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5:10-16
요절: 출애굽기 25:16
주님은 백성들이 성막
제작을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친 자원 헌물로 성막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경에는 그림이나
사진이 없고 오직 기록된 말씀만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오직
마음 속으로 성막의 모형을 그릴 수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단 한 장의 그림이나
도표를 그려 넣으시지 않으시고 다만 말씀만 해 주셨습니다.
시중 기독교 서점이나 인터넷에 성막에 대한 모형 사진이나
그림이 매우 많이 있지만 다만 참고 자료일 뿐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광야의 성막을 어떻게 지으라고 했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맨 처음 성막
제작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언약궤입니다. [그들이
시팀나무로 궤를 만들되 그 길이가 이 큐빗 반, 넓이가 일
큐빗 반, 높이가 일 큐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입히되 그 안팎을 입히고 그 위에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10-11). 출애굽기 37:1에 보면 언약궤를 만든 사람은
‘브살레엘’이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성막 제작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주님이 지혜를
주셔서 손재주가 얼마나 좋았던지 모세가 말만하면 그대로
다 만들어 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언약궤는 시팀나무로
만들어졌는데 광야에서는 가장 내구성이 강하고, 튼튼한
나무입니다. 한국인들이 오동나무나 향나무를 고급 목재로
여기는 것처럼 이스라엘은 시팀나무를 가장 견고하고
튼튼한 나무로 여겼습니다. 후에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백향목을 준비했지만 언약궤나 지성소 등에는 오직
시팀나무만이 사용되었습니다. 시팀 나무는 주님이
정해주신 규격대로 크기를 다듬어서 안팎으로 순금을
입혔습니다. 그리고 금테를 둘렸습니다. 크기는 미국
도량형으로 하면 길이 4피트, 너비와 높이는 2피트 반의
상자입니다. 주님은 언약궤의 안과 밖을 모두 순금으로
입히고, 그 위에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게 하셨습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 다시 한번 증거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서 9:4에 [거기에는
금 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히9:4)라고 했는데, 언약궤는
금으로 입혀졌습니다. 예전의 성경은 붉은 색으로 둘레를
둘렀는데 반해, 오늘날 성경을 금색으로 두르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주님께서 성막 제작에서
언약궤에 대해 맨 먼저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연
언약궤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보좌를 예표합니다.
언약궤가 없다면 성막의 다른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후에 솔로몬의 성전이 만들어질 때 성막의 모든
것이 새로 만들어지지만 오직 한 가지 언약궤는 새로 만들지
않고 본래 성막에 있던 언약궤를 그대로 옮기기만 합니다.
언약궤는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신 모든 언약을 그대로 성취하시는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 지성소에서 가장 거룩한
것이었으며, 다른 모든 기구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제작되고 배치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언약궤에 담긴 영적 의미를 고찰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언약궤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성경에는 두 번 궤(Ark)가
만들어졌는데 한번은 노아의 방주이고, 한 번은 성막에 놓인
언약궤입니다. 방주가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했듯이
주님의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방주나 언약궤는
둘 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예표합니다.
하나님은 방주를 지을 때 친히 그 모양과 제작 방법을
가르쳐 주셨듯이 언약궤 역시 동일합니다. 이는 구원이 결코
인간의 사고나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초자연적 계시, 말씀을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임의로 만든 방주(Ark)나 언약궤(Ark)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는 구원의 창시자와 완성자가 오직
주님이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영적 교훈이라면 하나님께서 먼저 행동을 취하시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없다는 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며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나오시는 것이지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바벨탑을 축조했던
프리메이슨(Free Mason)들은 자신들이 지은 건축물로 하늘에
까지 닿게 했지만 결코 하늘에 갈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석공이나 목수가 만든
황홀하고 웅장한 구조물에도 주님은 거하시지 않으시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정해주신 건축물만이 사람들을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합니다. 하나님은 바빌론의 공중 정원이나 중국의
자금성이나 로마의 웅장한 콜롯세움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으시지만 자신이 명하신대로 짠 작은 궤짝 하나에 주님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지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어떤 명성을 누리고,
성인으로 칭함을 받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관심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종파의 창시자들이나 정치인들이나
왕이나 장군들, 과학자들이나 발명가, 예술가, 철학자 등
사람들이 몰려 다니며 칭찬하고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눈길조차 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막
외에 다른 건축물을 주시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언약궤의 재료는 나무와
금입니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잘 예표합니다. 언약궤 안에는 주님이 친히 기록하신 돌판(말씀)을
담아 두셨는데,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시며, 하나님의 말씀만을 말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기뻐하오니 참으로 주의 법이 내 마음 속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언약궤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신격을 예표합니다. 반면 성막의 다른
기명들, 기구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하신 일들을
예표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주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그분이 행하신 일들에 관심을 갖지만 사실은 주님이
누구신가?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항상 순서는 주님과
주님이 행하신 사역입니다. 요한의 증거를 보십시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요1:29).-
[... Behold the Lamb of God (person), which
taketh away the sin of the world (his works).] 순서는 늘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증거 역시 동일합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음이라.
