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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주의 은밀한 곳

“주께서 그들을 주의 눈앞 은밀한 곳에 숨기사”(시 31:20)

F.B. 마이어 지음/ 황철수 옮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모셔 내려오거나, 바다에서 모셔 올라올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분의 존재는 모든 존재에 충만해 있으십니다.

 우주라는 대양(大洋)에 하나의 작은 섬처럼 떠 있는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징들로 가득합니다. 이것은 마치 친구의 집이 그분이 살고 계시다는 많은 증거들로 어지럽혀 있어서, 그분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께서 그곳에 거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신발을 벗기 전에 이미 떨기나무가 하나님의 불로 타고 있었던 것처럼, 음울한 대지를 헤치고 나오는 아름다운 꽃들, 숲 속의 개똥벌레들, 둥지에서 날아오르는 새들 등, 존재하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항상 깨닫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몇 시간, 몇 날, 몇 주, 때로는 몇 달을 기도하고 보내거나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왔다 갔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단지 그림자요, 이름뿐이며, 전승(傳承)이요, 지나간 날들의 꿈으로만 계실 뿐입니다. “오 어디에서 그분을 만날지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내가 앞으로 나아가나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뒤로 나아가도 그분을 감지하지 못하며 그분께서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그분을 바라 볼 수 없고 오른쪽에 숨으시나 내가 그분을 볼 수 없구나”(욥 23:3,8,9)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깨닫는 복된 체험과 그분의 임재를 깨닫는 데서 실패하는 것과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요!

그들은 그 비결을 알았습니다.

사람 좋은 요리사인 로렌스(Lawrence) 형제는 60년 이상이나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다는 느낌을 잃지 않았으며,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때와 같이 요리사라는 변변찮은 직무에 따른 의무들을 수행하는 동안 항상 그분의 임재를 의식했다고 합니다.

존 하우(John Howe)는 성경책 여백에 라틴어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매우 황홀하고 즐거운 꿈을 꾸다가 깨어났다. 그 꿈에서 하나님의 높은 왕좌로부터 열려진 내 가슴으로 놀라운 하늘의 빛줄기가 흠뻑 쏟아져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꿈을 꾸고 난 후, 문득 문득 하나님의 특별하신 사랑을 보여 주는 그 분명한 약속을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 되풀이 되는 새로운 즐거움으로 기쁨을 맛보고 있다.”

또한 그는 다른 체험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내 영혼에 찾아왔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며 나에 대해 가장 애정 어린 관심을 가지신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분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안 적도 없고 뵌 적도 없는 그분이 처음으로 나를 만나주셨으며, 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심을 확실히 알았다.”

너무도 복되고 고무적인 이러한 경험들은 시편 가운데 가장 길고 장엄한 119편을 지은 시편 기자의 체험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는 놀라운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일련의 구절들을 통하여 황금 같은 사상을 펼치다가, 갑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말해 왔던 주님이 자기에게 가까이 오셔서 자기를 굽어 살피시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다는 느낌이 그의 내면 의식에 확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의와 희열이 엇갈린 얼굴을 들고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주여, 주는 가까이 계시오니”(시 119:151)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체험이 항상 우리의 것이 되고, 공기나 빛처럼 우리를 감싸며,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으며, 깊고 조용한 초호(礁湖)의 말미잘처럼 그분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윗이 생전에 주의 집에 거하여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분의 장막 속에 자신을 숨기시고, 그분의 장막의 은밀한 곳에서 자신을 숨기시는 것에 대해 말했을 때(시 27편), 그가 의미했던 바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또한 평안과 순결과 능력의 복된 비결을 얻게 될 것입니다. 


주의 은밀한 곳에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할 터이나,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요 16:33). 어떤 곤충은 공기 막으로 자기를 둘러싸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고여 있는 흙탕물 웅덩이 속으로 떨어지더라도 공기 막에 에워싸여 무사하게 됩니다. 신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라는 보이지 않는 막으로 에워싸여 있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멀리 편지를 보낼 때 편지가 손상되지 않도록 봉투 속에 넣어서 부치는 것과 같습니다.

