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말씀




말씀: 출애굽기 27:9-19

요절: 출애굽기 27:9


하나님은 성막의 뜰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막은 안 뜰(마당)이 있고,
바깥뜰이 있는데 바깥뜰을 일컬어 이방인의 마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막 밖의 전 지역이 이방인의 마당입니다.
이방인들은 이곳까지는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이곳은
우상숭배, 살인, 간음, 도둑질, 여러 가지 불의와 악이
행해지는 죄의 처소입니다. 사죄의 은총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요, 버림받은 자의 거처입니다. 바깥뜰에서 문을 통과해
성막 안으로 들어서면 성막 안 뜰입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안 뜰에 대한 것입니다. 성막의 뜰은 회중의
성막이라고 불립니다. [뜰의 현수막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밑받침들과 뜰 문의 현수막과 그 줄들과 그 말뚝들과 회중의
장막 곧 성막에서 섬기는 일에 쓸 모든 기구와
](출39:40).
회중의 성막은 번제 헌물이 드려지고 주님을 경배하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일반 회중들의 예배는 모두 이곳
성막의 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너희 대대로 주
앞에서 회중의 성막 문에서 항상 드릴 번제 헌물이니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인하여 회중의
성막이 거룩히 구별되리라
.](출29:42,43). 성막 뜰은
백성들이 주님께 헌물을 드리고, 주님께서 열납하시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지성소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뜰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응답하시고, 말씀해
주십니다.


뜰의 너비는 남쪽 길이가
100큐빗인데 약 45미터요, 세마포로 현수막을 치게 했습니다.
현수막 기둥이 20개였고, 놋 받침이 20개였습니다.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만들었고 북쪽은 남쪽과
동일합니다.


서쪽은 길이가 50큐빗의
현수막을 치고, 기둥이 10개였으며 놋 받침도 열 개였습니다.
동편 역시 50 큐빗의 현수막이 기둥 셋과 놋 받침에 걸려
있었습니다. 뜰 문 이편에 15큐빗의 현수막이 기둥 셋과 놋
받침에 걸쳐 있었습니다. 뜰 문을 위해 청색, 자색, 홍색과
가는 아마포로 수놓아 짠 휘장의 길이가 20큐빗, 기둥이 넷,
놋 받침이 넷이었습니다. 모든 기둥의 가름대와 갈고리는
은으로 만들었습니다.


세마포 현수막의 높이는 5큐빗입니다.
그리고 이 안 마당에서 쓰는 모든 기구와 말뚝과 뜰의
현수막 말뚝은 다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안 마당은
이스라엘인의 마당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이 마당에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 외에는 절대로 출입하지
못하였으며, 또 제물을 가지고 들어와 제사드릴 자도
이스라엘 백성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일단 안 뜰로 들어서면
문을 통과해서 놋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다음에 접하는 것이
물두멍이고, 성소의 휘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순서입니다. 문은 우리 주 양의 문 되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라는 것입니다. 놋 제단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죄 헌물이 되신 구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드러내며, 물은 말씀의 물로 씻음 받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거듭나고 중생의 씻음을 입기
때문입니다. 성소의 휘장을 통과하면 주님을 섬기는 섬김의
장소가 펼쳐집니다. 제사장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는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산길을
열어 놓으실 때까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성막의 뜰에 아무런 포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솔로몬의 성전과는 매우 다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안팎으로 금으로 입혔습니다. [그 집의 마루를 안팎으로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10). 하지만 성막은 자연
그대로입니다. 이는 초림의 주님과 재림의 주님의 차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인간의 모습과 동일하게
오셨습니다. 재림의 주님은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재림의 영광을 예표하는 성전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온 땅이 주의
영광으로 충만할 것인즉
](민14:21). 광야의 성막은 초림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성막의 뜰이 자연 그대로의
땅인 것은 주님께서 땅에서 올라오신 뿌리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주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것임이라. 그에게 고운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
.](사53:2). 성막을 포장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막의 뜰은 성소나 지성소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곳으로 불립니다. [6그는 또 자기의
범법 헌물을 주께 가져올지니 곧 그는 네가 정한 값대로
양떼에서 흠 없는 숫양을 범법 헌물로 취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올 것이요, 16그 나머지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먹되
누룩을 넣지 말고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요, 회중의 성막
뜰에서 그들이 먹을지니라
](레6:6,16). 여기서 거룩한 곳은
회중의 성막 뜰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포장도 되어 있지 않는 광야의 모래 위의 뜰을 거룩한
곳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라고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막의 뜰은 택함받은
사람들, 구속받은 사람들을 위한 곳입니다. [주께서
택하시고 주께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거룩한 전(殿)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시65:4). 성막에 들어가는
것은 단순히 죄사함을 받는 의식이 아니라 주님을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주의 뜰에 거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분의 문들에 들어가며 찬양함으로 그분의
뜰에 들어가서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의 이름을
찬송할지어다
](시100:4). 더욱 놀라운 일은 이방인들에게도
이 복이 허락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집 사람이나 너희 가운데 거하는 타국인
중에 누구든지 번제 헌물이나 희생물을 드리되
](레17:8).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 헌물을
받으시며, 주의 뜰에 나올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는 구약
속에 들어 있는 신약입니다. 구약의 복음입니다.


