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7:1-8
요절: 출애굽기 27:4
오늘부터는 뜰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제작한 후에 이제 뜰에
있는 것들을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의 출입문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놋 제단입니다. 번제단은
바깥뜰 안쪽에 있으며(출 40:33), 문 앞(출 40:6)에 있었으며,
문을 통해 성막으로 들어가는 자들의 눈에 맨 먼저 띄는
물건입니다. 놋 제단은 출입문 바깥에 있지 않고 뜰 바로
안에 있어서(출 40:33),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문 안으로
들어갈 때 제일 먼저 대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그 제단은 뜰
안 성막 문 맞은편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놋 제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금 제단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놋 제단은 기독교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며, 성경이 왜 증오 문학이며, 온통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놋 제단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피가 흐릅니다. 심판의 불이 쉼없이
타오릅니다. 놋 제단 그 자체만을 본다면 사망과 지옥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 위에서 타는 제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놋 제단이야말로 사망과 지옥 그 자체입니다.
살아있는 제물의 피를 흘려서 제단 주위에 뿌리고, 몸은
불로 태워집니다. 지옥의 생생한 모습이 이보다 더 분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단 위에 있는 불은 그 안에서
계속해서 타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또 번제 헌물을 그 위에 가지런히 놓고 화평 헌물의
기름을 그 위에서 태울 것이며 결코 불이 끊이지 아니하고
제단 위에서 항상 타게 할지니라](레위기6:12,13). 이것은
밤낮, 영원히, 끊임없이, 타오르는 지옥의 불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계 14:10,11; 막 9:43-48). 제단의 속이 비어있으며,
제단 아래에(beneath) 그물망이 놓여집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지옥은 차지 않으며, 아래에 있다!!(잠 15:24; 사
14:9; 사 5:14; 잠 27:20). [지옥과 멸망이 결코 가득 차지
아니하는 것같이...](잠27:20a). 지옥은 아래에 있습니다.
번제단이야 말로 주님의 심판과 죄인들이 당해야 할 형벌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 주는 동시에 지옥에 대한 위대한
성경적 진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번제단에 드려지는 희생물들이 어떻게 죽으며 불태워지는지
마음에 그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당해야
할 운명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불타야 할 존재들입니다. 동시에 번제단에 타는
희생물들이 제물을 바친 죄인의 죄를 대신해 죽는 것과 같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죄와 저주가 되신
위대한 진리를 마음에 깊이 새기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지혜로운 자에게는 생명의 길이 위에 있으므로
아래에 있는 지옥에서 떠나느니라.](잠15:24).우리는
여기서 아래에 있는 지옥이란 말을 봅니다. [그러므로
지옥이 자기를 확장하고 한량없이 자기 입을 벌렸은즉
그들의 영광과 그들의 큰 무리와 그들의 영화(榮華)와
기뻐하는 자가 다 거기로 내려가리로다.](사5:14). 지옥은
아래에 있습니다.
먼저 8절을 보십시오. [제단은
널빤지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여 준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8). 속이 비었다는 것은 이 속으로
무엇이든 집어 넣을 수 있고, 삼킬 수 있음을 말합니다.
지옥은 입을 벌리고 삼킬 자를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물은 제단의 가장자리 밑에 달아 제단의
중간에 이르게 하고] (출27:5). 그물을 제단의 가장 자리
밑에 달았습니다. 옆이나 위에 단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예민하게 읽는 분들은 결코 이런 진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물의 네 모퉁이에는 고리가 만들어졌는데(4), 고리는
무엇을 걸거나 잡거나 고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네
모퉁이에 네 개의 고리가 있고, 네 개의 뿔이 있다면 우리는
이것들이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란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누구도 번제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무도 성막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피 흘림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피없이는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주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대속
희생물의 죽음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정결한 물로 씻겨졌으니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만약 여러분 가운데 이번 한 주는
참으로 주님 앞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고 생각나는 죄도 별로 짓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또
반대로 지난 한 주는 너무나 육신적으로 살아서 주님을 뵐
면목이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의를 힘입어 주님께
나아가려는 어리석은 생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근거는 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는 것 뿐임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근거는 우리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주님의 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게 되었나니](히10:19).
