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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부활이 없다면(03)
말씀: 고전15:32
요절: 고전15:32




인생에 대한 불확실성, 세상에 대한 불예측성,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우리는 늘 절감하며 살아갑니다. 성경도 이런 인생에 대해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약4:14)고 말합니다. 아무도 내일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한 가지 확실하게 아는 것은 인생이 짧다는 것, 인생은 허무하다는 것, 죽음은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하신 것이요’(히9:27)란 주님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아무도 죽음에서 일어나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그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 부활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의 무엇을 생각합니다. 인간답게 살다가 죽는다는 것은 각기 가치관에 따라 기준이 다르겠지만 가장 인간다운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대로, 지음 받은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는 사람이 매우 적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부활이 주는 참된 의의와 유익에 대해서 성경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부활이 주는 유익 가운데 현재적으로 우리 삶에 주는 현실적인 면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간의 삶의 생존 의미, 진정한 실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줍니다. 고린도전서 15:32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들의 방법대로 에베소에서 짐승들과 싸웠을진대 만일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내일 죽을터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자 하리라, 하리라](고전15:32).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자신은 막 가는 인생, 현세적 쾌락주의[Que Sera Sera]와 같은 그런 삶을 살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생의 존재 의미, 생명의 가치는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진정한 자아 발견과 자아 성취를 이루어 줍니다. 모든 철학이 추구하는 삶과 죽음, 생의 허무, 인생의 고난,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해답이 바로 부활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예화) 불교 철학에 심취했던 서정주 시인- “국민시인 미당 서정주 시인이 말년에 구원의 복음을 듣고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건은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불교대학인 동국대의 문리대학장까지 지낸 그의 영향으로 불교 문단에 들어간 후배 문인만도 수만 명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미국 앨라바마 주에 사는 아들의 권면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고, 혼자 성경을 쭉 읽다가 "내 죄 문제가 이제 풀렸다! 내가 이제 구원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외치며 기뻐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후 암으로 고생하던 시간에 그가 미국에 가서 아들과 함께 살고 싶다고 고백한 이유가 있다. 미국의 그 작은 교회에서 찬양도 하고 말씀도 배우고 봉사하며 느꼈던 그 소박한 감격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누리면서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소천한 후 불교장으로 성대한 장례식이 치러졌지만, 홍정길 목사 등이 중심이 되어 천국 환송예배가 드려졌다는 사실을 아는 세상사람들 역시 많지 않다. 80년 동안 불교에 묻혀 살던 그 시인은 예수님을 진정한 구주로 발견한 후 그토록 갈망하던 진리를 깨달았고, 지금 그가 바라던 천국에 있다.”/윤형주 장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 생의 존재 의미를 구하고, 도(道)를 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허무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고난을 받고, 모든 수고를 다하지만 손해 의식이 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영광스런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며 두려움이 없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용기는 타고난 기질이 아니라 부활이 내게 가져다 준 믿음의 힘입니다. 내가 늙지만 슬프지 않는 것, 내가 병이 들어서 병상에서만 누워 있다 해도 마냥 슬프지만 않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있기에 삶의 절제가 가능합니다. 부활이 있기에 우리의 이 생은 주와 복음을 위해 더 많은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기를 자원(自願)합니다. 이곳에 구도자들이 있다면, 삶의 허무를 느끼는 분이 있다면 부활이시오,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11:25)를 바라보십시오. 내 안에 죽음이 주는 어둠과 허무는 아침 햇살의 안개처럼 걷혀지고 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재 나의 삶의 고난과 절망을 극복하는 힘을 제공해 줍니다. 삶의 무게에 눌리고, 지치신 분들은 낙심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 닥친 모든 죽음의 그림자들을 걷어 내십니다. 고린도후서 1:8-10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우리에게 닥쳤던 고난에 대해서 너희가 모르기를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우리가 힘에 겹도록 눌림을 당하여 심지어 생명까지 단념하고 우리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느니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말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고 계시며, 또 건지실 줄을 우리가 신뢰하노라.](고후1:8-10). 믿음의 사도라고 불렸던 바울에게도 ‘나는 이제 죽었구나’란 생각이 들만큼 어려운 일은 항상 따라 다녔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술술 풀리고, 어려움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동역하던 형제들은 모두 생명을 단념할 정도로 고난을 당하였고, 눌림을 당했습니다. 그들 스스로 ‘우리 속에 사형 선고를 받았느니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부활의 참된 의미는 매일의 삶 속에서 재현되었습니다.


