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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만약 부활이 없다면(6) -중생과 부활-
말씀: 고전15:46-49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 주는 의미와 그것이 현재적으로 믿는 성도들에게 미치는 영적인 효력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인류의 누구도 죄사함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성도의 거듭남(중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부활의 가장 큰 의의를 세 가지로 요약하면 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구속의 가치를 지녔다는 점입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성도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통해 신자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앞으로 우리 자신의 몸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이 영적인 죽음이나 비유적인 죽음이 아니라 실제 육신의 몸에 못이 박히고, 피가 흐르고,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역시 그 죽었던 육신이 영광스런 몸으로 일어나셨습니다. 이 사건은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부활에 대한 약속이며, 모형이며, 소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그들의 창시자요 교주들의 죽음이 그들의 교리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유림(儒林)들에게 공자의 죽음은 그들이 유교를 이해하고, 믿고, 실행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단지 공자의 묘나 사당에 가례만 지내 주면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유학을 공부하고 이해하는데 어떤 장애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는 불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석가모니의 죽음은 불교 교리와 철학, 불교신도들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이는 어느 종교나 철학도 예외가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남긴 말이나 가르침, 사상이 중요할 뿐입니다. 공자나 석가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사상만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면 성경의 교리와 성도들의 신앙, 생활 방식은 곧바로 파산이 나고 맙니다. 성경의 가르침, 성경의 교리와 교훈은 전부 실재 존재하는 역사적 인물의 역사적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실의 바탕 없이도 무엇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영적 망상이며, 환영(illusion)입니다. 그것은 신념이요, 자기 확신일 수는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Mind Control입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을 세뇌하는 것(자기 암시)입니다. 때로 그런 것들이 힘과 용기를 주기도 하고, 삶의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자기를 속이는 데서 오는 거짓 평안이요, 거짓 믿음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정신력의 소유자라 해도 죽음을 이기지 못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볼 때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수련을 통해서,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신(神)이 될 수 있다’, ‘불멸(不滅)할 수 있다’는 거짓 믿음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보여 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들의 믿음의 뿌리는 허구와 가상이었기 때문에 결과 역시 허구와 가상의 세계에서 끝이 납니다. 세상 종교는 계속해서 거짓을 말하는데, 이들은 몸이 아닌 영혼의 불멸, 영혼의 회귀만을 말합니다.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가 거짓말을 해도 입증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몸은 중요하지 않다. 육신은 사악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고도의 ‘금욕주의’가 발전했습니다. 금욕이 곧 수련이며, 금욕이 곧 그들의 영성입니다. 몸을 괴롭히고, 학대함으로써 죄의 몸으로부터 나오는 욕구를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금욕주의가 아닙니다.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사용하는 대로 없어지는 것이요,) 사람들의 명령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참으로 이런 것들은 /자기/ 의지대로 경배를 드리며 /자기를/ 낮추며 몸을 경시하는 데는 지혜 있는 것같이 보이나 육체를 만족시키는 데는 아무 가치가 없느니라.](골2:21-23).

영혼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몸입니다. 우리는 자칫하면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는 말 등으로 인해 기독교 내에 금욕주의가 마치 경건의 훈련인 것처럼 둔갑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육신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써 부활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금욕과 고행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승리의 삶입니다. 흔히 오해하는 구절 가운데 하나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 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It is the spirit that quickeneth; the flesh profiteth nothing : the words that I speak unto you, they are spirit, and they are life.](요6:63a)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영을 살리시고 육체는 쓸모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영은 살리는 것이고, 육은 어떤 것도 살리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영(the spirit)이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입니다. 영은 죽어 있는 것도 살립니다. 하지만 육은 아무 것도 살리지 못합니다. 고로 육신을 단련하고 수련하고 모양을 내고, 자랑하는 것은 영적 생명이나 구원의 사역에는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수십년의 학문 연구나 정신 수련이나 종교 생활이나 신체 단련이나 경제력으로 무장한 어떤 육신(flesh)도 삶과 죽음의 문제, 구원의 문제, 영혼의 문제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이는 율법주의와 금욕주의의 무용론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여 육신은 쓸모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 한 가지 흔히 오해하는 구절은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함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염려함이로다.](고전9:27). 이 말씀은 바울이 금욕주의를 지향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주 금식을 했지만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기 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에다 묻지 말고 먹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음식 문제, 절기 문제 등에 조금도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개역 성경에는 이 구절이 ‘오직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함은...’이라고 말함으로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엄격한 규칙과 금욕적인 삶을 산 것 같은 강한 인상을 줍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반대의 의미입니다. 이는 위에 있는(25절에) 말씀대로 ‘절제’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왕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왕관을 얻고자 하느니라.](고전9:25). 절제는 금욕의 열매가 성령의 열매입니다. 바울이 몸을 억제했다는 것은 경건의 훈련을 했다는 말입니다. 몇 가지 참조 구절을 보십시오. [이는 육체의 훈련은 유익이 적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현재의 생명과 앞으로 올 생명의 약속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니라.](딤전4:8). 