“사악한 자들이 내게로 왔으나, 주는 가장 가까이 있는 자보다 더 가까이 계시며, 저는 주께서 임재하시는 내면(內面)의 원에 거하고 있나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산들은 주의 보호하는 말과 병거들로 가득하나이다. 나를 겨냥하고 있는 무기로 나를 죽일 수 없으니, 이는 그것이 주를 지나서만 내게 이를 수 있을 뿐, 그것이 주께 닿으면 해를 입히지 못하고 튕겨 나갈 것이니이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폭풍우가 몰아칠 때 견고한 집안에 있는 것과 같고, 그 문이 뒤쫓는 자를 들이지 않는 성소에 있는 것과 같나이다.”

주의 은밀한 곳에 순결이 있습니다.

제네바의 호수 너머로 멀리 보이는 눈으로 덮인 알프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세속에 물든 영혼은 고양되고 변화되어 내면의 삶에 침입해 들어오려는 모든 악한 것들이 머뭇거리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의 순진무구함으로 인해 화가 가라앉는다고 하는데, 이는 마치 동굴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치면 그 속에 있던 뱀들이 흩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주님이 임재해 계시다는 느낌을 얻고, 또 주님이 임재하신 은밀한 그곳에서 산다면, 주님의 임재하심이 능치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설령 그 불 한가운데에서 까맣게 타버린 재가 될지라도, 정녕 나는 깨끗하게 지켜지고, 빛나며, 열정적인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의 은밀한 곳에 능력이 있습니다.

밤낮으로 내가 부르짖는 것은 능력, 곧 영적 능력입니다. 영적 능력은 지적인 능력이나 말을 잘하는 능력이나 인간의 힘의 능력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빽빽이 늘어선 악의 행렬을 물리치는 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께서 진실로 이르시기를 그것은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되지 않는다고 하셨나이다. 그러나 주를 만지는 인간의 영혼은 자력(磁力)을 띠게 되어 세상이 부인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영적인 힘으로 채워지나이다.”

“오! 나로 하여금 주를 만지게 하소서! 나로 주와 완전한 접촉을 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로부터 계속해서 밀려오는 신적 능력의 조수(潮水)가 나의 비어있는 간절한 영혼 속을 통과하게 하시며, 그 조수가 흐를지라도 결코 밀려가지 않게 하소서. 또한 그 조수로 인해 내가 복된 사역의 삶을 살아, 사막을 주 하나님의 동산처럼 만들게 하소서.”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이 가까이 계신다는 이 느낌을 얻으며 유지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는 벧엘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야곱조차도 “정녕 하나님이 이곳에 계시는가?”하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름 부음을 받지 못한 눈으로, 야곱 곁에 서 있으면서 아무런 사닥다리도 보지 못하고 아무런 음성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족장은 우리가 경의(敬意)도, 기쁨도 없이 걸어가고 있는 우리 인생의 빈 황무지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엘리야가 숨었던 그 동굴 입구로 가서, 천둥과 폭풍의 대조에 의해 더욱 감미롭고 세미한 음성에 의해 감동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마 저 영광스러운 임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엘리야 곁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야가 지금 살아 있다면, 바람의 속삭임과 아기들의 옹알거림과 심장 고동의 리듬 속에서도 그 임재를 분별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을 때, 그의 곁에 있었다면 아마도 장막을 만드는 사람의 가게나 초라한 셋방만을 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속에 있지만, 그는 무아경 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다시 살아 있다면, 그는 우리의 배에서 천사들을, 우리의 교회에서 환상들을, 어두컴컴한 하늘의 경감된 영광 속에서 하늘로 열려 있는 문을 분별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 내면의 빛이나 어두움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녹이 그분과 동행할 때나 모세가 그분과 대면하여 이야기할 때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이 세상에 임재해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에 대해서도 기꺼이, 살아 있는 밝은 영광스러운 실재가 되십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기름부음을 받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시지만, 세상에 대해서는 그렇지 아니하십니다. 시대를 탓하는 것을 멈추고 우리 자신을 탓합시다. 시대가 타락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혼이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가까이 계심을 즉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주의 은밀한 곳에 영원히 거하고, 또한 주의 장막에 감춰지는(시 31:20) 복된 비결을 배우도록 힘씁시다.