9절입니다.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곧 남쪽을 향한 남쪽 면에는 가늘게 꼰 아마 /실/로
한 면의 길이가 백 큐빗 되는 현수막들을 뜰에 달기 위해
만들고
](9). 성막의 둘레는 아마 실로 짠 현수막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은 길이와 너비가 같습니다.
2:1 비율의 직사각형 모양에서 긴 부분입니다. 흰 아마포(개역-세마포)는
의를 상징하는 것입니다(계19:8). 성막 둘레로는 12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친 장막은
염소 털로 된 검은 색이었습니다. 그 한 중앙에 주님의
성막이 있습니다. 검은 색과 흰색의 선명한 대조를 보입니다.
[오 너희 예루살렘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어도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들과도 같고 솔로몬의 휘장들과도
같으니라
](아1:5). 검은 장막 속에 거하지만 이들은 모두
주님의 택함받은 백성들입니다. 이들이 주님의 성막을 볼 때
얼마나 아름답게 느껴졌을지는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진영 한 중앙에 있는 흰 세마포가 둘러싸인 성막의 벽만
보아도 황홀할 지경이었습니다. [오 만군의 [주]여, 주의
장막들이 어찌 그리 사랑스런지요! 내 혼이 [주]의 뜰을
사모하여 참으로 쇠약하게 되었사오니 나의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오 만군의 [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참으로 참새도 집을 찾았고 제비도 제
새끼를 둘 보금자리를 스스로 찾았사오니 곧 주의
제단들이니이다.
](시84:1~3).