극심한 박해와 고난, 마음의 절망 가운데서 그는 그런 사건들 속에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본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부활의 주님을 삶 가운데서 신뢰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고, 부활의 주님을 신뢰하노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건지고 계시며, 또 건지실 줄을 우리가 신뢰하노라.](고후1:10).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부활의 의의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극심한 고난, 심지어 생명을 단념할 정도의 그런 고난들은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도록 주님이 주시는 기회요, 은혜란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건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믿음을 단련시키는 과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생물학적으로 몸이 죽은 후에 일으킴을 받는 그런 미래적인 소망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현재 나의 삶 가운데 있는 모든 고난들, 죽음의 입구에 다다른 나의 혼을 소생시키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사업에 파산이 나서 삶의 벼랑 끝까지 몰려 죽음 외에 달리 피할 길이 없던 형제가 부활하신 주님을 신뢰함으로 넉넉히 살아납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아내가 목숨을 끊으려고 강가를 배회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생명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넘치는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쉽게 이혼하고, 쉽게 자살을 하고, 쉽게 믿음을 포기합니다. 이것은 모두 부활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부활절 행사를 하지만 그 부활이 현재 나에게 주는 실제적 의의와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부활의 권능, 부활의 주님을 의뢰하는 믿음을 통해 날마다 부활을 체험하고,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낙심을 이기는 힘입니다.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8-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8-11).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몸, 우리의 육체를 통해 나타나게 하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짊어지는 것, 자신을 주님의 죽으심과 같이 죽음에 넘겨주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앙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삶입니다. 이 때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은 어김없이 우리 몸에 드러납니다.


성도들이 부활의 권능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십자가를 지는 삶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난처한 일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타협을 합니다. 핍박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분리와 구별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생활 방식,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똑같이 장사하고,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생각합니다. 일요일에 교회를 온다는 사실 한 가지만 제외하고는 아무리 구별하려고 해도 구별이 가지 않는 것이 오늘날 성도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삶을 고집할 때 부활의 권능은 아무리 갈구해도 드러날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기도하고 복을 구한다면 부활의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할 수 없습니다. 동일한 공부를 하고, 동일한 사업을 하더라도 나의 꿈과 야심과 삶의 안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한다면 부활의 능력을 맛보며 할 수 있습니다.


예화) 덴마크의 그룬트비 목사(1783-1872)-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그룬트비는 22살에 코펜하겐대학 신학부를 졸업하고 25살에 보우스카우 전문학교 교수로 피택된 수재요, 목회자요, 문필가, 천부적인 웅변가였습니다. 당시 덴마크는 영국과 독일 과의 두 차례의 전쟁으로 척박하고 협소한 농토, 나무 한그루 자라지 못하는 광활한 황무지가 이들에게 남겨졌습니다. 희망을 잃은 국민들은 퇴폐적인 향락과 도박, 싸움질을 일삼고, 정신적으로 크게 타락하며 병드는 등 말기적인 현상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30대의 한 청년이 “조국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덴마크 역사에 길이 빛날 그룬트비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룬트비 목사는 당시 교회를 비판했기 때문에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조국 교회에서 배척을 받아 유랑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한 때는 7년간 설교 금지 조치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극심한 좌절감과 상실감으로 정신 이상을 잃으킬 정도였습니다. 그는 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때 빛으로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부활의 주님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방에서 고난을 당하나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난처한 일을 당하나 절망하지 아니하고 핍박을 받으나 버림받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나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8-11). 그는 부활의 생명, 부활의 권능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란 설교는 설교를 듣고 있던 전역 공병대 장교였던 달가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룬트비가 부활의 주님을 통해 부활 신앙을 찾았을 때, 죽어버린 조국 덴마크가 부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를 이기는 권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의 종이었던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권능을 줍니다.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속박아래 있지 않게 됩니다.