/For I determined not to know any thing among you, save
Jesus Chris (person), and him crucified(his
works).](고전2:2).
다시 10절을 주목해서 보면
“그들이 시팀나무로 궤를 만들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팀나무는 가시 나무의 일종인데, 광야에서 자랄 수 있는
수목 가운데 몇 안되는 나무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리시고, 고운 모양도 우아함도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다(사53:2)고 한
그대로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시팀 나무는 밤에 가지를
자르거나 구멍을 내어서 나오는 수액을 받아 사람들의
약재로 사용했는데,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는 것을 예표합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53:5).
시팀 나무의 또 한 가지의 특징은 좀처럼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이 죽으셨지만 썩음을 보지
않으시고 부활하심을 예표합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은 시팀
나무로 언약궤의 재료로 삼으셔서 궤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언약궤는 사람이 주님의 명을 받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10:3-5에 보면 [내가 시팀나무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두 개를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주]께서 그 집회의 날에 산에서 불 가운데서
너희에게 이르신 열 가지 명령을 쓰시되 처음에 쓰신 것같이
그 판들에 쓰시고 그것들을 내게 주시기에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주]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들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그 판들이 거기 있느니라.](신10:3-5)고
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직접 궤를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언약궤에 넣을 돌판을 받아 산에서 내려왔을 때
백성들이 우상 숭배의 범죄로 말미암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받아 가도록 하셨는데, 이
때 모세는 직접 궤를 만들었고, 돌 판 두개를 다음어서
올라갔습니다. 지성소 안에 둘 언약궤는 브살레엘과
아홀리압 등이 만들었습니다(36:1).
모세는 언약궤 안에 넣을
돌판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은 배교하여 이집트로
돌아가자며 합창을 했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을
숭배했는데, 주님이 주신 언약의 돌 판은 그들 앞에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긍휼의 자리를 만드시기 전에
그들 앞에서 돌 판을 깨뜨리심으로 율법을 이기는 주님의
긍휼을 필요로 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긍휼의 자리를
만들면서 그것이 왜 필요한지, 왜 만들어져야 하는지 절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도 주님의 긍휼없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언약궤의 크기에
대해서 잠깐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이 시팀나무로 궤를
만들되 그 길이가 이 큐빗 반, 넓이가 일 큐빗 반, 높이가 일
큐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입히되 그
안팎을 입히고 그 위에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10-11).
특징은 길이, 너비, 높이에 모두 ‘반’(half)이 들어 가
있습니다. 반(half)이란 온전한 것을 잘라야 하는 것입니다.
반이라고 하면 온전한 한 개를 두 개로 나눈 것이며,
전체에서는 부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대로 [이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볼 것이요,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알게 될 것임이라.](고전13:12). 지금은 희미하게,
부분적으로 주님을 압니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왕에게 이르되, 내가 내 땅에서
당신의 행적과 당신의 지혜에 관하여 들은 소문이 참되도다.
그러나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내
눈으로 본즉, 보라,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번영이 내가 들은 명성보다 더 크도다.](왕상10:6-7).
