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2004년 12월 29일-성경공부/[송년 특강]


말씀을 보내사(II)

말씀: 시147:18-19        
요절: 시147:18-19
        

사람이 하나님을 정의하거나 규정하거나 개념 짓는 일은 아예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과 같은가? 라고 물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과도 같지 않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와 같은가? 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와도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수도 없고, 그릴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이것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모습이다.”와 같이 말하는 순간 이미 그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성경의 반복적인 증언은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입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여수룬의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자신의 위엄을 공중에 나타내시는도다.](신33:26)고 했습니다. 다윗 역시 [그러므로, 오 [주] 하나님이여, 주는 광대하시오니 이는 우리 귀로 들은 모든 것대로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니이다.](삼하7:22)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일관된 증언은 하나님 같은 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 [주]여, 우리 귀로 들은 모든 것에 따르면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하나님이 없나이다.](대상17:20). 시편에도 증거하기를, [내 모든 뼈가 말하기를, [주]여, 주와 같은 이가 누구니이까? 주는 가난한 자를 그보다 훨씬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고 참으로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노략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이시라, 하리로다.](시35:10)고 했습니다. 지상의 신화와 전설과 소설, 만화 등에 등장하는 어떤 신들도 하나님 같은 이는 없습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사오며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같은 일들도 없나이다.](시86:8). 이는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옛날 일들 곧 이전 일들을 기억하라.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기 때문이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사46:9). 하나님과 같은 이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같으신 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정의하고 개념 지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마음 속에서 상상과 생각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려는 우상 제작과 같은 것입니다. 이런 경향으로 인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마음 속에 믿고 섬기는 예가 허다합니다. 현대 기독교와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가르치고, 설교함으로써 성도들의 마음속에 우상을 심어 주고 있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한 가장 바른 인식과 개념은 “하나님은 말씀이시다.”입니다. 이보다 정확한 성경적인 정의는 없습니다. 무엇과도 같지 않고, 누구와도 전혀 같지 않으신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셔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며, 우리 안에 자신을 알리십니다. 말씀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십니다.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지만 빛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랑, 빛 등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요, 자체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이란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일컬음을 받더라.](계19:3). 주님은 자신을 알파와 오메가로 계시하셨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앞으로 오실 {주} 곧 전능자께서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마침이라, 하시더라.](계1:7/ 21:6, 22:13). 알파와 오메가란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 글자와 끝 글자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말씀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한 글자도 주의해서 보고,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말씀은 하나님이십니다. 말씀 외에 그 어떤 것도 “***은 하나님이다” 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은 ****이시다”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기 때문에 말씀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말씀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말씀의 신성이나 하나님의 신성은 같습니다. 말씀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는 같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의 권위를 확증하셨습니다. <./b>주님은 주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가? [내가 주의 거룩한 전(殿)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仁慈)와 주의 진리로 인하여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셨음이니이다.](시138:2). 주님은 홀로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이름보다 자신의 말씀을 더욱 크게 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크게 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통해 [너는 [주] 네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지 말라. 이는 [주]가 자신의 이름을 헛되이 취하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할 것임이라.](출20:7)고 경고하실 정도로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이렇게 존귀한 자신의 이름보다 더욱 크게 하시고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거의 모든 일을 말씀을 보내심으로 행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시고, 말씀으로 무엇인가를 이루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 꿈, 환상, 계시, 천사, 우림과 둠밈, 자연 현상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자신의 종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내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성경에 가장 잘 알려진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히1:1)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줄기에 속한 자손과 너희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아, /주께서 /이 구원의 말씀을 너희에게 보내셨거늘](행13:26). “말씀을 보내셨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이 말씀을 어떻게 듣고 받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예입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보내신 구원의 말씀을 통해 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위로의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은혜는 은혜의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능력은 권능의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믿음은 믿음의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거룩함은 거룩한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생명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이 옵니다. 