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호세아 1:1-6:11
요절: 호세아 6:1,6
호세아는 킹제임스 성경으로 총 14장이요, 절수로는 197절, 어휘로는 5,175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호세아란 이름의 말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입니다.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는 이름이 같습니다. 대언자 호세아와 동명이인으로 북 왕국의 마지막 왕의 이름이 호세아입니다(왕하15:30). 호세아는 북왕국이 멸망하기 전 약 40년간 활동한 대언자입니다. 동 시대에 활동했던 대언자는 아모스, 이사야, 미가가 있습니다. 호세아는 아모스보다는 좀 어렸고, 이사야나 미가보다는 약간 앞섭니다. 1:1절은 그가 대언자로서 활동했던 시기가 나옵니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주]의 말씀이라.] (호1:1). 당대의 북 왕국 왕들은 여로보암 2세,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입니다. 호세아는 북 왕국의 마지막 왕으로서 B.C 721년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동시대의 남 왕국 유다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이 때 북왕국이 망함)입니다. *열왕기 연대기표 참조.
북왕국은 이스라엘 또는 에브라임으로 불립니다. 북 왕국은 호세아의 시기보다 약 200 년 전에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열 개의 지파가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해서 만든 왕국입니다(B.C 931).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바알을 섬겼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신 벧엘과 단에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경배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엘리사, 요나, 아모스 그리고 호세아를 보내셔서 그들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1장입니다. 호세아는 ‘가서 행음하는 여자’를 아내로 취하라는 명을 받습니다(1:2). 구약의 대언자들은 말로서만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을 몸으로 행함으로써 백성들의 죄악을 드러내고, 보여 주는 일을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실물 설교입니다. 에스겔은 드러누워서 똥으로 구운 빵을 먹었고(겔4), 이사야는 벌거벗었습니다. 호세아는 창녀를 아내로 취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십니다. [이는 이 땅이 [주]를 떠나 크게 행음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호1:2).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를 따르는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행음’입니다. 호세아는 고멜이란 창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첫 아들을 낳았는데 ‘예스르엘’입니다. 이 이름은 침례인 요한,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주님이 친히 지어 주신 이름이지만 그 내용인즉 왕조의 멸망을 가르킵니다. 예스르엘은 예후가 아합 왕의 모든 족속을 다 죽인 장소입니다. [이와 같이 예후가 예스르엘에서 아합의 집에 속한 자들 가운데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의 존귀한 자들과 가까운 친척과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왕하10:11). 둘째는 딸달인데 ‘로루하마’입니다. 이 뜻은 ‘긍휼을 받지 못하는’이란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는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의 집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그들을 완전히 제거할 것임이니라.] (호1:6b). 셋째는 아들입니다.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그 뜻은 “내 백성이 아닌”입니다. [이는 너희가 내 백성이 아니요,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호1:9). 하나님은 호세아의 아내와 자녀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행하실 일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율법대로 걸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오직 내가 이것만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음성에 순종하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길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잘되리라, 하였으나](렘7:23),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이집트 땅 곧 쇠 용광로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그들에게 명령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에 순종하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에 따라 그것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될 것이요,](렘11:4). 그러나 이들은 율법을 깨고, 이방신들을 쫓아감으로써 “이는 너희가 내 백성이 아니요”란 관계 단절이 선언됩니다. 그러나 영원한 단절은 아닙니다. 그들은 완전히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회복의 여지를 남겨 주셨고, 이들의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할지라도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또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하리라.] (호1:10). 심판과 징계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이들의 미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회복입니다.
2장입니다. 2장은 행음에 대해 받게 될 이스라엘의 고통입니다. 1절입니다. [너희 형제에게는 너희가 암미라 말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말하라.] (호2:1). 로암미에서 ‘로’가 떨어지고, 로루하마에서 ‘로’가 떨어지는데 이는 “없는”이란 말이 사라짐으로서 ‘내 백성이 아닌’이란 말이 ‘내 백성이요’로 바뀌고, ‘긍휼을 입지 못한’에서 ‘긍휼을 입은’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3-13절은 그들이 받게 될 심판입니다. [/그녀가/ 바알들/을 섬긴/ 날수대로 내가 그녀에게 징벌하리니 그때에 그녀가 그것들에게 분향하고 귀고리와 보석으로 자기를 치장하며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을 따라가고 나를 잊었도다. [주]가 말하노라.](13). 이스라엘은 주님이 주신 것들을 자신들이 섬기던 농경신(바알), 일월성신 등에게 영광을 돌렸으나 주님은 그들이 우상을 섬긴 날수대로 징벌하시겠다는 형 집행을 선포합니다.
