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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말씀: 마5:16 요절: 마5:16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 누구라도 예외 없이 사람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고, 육신의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행위 역시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위가 무용하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믿음 못지않게 행위를 매우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를 살피시며, 달아 보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 {주}여, 긍휼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이는 주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으시기 때문이니이다.](시62:12).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대로 갚으시되](롬2:6). 베드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벧전1:17a)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십니다. [그들의 길과 행위대로 그들을 심판하여 이교도들 가운데로 흩으며 여러 나라로 흩어지게 하였느니라.](겔36:19). [[주]께서 또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의 길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호12:2). 하나님은 성도들의 행위를 보십니다. 그리고 그 행위에 따라 보상해 주십니다. [또 내가 너희 행위에 따라 너희 각 사람에게 주리라.](계2:23b),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報償)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 행위에 따라 주리라.](계22:12). 이런 이유로 우리는 행위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때로 어떤 성도들은 하나님은 믿음과 속 중심을 보시지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의 동기와 과정이 중요하지 결과는 전혀 개의치 말라고 충고합니다. 이는 언뜻 위로의 말처럼 들리고, 낙담하고 연약한 형제들을 도와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절반의 진리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은 행위로 입증됩니다. 행위는 믿음의 결과요, 믿음의 열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율법의 행위(롬3:20), 육신의 행위(갈5:19), 이교도들의 행위(겔11:12), 불법의 행위(사59:6), 악한 행위(골1:21), 어둠의 행위(롬13:12) 등은 철저히 배척해야 하지만 믿음의 선한 행위(마5:16), 사랑의 수고(히6:10), 경건과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로써의 행위, 주와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헌신 등은 아무리 넘쳐도 부족한 것들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육신의 행위, 율법의 행위가 필요치 않습니다. 육신으로 행한 의나 경건이나 거룩함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받은 후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은 후로는 믿음의 행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이것이 없이는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는 위선자, 말뿐인 사람들이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육신의 행위와 믿음의 행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행위는 그 주체가 아담의 본성입니다. 자아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그 주체가 성령이시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둘의 차이는 육신과 영,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이는 팔복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 잘 보십시오. 성도들은 a) 사람들 앞에서 자선을 행하지 말고-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 b) 사람들 앞에서 기도를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기도하라. c) 사람들 앞에서 금식을 하지 말고-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사람들 앞에 티를 내지 말라. 이런 일들은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없을 것이요 가식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무엇을 해서 빛을 비춥니까? 주님은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라고 하십니다. 이는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기독교인들은 무조건 “남보다 더 잘 살고, 잘 되어야 한다, 성공해야 한다, 더 빨리 승진해야 한다, 더 좋은 직장을 잡아야 한다. 더 좋은 학교를 가야 한다.”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성도들 중에는 명색이 예수 믿는 다고 말하려면 성공, 부, 건강, 좋은 학교나 직장, 명예, 높은 지위 등으로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합니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란 말씀은 우리가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생명의 빛’, 사탄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에 비치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는 ‘영광스런 복음의 빛’(고후4:4)을 비추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자신 안에 빛을 비출 만한 어떤 선한 것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 (롬7:18)는 말씀은 우리가 이미 경험적으로 깊이 알고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일찍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다윗조차도 자신의 육신의 본성에 대해 말하기를, [보소서, 내가 불법 중에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수태(受胎)하였나이다.](시51:5)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심히 사악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렘17:9)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현재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출 수 있습니까? 먼저 생명의 빛이신 주님을 믿음으로 빛을 받아야 합니다.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 빛,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내 안에 있을 때, 성령의 기름이 내 안에 부어질 때 주님이 말씀하신 바,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란 말씀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침상 아래나 말 아래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둔 등불이 되어 온 도시가 숨기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바닷가에 서 있는 등대를 보십시오. 등대가 배를 찾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바다에서 헤매는 배들이 등대를 보고 방향을 잡습니다. 배들이 등대의 빛을 가두거나 숨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고, 생명의 빛을 비출 때 세상은 숨겨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세운 도시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5:14)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은 결코 주의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에스겔이란 등불에서 숨겨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대언자가 있음을 보았고 알았습니다. 바빌론의 온 도시는 다니엘이란 하나님의 사람 하나가 비추는 빛에서 결코 숨겨지지 못했습니다. 온 유대 사람들은 침례인 요한이 비추는 빛으로 인해 결코 숨겨질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왕궁에 있던 헤롯 왕조차도 침례인 요한을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그 빛에 노출되었고, 그 빛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이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될 때 집안 식구들, 친지들, 친구들, 자신이 속한 어떤 사람들은 모두 그 빛에 노출이 되고 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하나 있으면 온 집 안에 비치고, 온 직장에 비칩니다.