가늘게 꼰 아마 실은
아마포, 또는 세마포라고 하는데 성막의 모든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나타내듯이 성막 사방으로 벽을 두르고
있는 세마포 역시 그러합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에게 자신을
맡기시며
](벧전2:22-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계실
동안 전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늘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의로운데 반해서 인간은 어떻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란 말씀대로입니다. 성경경이
말씀 하듯이 ?우리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의롭지 못하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이나 옷을 입었고, 신발을 신었습니다. 광야 생활 동안에
그들은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는 기적의
연속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옷과 신발은
더러웠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이들은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성막에 올 때 하얀 아마포로 사방을 두른
벽을 보았을 때, 자신들이 입고 있는 옷이 더럽고 추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
.](사64:6).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더러움을
잘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나아오면 우리는
자신의 더러운 죄성을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 섰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이요, 죄 덩어리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신지 알았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
](눅5:8). -I am a sinful man. 그는
평소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 본 결과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접하게 되자 자신의 죄성 그 자체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때에
내가 이르기를,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 곧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면서 내 눈으로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음이라, 하였더라.
] (사6:5). 이사야는 주님의 영광을
본 후에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망하게 된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욥은 주님을 만난 후에 천하에
자신보다 의로운 사람은 없다고 주장하다가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
.](욥42:6)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지를 보고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서 이런 자아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아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을 십자가의 죽음에 기꺼이 내어 놓으며,
장사 지내 버리지만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십자가의 언저리에 머무는 신앙 생활을 합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정과 욕심을 못 박지 않는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죽었는데 나는
살아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묻혔는데,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면 주님이 부활할 때 함께
일으킴을 받지 못한 것이요, 주님과 함께 하늘에 앉힌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나의 부활이 되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10절입니다. [그 뜰의
기둥 스무 개와 기둥 밑받침 스무 개는 놋으로 만들고 그
기둥들의 갈고리들과 띠들은 은으로 만들 것이며
](10).
성막을 둘러싼 담장은 시멘트, 철근, 목판이나 벽돌이
아니라 아마포로 된 현수막입니다. 마치 우리의 몸을 감싸고
있는 육신은 얇은 피부인 것 같이 성막의 외부 둘레는
천이었습니다. 100(남), 50(서), 100(북), 50(동)큐빗으로 성막
사방을 두르자면 5큐빗마다 기둥을 박아야 합니다. 남쪽과
북쪽은 20개씩 박았고, 서쪽은 길이가 50큐빗이므로 10개를
박았습니다. 동쪽 가운데는 문이 있습니다. 문 좌우로 각각
15큐빗의 현수막을 치고 기둥 세 개를 박고, 문은 기둥 네
개를 세운 뒤에 20 큐빗의 현수막을 쳐서 바깥 담을
형성합니다. 그렇게 되면 성막의 뜰을 두르는 현수막의 총
길이는 300 큐빗이 되고, 매 5큐빗마다 기둥이 있음으로 전부
60개의 기둥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성막에 사용된 각 기둥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지성소에 세워진 4개의 기둥은 싯팀 나무에 금을 입혔고,
밑받침은 은입니다(출26:32). 성소에 세운 5개의 기둥은 싯팀
나문에 금으로 입힌 다음 밑받침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출26:37).
반면 뜰 둘레의 60개의 모든 기둥은 은으로 띠를 두르고
밑받침들은 놋으로 만들었습니다. 60개의 기둥이 성막의
둘레에 견고하게 세워진 것은 죄인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피할 수 있는 안전한 거처가 된다는 뜻입니다. 기둥은 주의
견고한 망대와 같습니다. [주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로운 자는 거기로 달려가 안전을 얻느니라.
](잠18:10).
기둥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약속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보라, 앞으로 한 왕이 의로 통치하며
통치자들이 공의로 다스릴 터이니 한 사람이 바람을 피해
숨는 곳 같이 되고 폭우를 피하는 은밀한 곳 같이 되며 마른
땅의 강물 같이, 지친 땅의 큰 바위 그늘 같이 되리라.
](사32:2).
60개의 기둥은 5x12입니다. 60은 정부의 통치를 나타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
둘레의 모든 기둥은 은으로 띠를 두르고 그 갈고리들은
은으로, 그 밑받침들은 놋으로 만들지니라.
](출27:17).
그런데 주님은 무슨 나무로 기둥을 만들어서 은으로 띠를
두르라는 명령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지성소와
성소에 쓰인 것과 마찬가지로 싯팀 나무였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는 있지만 주님은 언급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여기에 사용된 기둥은 우리 인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전에 어떠한
사람이었는가에 대해 전혀 말씀하지 않으시며, 언급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그 자체로 주님의 집을 이루는
건축 재료가 됩니다. [그분 안에서 모든 건물이 서로 꼭
맞게 뼈대를 이루어 {주} 안에서 거룩한 전(殿)으로 자라가고
](엡2:21).


뜰 둘레의 모든 기둥은
은으로 띠를 둘렀는데, 은은 구속의 몸값을 나타냅니다.
요셉은 은 20개에 몸이 팔렸고, 주님은 은 30개에 몸이
팔리셨습니다. 은 반 세겔은 성전 세금으로 바치는 자기
몸값이었습니다.