먼저 당신을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는 기쁨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는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들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임재는 공포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하여 마귀들은 지옥에 숨고, 죄인들은 가리개를 만들거나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 모든 장벽은 무너지고, 모든 장막은 찢어지며, 모든 구름은 흩어지고, 가장 나약한 신자라도 부정한 것은 다 태워버리는 모세가 머물렀던 그 불속에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에서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임재라는 이 복된 의미와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까요?

주님의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죄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온유하신 사랑을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를 위해 흠 없이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는 그 왕이 계시는 은밀한 방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집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거기서(속죄소) 내가 너와 만나고”(출 25:22).

아론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마다 피를 뿌렸던 금으로 된 단은 예수님의 예표였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속죄소가 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분의 죽음으로 그분과 가장 깊은 교제를 갖고 또 항상 그분을 기억하는 만찬의 영으로 살 때, 당신은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가장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제 엠마오에서처럼, 그분은 빵을 부수어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노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우리를 위해 이루시려고 주님은 성령에 대한 약속을 아버지로부터 받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므로 그 복된 위로자가 당신에게 속한 분이심을 아십시오. 그분이 하나님 안에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분은 당신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걸으며, 그분께 당신의 전 존재를 여는데 비례하여, 당신은 그분의 영광의 빛으로 빛나는, 그분이 임재하시는 방이 됩니다. 또한 그분이 당신 안에 계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자신이 늘 그분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요한 사도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 4:13)

나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내 안에 성령님이 거하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나의 삶이 너무도 분주한 탓입니다. 나는 묵상하고 기도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드리지 않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과 밖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분별할 수 없습니다.

오감(五感)은 쾌락에 빠져 있고, 맥박은 빠르게 뛰고 있으며, 머리 속은 여러 가지 조급한 생각들로 꽉 차 있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아야 그 물이 맑아져서 밑에 있는 조약돌을 드러내는 법입니다.

우리는 잠잠히 있어, 하나님께서 내 안에, 내 주위에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의 침묵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고, 영원한 것이 실재가 됩니다. 태양에 부신 눈은 그 눈부신 빛에서 벗어나서 얼마간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장막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단 하루도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기다리는 침묵의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의 은밀한 곳에 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하나요?

1. 마음을 깨끗이 하십시오. 

모든 묵인된 죄는 영혼의 창을 온갖 더러움으로 덮어서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부정한 것과 이기심에 대한 모든 승리는 영적 시력을 깨끗하게 하여, 눈에 끼어 있던 비늘을 떨어지게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자아를 부인하고, 죄에 관대치 말며, 마귀에 대항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정한 영혼은 설령 하늘 한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영혼은 이 세상의 지극히 평범한 것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고 또 시선이 닿는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정한 영혼은 유리같이 맑은 바닷가에 서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그런 영혼들이 가지는 유일한 이점은 죽어야 할 죄악된 본성의 베일이 찢어졌을 때, 더 직접적으로 그리고 더 완전하게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십시오.

결코 어떠한 명령도 인정하지 않거나 지키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나의 명령들을 가지고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신실한 종인 모세 역시 하나님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했습니다.

3. 기도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때로는 소원의 간절함과 확고부동함을 시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늦게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명이 밝아오듯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닫혀 있는 문들을 통하여 제자들 가운데로 예고 없이 조용히 오시곤 하셨습니다. “주의 발자취는 알 수 없었나이다.”(시 77:19).