바울 사도는 자신의 몸을 억제하기 위해 육식을 금하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수련을 하거나 금욕적인 고행의 수련을 한 것이 아니라 경건의 훈련을 함으로 몸을 억제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에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절제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 자신의 몸을 억제하여 복종케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방식입니다. 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베드로후서 1:5-8절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너희는/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것들이 너희 안에 있어 풍성한즉 너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빈약하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1:5-8). 몸을 억제하여 복종케 하는 삶,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은 제자도의 기본처럼 자주 선포되는 설교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성경의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활을 알고, 믿고, 그 영적 신학적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해할 때 우리의 영혼은 자유와 힘을 얻습니다. 우리는 수도자들처럼, 종교인들처럼 어떤 훈련을 통해서, 수련을 통해서, 고행이나 금욕을 통해서 경건의 능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고, 그 부활의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경건의 모습은 없지만 경건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경건의 능력이 무엇입니까? 죄악된 습관이 끊어지고, 이전에 끌리던 세상에 대한 관심이 끊어지고, 내가 좋아하고 사랑했던 기호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멸시하고 혐오했던 전도를 합니다. 기도와 말씀 공부를 즐기게 됩니다. 교회의 모임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변화된 친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네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렇게 달라질 수 있나? 술도 안 마시고, 그 좋아하던 담배도 안 피우고, 나이트클럽도 안가고,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더니 이제는 친구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컴컴한 영화관에 죽치고 앉아 있던 친구가 영화도 안 보고....’ 이것이 훈련이나 강제적 물리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살아난 영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행위나 수고가 아니라 ‘은혜로 강건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부활에서 영이나 혼이 아닌 몸의 부활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죄가 그분의 몸으로 인해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의 구속은 주님의 영혼이 아닌 몸을 통해 해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죄를 해결하고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시는데 영과 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한 몸이 필요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혼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죽으심과 몸의 부활로 구원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15, [원수 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엡2:15). 우리는 흔히 기독교 정신을 강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을 이야기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간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독교 정신이란 바로 ‘몸의 드림’, ‘몸으로 드리는 제사’, ‘친구를 위해 목숨(몸의 죽음)을 내어 놓는 것’이지 정신적 사랑이 전부가 아닙니다. 몸은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몸은 마음의 표현 수단입니다. 몸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우리의 거듭난 영이 몸을 통해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빌2:12).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몸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골1:27, 요15).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몸을 통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갈5:22-23). [이제는 그분께서 죽음을 통하여 자기 육체의 몸으로 너희를 화해하게 하사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아버지/의 눈앞에 드리고자 하셨으니](골1:22). 주님의 죽음은 영적인 죽음, 정신적 죽음이 아닙니다. 주님의 죽음은 자기 육체의 죽음이었습니다. 육체의 몸을 통해서 하신 가장 큰 일은 오랫동안 육체 가운데 사시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죽음에 넘겨주어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의 몸을 통해 우리의 죽은 영은 살아나고, 병들고 상처 난 혼은 고침 받았습니다. 죄로 인해 우리의 상한 마음과 감정, 비뚤어진 사고와 완악한 의지력을 치유하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이 몸으로 하신 일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의 정신, 예수의 정신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따른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희생정신, 사랑, 봉사,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랑하는 것, 자선을 베푸는 것 등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에 따라 한 인생을 살다가 존경을 받으며 죽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슈바이쩌 박사, 마더 테라사 수녀 같은 사람은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탁월하고 고결한 기독교 정신, 예수의 정신을 사랑하고 따른다고 해서 죄인이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행하신 일들을 믿을 때, 주님이 행하신 일들의 실제적인 영적인 능력이 내 안에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우리의 육체의 남은 삶의 생활 방식을 결정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이는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한 자가 이미 죄를 그쳤기 때문이라. 그런즉 그는 자기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사람들의 정욕대로 살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리라.](벧전4:2). 우리는 우리 몸을 주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몸을 주셨으므로 우리 역시 주님께 몸을 드려야 합니다(롬12:1-2). 몸은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몸으로 하는 행동 역시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갈2:20). 주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삶 역시 정신 활동이 아니라 몸의 활동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체 안에서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영적인 원리, 성경적인 원리로 이 세상을 살아 보라고 주신 여분의 삶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세상 모든 민족과 전적으로 다른 생활 방식, 생활 원리대로 삶으로서 이 세상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한 분만이 살아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주고, 증거하도록 하셨듯이, 구원받은 성도들 즉 신약의 교회는 세상 지혜와 능력과 원리를 버리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감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자이시며,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심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먹는 식(食) 습관이 틀렸습니다. 쉬는 날이 달랐습니다. 결혼관이 달랐습니다. 토지에 대한 경제관이 달랐습니다. 내세관이 달랐습니다. 외적에 대한 전쟁 방법이 달랐습니다. 