14-23절은 장차 먼 미래에 회복될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벌 주시고 이들을 정결케 한 후에 다시 위로와 소망을 주십니다(14-15). 이들은 주님을 다시 남편이라 부를 것이며 더 이상 바알을 주라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주]가 말하노라. 그 날에는 네가 나를 이쉬(my husband(라 일컬을 것이며 다시는 바알리(baal, my lord)라 일컫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녀의 입에서 바알들의 이름을 제거할 터인즉 그것들이 다시는 그것들의 이름으로 기억되지 아니할 것임이라.](16-17). “그 날에는”이란 말에 주목하십시오. 대환란을 통과한 이후를 말합니다. 그 날에는 전쟁이 중단됩니다(18). 주님은 이들과 다시 정혼합니다. [또 내가 영원토록 나를 위하여 너와 정혼할 것이요, 참으로 나를 위하여 의와 공의와 인자와 긍휼로 너와 정혼하며 나를 위하여 신실함으로 너와 정혼하리니 네가 [주]를 알리라.](19-20). 여기서 주님은 반복적으로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하여 너와 정혼”한다고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이는 구원이 이스라엘의 행위와 의로 말미암지 않고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확고히 해 줍니다. 23절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회복이란 영적 소망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스라엘을 이 땅에서 버림 받은 민족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을 정확히 해석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호세아의 글에서도 이르시되, 내가 내 백성이 아니던 자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며 사랑받지 못하던 그녀를 사랑 받는 자라 부르리라. 또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9:25~26).
3장입니다. 3장은 다섯 절로된 매우 짧은 구절이지만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구절이 선명하게 들어 있습니다. 1-3절은 호세아가 다시 고멜을 사 오는 장면입니다. 음행으로 자신을 떠나 버린 여자를 사옵니다. 단지 돈으로 사올 뿐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호세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했습니다. [이에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일 호멜과 보리 반 호멜로 나를 위하여 그녀를 사고] (호3:2). 이는 갈보리 십자가에서 우리를 값 주고 사시는 주님의 모습을 예표합니다. 4-5절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날 동안 왕도 없고 통치자도 없고 희생물도 없고 형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 드라빔도 없이 거하다가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주] 자기들의 하나님과 자기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들에는 [주]와 그분의 선하심을 두려워할 것임이라.](4~5). 북왕국과 남왕국 모두 멸망한 후에는 왕이 없습니다. 통치자도 없습니다. 희생물도 없고, 형상도 없고, 에봇도 없고(제사장), 드라빔도 없이 지냄으로써 하나님도 우상도 없는 그런 시대가 옵니다. 현재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지난 2,000년 동안 왕도 에봇도 없이 살아 왔습니다. 5절에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라고 할 때 그 후란 이방인의 때가 끝난 후 즉 대 환란을 겪은 후를 말합니다. 창녀 같이 살아온 이스라엘의 더러움은 깨끗하게 씻겨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위로부터 영을 부어 주실 때,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회개하게 됩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주민들 위에 은혜의 영과 간구하는 영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나 곧 자기들이 찌른 나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곡하기를 사람이 자기 외아들을 위하여 애곡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기를 사람이 자기의 처음 난 자를 위하여 몹시 슬퍼하듯 하리로다.](슥12:10). 자신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주요, 그리스도란 사실을 알 때 애곡하며, 슬퍼하며 회개합니다. 주님을 보고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깁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기/ 위한 샘이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을 위하여 열리리라.] (슥13:1).
