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5:17-22
요절: 출애굽기 25: 22
언약궤 위에는 긍휼의
자리(자비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언약궤 안에
넣고 그 위를 덮을 긍휼의 자리를 만들게 하셨는데 이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맨 처음 보여 주신 예가 언약궤를 통해 '언약의 하나님'이며,
다음이 바로 긍휼의 자리를 만들게 하심으로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주] 네 하나님은 긍휼이 많은 하나님이시므로) 그분께서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신4:31).
긍휼은 은혜와 비슷한 말이지만 약간 의미가 다릅니다. 긍휼(mercy)은
벌을 받아야 마땅한데 그 벌을 감해 주시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에 대해 베푸시는 주님의 속성은 본래 진노와
심판인데, 이를 주님께서 다른 대상에게 돌리고 마땅히
진노와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을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가? 주님은 주의 법도와 언약을 지키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이 모든 법도에 귀를
기울여 /그것을/ 지키고 행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키시고 네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니라.](신7:12). 긍휼이 여기는 자에게 주님은 자신의
긍휼을 베푸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주께서 주의
긍휼을 보이시고 올바른 자에게는 주의 올바르심을
보이시며](삼하22:26). 주님은 온 마음으로 주 앞에서 걷는
주의 종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이르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 앞에서
걷는 주의 종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긍휼을 베푸시나이다.](왕상8:23).
주를 신뢰할 때 주의 긍휼이 우리를 에워쌉니다.[사악한
자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으나 [주]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긍휼이 그를 에워싸리로다.](시32:10). 주께 소망을 두는
대로 주님은 긍휼을 베푸십니다.[오 [주]여, 우리가 주께
소망을 두는 대로 주의 긍휼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33:22).
우리는 완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실수와 허물로
인해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긍휼은 계속
필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주를 부르며 기도하는
혼에게 긍휼을 부어 주십니다. [이는, {주}여, 주께서
선하시고 기꺼이 용서하시며 주를 부르는 모든 자에게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이니이다.](시86:5). 시편 136편을
한번 펴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매절에서 주님의 긍휼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25번이나 반복적으로 주님의 영원하신
긍휼을 찬양하는데, 이는 긍휼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보여 주는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통해
말씀의 하나님을 긍휼의 자리를 통해 긍휼의 하나님을
계시하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17절입니다.[너는 순금으로 긍휼의 자리를 만들되 그
길이가 이 큐빗 반, 넓이가 일 큐빗 반이 되게 하고](17).
언약궤와 달리 긍휼의 자리는 나무로 만들어서 도금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긍휼의 자리는 율법의
돌판을 덮었습니다. 이는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는 진리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우리는 심판의 정죄에서
벗어났습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며,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저주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돌판
위에 긍휼의 자리를 만드시고 덮으심으로써 다음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려고 그들 모두를 믿지 아니하는 데 가두어
두셨음이라.](롬11:32). 우리는 모두 긍휼의 그릇들입니다. [이
긍휼의 그릇들은 우리니 곧 그분께서 유대인 중에서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들이니라.](롬9:24).
긍휼의 자리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이는 긍휼의 자리 양 끝에 위치한 그룹
두개를 통해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긍휼의
자리 양 끝에 금으로 그룹 두 개를 만들되 두들겨서 만들고
한 그룹은 이쪽 끝에 다른 그룹은 저쪽 끝에 만들어 긍휼의
자리 양 끝에 그룹들을 만들지니라.](18-19). 주님은 형체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이 계신 위치를
그룹들을 만들어서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이 사실을 자주
노래했습니다. 먼저 아삽의 시를 보면,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주는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이여, 주는 빛을 비추소서](시80:1)라고
했고, 다윗 역시[[주]께서 통치하시니 만백성이 떨 것이요,
그분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시99:1)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37:6에 이르기를[오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만군의 [주]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는 땅의
모든 왕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 주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나이다.](사37:16)라고 하는 말씀을 통해
주님이 성전의 지성소 어디에 거하시는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룹들 사이 즉 긍휼의 자리가
그분의 좌석이었습니다. 우리는 긍휼을 얻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주님이 계신 그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이
자리는 긍휼의 자리요, 은혜의 왕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왕좌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긍휼의 자리의 크기는
언약궤 위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언약궤의 길이와 너비가
같았습니다. 두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긍휼의
두께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그분의
긍휼이 크시기 때문이로다.](시103:11)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길이와 너비가 엄격하게 측정되어 있는데 이는
주님의 은혜의 시대가 교회 시대로 분명히 제한된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구원의 때는 한정없이 펼쳐지지
않습니다.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받을 만한 때에 내가
네 말을 들었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하셨음이니, 보라, 지금이 받아 주시는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하신 말씀대로 입니다. 물론
주님의 긍휼 역시 은혜에 비례합니다. 긍휼의 자리의 크기가
