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주]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아, 네가 아홀라와 아홀리바를 심판하고자 하느냐? 그리하려거든 참으로 그들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밝히 말할지니라.](겔23:36).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심판(판단)하고자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때로 범죄가 만연하고 사악한 세상과 사람들을 볼 때 심판하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는 꼭 의인이 아니더라도 술에 취한 어떤 사람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세상은 완전히 없어져야 해!” -이는 단순히 세상에 대한 비뚤어진 시각과 불평불만이 아니라 악한 현 세상을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없어져야 한다. 불공평하다, 악하다, 썩었다는 말은 누구나 입에 담는 소리이며, 그들은 이미 세상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역시 우상이 범람하는 이스라엘의 현실 속에서 그들의 사악함에 대해 심판하고자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만 의식이 있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도 범죄한 민족을 향해 의분(義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람이 사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그러하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에스겔에게 심판하려거든 [참으로 그들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밝히 말할지니라.](36b)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죄를 밝히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밝히 말하라’는 것은 목숨이 열 개라도 살아남기 어려운 일입니다. 죄인에게 죄를 말해 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말해 주라는 것입니다.

대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죄악을 밝히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처럼 인권이 중시되고, 개개인의 사생활이 철저히 보호되어야 할 귀한 덕목인 시대에는 죄악을 지적하는 일이 더욱 힘듭니다. 목사들은 좀처럼 성도의 죄들을 밝히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가증한 일들을 밝히 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크게 외치라. 네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소리 같이 높여서 내 백성에게 그들의 범죄를, 야곱의 집에게 그들의 죄들을 보여 주라.](사 58:1).

죄를 죄라고 선포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죄를 지적하지 못한다면 그는 이미 삯꾼 목자입니다. 어떤 이는 주님의 종이 주님의 말씀만 전하면 되지 무엇 하러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들추어내는가? 그런 목사는 목사도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런 문제로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에게 “네 목소리를 나팔소리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범죄를, 야곱의 집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 주라”고 하십니다. 이는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세상에 말씀을 전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세상이 악하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하고, 그들이 죄인임을 외치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첫 감독으로 세움을 받은 디모데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죄짓는 자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딤전5:20).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목자였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감독이요, 목자인 디모데에게 죄짓는 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며, 대해야 하는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은밀히 처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른체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앞에서 꾸짖어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꾸짖습니까? 설교를 통해서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꾸짖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설교의 방식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설교를 통해서 목사가 누구에 대해서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도 열을 받고, 목사의 인격이 어쩌고 저쩌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는 죄인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합니다. 주일 11시 예배에 모든 사람이 참여하게 하여 그 설교 시간에 꾸짖어서 다른 사람들도 두려워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기분이나 맞추어 주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악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설교자들은 주님이 부르신 주의 종이라 할 수 없습니다. 죄악에 대한 책망이 없고 꾸짖음이 없는 설교는 성경적인 설교가 아니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너는 말씀을 선포하라. 때에 맞든지 맞지 아니하든지 항상 예비하라. 모든 오래 참음과 교리로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딤후4:2).

여기서 우리는 책망하고, 꾸짖고 권면하라는 말씀을 봅니다. 매일 도덕 강론 같은 윤리적인 설교나 하고, 칭찬이나 해주고, 힘과 위로를 준답시고 입술발린 이야기나 하는 것은 설교자의 직무를 무시하는 것이며,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꾸짖는 일은 주의 종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위로와 칭찬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를 책망하며, 성령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그렇다면 주의 종은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받아 죄를 책망하고 죄인들을 책망하고 꾸짖는 일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꾸짖게 하도록” 반복적으로 명령합니다. 크레테 교회의 첫 감독은 에바브로 디도였습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건전한 자가 되게 하여](딛1:13). 바울은 디도에게 “엄히 꾸짖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죄를 행하는 자들, 잘못하는 자들을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은 사람들의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침례인 요한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당대의 지도층 인사들의 죄를 낱낱이 공개적으로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르되, 오 독사들의 세대여, 누가 너희에게 경고하여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 그는 왕이라고 해서 봐 주는 법이 없었습니다. 당대의 왕이었던 헤롯에게 가서 그의 사적인 죄를 지적하며 설교했습니다.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녀를 취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다, 하였음이라.](마14:4).

주님 역시 마찬가지이십니다. [오 독사들의 세대여,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으리요? 이는 입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기 때문이라.](마12:34). “같은 말을 해도 고운 말을 써라”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며 예의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성과 교양이 넘쳐 흐르는 자칭 경건한(?) 성도님들과는 달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뱀들아, 독사들의 세대여, 어찌 너희가 지옥의 정죄를 피하겠느냐?](마23:33). 이는 구약의 모든 대언자들은 물론이요, 교회사를 통해 주님의 성령으로 충만했던 모든 주의 종들이 죄와 죄인들을 향해 대적했던 전사의 모습입니다. 가장 온유하셨던 주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독사들, 회칠한 무덤, 위선자들이여, 눈 먼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에게 죄를 밝히 말해 주셔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 죄를 지적하여 밝히 말해 주지 못하는 사람은 진정한 설교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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