4장입니다. 4장은 우상들에게 밀착한 에브라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들의 영적 타락과 죄악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진리의 지식의 부족,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부한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부족하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거부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거부하여 나를 위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은즉 나도 네 자녀들을 잊으리라.](6).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자연 과학이나 인문학, 철학, 신학, 어학에 관한 지식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지식은 진리의 지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2:4). *the knowledge of truth. 그러나 어떤 이들은 교회를 다니고, 신학교를 나오고, 열심히 책을 읽지만 결코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를 아는 데 이르지 못하느니라.](딤후3:7). 왜 그렇습니까? 지식을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고의적 무지(wilfully ignorant)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지식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이는 그들이 지식을 미워하고 [주] 두려워하기를 택하지 아니하며 내 권고를 원치 아니하고 내 모든 책망을 멸시하였음이니라.](잠1:29-30). 세상의 모든 헛된 지식을 자랑하고 높이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거부하고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지식이 부족하고, 지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 결과는 포로됨, 굶주림, 갈증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포로로 잡혀갈 것이요, 그들의 존귀한 자들은 굶주릴 것이며 그들의 큰 무리는 갈증으로 목마를 것이라.](사5:13). 주님을 알지 못할 때 죄의 포로가 되고 영적 기갈이 들리게 됩니다. 이 시대는 자연 과학이 발전한 시대입니다. 철학과 인문학이 발전해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 지식에 관한한 사람들의 태도는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께 이르되, 우리를 떠나소서. 이는 우리가 주의 길들 알기를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이다. 전능자가 무엇이기에 우리가 그분을 섬겨야 하리이까? 우리가 그분께 기도한들 무슨 유익을 얻겠나이까? 하는구나.] (욥21:14~15). 이것이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이들의 반응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아뢰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전능자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나이까? 하였으되] (욥22:17). 북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는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대신 바알이 많은 것을 줄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지식을 거부한 결과 어리석게 되고, 포로가 되고, 주리고, 굶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수용하고 배우며 자라나야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그분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벧후3:18). *엡4:13, 3:8, 골1:10, 벧후1:8 참조.
17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은 우상들과 연합하였으니 그를 내버려 둘지니라.](17). 하나님의 심판 중에 한 가지는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이는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버림받으면 고침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누가 알려 하지 아니하거든 알지 못하게 내버려 둘지니라.](고전14:38). 우리는 때로 어떤 이들은 버려 두어야 할 때가 있는데 이는 ‘알려 하지 아니하거든’-배우려 하지 않고, 알려는 의지나 소원이 없는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도 버려 두시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버림받은 생각에 내어 주사 합당하지 못한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롬1:28).
5장입니다. 주님의 책망에도 불구하고 에브라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물러 나셨습니다. [그들이 양떼와 소떼를 끌고 가서 [주]를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하리니 그분께서는 스스로 물러나사 그들을 떠나셨느니라.] (호5:6). 하나님은 에브라임에게서 물러나시고, 떠나셨습니다. 주님이 물러나시고, 떠나시면 양떼와 소떼를 끌고 가서 주를 찾을지라도 찾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습니다. 주님의 권고를 거절할 때 주님 역시 그들의 기도와 부르짖음을 듣지 않으십니다. [그때에 그들이 나를 부를 터이나 그래도 내가 대답하지 아니하겠고 그들이 아침 일찍 나를 찾을 터이나 그래도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리니](잠1:28). 주님의 뜻을 거슬러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에 그에 대한 부르짖음 역시 그러합니다. [그 날에 너희가 택한 왕으로 인하여 너희가 부르짖을 터이나 [주]께서 그 날에 너희를 듣지 아니하시리라, 하니라.](삼8:18). 주님은 때로 자신을 숨기심으로써 죄악된 백성들을 심판하십니다. [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자신을 숨기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45:15).
범죄자들에게 주님은 무엇이 되시는가? 보십시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방패가 되시고, 반석이 되시고, 망대가 되시고, 산성이 되십니다. 주님은 주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상급이 되시고, 도움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십니다. 주님은 자녀들에게 아버지가 되시고,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하지만 범죄한 에브라임과 유다에게는 좀 같이 되시고, 썩은 냄새가 나는 것같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좀같이 되며 유다의 집에게는 썩은 내 나는 것같이 되리로다.](호5:12). 뿐만 아닙니다. 사자같이 되십니다. [이는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같이 되고 유다의 집에게는 젊은 사자같이 되어 나 곧 내가 찢고 떠나갈 것임이라. 내가 제거하리니 그를 구출할 자가 없으리라.](호5:14). 이로써 이들은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살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에도 피할 길을 내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물러나시는 데는 기한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기 범죄를 인정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가서 내 처소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자기들의 고난 중에서 나를 일찍 찾으리라.](15). 징계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요, 이들을 고쳐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자기들의 고난 중에”란 말은 ‘야곱의 대환란’을 말합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모두 죄를 자백하고, 주님을 구할 것입니다.
6장입니다.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 이는 그분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1). 이스라엘은 역사 이래로 없었던 대 환란을 겪으면서 “오라,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자”고 회개의 음성을 발합니다. 회개란 주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단지 마음의 슬픔이나 후회가 ‘회개’는 아닙니다. 자신을 살피고 잘못을 깨달았다면 주님께로 돌아서 가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길들을 살피고 시험하여 [주]께로 다시 돌아가자.](애3:40). 찢기고 상한 그들이 치유의 주 하나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주로 성도들이 마음에 입은 상처, 고통 등의 치유를 생각하고 적용하지만 이 구절은 문자 그대로 모든 병자들이 나음을 입는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임을 말해 줍니다. 천년 왕국 때는 모든 불구자들, 불치병자들, 병자들이 깨끗하게 다 나음을 입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보여 주셨던 일들은 실제 하늘의 왕국이 세워질 때는 일상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또 [주]께서 자신의 백성의 터진 곳을 싸매시고 그들의 맞은 곳을 치유(治癒)하시는 날에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나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사30:26).