“반”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주님에 대한 지식은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 큐빗 반은 오 큐빗의
반이고, 일 큐빗 반은 삼 큐빗의 반입니다. 오와 삼은 성경의
수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는 죽음의
수입니다. 삼은 완전수입니다. 주님은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그 궤에 금
고리 네 개를 부어 만들어 그 궤의 네 모퉁이에 달되 이쪽에
고리 두개, 저쪽에 고리 두 개를 달지니라.](12). 언약궤가
솔로몬의 성전이 만들어져 지성소에 안착되기 까지는
광야에서 계속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네 모퉁이에 고리
두개씩 달아서 막대기를 끼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운송을 위한 것입니다. 고리를 만들게 하신 것은 언약궤를
수레에 싣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약궤에 네 개의 고리가 있었다는 것은 마치
네 개의 그룹들을 연상시키는데, 주님은 그룹들 가운데
거하십니다(겔1,10장). 후에 다윗이 언약궤의 고리에 막대를
끼워서 옮기지 않고 수레에 실어서 옮기다가 혼이 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기브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그 궤를 가지고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히오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삼하6:3).
이는 언약궤와 율법에 대한 무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결국
웃사가 흔들리는 궤를 잡다가 즉사하는 사고를 맞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만들 때부터 운반용 막대기를 두셨는데,
수레에 실어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이 법이 아니라 인간의
편리성에 기초한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믿음은
하나님의 중심이 아니라 자신들의 편리와 실용성, 합리성에
근거함으로써 공공연히 주님의 법을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는 모두 웃사의 동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편리한 대로 예배를 보고, 우리가 편리한 방식대로 시간을
정하고, 우리가 편한대로...뭐든지 사람의 편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지라 조금의 불편도
매우 짜증을 내는 성도가 허다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약궤의 고리대신에 밑에 도르래나 바퀴를 만들자고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이 말하는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세가 되기까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13-15절을 보십시오. [너는
시팀나무로 /운반/ 막대들을 만들어 금으로 입히고 그
막대들을 궤의 양쪽 고리들에 끼워 그것들로 궤를 나르게
하고 또 그 막대들을 궤의 고리들에 끼워 두고 거기서
빼내지 말지니라.](13-15). 언약궤를 옮기는 막대들 역시
동일한 재료인 시팀 나무로 만들었고, 금으로 입혔습니다.
주님은 막대기들은 고리들에 늘 끼워 두도록 하셨고,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후에 지성소에 둘 때 비로소
빠졌습니다. [또 그들이 /운반/ 막대들을 빼내었으므로 이
막대들의 끝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 앞의 성소에서는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였더라. 이 막대들이 이
날까지 거기 있더라.](왕상8:8).
16절입니다. [너는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그 궤 속에 넣을지니라.](16). 이렇게
만들어진 궤 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제작하신 십계명의 두
돌 판을 넣게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세
가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금 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히9:4).
그런데 역사서에 따르면 언약궤 속에는 돌판 외에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궤 안에는 두 개의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었으니 이것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에 [주]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왕상8:9). 이 두
말씀은 흔히 성경의 모순이라고 알려진 구절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순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4은 성막의 언약궤 내에
있었던 내용물이며, 열왕기상 8:9에는 성전에 있었던 언약궤
내에 있었던 내용물입니다. 성막의 언약궤에 있었던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광야시대를 지나 언약궤가 솔로몬의
성전에 안치되었을 때는 궤 안에 두 돌판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왕상8:9). 다른 것들이 언제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직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
말씀뿐이란 것을 엄숙히 말씀해 주십니다.
언약궤 안에 있었던
내용물은 모두 증거를 위한 것입니다. 만나 항아리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주님의 신실한
공급하심을 보여 주시고, 그 증거를 마음에 새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일 오멜을 가득히 담아 [주] 앞에 두어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하니 아론이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니라](출16:33-34). 주님은 이것들을 후대의
자손들에게 증거하기 위해 보관하도록 하셨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반역하는 백성들을 위해 증거하도록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막대기는 증거/판/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하는 자들을 대적하는
증표가 되게 하며 또 너는 그들로 하여금 나에 대한 불평을
그치게 하고 이로써 그들이 죽지 않게 할지니라, 하시니](민17:10).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반역하는 자들을 대적하는 증표로서
보관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3가지의 증거
장치를 마련해 두신 것입니다.