심판의 말씀을 통해서 심판이 옵니다. 지혜와 지식과 명철의 말씀을 통해 지혜와 지식과 명철이 옵니다. 지어진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해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것은 그대로 됩니다. “빛이 있으라”(창1:3)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말씀의 빛을 비추십니다. [이는 빛에게 명령하사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주셨기 때문이니라.](고후4:6).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는 것은 그냥 읽고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방법이며,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말씀으로 새 생명을 낳으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1:18).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씨앗입니다. 말씀은 새로 태어난 아기들이 먹고 자라야 할 젖입니다(벧전2:3). 말씀은 영의 양식이며, 음식이며, 빛이며, 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시며, 우리는 그 말씀을 받아서 영적 생명을 유지하고, 영적 생활을 영위해야만 합니다.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2:2). 주님의 말씀은 비, 이슬, 가는 비, 소나기와 같습니다. 인생이 풀과 나무에 비유된다면 말씀은 비와 이슬에 비유됩니다. 주님의 말씀이 나무와 풀에 비요, 이슬인 것 같이 우리 인생은 주의 말씀으로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가장 영화롭고, 크게 하신 주의 말씀을 주님은 의인과 악인에게 공평하게 내리는 비와 같이 온 세상에 값없이 널리, 풍성하게 보내 주셨습니다.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하나님은 매일 저녁 이슬을 맺히게 하시며, 시시때때로 비를 주십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명구들은 불신자들에게도 한 두 마디 이상 다 전파되었을 정도이며, 성경의 유명한 스토리는 무신론자들의 귀에도 다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이 전혀 없는 희귀한 시대가 있고, 거의 찾을 수 없는 시대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머니 한나의 젖을 떼자마자 성전에 맡겨져서 키워졌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는 말씀이 얼마나 귀했던지 열린 환상이 없었던 시대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주]를 섬기더니 그때에는 [주]의 말씀이 희귀하여 열린 환상이 전혀 없었더라.](삼상3:1). 말씀이 없으면 비전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다는 것은 곧 멸망을 의미합니다. [환상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하려니와 법을 지키는 자는 행복하니라.](잠29:18). 여러분이 어떤 말씀을 잡고 있으면 그 말씀이 여러분을 인도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말씀을 잡은 줄 알았는데 말씀이 나를 가르치고, 이끄는 놀라운 영적 삶을 알게 됩니다. 비전이란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된 영적 소망이며, 주안에서 얻게 된 꿈입니다. 지금은 롯처럼 살지만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고, 지금은 사울과 같이 보여도 다윗과 같은 용사가 되는 꿈은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아무도 롯과 같이, 사울과 같이, 데마와 같이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아브라함, 다윗, 바울, 엘리야 등과 같은 생을 흠모하고 꿈꾸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비전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주신 환상입니다. 설교를 듣다보면, 성경을 읽다보면 주님 안에서 큰 일을 하고 싶고, 열매를 맺고 싶고, 많은 사람들을 회심시키고 싶고, 좀 더 전도하고,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헌신되고 싶습니다. 이런 열망이 생겼다면 그것은 말씀을 통해 비전이 생긴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인터넷으로 제 설교와 강의안을 읽고 정리하면서 이것들을 책으로 내자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책을 내자니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이제 책 3-4권을 낼만한 돈을 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 역시 말씀을 통해 전파하고 싶은 작은 비전입니다. 말씀을 통해 방향이 생기고, 목표가 생기고, 꿈이 생기는 것을 비전이라고 합니다. 이런 비전이 전혀 없다는 것은 여러분 안에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설교는 믿음이 강한 나 같은 사람이나 겨우 감당하지 초신자들이 들으면 실족할 것 같으니 가족들이나 아는 사람들은 이 교회에 데려오면 안 되겠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의 물이 씻기고, 말씀의 불이 열정으로 불타게 하는 일은 결코 여러분들이 누구에게는 좋겠다, 누구에게는 안되겠다는 식으로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어떤 대언자나 사도들도 군중들을 수준별로 나누어서 말씀을 전한 예가 없습니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증거하셨고, 선포하셨습니다. 설교는 학교 수업이 아닙니다.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아이 성경이 있고, 노약자용 성경이 있고, 초신자용 성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때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다고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들이 아니라 말씀을 판단하는 자들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백성은 말씀을 듣지 못할 때 망하고, 포로로 잡히고, 기갈이 듭니다. 마지막 때에 있을 일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날들이 이르러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빵으로 인한 기근도 아니요, 물로 인한 갈증도 아니요, 오직 [주]의 말씀들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주의 말씀이 없는 시대가 기근의 시대요, 갈증의 시대입니다. 말씀이 마음 속에 풍성히 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말씀은 양식이며, 물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하건대 /너는/ 그분의 입에서 법도를 받고 그분의 말씀들을 네 마음 속에 쌓아 두라.](욥22:22)고 했습니다. 말씀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은 금방 황폐해지고, 갈해 지고 맙니다. 말씀을 공급받지 못하는 영혼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보내시는 방법은 사람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고, 꿈이나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실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자신의 모든 종 대언자들을 일찍부터 일어나 보내시고 보내셨으나 너희가 주의하여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렘25:4).