11절입니다. [그 북쪽
면에도 마찬가지로 길이 방향으로 길이가 백 큐빗 되는
현수막을 치되 그 기둥 스무 개와 그 밑받침 스무 개는
놋으로 만들고 그 기둥들의 갈고리들과 띠들은 은으로
만들지니라.
](11). 북쪽 면은 남쪽 면과 똑 같이 만들면
됩니다. 여기서는 놋 받침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성막 뜰에
박힌 60개의 기둥은 반드시 놋 받침 위에 세워야 합니다.
놋은 이미 놋 제단에서 언급했듯이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신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둥이 사람을
예표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받아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넘치도록 감사를
드리라.
](골2:7). 대부분의 사람들은 밑받침이 엉뚱한 곳에
있기 때문에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위에
세움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높고, 화려하게 세워졌다 해도
금방 무너져 버립니다. 집은 견고한 반석 위에 지어야 하는
것처럼 뜰의 모든 기둥은 반드시 놋 받침 위에다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피라는
무섭고도 이상한 단어가 제일 바탕에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죽음 즉 갈보리의 십자가를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자기가 배운 학문이나 철학이나
지식의 기반 위에 있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신의
믿음을 체험이나 감정 위에 세운 사람 역시 잘못된 곳에
기둥을 세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믿음을 자기의
행위에다 세워서 행위가 좋을 때는 믿음이 견고하게 서
있지만, 행위가 나빠질 때는 믿음도 흔들리면서 나빠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우리의 죄로 인해 피를 흘리시고, 죽음을 맛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도 밑받침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세우십니다.
넘어진 기둥은 기둥이 아닙니다. 기둥은 똑바로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남의 종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의
서거나 넘어짐이 자기 주인에게 달려 있은즉 참으로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능히 서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라
.](롬14:4). 우리가 구원받은 형제라 해도
여전히 범죄할 수 있으며, 넘어질 수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넘어 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놋 받침 위에 서
있으면 우리의 죄는 모두 사해지고, 모든 허물은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우리 생명의
뿌리이며 거기서 흘러나오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정결하게 해 줍니다. 놋 받침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거나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심판을 받으신
주님 위에 서 있을 때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둥이 흔들려서는 건물이 유지될 수 없듯이 우리가
흔들리면 지역 교회는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간교한 술수로 속이고자 하는 자들의
온갖 교리의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엡4:14).
속임수, 간교한 술수, 온갖 교리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더욱 갈보리 십자가에 깊이 뿌리내리는 성도가
되어야만 합니다.


● 부활의 사실을 흔드는
바람이 교회에 불어 닥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는 자가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알기 때문이니라
.](고전15:58).


● 박해의 바람이 불어
닥칩니다. [아무도 이런 박해로 인해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도록 세우심을 받은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아느니라.
](살전3:3).


● 재림의 교리의 바람은
광풍처럼 몰아닥칩니다. [너희는 영으로나 혹은 말로나
혹은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서신으로나 그리스도의 날이
가까이 이르렀다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말라.
](살후2:2).


● 기도의 응답에 대한
불신으로 흔들립니다. 불신과 두 마음은 밖에서 불어오는
회오리바람이 아니라 속에서 이는 바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말라. 이는 흔들리는 자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기 때문이니
](약1:6).


● 자의적 성경 해석으로
인해 흔들립니다. [또 그의 모든 서신에서도 이것들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배우지 못하여 흔들리는 자들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
](벧후3:16).


우리는 더 이상 이런
것들에 흔들리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으셨고,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기의
의지나 결심, 선한 행위에 서 있다면 우리는 쉽게 흔들리고
넘어질 수 있겠지만, 우리를 위해 심판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보혈에 세워져 있다면 결코
흔들릴 수 없습니다.