이를 영적으로 단계적으로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불신으로 주님께
반역하고 대적하는 백성들에게 영적 양식으로 먹이셨습니다.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으며](고전10:3). 만나는
영적 음식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이것을 천사의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천사의 음식을 먹었으며
그분께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풍족히 보내셨도다.](시78:25).
이는 광야의 백성들이 다가오는 세상의 능력을 맛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히6:5) 바로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하나님의
산으로 인도하시고 자신의 거룩하심을 보이심으로 이들이
죄인 됨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세를 제외하고 이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산에 오르지 못했습니다(출19:21). 이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충분히 죄인 됨을 깨달았고 자신들이 결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에 곧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함으로 죄악에 빠져들었는데
결국 중보자 모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건짐을 얻습니다. [이르되,
오 {주}여, 이제 내가 주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우리 가운데서 /함께/ 가시옵소서. 이는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한 백성이기 때문이니이다. 우리의 불법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주의 상속으로 삼으소서, 하니라.](출34:9).
율법이 들어오면 누구나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나를 먹고, 영적 음료를 먹을 때는
깨닫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성과 하나님의 거룩하심 등을
율법을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롬3:20). 바울 사도는 [그러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오히려 율법을 통하지 않고서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니 이는 율법이, 너는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욕을 알지 못하였을 것임이라.](롬7:7)고
했습니다. 언약궤의 돌 판이 증거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인 됨입니다. 주님의 돌 판은 언제나 이들의 죄성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론의 지팡이는 살아있는
나무가 아니라 바싹 마른 죽은 나무였습니다. 죽은 나무에서
싹이 났는데 이는 부활을 의미하며, 아론은
대제사장이었으므로, 부활한 대제사장을 의미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데 이분을 거역하고 반역하면 누구든지 지옥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지성소에 두게
하신 모든 물건은 모두 증거를 위한 것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 책 역시
증거를 위한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세가 이
율법의 말씀들을 책에 기록하기를 마친 뒤에 [주]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 율법
책을 가져다가 [주] 너희 하나님의 언약궤 옆에 두어 거기서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31:24-26).
마지막으로 언약궤의
다양한 이름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언약궤는 증거궤로
불렸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긍휼의 자리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명령으로 줄 모든 것에 관하여 너와 대화하리라.](출25:22).
이는 언약궤 안에 있는 십계명을 적은 두 돌판이 증거판이라
불렸기 때문입니다(31:18). 성경의 모든 내용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증거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성경을 탐구하라.
이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이니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거하느니라.](요5:39)고
했습니다. 주의 증거를 받으십시오. 그럼 증거의 능력을
지닌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서신이며, 증인입니다.
둘째, 언약궤라고
불렸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름입니다. [그들이 [주]의
산에서 떠나 사흘 길을 갈 때에 [주]의 언약궤가 그 사흘
길에서 그들 앞에 나아갔고 그들을 위해 쉴 곳을 찾았으며](민10:33).
이는 주님의 말씀이 모두 언약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약이란 말이 구약에서만
거의 300회나 등장하는데 이는 우리 주님이 언약의 말씀에
따라서만 일하시는 분이심을 스스로 입증해 주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더 나은 언약의 중재자이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상속/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7:22).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 더욱
뛰어난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또한 그분께서 더 나은
약속들 위에 세우신 더 나은 언약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이라.](히8:6).