그러나 마지막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분에게서 나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매](요7:29).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히1:2a). 하나님의 아들은 다시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왜 보내셨습니까? 말씀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천하 만민, 세계 도처로 가서 전하고 가르치라고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 주님은 죄인들을 향해, “오라!” 말씀하시지만 제자가 된 형제들을 향해 “가라!” 명하십니다. 바울에게 직접 말씀을 주셨던 주님께서 뒷일은 아나니아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고넬료에게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정작 복음은 베드로를 통해 듣게 하셨습니다. [많은 논쟁이 있은 뒤에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내 입을 통하여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시려고 매우 오래 전에 우리 가운데서 /나를/ 선택하시고](행15:7). 할례자들은 베드로, 이방인들은 바울을 통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원칙입니다.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이방인이든 베드로와 바울을 통하지 않고 복음을 믿거나 성령을 받은 예는 없습니다.우리는 누군가를 통해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를 구원하는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고 또한 그분을 믿은 뒤에 저 거룩하신 약속의 영으로 인치심을 받았나니](엡1:13).

소위 구원을 직통 계시로 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직통 복음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빌립을 보십시오. 성령께서는 빌립을 광야로 보내셔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친히 하시면 될 일이지만 친히 하신 것이 아닙니다. 빌립은 초대 교회에서 뽑힌 일곱 명의 집사(?) 가운데 한 명이었는데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구원받았거나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람일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천사들 역시 사도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전하도록 촉구했습니다. 감옥에서 문을 열어준 천사라도 복음을 전하지는 않습니다. 복음 전파, 말씀 사역은 사람들에게 맡겨진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빛이 없습니다. [/그들이/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만일 그들이 이 말씀에 따라 말하지 아니하면 그 까닭은 그들 안에 빛이 없기 때문이니라.](사8:20). 빛이신 주님은 우리 안에 말씀을 통해서만 빛을 비추십니다. 말씀이 없다는 것을 내 안에 빛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을 비추시는 것은 우리 안에 말씀을 주심으로써 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주]의 영광이 일어나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사60:1)고 하셨는데 이는 말씀이 임한 것을 말합니다. 어린 사무엘이 성전에서 대제사장 엘리와 함께 생활했지만 그는 어려서 주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주의 말씀이 계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사무엘은 아직 [주]를 알지 못하고 [주]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계시되지 아니하였더라.](삼상3:7). 누구라도 주의 말씀이 계시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주]를 아는 것은 말씀의 계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주]께서 다시 실로에서 나타나시니 이는 [주]께서 실로에서 [주]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신을 계시(啓示)하셨음이더라.](삼상3:21). 사무엘에게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듯이 동일하게 주님은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말씀이 없으면 살인자가 됩니다.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씨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8:37).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면 생명이 살아납니다.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반면에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할 곳이 없다면 그는 주님을 죽이려 하는 살인자가 됩니다. 말씀이 없는 사람들이 말씀을 지닌 사람들을 찾아 죽이는 것입니다. 교회를 없애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또한 지역 교회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는 것은 주의 명령에 따른 것이요, 부르심에 따른 것이지 그냥 마음이 내켜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왜 나는 교회에 가는가? 주님께서 교회로 나를 부르시고, 가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합당한 이유입니다. 교회에서는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웁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전입니다. 이 사실로 인해 교회에 온다면 그는 잘 온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목자로서 늘 기도하는 한 가지가 말씀을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교회에 사람은 많이 안 주셔도 주의 말씀은 제 안에 꾸준히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옵소서!” 이것이 늘 저의 기도 제목입니다. 빈약한 말씀으로 천명, 만 명 앞에 서는 것보다 풍성한 말씀으로 한두 명 앞에 서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몇 몇 성도들은 교인의 수가 늘어야 주님이 제게 말씀을 주시는 줄 압니다. 