놋 제단은 번제물을
드리는 곳입니다. 제단이란 말은 “도살하는 장소”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제단에는 수많은 양들, 염소들, 소가
죽었습니다. 제단에 흐르는 피를 통해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나니”란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놋 제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곳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너는
시팀나무로 제단을 만들되 길이를 오 큐빗, 넓이를 오
큐빗으로 하여 네모 반듯하게 하고 그 높이는 삼 큐빗으로
하며](1). 제단의 재료는 시팀 나무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시팀 나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것이 바로 시팀
나무입니다. 주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보잘 것 없는 외모를 지니셨습니다. 아카시아
나무에 속한 시팀 나무는 바로 그런 나무였습니다. 주님은
땅의 열매로 불리십니다(사4:2). [그 날에 [주]의 가지가
아름답고 영화롭게 될 것이요,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들을 위하여 심히 좋고 아름답게 될 것이며](사4:2).
주님이 육신을 입지 않으셨다면 주님은 죽으실 수가 없고,
속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제단의 크기는 오큐빗,
오큐빗, 높이 삼 큐빗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매우 깊은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5는 언제나 죽음의 수입니다.
해마다 이 번제단에서 5천 마리 이상의 동물이 거기서
죽었습니다. 죄인들은 그곳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신
희생물을 가지고 갔으며, 그 위에는 불이 계속적으로 붙어
있었고(레위기 6:13),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희생물을
드렸습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연기가 올라갔고, 언제나 피로
물들어 있었으며, 죄를 범한 히브리인들이 원하면 언제나
나아올 수 있도록 열려 있었습니다.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롬6:23).
3은 완전수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완전하게 하십니다. 불완전한 사람이
완전하게 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부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분께서 죽음을 통하여 자기
육체의 몸으로 너희를 화해하게 하사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아버지/의 눈앞에 드리고자
하셨으니](골1:22). 예수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고(롬5:10), 예수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함께
죽었으며, 생명의 새로운 속에 걷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 없이는 아무도 부활의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놋
제단에서 죽는 양들의 죽음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을 만듭니다.
제단을 네모 반듯하게
만들었는데 정 사면체는 온 세상을 가리킵니다. 4는
동서남북, 사계절 등과 같이 전부를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단지 택한 자를 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주님은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니 우리의 죄들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들로 인한 /화해 헌물이시라/.](요일2:2). M.R
디한 박사는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동서남북은 NEWS 즉 온
세상의 방향을 가리키는 소식이라고 적용했습니다. 이
소식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며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고,
해당되는 기쁜 소식이다. 북쪽이나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
어디에 있는 사람이든 그 십자가의 소식은 모든 자들에게
정말로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복음은 온 세상에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온 사방으로 다 미칩니다.
2절입니다.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들이 /제단과/ 하나가 되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입히며](2). 주님은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게 하셨고, 싯팀 나무로 제작한 제단을 놋으로
입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놋 제단이라 불리게 됩니다. 왜
주님은 놋으로 만들게 하셨는가? 놋은 불에 견딜 수 있는 몇
안되는 금속 중에 하나입니다. 놋 문은 화재에서도
끄덕없습니다. 이는 소방관들도 이미 확인한 일인데 나무로
만든 문에 놋을 입히면 대화재가 발생해도 그 문은
끄덕없습니다. 번제단으로 금이나 은은 사용할 수 없습니다.
금과 은을 나무에 입혀서 불에 넣으면 녹아 버립니다. 놋은
본래 녹여서 내는 것입니다. [쇠는 땅에서 취하고 놋은
돌에서 녹여 내느니라.](욥28:2). 그래서 놋은 불에
강합니다. [그의 뼈들은 강한 놋덩이 같으며 그의 뼈들은
쇠막대기 같으니라.](욥40:18). 진노의 불길을 견딜 수 있는
제단은 놋이 제격입니다. 우리 주님은 놋뱀으로 형상화되며
놋 제단에 불이 임한 것같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이 마르다”
하시며 불타는 지옥의 뜨거운 화염을 경험하시면서도
끝까지 속죄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놋은 심판과 저주를
의미합니다. 금은 영광, 은은 구속을 말함과 같이 놋은
심판을 말합니다. 놋은 주님의 심판이 선고될 때 등장하는
말입니다. 광야의 놋뱀 사건을 보십시오. 하필이면 금이나
은이 아니라 놋으로 뱀을 만드셨습니까? 왜 양이나 소가
아니라 마귀를 예표하는 뱀을 만드셨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와 저주가 되셔서 심판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담당하신
주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놋 뱀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위에 저주의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 의하여 주님께서 내리실 심판을 알리실 때, 다른
재앙들과 함께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신28:23)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권능의 교만을 꺾고 너희
하늘을 쇠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 같게 하리니](레26:29).