언약궤를 넉넉하게 덮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은 주님의 긍휼은 기록된 언약의 말씀과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없이 긍휼을 기대한다면 그는 헛된 망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긍휼의 자리는 언약궤보다 길지 않으며,
넓지 않습니다. 긍휼과 은혜, 영원한 생명은 어떻게 오는가? [은혜도
의를 통해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롬5:21)
말미암아 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긍휼은 정확히 우리
주님의 말씀, 행동과 일치합니다. 주로 말미암지 않는
은혜와 긍휼은 없습니다. 성경은 구주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늘 한분으로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복음주의를
자처하는 많은 주의 사역자들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의
풍성함을 강조하는 나머지 마치 긍휼의 자리가 언약궤 보다
훨씬 큰 것처럼 설교하는 예가 허다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 죽으심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불신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믿는 자들은 누구라도, 어떤 사람일지라도
확실하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그룹들은
자기 날개들을 높이 펴서 그것들로 긍휼의 자리를 덮게 하고
그들의 얼굴은 서로를 마주보게 하되 그룹들의 얼굴이
긍휼의 자리를 향하게 하라.](20). 그룹들의 가리키는
방향은 주님이 계신 방향입니다. 주님은 그룹들 사이 긍휼의
자리 위에 계십니다. 레위 지파의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피를 뿌릴 때 그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룹들 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거기서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세가 회중의
성막에 들어가서 그분께 말씀을 드리려 할 때에 증거궤 위
긍휼의 자리로부터 곧 두 그룹 사이로부터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목소리를 들었으니 /이는/ 그분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음이더라.](민7:89). 이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분명한 진리는 하니님께 예배드리는 자는 '반드시 영과
진리로'(요4:24) 경배드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언약궤와
긍휼의 자리를 통해서 이미 구약에서부터 주님은 참된
경배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언약궤를
볼 때 마다 말씀의 하나님- 즉 진리의 하나님을 보게 되고 그
위에 긍휼의 자리에 보이지 않으시며 그룹들 사이에 빈
공간을 볼 때 영이신 하나님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결코 예배가 아닙니다. 모든
이방 종교들은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다 먹을 것이나
헌물을 바치며 경배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아론의
금송아지처럼 헛된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 어떤
종교도 영과 진리로 경배드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무엇을 드리며, 눈에 보이는 무엇을 앞에 두고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약궤 위에 덮개로 덮인 긍휼의
자리, 그 위를 덮고 있는 그룹의 날개 사이에 거하시는
주님은 아무 형체가 없으시며 보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룹들을 위에
세워 두신 또 한 가지의 이유는 궁휼의 자리를 통해 용서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천상의 존재들에게
알리고자 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신비를 첫째 사람에게 둘째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권능들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십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 목적은 이제
교회를 사용하사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정사(政事)들과
권능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작정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이라.](엡3:9~11).
하늘의 천사들은 이 땅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 살펴 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이것들을 수행한 것이 아니요, 우리를 위하여
수행한 것임이 그들에게 계시되었으니 이것들은 곧 복음을
선포한 자들이 하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성령님과 더불어
이제 너희에게 전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갈망하는
것이니라.](벧전1:12). 그래서 주님은 그룹을 긍휼의 자리
맨 끝에 세워 두셨습니다. 하늘은 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한 명의 혼이 회개할 때 저 하늘에는 기쁨이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더 기쁨이 있으리라.](눅15:7).
여러분이 만약 하늘에 올라가 그들이 기뻐 노래하는 것을
본다면 그들은 '이 땅에 있는 누군가 회개한 것을 알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의 눈앞에서
기쁨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5:10).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고, 누군가가 그것을 듣고 거듭난다면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하는 사람들은 당연 저 위에 있는 천사들입니다.
천사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다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천사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께서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정하신 자같이 막다른 곳에 두셨으니 이는 우리가
세상과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음이라.](고전4:9).
긍휼의 자리를 향한
그룹들은 불타는 칼을 들고 범죄한 인간이 에덴의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동산 입구를
지켰는데, 이제는 주님의 긍휼을 입어 구원받는 것을 곁에서
목격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21절입니다.[너는 긍휼의
자리를 궤 위에 두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을지니라.](21). 이제 십계명의 돌판을 넣고 궤 속에
놓고 긍휼의 자리를 그 위에 두면 언약궤는 완성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로써 언약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
충분히 계시되었습니다. 성막 제작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우고 있습니다.
22절입니다.[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긍휼의 자리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명령으로 줄 모든
것에 관하여 너와 대화하리라.](22). 주님은 자신이 성막
어디에 거하시는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의 뜰, 성소, 지성소 가운데 지성소에 거하시며, 지성소
안에서는 증거궤 위에 두 그룹 사이 즉 긍휼의 자리에
거하십니다. 물론 누가 보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거기에 거하시며 말씀을 하십니다.
긍휼의 자리가 주는 영적
의미와 유익이 무엇입니까?
1.