우리 주님의 위대한 설교는 많은 군중들 보다 한 명을 상대로 한 설교였을 때가 허다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요한복음 3장의 긴긴 설교는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 한 명을 두고 행한 말씀 선포이며, 요한 복음 4장에서도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 한 명을 두고 한 명 설교였습니다. 마태복음 5-7장에서 같이 수많은 청중들을 앞에 둔 산상 수훈도 있지만 한 명이나 몇 명을 두고 한 설교도 허다합니다. 하나님이 제 안에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는 것이 설교요, 전파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하기 때문이니 그분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고후13:3).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가? 증거를 구했습니다. 구약의 대언자들 뿐 아니라 오늘날 지역 교회 목회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다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잘 받아서 선포할 때 그것을 설교라고 합니다. 만약 내 안에 받은 말씀 없이 자신이 여기저기서 남의 설교를 베끼거나 참조해서 설교문을 편집하고, 감성적이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전하는 것은 웅변일 뿐 말씀 선포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을 보내 주십니다. 성령은 세우신 사역자들을 통해 성경을 선포하고 가르치게 하시며, 듣는 이들 안에서 그것을 믿고 순종하고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우리 속에 거해야 열매로, 선행으로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남아 있으면 너희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리라.](요일2:24). 사도 요한 역시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말씀이 있어야 할 곳은 창고나 은행이 아닙니다. 말씀은 언제나 여러분 안에 거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 속에 있고, 우리 입술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두어야 할 곳은 마음속입니다.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너는 마음 속에 두고](신6:6). 주님의 말씀은 마음과 혼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들을 너희 마음과 너희 혼에 두고 또 그것들을 너희 손에 매어 표적으로 삼고 너희 눈 사이에 붙여 이마의 표로 삼으며](신11:18).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대언자들은 바람이 되리라. 말씀이 그들 속에 있지 아니한즉 그와 같이 그들에게 이루어지리라, 하였도다.](렘5:13). 바람이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백성들을 나무로 만드시고, 불을 붙이게 하실 때 그 위에 부는 바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백성들을 모두 활활 불타게 하는 바람이요, 멸망시키고 소멸시켜 버리는 바람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대언자들이나 목사들이 이와 같습니다. 듣는 자들을 모두 불 구덩이 집어넣어 바람을 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말씀이 거하지 않으면 동료들을 불구덩이에 불타게 합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법의 세계라. 이와 같이 혀는 우리의 지체들 가운데 /하나로/ 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이며 자기도 지옥 불로 불타느니라.](약3:6).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은 채 모인 모임, 대화는 부패한 대화일 수 밖에 없고, 불을 가열차게 하는 바람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 거해야 실족하지 않으며, 타락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결코 미끄러지지 아니하리로다.](시37:31). 왜 사람이 실족하는가? 사람들은 많은 이유를 대지만 이유는 마음 속에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받지 않는 자들은 반드시 미끄러지며 실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말씀은 발이 밀끄러지지 않게 하며, 넘어지지 않게 하는 안전장치입니다.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을 실족하게 할 것이 없으리로다.](시119:165). 주께 죄를 범하지 않는 방법 역시 말씀을 마음 가운데 두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 속에 숨겼나이다.](시119:11). 마음속에 말씀을 두는 것이 범죄 예방의 첩경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분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그분의 모든 성도가 그분의 손 안에 있으며 그들이 주의 발 밑에 앉아 각 사람이 주의 말씀들을 받는도다.](신33:3). 말씀을 잘 받는 성도보다 주님께 더 사랑받는 성도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보면서 마리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녀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더니 그녀도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들으나](눅10:39). 주님은 마리아를 칭찬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2). 주님을 섬기기 위해 분주하게 음식을 장만하고 일을하는 것보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욱 사랑받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 주님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조용히 말씀을 경청하고 주목해서 듣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이는 큰 문제입니다. [지혜가 있어서 이 일을 깨달을 자 누구인가? [주]의 입의 말씀을 받아서 이 땅이 어찌하여 멸망하고 광야같이 불에 타서 지나가는 자가 없게 되었는지 밝히 알릴 자 누구인가?](렘9:12). 말씀을 받아서 우리는 전파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을 받아서 우리는 일해야 합니다. 