다시 11절을 보십시오. [
북쪽 면에도 마찬가지로 길이 방향으로 길이가 백 큐빗 되는
현수막을 치되 그 기둥 스무 개와 그 밑받침 스무 개는
놋으로 만들고 그 기둥들의 갈고리들과 띠들은 은으로
만들지니라.
](11). 밑받침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갈고리들과 띠들이 있어야 합니다. 기둥과 기둥을 서로
붙들어 주고 연결해 주는 갈고리와 띠는 은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우리는 복음 위에 견고하게 세워져야 하고, 동시에
같은 형제들끼리 성령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화평의 메는 띠로 견고하게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의 하나됨을 힘써 지키라.
](엡4:3). 분리와
분열은 안 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라고 했습니다. [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덧입으라. 사랑은 완전하게 하는
띠니라
.](골3:14). 성막에 나타난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또 다른 면으로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들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 기둥이 튼튼하게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기둥과 기둥사이를 갈고리들과 띠가 연결시켜
주어서 기둥들이 견고하게 서 있을 수 있는데 모두 은으로
되어 있습니다. '금'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하고, '나무'
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놋'은 심판을 의미하는데, '은'
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상징하는 금속입니다.
모든 성도는 구속의 은혜로 인해 견고하게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지체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지체들을 각각 몸 안에
두셨느니라
.](고전12:18). 이는 단순히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빈틈없는 이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럴
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들이 오히려 더
필요하고 또한 우리가 덜 귀한 것으로 여기는 몸의 지체들을
더욱 귀한 것으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은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나니 이는 우리의 아름다운 부분들은
부족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 오직 하나님께서 몸을 다 같이
고르게 하사 부족한 부분에게 더욱 귀한 것을 주심은 몸
안에 분쟁이 없게 하고 오직 지체들이 서로 같은 보살핌을
받게 하고자 하심이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하느니라.
] (고전12:22~26). 하나님은 모든
성도를 지체로 보시며, 우리는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들입니다. 몸 안에는 분쟁이 없는데,
만약 분쟁이 있다면 그것을 악성 종양(암)이라고 합니다.
영양이 균등하게 배분되지 않고, 공급되지 않을 때 신체는
불치병에 걸리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되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의 지체임을 기억하고
세워주어야 합니다.


12-13절입니다. [서쪽
면으로 뜰의 너비에는 오십 큐빗의 현수막을 치되 그 기둥이
열 개요, 그 밑받침이 열 개며 동쪽 면으로 뜰의 너비는 오십
큐빗이 되게 할지니라.
](12-13). 성막의 너비가 2:1의
비율이었기 때문에 남쪽과 북쪽이 100큐빗이라면 동쪽과
서쪽은 50큐빗이 됩니다. 5큐빗마다 기둥을 세우고, 기둥마다
밑받침을 두었습니다. 문제는 동쪽입니다. 동쪽은 길이는
서쪽과 같지만 한 중앙에 문이 있습니다. 성막에 있는
유일한 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동문을 통해서만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50큐빗의 한 중앙에 20큐빗의
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좌우에 정확하게 십오 큐빗씩
남게 되는데 거기에 현수막을 치고, 매 오 큐빗마다 기둥을
박습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
이편의 현수막이 십오 큐빗이며 그 기둥이 세 개요, 그
밑받침이 세 개며 저편에도 현수막이 십오 큐빗이며 그
기둥이 세 개요, 그 밑받침이 세 개니라.
](14-15). 이미 문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했기 때문에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문 좌우 옆면에 현수막을 치는 것은 동일합니다.


16절입니다. [뜰 문에는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바느질을 해서 만든 이십 큐빗의 현수막이 있을지니 그
기둥이 네 개요, 그 밑받침이 네 개며
](16). 뜰 문은 매우
넓습니다. 사방이 흰색 아마포로 된 현수막 둘레이지만
동편의 한 중앙에 있는 너비 20 큐빗(약10m)의 이 문은 높이가
2.5m인데, 4가지 실로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청색,
자주색, 주홍색, 흰색으로 만들어진 현수막이며, 역시
오큐빗 마다 기둥이 박혀 있습니다. 청색은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자주색은 예수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심을, 가는 베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종이심을 나타낸다면, 주홍색은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받으신 메시야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는
사복음서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내가 곧 문이니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 들어가고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요10:9). 주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아버지께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다른 이에게는 구원이
없나니 이는 하늘 아래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이 없습니다. 종교 다원주의, 종교
간에 화해와 일치는 모두 사탄의 작품이며, 속임수입니다.
기독교를 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 버리고, 타종교와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려는 것입니다. 구원은 종교가
아니며, 의식이 아닙니다. 구원은 생명입니다. 구원은
능력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오라고 초청하십니다(마12: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인도에서 어떤 전도자가
복음을 전했는데 힌두교도가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어떻게
주님을 믿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인도에는 수 만 종류의
신들이 있지만 인간을 위해서 땀 한방울, 피 한 방울 흘린
신이 없는데, 당신이 말한 신은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하니
어찌 안 믿을 수가 있겠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 죽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17-19절은 이미 앞에서 다룬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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