새 언약을 세우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언약을
기억한다면 성도는 분리된 삶, 말씀 중심의 삶을 사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 주의 궤라고
불렸습니다. [온 백성이 깨끗하게 건넌 뒤에 [주]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눈앞에서 건넜으며](수4:11). 주의 궤란
말은 모세오경에는 나오지 않고, 역사서에만 등장하는
말인데 요단강을 건넌 후부터 사용된 말입니다. 주의 궤는
요단강을 건널 때나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항상 그들 앞서
나아갔습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전쟁의 사람이심을 보여
주는 예표입니다. [[주]는 전사(戰士)시요, [주]가 그분의
이름이시로다.](출15:3).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마치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벌이듯이 이 땅의 모든 원수들을
쳐서 무찌르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왕국을 세우시고,
온 땅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또 [주]께서 온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오직/ 한 [주]만 계시며
그분의 이름도 하나만 있으리라.](슥14:9). 주의 궤는
승리의 궤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러했듯이 모든 성도는 주의
궤가 예표하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앞 세우고,
겸손이 어린 양의 발 자취를 따름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궤라고
불렸습니다. [[주]의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더니 그곳에 하나님의 궤가 있더라.
사무엘이 잠자려고 누웠는데](삼상3:3).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기도 했고, 여기 저기 성막이 없는
곳에 이리 저리 옮겨 다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자기
백성에게 버림을 받지만 후에 영접을 받으시는 우리 주님을
예표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궤 곁에 있었듯이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궤가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해야 하며, 성령과 동행해야 합니다. 말씀 안에 살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다섯째, 주 하나님의
궤라고 불렸습니다.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밭이 있는 아나돗으로 갈지니 이는 네가 마땅히 죽어야
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네가 내 아버지 다윗 앞에서 {주} [하나님]의
궤를 메었고 또 내 아버지가 당한 모든 고난 중에서 너도
고난 당했은즉 내가 이 날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왕상2:26).
주 하나님이라고 할 때 주는 아도나이 즉 주인되심을 말하고,
하나님(여호와)는 언약을 의미합니다. 주 하나님의 궤란
복되신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궤를 말하는데, 언약궤를
메었다는 이유만으로 솔로몬은 자신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던 제사장 아비아달과 같은 역적을 살려 주었습니다.
반면 요압과 아도니야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주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면 죽을 죄를 살림받는데, 이는 죄인들이 어떻게
구원받는가에 대한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거룩한 궤라고
불립니다. [또 [주]께 거룩한 자들 곧 온 이스라엘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에게 이르되, 거룩한 궤를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집에 두라. 이 궤가 다시는
너희 어깨의 짐이 되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제 [주] 너희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섬길지니라.](대하35:3).
유대의 개혁적인 왕이었던 요시야는 완전히 타락해 버린
백성들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언약궤를 성전에 두도록
했습니다. 그동안 언약궤는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성전 청소를 하면서 비로소 율법 책을
발견할 정도였고(대하34:8), 유월절을 처음으로 지켰습니다(대하35:1).
성도들의 마음 속에 영적 부흥이 왔을 때 주님의 언약궤는
거룩한 궤로 불렸습니다. 이는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본보기입니다. 비천한
죄인들은 거룩한 궤를 통해 예표되는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한 성령, 거룩한 말씀을 통해 정결하고 깨끗함을 입게
됩니다.
일곱째, 주의 능력의
궤라고 불립니다. 성경 전체에 두 번 나오는 표현입니다. [오
[주]여, 일어나사 주의 능력의 궤와 함께 주의 안식처로
들어가소서.](시132:8/대하6:41).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권능이시며(고전1:24), 능력 있는
자위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해 줍니다. [그때에
주께서 주의 거룩한 자에게 환상 속에서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능력 있는 자 위에 도움을 두었으며 백성
중에서 택한 자를 높였도다.](시89:19).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언약궤가 주의 능력의 궤라 불리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연약함 가운데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얼마든지 강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약하지만 주의 능력의 궤가 되신
그리스도, 말씀을 통해 강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약궤에 대해서 다루어야
할 내용이 매우 많지만 계속 반복적으로 언급되므로 본문에
맞추어서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권별 강해 > 출애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을 만들되 (0) | 2006.08.08 |
---|---|
긍휼의 자리 (1) | 2006.08.08 |
내가 네게 보여주는 모든 것에 따라 (1) | 2006.08.08 |
나를 위해 성소를 만들게 하되 (0) | 2006.08.08 |
그들도 하나님을 보니 (0) | 2005.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