삼손은 놋으로 만든 족쇄에 묶였고(삿 16:21), 시드기야도
그러하였습니다(왕하 25:7). 주님은 패역하고 거역하는
백성들에게 권고하실 때 [내가 알거니와 너는 고집이 센
자요, 네 목은 쇠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 이마라.](사 48:4)고
하셨습니다. 놋의 의미는 늘 심판과 저주, 죄와 연관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놋 제단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갈보리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입니다. 성막의
번제단이 놋으로 만들어져 양들을 태웠다면 그 번제단의
본체는 십자가이며, 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거룩의 불, 그 무서운
소멸시키는 불을 견디는 힘을 지니신 참 놋 번제단이셨으면
자신을 온전히 제물로 드린 번제 헌물이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통과하셨을 때 묵묵히
담당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짊어
지시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지옥으로 가신 것입니다.
네 모퉁이에 뿔을 만들게
하신 것은 희생물을 번제단에 묶는데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로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빛을
보이셨으니 밧줄로 희생물을 제단 뿔들에 맬지어다.](시118:27).
번제단에서 뿔들은 그물망이 제단 밑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희생물들을 묶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뿔은 권능과 힘을 예표합니다(합3:4; 슥1:18-21).
[그분의 광채는 빛과 같고 뿔들이 그분의 손에서 나와
그분께 있나니 거기에 그분의 권능이 감추어져 있도다](합3:4).
성경에서 거듭거듭 이 뿔들이 권능과 힘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구원의 뿔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눅1:69).
그렇다면 우리에게 뿔이 되신 주님이 주신 권능(power)이
무엇입니까?
신약의 3대 권능은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선포,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권능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16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이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롬1:16). 많은 권능이
있지만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은 복음
뿐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원한다면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에게 강력한 권능을 주셨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기적이나 표적도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지만 복음은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복음의 권능을 믿으십시요. 이 권능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십자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선포함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기 때문이라.](고전1:18).
세련되고 지성을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전혀 구령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복음의 권능, 십자가의
선포라는 하나님의 권능 대신 자신들의 지식과 상식과
갖가지 사람의 지혜라는 도구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능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시요, 하나님의 지혜이시니](고전1:24). 네
개의 뿔이 제물을 묶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상에
붙들어 맨 것은 세 개의 못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번제단에 묶이셨던 것은 아버지와 잃어 버린
양들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디. 스스로 묶이신 것입니다. 마치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묶을 때 잠잠한 것 같이
그렇게 묶이셨습니다. 원수들은 그분을 내려오도록
충동질하였지만, 주님은 거절하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재를
담는 통과 부삽과 대야와 고기 갈고리와 불 옮기는 그릇을
만들되 제단의 기구들을 다 놋으로 만들지니라.](3).
재단에서 사용되는 보조 도구들입니다. 재를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등은 번제물을 태우는데
필요한 것들입니다. 재를 담는 통은 속죄 제물이 완전히
탔음을 증거합니다. 완전한 속죄 사역을 예표합니다. 부삽은
재를 옮기거나 타다 남은 불을 옮기는 도구입니다. 대야는
피를 받아서 뿌리는데 씁니다. 고기 갈고리는 고기를
태우는데 골고루 타도록 부위를 돌리는데 사용합니다.
불은 제단에서 활활
탑니다. 이 불은 주님이 친히 점화하신 불입니다(레9:24).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 헌물과 기름을 사르매 온
백성이 이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엎드렸더라.] (레9:24).
주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란 사실을 절감하게 됩니다. [이는
[주] 네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요, 심지어 질투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니라.](신4:24). [이는 우리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이시기 때문이라.](히12:29).
그래서 놋 제단에는 불에 관련된 여러 가지 보조 도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재를 담는 통, 부삽, 대야, 고기 갈고리, 불
옮기는 그릇은 모두 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4-5절입니다. [너는
제단에 쓸 그물을 놋으로 만들고 그물의 네 모퉁이에 놋고리
네 개를 만들며 그물은 제단의 가장자리 밑에 달아 제단의
중간에 이르게 하고](4-5). 그물은 제단 안에 있었습니다.