다윗은 주의 말씀으로 주의 계획과 뜻을 알았습니다. [[주]의 말씀으로 인하여 주의 마음대로 주께서 이 모든 큰 일을 행하사 주의 종에게 그것들을 알게 하셨나이다.](삼하7:21). 그는 성전 건축을 위해서 모든 재원을 마련했는데 주님이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심으로 우리는 그것을 책으로, 테잎으로, 문서로 출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그것을 전파하는(PUBLISH) 자들의 무리가 많았도다.](시68:11).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이 말씀을 주시지 않으면 예전에 말씀을 받았던 선배 목사님들의 고전들을 반복해서 찍어내는 것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특히 1800년대와 1900년대 초반에 수없이 쏟아져 나온 말씀의 종들은 죽은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책이 인쇄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주셨고, 말씀을 받은 무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는지라 매일 재탕, 삼탕하면서 설교하거나 여기 저기서 베끼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받으시고, 그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베레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과연/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탐구하므로](행17:11). 성경이 왜 있습니까? 선포한 말씀들을 받아서 그것들을 탐구하도록 있는 것입니다. 성경만 읽고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나 설교만 듣고 성경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베뢰아 사람들과는 매우 동떨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 여러분은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 들이고,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탐구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일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쉽고, 편하게 하며 확신 있게 아멘으로 받도록 돕습니다. 반면 설교를 듣는 일은 성경을 읽는 것은 쉽고 편하게 해 줍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받지 않으면 주의 종이나 교회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박해 속에서 성령님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따르는 자가 되었으니](살전1:6). 누가 주를 따르고 사도 바울의 일행을 따랐습니까? 말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설교를 들을 줄 알았습니다. 선포하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가 또한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림은 너희가 우리에게서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들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느니라.](살전2:13).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런 덕분에 매우 급성장하였고, 강성했습니다. 말씀을 받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영적 생명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그 선포된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한 것은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결합되지 아니하였음이라.](히4:2). 하나님은 말씀을 보내십니다. 마치 땅위에 씨를 뿌리듯이 뿌리시는데 씨앗들을 받은 밭은 각기 다 다릅니다. 길가에도 뿌려지고, 가시 떨기에도 뿌려지고, 더러는 돌짝 밭에도 뿌려졌습니다. 모두 좋은 밭에 뿌려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상태를 두고 한 이 비유에서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받아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좋은 마음 밭이란 어떤 밭입니까? [그러나 좋은 땅에 있는 자들은 이들이니 곧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자들이니라.](눅8:15).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하고 진실하며 정직해야 말씀을 듣고 읽을 때 마음에 간직되며, 열매가 맺힙니다.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리 읽고 들어도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교회와 집에서, 집과 직장에서 이중 플레이를 하는 사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는 나중에 가족들이나 그 사람과 잘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완전히 딴판인 경우가 있습니다. 무릇 성도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이 틈만 나면 전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분인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목사님의 사모님과 따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남이 아는 나와 내가 아는 나’가 이렇게 차이가 나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높임을 받고, 크레딧을 잔뜩 쌓아 올려놓아도 이런 것은 한 순간에 무너지는데 더욱 문제인 것은 그 마음이 좋은 땅이 아니어서 지금까지 말씀을 받은 것이 없다는 영적 현실입니다. 좋은 땅에 있는 자들이 말씀을 받아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만고의 불변의 진리입니다. 주님은 누구에게 말씀을 주시는가? 헌신된 사람입니다. [주의 종이 헌신하여 주를 두려워하오니 주의 말씀을 주의 종에게 굳게 세우소서.](시119:38). 여러분이 주님께 완전히 헌신하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시고, 굳게 세워 주십니다.

여러분은 모두 내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받으십시오.

글쓴이.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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