식에만
정신이 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30절입니다. [너는 그 상
위에 전시하는 빵을 두되 항상 내 앞에 둘지니라.](30).
빵을 항상 주님 앞에 두게 하셨는데, 무엇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showbread/보여 주는 빵
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이스라엘 12 지파를 날마다 먹이신다.
2. 하나님께서는 일곱으로
일하신다. 일주일마다 빵은 교체되었는데 8일째는 새 빵을
올려 두었습니다.
3. 빵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4. 빵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상징한다. 성소에는 창이 없었는데 유일한 빛은
등잔대 위의 불, 즉 성령의 조명이듯이 성도가 성소에서
먹을 수 있는 빵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만 산다(눅4:4).
5. 빵은 주님을 섬긴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는데, 이는 주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의 양식을 책임지신다.
6. 전시하는 빵은 뭔가를
보여 주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주님의 죽으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여 줍니까?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라.](고전11:26). 빵이
보여 주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전시하는 빵은 제사장들이
성소에 들어와 주 앞에서 먹는 먹는 빵입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주님을 섬기는 장소이며, 주님과 교제하는
장소이며, 주님 앞에 놓인 빵을 먹는 곳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안식일마다 빵을 [주] 앞에 진열할지니 이것은
영존하는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취한 것이니라.
이 빵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것이 될지니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라. 그 까닭은 이것이 영속하는
법규에 따라 불로 예비하는 [주]의 헌물 중에서 그에게
지극히 거룩한 것이기 때문이니라.](레24:8~9). 저와
여러분은 모두 주님의 제사장들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제사장은 주님 앞에 희생물을
드려야 합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벧전2:5).
[그러나 너희는 택함 받은 세대(世代)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특별한 백성이니 이것은
너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신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가 보여 주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주님과 늘 밀접한 친교를 유지해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 앞에 놓인 빵을 먹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매일 성소에 있는 주님 앞에 놓인 빵을 먹습니까?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상위에 놓인 전시하는 빵은 제사장들이 결코 앉아서
먹을 수 없습니다. 지성소와 성소 어디에도 의자는 없습니다.
서서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은 편안히 쉬고 즐기는
장소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봉사와 희생의 장소입니다.
먹고 나서는 곧 바로 나가서 주의 백성들을 섬겨야 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밤에도 이미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음식을 나누면서 다음에는 뭐 먹을까?
다음에는 뭐하며 놀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빨리 먹고
나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그런 신실한 종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