긍휼의 자리는 주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긍휼의 자리가 아닌 율법의 돌판 위에
앉아 계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주님은 이 땅의
어딘가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중의 장막 한 가운데
지어진 성막의 지성소안 긍휼의 자리에 계십니다. 이 사실은
광야를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긍휼의 자리에 계시기에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불신과 주님을 시험하는 불경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죄와 허물 가운데 죽었지만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의 긍휼 때문입니다. [지나간 때에는 우리도
다 그들 가운데서 우리 육신의 욕심대로 행하였으며 육신과
생각의 욕망을 채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본래 진노의
자녀들이었으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인하여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3~5).
2.
긍휼의 자리는 언약궤 안에 있는 돌판을 완벽하게 가려
줍니다. 이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도 긍휼의 자리를 열고, 그
안의 율법의 돌판을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긍휼의 자리로
덮지 않은 채 언약궤 속에 있는 율법을 접하면 누구나
죽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역사적인 예를 보십시오.[벧세메스
사람들이 [주]의 궤를 들여다보았으므로 그분께서 그들을
치사 백성 중에서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시매 [주]께서 백성
중에서 많은 사람을 크게 살육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주]
하나님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분께서 우리를 떠나
누구에게로 가실까? 하더라.](삼상6:19~20).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긍휼의 자리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이와같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긍휼의 자리는 주님의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속량해 주는 보호제 역할을
합니다. 이 점에서 우리 주님을 잘 예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대속(代贖)하셨으니
이는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는 다 저주받은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이는 누구라도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 주님께서 율법의 저주를
속량하시지 않았다면 모두 율법 대로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긍휼의 자리는 하나님의 준엄한 율법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생명을 보존하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사랑의
상징입니다.
3.
언약궤 위에 있는 긍휼의 자리에는 피가 뿌려졌습니다. [그는
또 수소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긍휼의 자리 위에
동쪽으로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긍휼의 자리 앞에
일곱 번 뿌릴지니라. 그 뒤에 그는 또 백성을 위한 죄 헌물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으로 들어가서 그
수소의 피로 행한 것같이 그 피로 행하여 긍휼의 자리 위와
긍휼의 자리 앞에 뿌릴지니 곧 그는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함과 그들의 모든 죄로 말미암은 범죄들로 인해 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부정함 가운데 거하는 자들 속에 머무는
회중의 성막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할지니라.](레16:14~16).
이는 우리 주님께서 흘리신 피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
피로 인해 우리는 긍휼을 입었으며, 죄가 가리워지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오직 둘째 /성막/에는 대제사장이
홀로 해마다 한 번씩 들어가되 자기와 백성의 잘못으로
인하여 /주께/ 드리는 피 없이는 들어가지 아니하였나니](히9:7).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긍휼의 자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곳입니다.
4.
긍휼의 자리는 만남의 장소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일년에 단 한번씩만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언제나 아무 때나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누구든지 주님의 피를 믿기만 하면 그 피를
힘입어 언제든지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죽으실
때 성막의 휘장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이에, 보라,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들이 터지고](마27:50~51). 성소와 지성소를 막는
베일이 사라지고 새롭고 산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우리는 구약의 대제사장들조차 결코 누릴 수 없었던 지위를
누리는데, 우리는 모두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레위 지파이의 계열이 아닌 멜기세덱 계열의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이들을
다스리는 권능이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분과 함께 통치하리로다.](계20:6).
이로써 우리는 신정 일치, 재정일치 국가인 천년 왕국에서
왕과 제사장의 겸직을 누리게 됩니다(계1:6, 5:10).
5.
긍휼의 자리는 교제의 장소입니다. 주님의 긍휼이
아니면 누가 감히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까?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공로나 의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의 긍휼로 구원받습니다. [오 [주]여, 돌아오사
나의 혼을 건지시옵소서. 오 주의 긍휼로 인하여 나를
구원하소서.](시6:4). 시편 기자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오 이전의 불법들을 기억하사 우리를 치지
마시오며 주의 긍휼이 속히 우리보다 앞서 가게 하소서.
이는 우리가 심히 비천하게 되었음이니이다.](시79:8).
우리는 주의 긍휼로 구원받아, 주의 긍휼로 주님과 친교를
갖게 됩니다. 주님은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긍휼의
자리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명령으로 줄 모든 것에 관하여 너와
대화하리라.](출25:22). 주님이 '거기서 너와 만나고 ...
긍휼의 자리 위에서 ... 너와 대화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곳에서 말씀하신다는 것은 마지막 날들에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말씀'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주님께서는 어디에서나 말씀하실 수 있지만
긍휼의 자리에서 모든 것에 관하여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점에서 긍휼의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이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히1:2).
오늘 우리는 언약궤
다음으로 만들어진 긍휼의 자리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모두 주님의 풍성한 긍휼을 힘입어 복음에
합당한 경건의 능력으로 살아 갈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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