이스라엘은 적이 쳐들어왔다고 해서 이집트로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고, 전쟁 물자를 들여오고, 이웃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돈을 갖다 주는 일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세상 민족들의 지혜며, 생활 방식입니다. 그들은 위험에 처하면 처할수록 주님을 의뢰함으로써 적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방법을 포기하고, 육신의 지혜대로 세상이 하는 대로 이런 저런 일을 했을 때 그것은 주님을 버린 배신이며, 주님을 저버린 불신이요, 배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삶의 가치관과 방향이 달라야 하며,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도 저들과 같이 동일한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전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살 때 우리의 증거는 힘을 얻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게 됩니다. 칼을 들어야 할 때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돈을 벌러 일터로 나가야 할 때 교회로 갑니다. 약간의 타협과 부정으로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데 차라리 손해를 당합니다. 세상이 지혜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는 죄라고 부르며 경멸하며, 세상이 침을 흘리며 부러워 하는 것을 우리는 탐욕이라고 하며 눈을 돌립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생활 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셨습니다. 이제 곧 오실 주님께서 우리의 몸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하고 아름답고 쇠하지 않는 그런 몸을 갖고 싶어합니다. 부활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은 이런 몸으로 다시 살아봐야 무슨 낙(樂)이 있겠는가? 영원히 살아서 뭐해? 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몸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운동도 하고, 약도 먹고, 미용에 좋다는 것들은 이것저것 다 해보려고 합니다.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아무도 자기 육체를 미워한 적이 없고 오히려 양육하고 소중히 여기기를 {주}께서 교회에게 하신 것같이 하기 때문이요,](엡5:29). 이는 사람들이 육신을 얼마나 섬기고 아끼는지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 몸이 정말 현재 입고 있는 흙으로 만들어진 이 몸으로 부활한다면 상당히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부활할 우리의 몸은 어떤 몸입니까?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먼저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먼저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 첫 사람은 흙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고전15:46-49). 우리는 여기서 두 부류의 사람이 있고, 두 부류의 몸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과 동일한 몸이 될 것입니다. 이 몸은 늙지도 쇠하지도 않습니다. 이 몸은 허무한 것에 굴복하거나 죄의 유혹을 받지도 않습니다.

두 종류의 몸에 대해서 좀 더 살펴봅시다. 고린도전서 15:40, [또한 하늘에 있는 몸도 있고 땅에 있는 몸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다르니라.](고전15:40). 하늘에 있는 몸, 땅에 있는 몸이 있습니다. 땅에서 살기 위해서는 땅의 흙으로 만든 몸으로 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에 살기 위해서는 땅의 흙으로 된 몸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영원히 이 땅에서만 살겠다고 결심한 자들이므로 하늘에 속한 몸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저와 여러분은 새하늘과 새 땅에 살아야 할 사람들이므로 하늘에 있는 몸을 입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44,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리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은즉 영에 속한 몸도 있느니라.](고전15:44). 본성에 속한 몸과 영에 속한 몸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본성에 속한 몸입니다. 이 몸은 본성의 지배를 받습니다. 영에 속한 몸은 영의 지배를 받습니다. 영에 속한 몸을 입을 때 우리는 죄의 본성에서 완전히 해방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이 본 그분의 몸은 사흘 전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의 그 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금방 알아 보지 못했던 사건과 마리아가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동산지기인 줄로 알았던 것을 볼 때 잘 알 수 있습니다(요20:15). 동일한 예수님이셨지만 몸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알아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제자들 가운데는 경배하면서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마28:17). 예수님은 자신이 영이 아니라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그 앞에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9).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늘에 속한 몸, 영에 속한 몸, 부활의 몸은 땅에 있는 몸, 본성에 속한 몸과 전혀 다른 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21을 보십시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사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신의 영광스런 몸과 같게 하시리라.](빌3:21). 여기서 주님은 ‘자신의 영광스런 몸’이라고 하심으로 부활하셨을 때 주님 자신의 몸과 동일한 몸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한 영이 아니라 부활한 몸을 말씀하셨는데, 이 몸은 알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제한이 없고(요20:19), 먹을 수 있고(눅24:42, 요2:12), 사라질 수 있으며(눅24:31),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죽을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이 몸을 입은 사람들을 부활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0:34-3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얻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고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부활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34-36).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몸을 입고 부활하셔서 우리 자신의 미래에 있게될 부활의 모습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현재 우리는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무 약속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일어난 적이 없는 그런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면 기다림으로 끝나버릴 헛된 기다림에 불과할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주님 자신도 죽음에서 일어나지 못했는데 그를 믿는 사람들이 부활한다는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주님 자신과 제자들은 성경을 통해 그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우리 또한 부활의 영을 통해 흔들림없이 몸의 부활을 기다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뿐 아니라 우리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림은](롬8:2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인침을 통해 주님 오시는 그날을 바라 보며, 이 땅에서 남은 육체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육체이지만 그 안에 있는 영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육체이지만 앞으로의 입게 될 몸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육체의 남은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며 성령의 열매를 더 풍성히 맺음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부활 신앙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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