그 때에 우리는 참으로 성(聖) 버나드(Bernard)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에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눈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었으니, 이는 그분의 임재가 색(色)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귀로 들어가신 것도 아니었으니, 이는 아무 소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숨으로 들어가신 것도 아니었으니, 이는 그분이 공기와 섞이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촉감으로 들어가신 것도 아니었으니, 이는 그분은 만져도 알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대는 내가 어떻게 그분이 계신 것을 알았는지 묻게 될 것이다. 그분은 소생시키시는 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들어 오시자마자 내 잠자는 영혼을 깨우셨다. 내 영혼이 그분을 찬양할 수 있도록, 전에는 알지 못했고, 무정했고, 강퍅했고, 병들었던 내 마음을 움직이셔서 깊이 감동시키셨다. 그리하여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했다.”

4. 하나님께 소리 내어 말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아마도 우리는 하나님께 늘 소리 내어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이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거룩하고 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집에 앉아 있거나 길을 걸어가는 중에 같이 있는 친구에게 하듯이 하나님께 말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당신의 문제, 곧 자신의 학문, 계획, 소망, 잘못, 슬픔, 죄에 대해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십시오. 사물은 그분의 임재의 고요한 빛 속으로 가져갈 때 매우 다르게 보입니다. 우리가 소리 내어 하나님과 오랫동안 이야기하면 반드시 그분이 가까이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5. 말씀을 많이 묵상하십시오.

말씀은 주 하나님이 거니시는 동산이며, 그분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그분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시는 그분이 계시는 방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말씀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주하고 나도 그 안에 거주하나니”(요 6:56).

6. 부지런히 일하십시오.

기도하는 곳은 실로 주님께서 자신을 명백히 드러내시는 곳입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하는 종이 울린 뒤에도 그곳에서 꾸물거린다면 주님의 임재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행하면, 늘 주님의 임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의를 행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일상적인 일을 성실히 행하면 그분이 계시는 곳에 있는 천사가 우리를 맞이하러 와서, 우리 곁에서 우리와 동행합니다. “너희는 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성전의 법정에서나, 깊숙한 골짜기에서, 또는 병상에서뿐만 아니라 되풀이 되는 일상적인 일이나 평범한 삶 속에서도, 활기 없는 생활에서도, 우리는 항상 주의 은밀한 곳에 있을 수 있으며, 엘리야가 아합 앞에서 했던 것처럼, 가브리엘이 사가랴에게 했던 것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눈앞에 서 있다.”(눅 1:19)(왕상 17:1).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주께서 택하시고 주께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시 65:4).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느끼는 삶은 귀한 삶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너무 좁아서 지나갈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깨닫는 삶은 귀한 삶입니다.

우리가 결코 한 순간도 외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과, 앞뒤로 그분께서 에워싸이고 그분의 손에 감싸여 있음을 깨닫는 것 또한 귀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있을지라도 그분이 지금보다 우리에게 더 가까이 계실 수 없으시다는 것을 깨닫는 것 또한 귀한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친구로, 중재자로, 상담자로, 안내자로 계신다는 것을 깨닫는 것 또한 귀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막강한 군대를 거느리신 주의 군대 장관이 계시는 한, 우리 인생에 있는 여리고는 모든 벽이 무너져버릴 것임을 깨닫는 것 또한 귀한 것입니다. 옛 성도들이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내가 결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리라.”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용감히 전쟁에 임했던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두운 골짜기의 두려움과 슬픔과 불안이여, 사라지라!  “주께서 그들을 주의 눈앞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교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그들을 은밀히 장막 안에 두사 혀의 말다툼에서 벗어나게 하시리이다.”(시 31:20).

- F. 마이어 지음 『고난은 선물이다』(생명의 말씀사)에서 발췌, 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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