죄는 지배력이 있습니다. 죄는 주인 노릇하며, 왕 노릇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죄의 종이니라.](요8:34).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죄의 종이 되고,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죄의 종이 됩니다. 마음속에는 죄를 짓지 말아야지! 결심을 해도 5분이 지나지 않아서 그 마음이 무너지고 맙니다. 죄를 짓는 환경을 좀 정리하고, 격리된 생활을 하면 낳아질 것 같아도 죄는 반드시 반복됩니다. 이는 자신이 죄를 이길 수도 없거니와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죄를 인격체로 의인화하여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죄란 단순히 범법으로 인한 결과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반대로 죄의 결과가 범법이며, 죄의 결과가 불의요, 죄의 결과가 불신이며, 죄의 결과가 더러움이란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살인, 도둑질, 간음, 욕설, 험담, 거짓말과 같은 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죄의 나타난 현상들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죄의 실체와 존재를 아는 것입니다. 죄란 것은 그런 것들을 맺을 수 있는 뿌리요, 그런 것들을 맺을 수 있는 씨앗이며, 생명입니다. 사랑, 화평, 희락, 온유- 이런 것들이 성령의 열매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의 몸을 멸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주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의 몸을 처리하시고, 그 피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로써 영원히 죄와 단절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아닙니다. 구원 그 이후의 삶이 바로 성도의 삶이요, 우리의 현재적 문제입니다. 단번에 구원받은 성도는 영원히 단 한번의 완전한 죄 사함과 구원이 완성되었지만 성도의 삶은 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쇠붙이에는 자성이 있어서 자석에 이끌리듯이 우리의 육신에는 죄성이 있어서 죄의 법 아래로 자주 사로 잡혀 옵니다. 구원받은 한 성도의 처절한 경험을 들어 보십시오. [내 지체 안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기 때문이라](롬7:23). 죄는 한 법입니다.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이 대기권 안에 있는 모든 물체를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것처럼 죄의 법은 육신의 소욕을 자극해서 끊임없이 죄 아래로 끌어당깁니다. 때로 어떤 교회에서는 한번 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고, 죄가 없다고 말합니다(구원파).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고, 죄의 지배 아래서 다시 죄의 종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죄는 권능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죄를 이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이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죄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을 사모하고, 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죄를 미워하고, 증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죄를 즐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 정도로는 상관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에는 잠시 동안이지만 분명히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택하였으며](히11:25). 일시적이지만 이 쾌락에 젖어서 살아 본 사람들이 이것을 끊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미워하기까지는 매우 어렵습니다. 도박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어떤 사람이 도박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손가락을 잘랐다고 합니다. ‘도박이라고 하면 지긋지긋하다. 몸서리 쳐진다’라고 말하지만 도박을 미워하거나 혐오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도박으로 인해 피해를 본 가족들이나 주위사람들은 도박을 철저히 미워하고 혐오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도박을 미워하지는 못하고, 다만 도박에서 피해를 보고, 돈을 잃어버린 자신을 미워합니다. 아니면 자신의 돈을 따간 동료 도박꾼들을 미워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구원은 받았지만 육신대로 살아가는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죄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죄와 싸울 일이 없습니다. 죄와 싸울 의사가 없는 성도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부활의 능력을 간절히 필요로 할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에 술을 마시고 취한 탓에 방화를 하고 온 가족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불을 지른 사람은 살았는데, 술에 깬 후에 하는 말이 “술이 원수가 아니라 제가 원수지요. 술이 뭔 죄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당분간 술을 안 마실 수 있겠지만 언젠가 다시는 술을 마실 것입니다. 그는 결코 술을 미워해 본 적도 없고, 술을 미워할 의사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미워하라, 죄와 싸우라는 설교는 매우 섭섭한 말이 될 것입니다.


죄는 결코 자신이 미움받을 정도의 나쁜 존재가 아니라고 사람들을 속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죄에 속아 삽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죄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를 깨끗이 제거하고, 말씀을 물로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서로 날마다 권면하여 너희 중에 하나라도 죄의 속임수를 통하여 완악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죄를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죄와 싸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지긋지긋한 노예 생활을 하며 고통으로 울부짖던 이스라엘 백성들인 막상 광야에서는 “이집트로 돌아가자. 이집트의 고기 가마가 생각난다. 마늘, 부추, 상치, 오이가 생각난다.”며 외쳤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가능하기만 하다면 이집트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을 학대하던 이집트를 미워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자고 했던 것은 가서 이집트를 박살 내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이집트의 종살이를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죄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다만 죄를 미워하고, 육신을 철저히 순복시키고자 하는데도 잘 안되는 성도들에게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한 현 세상에서 죄의 몸된 육신을 입고서도 죄를 이기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로마서 6:8-11,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 까닭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았으므로 다시는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할 줄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로다. 이는 그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단 한번 죽으신 것이요, 그분께서 살아 계신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신 것이기 때문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6:8-11). 여기서 우리의 믿음, 여김의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았으므로’란 말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에 대하여 참으로 죽은 자로 여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우리는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하여 산 자로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과 죄와 육신에 대해 승리를 주는 부활의 믿음이요, 부활의 권능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신 주님은 주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준 가장 중요하고도 소중한 부활의 첫 번째 의의입니다. 거듭난 성도에게 지속적으로 죄를 이기고 승리의 삶을 주는 것은 부활의 두 번째 의의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 우리의 몸이 변화되고,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나는 것은 부활의 가장 큰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산 소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나머지 부활에 따르는 각종 영적 의미와 우리에게 미치는 수많은 선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맛보며 살아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빕니다. 더 이상 죄의 소욕대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며,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지만 우리를 위해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다시 사신 구세주가 저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주님의 부활이 곧 저와 여러분의 부활이요, 우리의 생명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부활에 대해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를 넘어서 깊이 있는 영적인 이해와 풍요로움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승리의 찬가를 부릅니다. 고린도전서 15:55절을 보십시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고전15:55). 이것은 죄에 대해, 사망에 대해 승리 선언입니다. 2000년 전에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현재 나의 몸에 드러나고, 먼 미래에 맛 볼 부활의 영광을 하루 하루 살아가는 지금 체험하는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



쉽고 단순한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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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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