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란 것은 특별한 종교 의식이나 남들이 하지 않는 옷차림, 식습관, 머리 모양, 풍습 등을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자신 안에 빛이 없는 교인들은 손에 든 성경책과 찬송가, 십자가 목걸이나 귀걸이, 묵주, 머리에 쓴 면사포, 집안에 걸어둔 성화 등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믿음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사람들 앞에 비출 빛의 전부라면 그것이라도 해야 마음에 위안이 될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람들 앞에 비추어야 할 “너희 빛”이란 우리를 통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라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종교를 가진 사람인가를 사람들 앞에 보여 주거나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가 보여 지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성령을 접하게 되고 인지하게 됩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누가 어떤 사람으로부터 “당신 안에서 비치는 빛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는 보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졌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이 보화로부터 능력이 나옵니다. 이 보화로부터 환한 광채가 비칩니다. 우리 속에는 성령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빛이신 하나님]을 세상에 비추는 등이 우리 몸입니다. 이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가 나의 육신, 나의 자아가 아니라 주의 성령, 주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된 후로 우리는 그 맛을 내고, 그 빛을 비추어야 하는데 맛과 빛을 믿음의 행위라고 합니다. 행위 없는 믿음이라면 그는 맛을 잃은 소금이요, 빛이 없는 등불입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행위 없는 믿음은 영이 없는 몸”이라고 선포합니다. [이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위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약2:26). 영이 없는 몸과 행위 없는 믿음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도 행위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죽은 것이라.](약2:17). [그러나, 오 허무한 사람아,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약2:20). 흔히 이 구절을 구원의 조건 또는 구원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 오해하여 이단에 빠진 교회들과 그런 신학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구원의 조건이나 구원받은 이후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율법의 행위, 육신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드러나게 하는데 믿음의 행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아무런 선한 행위가 없을 때 그 사람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믿음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믿고 구원받은 성도가 아무런 선한 행위가 없다면 그는 현재 어떤 행위를 할 수 없을 만큼 a) 믿음이 너무 어리거나- 너무 어린 아이는 우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사 표현을 못합니다.- b) 너무 약하거나 - 식물인간 정도로 병약하다면 아무도 그에게 어떤 행위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c) 죽어 버린 상태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요구하는 이는 없습니다. 성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았다면 그의 육은 죽고 영은 살아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믿는바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근거인 하나님의 말씀이 말이나 행위로 드러나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육신의 본성, 정욕, 탐욕 등은 살아나고 믿음의 행위들은 전혀 드러나지 않을 때 그 사람이 가진 믿음은 무용지물이요, 죽어 있는 상태입니다. 죽음은 무엇입니까? 어떤 조건이나 환경 속에서도 전혀 반응이 없고, 행위가 없고, 생명의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의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말하기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5:12)고 했습니다. 자신 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면 그는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은 열매로, 행위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사람들은 무엇을 봅니까?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을 그 자체로 보여 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라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망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행위]를 통해서만 사람들 눈에 보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탁월한 예술적 영감과 소질이 있다고 해 봅시다. 우리는 그가 그림이든, 글이든, 연극이든, 음악이든 그 무엇으로든 간에 보여 줄 때까지 그런 재주를 가졌는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믿음은 행위로 보여 질 때까지 사람들은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떤 사람은 이르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위가 있으니 행위가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내 행위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느니라.](약2:18). 행위로 믿음을 보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지식을 갖춘 자가 누구냐? 그는 지혜의 온유함으로 선한 생활에서 나오는 행위들을 보일지니라.](약3:13).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행위로 믿음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행했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바쳤거나(아벨), 드렸거나(아브라함), 만들었거나(노아), 떠났거나(아브라함), 버렸거나(모세), 당했거나, 죽었거나 등등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행함으로써 세상에 보여 주었습니다.

불신자들은 무엇인가를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않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지만 신약 성도들은 그런 표적을 보여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표적을 보여 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를 보여 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선한 행위를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주님께서 보여 주시라고 한 선한 행위는 무엇입니까?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라. 뛰어난 지혜를 보여 주라. 기도와 믿음의 능력으로 실패를 모르는 재테크의 실력을 보여 주라. 시험에는 절대 떨어지지 않고, 질병이나 사고, 파산 따위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불사조처럼 되는 것이 ‘선한 행위’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는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잡탕 신학에 개똥철학’을 믿는 것입니다. 이득을 경건이라 생각하는 이들로부터는 돌아서야 합니다. 그들과는 분리해야 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조금 아는 성경 지식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합리화하고 경건한 체 하는데 시간을 보내 버립니다. 마치 구약에 나오는 재판관이나 되는 것처럼 이 교회, 저 교회 이야기들을 듣고는 판단을 내려 주고 어떤 성도들에게는 설교에서 들은 것과 정반대의 조언을 해 줍니다. 이런 자들로부터도 역시 돌아 서야 합니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악한 사귐이 됩니다.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킵니다. [속지 말라. 악한 사귐은 선한 습성을 부패시키느니라.](고전15:33).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빛, 세상 사람들이 보아야 할 선한 행위란 무엇입니까? 성도들이나 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불우 이웃 돕기나 병원 짓기, 고아들을 돌보고, 학교를 세우는 일 등도 선한 행위 중의 하나입니다. 성도들이 행하는 선한 행위가 믿음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육신의 선한 행위라면 그 사람은 칭찬을 받고, 매스컴을 타고, 표창장이나 훈장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해마다 대통령상을 비롯한 각종 훈장을 수여하는 시상식이 있습니다. 효행상도 있고, 선행상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사연을 들어 보면 존경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한 행위를 보고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면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도 그런 선행을 하는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선한 행위를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본을 보십시오. 주님께 어떤 일을 행하시면 무리들은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무리가 보고 놀라며 이러한 권능을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마9:8). 병이 나은 사람들도 병이 나은 순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도들이 보여 주어야 할 믿음의 선한 행위는 어떤 것입니까?