2절입니다. [이틀 후면 그분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셋째 날에는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리니 우리가 그분의 눈앞에서 살리로다.](2). “이틀 후”란 예언의 달력에서 2000년을 말합니다.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지 약 2000년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이틀 후에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셋째 날은 천년 왕국을 말합니다. 이 구절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련된 말씀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운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2000년 간 고난을 받습니다. [이틀 후면, 셋째 날에는] 이것은 예언의 한 기점입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에 우리가 알게 되리라. 그분의 나아오심은 아침같이 예비되어 있나니 그분께서는 비같이 곧 땅에 내리는 늦은 비와 이른 비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3). 이전에는 주님을 거부했고, 주를 아는 지식을 싫어했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지만 이제는 주를 알고자 주를 따릅니다(follow on). 사도 바울은 주를 아는 지식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똥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빌3:8). 다윗은 말하기를, [온유한 자는 먹고 만족할 것이며 [주]를 찾는 자들은 그분을 찬양할 것이요,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리로다.](시22:26). [젊은 사자들은 부족하여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라고 합니다. 주를 찾는 것은 금을 찾고 은을 찾는 것보다 귀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주를 알고자 하면 그때에 우리가 알게 되리라”는 말씀은 이들이 그동안 주님의 부르심에서 돌아섰던 죄악을 회개하고 철저히 주님께로 마음을 향하겠다는 선한 결단입니다. 주를 찾는 자들이 명철한 자요, 지식을 깨닫습니다. [악한 자들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주]를 찾는 자들은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28:5). “그분의 나아오심은 아침같이 예비되어 있나니”란 말씀은 주님께서 의의 태양이시기 때문에 아침같이 옵니다. 지금은 밤입니다. 새벽이 다가올수록 어둠이 깊어지지만 찬란한 의의 태양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나아오심이 아침같이 예비 되어 있다는 것은 꼭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아침이 주의 오심을 가리키는 구절은 매우 많이 있습니다. [이는 그분의 분노는 잠시 뿐이요, 그분의 은총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니 밤에는 울음이 있을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임하리로다.](시30:5). [그들은 양같이 무덤에 놓였나니 사망이 그들을 먹을 것이요, 곧바른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지배하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이 그들의 거처를 떠나 무덤에서 소멸되리로다.](시49:14). 늦은 비와 이른 비가 오면 땅은 열매를 냅니다. 새롭게 됩니다. 마찬 가지로 주님의 오심이 그와 같기에 온 유대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민족이 됩니다. 그들 마음은 주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고, 주의 성령을 받아 주님을 알게 됩니다.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이나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너는/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다 나를 알 것임이요, 또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할 것임이라. [주]가 말하노라.](렘31:34).
4-11절은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주님의 응답입니다. 6절입니다. [이는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기 때문이니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번제 헌물보다 나으니라.] (호6:6). 이 말씀은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때 인용하신 유명한 구절입니다. 율법의 형식과 외적 행위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긍휼없는 희생물은 위선이요, 가증한 것이지만 희생물 없는 긍휼은 주님이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번제 헌물보다 낫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희생물과 번제 헌물을 가장 중요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오직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마9:13a)고 하셨습니다. 가서 호세아 6:6을 읽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외치는 자들이 정작 율법을 모르는 것을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는 문제로 주님을 정죄했을 때 주님은 [그러나,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마12:7)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고, 양을 꺼내 주고, 소에게 물을 먹이는 것, 제자들이 배가 고파 이삭을 따서 먹은 것 등을 강하게 비난하던 이들을 향해 호세아 6:6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그런 정죄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흔히 구약은 율법, 신약은 은혜요 구약은 행위 신약은 마음이라고 자연스럽게 분류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주님은 마음을 중요시합니다. 희생물보다 긍휼을 더 중하게 생각하십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주]께서 번제 헌물과 희생물을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것보다 더 좋아하시겠나이까? 보소서, 순종이 희생 헌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하나님은 언제라도 물질을 마음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 주님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언제나 말씀으로 잘못 판단하고, 잘못 정죄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주의 성령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끊임없이 주님을 알도록 구해야 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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