불길은 이 그물을 통과해서 고기를 태우고, 피와 기름은
아래로 빠져나갔습니다. 그물이 제단 안에 설치되어 있었고,
불이 그것을 깡끄리 태웠듯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혼은 그렇게 불탔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외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적인 것이 훨씬 더 컸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외적고통이
따르지만 내적으로는 평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움을
이길 힘과 평안과 기쁨을 주시기 때문에 몸이 불타면서도
찬양을 부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적인 고통의 극심함과
더불어 내적인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둠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홀로 주님이 세 시간 동안이나 메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6-8절입니다. [또 그
제단을 나를 /운반/ 막대들을 만들되 시팀나무로 만들고
놋으로 입히며 그 막대들을 고리들에 끼우고 제단의 두 면에
두어 제단을 나르게 하며 제단은 널빤지로 속이 비게 만들되
산에서 네게 보여 준 대로 그들이 만들지니라.](6-8).
이동용 성막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운반이 가능하도록
제작되었습니다. 운반 막대들, 제단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민수기 4:13,14절을 보게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것을 어떻게 덮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그들이
성소에서 섬기는 데 쓰는 기구 곧 섬기는 기구를 다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오소리 가죽 덮개로 덮고 막대기 위에
둘지니라. 또 그들이 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주색 보자기를 펴고](민4:12~13). 번제단 위에는 덮개가
있습니다. 색깔이 자주색입니다. 자주색은 왕이 입는 옷의
색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다가올
영광”(벧전 1:11; 눅 24:26)과 얼마나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지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을 미리
증거해 주실 때에 /그것들이/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탐구하였느니라.](벧전1:11).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겪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24:26).
자주색 보자기를 제단
위에 편 후에는 5,6절에 나오는 제단에서 섬기는 기구들을
모두 그 위에 두고 오소리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었습니다.
[제단에서 섬기는 데 쓰는 모든 기구 곧 향로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단의 모든 기구를 그 위에
두고 오소리 가죽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운반/ 막대들을
끼울지니라.](민4:14). 이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듯
합니다. 자주색 보자기 위에 오소리 가죽으로 덮었는데,
이는 다시 한번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를
분별할 능력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다. 어떤 이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한 왕이심을 볼 수 있지만 덮은
오소리 가죽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 이상으로 보지
못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번제단에 대해서 요약해
보겠습니다. 이제 요약해보면, 번제단은 죄를 심판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는 장소입니다. 휘장이 죄로 인한 분리를
말한다면, 번제단은 죽음이 죄의 결과(롬 6:23)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번제단은 또한 죄의 사면을 말해 줍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입니다. 그곳에서
죄에 대해 타협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은 죄인을
처벌함으로써가 아니라 죄인들의 대속물을 심판하심으로써
하셨으니, 그 대속물은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 2:24)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공의가
나타난 곳은 번제단이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죄를
증오하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죄가 처벌을
받는 곳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해 본
일이 있으며 여러분의 죄가 그 앞에 나아가는 일에 얼마나
합당하지 못한 가를 생각해 보았습니까? 우리는 번제단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 요구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을 어떻게
대하실 것인지를 미리 말해줍니다. 죄에 대한 본질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죄인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놋 제단을 직시하지 않는 한, 속죄 없이는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다. 피 흘림이 없이는 구속이
없습니다. 죄가 태워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다가설
수 없습니다. 태워지지 않고서는 축복이 없습니다.
또한 뜰 안, 성막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있었던 번제단은 주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만나시는 장소였습니다.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출
29:42,43)라고 하심과 같습니다. [이것은 너희 대대로 [주]
앞에서 회중의 성막 문에서 항상 드릴 번제 헌물이니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으로 인하여 회중의
성막이 거룩히 구별되리라.](출29:42~43).
그러므로 십자가는 이제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그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일을 근거로 하여 의로워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의 칭의가 이루어진다.
십자가 외에는 죄인들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하는
다른 근거가 없다.(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리심을 받으사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3:18)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제단을 거절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스스로를 영원히 단절시키는 일이요,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면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스스로를 영원히 분리시키는 일이
된다. [그 제단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게 되리라](출
29:37)고 하신 것은 형용할 수 없이 복된 말씀인데, 이와 같이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드는 모든 죄인들은
깨끗함을 얻는다. 이것은 마치 열두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아
온 여자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옷에 손을 댐으로 그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막 5:27-29).
또, 번제단에는 올라가는
계단이 없었지만(출 20:26; 너는 계단으로 내 제단에 오르지
말지니...) 레위기 9:22에 보면 그것을 높은 지대에
세웠음이 분명한 것은, 아론이 번제단에서 섬긴 후 “내려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하고 죄 헌물과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 드리기를 마치고
내려오니라.] (레9:22) 번제단이 높이 세워져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는 구주께서 골고다라고 불리우는
언덕 위에 ‘높이 들리었음’(요 12:32)을 기억하게 합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
(요1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