첫째, 믿음의 고백을 붙들라. 우리는 어디에서나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료들 앞에서든, 직장 상사 앞에서든, 나와 사이가 좋지 않는 불신자 앞에서든, 군대의 상관 앞에서든 어디에서나 나의 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하고 행위로 고백해야 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영원한 생명을 붙들라. 이것을 위하여 너 역시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한 고백을 하였도다.](딤전6:12). 증거에 앞서 고백입니다. 믿음의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선한 행위입니다. [오직 (경건함을 고백하는 여자들에게 합당한) 선한 행위로 하기를 원하노라.](딤전2:10). 믿음의 고백과 행실이 전혀 다를 때 우리를 통해 어떤 빛도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말하는 고백의 진위 여부를 관찰하기도 하고 시험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합니다.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다를 때 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격렬하게 비난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니 가증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요, 모든 선한 일에 버림받은 자들이니라.](딛1:16)고 합니다. 이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고백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 선한 행위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고백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대하신 대제사장이 계시니 하늘들 안으로 지나가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시라.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굳게 붙들지어다.](히4:14), [(또 약속하신 분께서 신실하시니)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고](히10:23). 사람들이 그것을 봅니다.

둘째, 필요를 채워주라. 성도들은 서로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이 서로 형제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행하는지를 매우 주의 깊게 살펴봅니다. 세상에 베푸는 구제도 구제지만 같은 교인들끼리는 어떻게 하는가? 그것을 더욱 보고 싶어 합니다. [또 우리에게 속한 사람들도 필요한 용도를 /채워 주기/ 위해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 그리하여야 그들이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아니하리라.](딛3:14). 하나님은 하늘에서 친히 모든 성도, 모든 교회의 필요를 능히 채우실 수 있고, 공급하실 수 있지만 같은 형제들의 손길을 사용하셔서 그 일을 하시기를 더욱 기뻐하십니다. 가난한 형편에도 받는 것보다 주기를 기뻐하는 이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많아서가 아니라 필요를 넉넉히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하늘의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얼마나 풍성하게 사용하는가? 이 땅에서 하늘의 창고를 마음대로 열어서 가져다 쓸 수 있는가? 하나님께 필요를 얼마나 자주 많이 요구하는가? 에 따라서 영적 삶의 질이 결정 납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삶을 보여 주십시오. 나의 능력, 나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공급을 받아 사는 삶이 바로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선한 행위’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죠지 뮬러의 이야기를 알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서 많은 돈을 벌어서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많이 받아서 유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에게는 한 푼의 돈도 없었지만 늘 주님께 필요를 아뢰고, 그분께 도움을 구함으로써 많은 고아들을 먹이고 입혔습니다. 그는 세상에 ‘선한 행위’를 보여 주었습니다. 흩어 구제해도 가난해지지 않고, 가난해도 부요하게 사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는 것이 믿음의 선한 행위입니다. [그가 /재물을/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지속되고 그의 뿔이 영화로이 높임을 받으리로다.] (시112:9). [흩을지라도 더욱 불어나는 일이 있으며 지나치게 아낄지라도 가난에 이르는 일이 있느니라. 후하게 주는 혼(魂)은 풍부하게 될 것이요, 물을 대는 자는 자기도 물을 받게 되리라.] (잠11:24~25). 이것은 믿고 순종해 본 사람들만이 누리는 영적 체험이 될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나눔의 삶을 삽니다. [이 직무의 실행을 증거로 삼아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 이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시인하고 복종하며 또 그들과 모든 사람들을 향해 너그러이 나누어 주었음이라.](빌1:11).

셋째, 정직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할 선한 행위는 정직입니다. 같은 성도들 사이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들 가운데서 행실이 정직해야 합니다. 세상은 모두 거짓됩니다. [이방인들 가운데서 너희 행실을 정직하게 하라. 이것은 그들이 너희더러 악을 행하는 자라고 비방하다가도 너희의 선한 행위들을 보고 징벌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2). 정직은 그리스도인들의 표지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행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넷째, 열매를 맺으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요15:8). 삶이 변화되고, 가치관이 바뀌고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성령의 열매는 환경과 처지에 반응하는 우리의 내적 성품입니다. 기뻐할 수 없는 처지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 염려와 근심거리가 가득한 상황에서 평강을 누리는 것, 원수를 향해 사랑이 나타나고, 대적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오래 참고 인내하는 것, 절제하는 것 등이 모두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이 교육으로 훈련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세상 역시 잘 압니다. 주의 기쁨과 주의 즐거움, 주의 안식과 주의 평강이 내 안에 넘치는 것을 사람들이 볼 때 그것을 갈망하고 얻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것은 열매 맺는 삶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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