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만약 부활이 없다면

만약 부활이 없다면(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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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도의 부활 신앙 -

말씀: 고전15:3-4
요절: 고전15:3-4

오늘은 다 같이 구약 성도의 부활 신앙에 대해서 함께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3-4에 [곧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시고](고전15:3-4)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성경이란 구약 성경을 일컫는 말입니다. 구약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미리 말했고, 역사는 미리 기록된 말씀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서 부활을 믿지만 구약 성도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는 사건을 소망 가운데 믿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에서 생애 모든 사역과 죽으심, 부활, 어느 하나라도 ‘미리 기록된 성경’에 따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일어나셨다면 우리는 구약에서 그렇게 기록된 부분들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예언했고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사람들과 후대의 자손들에게도 “부활”에 대해 증거 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죄를 책망하고 ‘만군의 주께서 말씀하시기를...’하며 선포하는 것으로 임무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성경을 읽고, 공부했고, 연구하고, 탐구했습니다. 예언의 등불을 켜서 주님이 영감으로 주신 말씀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조명을 얻고자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성경을 공부하고, 예언을 탐구하는 신실한 학생이 되어야 함에는 신, 구약의 구분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만 왔다갔다하며, 일주일에 한 두 번 형식적으로 성경 공부 모임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 그런 식으로는 영적 진리를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했습니다. 성경에 심취하는 것은 신학자들이나 성직자들만의 임무가 아니라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의무요, 특권입니다. 베드로는 구약의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탐구했던 두 가지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혼의 구원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대언한 대언자들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하되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께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을 미리 증거해 주실 때에 /그것들이/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탐구하였느니라.](벧전1:10-11). 첫째, 구약의 대언자들은 혼의 구원에 대하여, 우리에게 임할 은혜에 대하여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했습니다. 그들은 실체를 보지 못했기에 복음을 통한 구원의 은혜에 대해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드리는 성전 희생 제사의 불완전함을 익히 알았습니다. 염소와 황소와 어린양의 피를 아무리 흘려도 완전한 속죄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의 고난을 통한 혼의 구원에 대해 조사하고 탐구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임한 은혜, 혼의 구원에 대해 부지런히 조사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실체가 오기 전에 구약의 대언자들이 그러했다면 이미 혼의 구원을 얻은 우리들이야말로 더욱 분명하게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구약의 대언자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이 무엇인지, 어느 때에 있을 일인지에 대해서 탐구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합니다. 그 뒤에 있게 될 영광은 부활의 영광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탐구했습니다. 또 이 예언이 언제 성취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탐구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올바로 나누어 성경이 말하는 바 그 실체와 그 때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인지, 이방인들에게 하는 말인지, 교회에게 하는 말인지, 지금 현 시대에 해당하는 말인지, 환란 때에 해당하는 말인지, 아니면 천년 왕국에 있을 일인지 ‘그것들이 무엇을 혹은 어느 때를 가리키는지 탐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의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야말로 주님께서 잘하는 것이라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지금까지 들은 것들에 더 열심히 주의를 기울여 언제라도 그것들을 흘려보내지 말아야 하리라.](히2:1). 베드로후서 1: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대언의 말씀도 있으니 너희 마음 속에서 날이 새어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벧후1:19).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부활에 대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여 성경적 의미를 정확히 알고, 믿음으로 우리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려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복음을 통해 죽음에서 일어난 영적 경험과 실체를 지닌 성도들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肢體)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게 내어 주지 말며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 자로서 하나님께 드리고 너희 지체를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영적 부활을 경험한 성도만이 주님이 오실 때 육신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죽은 성도들이 부활하고, 살아있던 성도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들림 받는다는 휴거와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현재 내가 그런 부활의 근거, 부활의 생명, 부활의 영광, 부활의 실체를 내 몸 안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이 내 안에 계시기에 나는 현재 영적으로 부활해 있고, 미래에 육신 역시 부활하거나 변화 받을 것입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죽은 영이 부활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거듭남의 근거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고, 내가 그 사실을 믿는다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의 영’ 또한 부활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진리를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영적인 힘과 생명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무지하다면 여러분은 정상적인 영적인 삶을 사는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없다면 죄에 대한 승리는 매우 드문 경험이 될 것입니다. 설령 승리가 있다 해도 그것은 매우 일시적인 것이며, 죄에 대한 패배는 지속적인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오늘 믿음으로 일생을 살다간 구약 성도들이 지닌 믿음의 삶, 승리한 삶의 비결이 부활 신앙에 있었다는 점을 여러분에게 증거 하고자 합니다. 구약 성도들은 모두 믿음으로 죽었고, 그들 역시 우리와 동일한 부활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성도의 삶에 기초이며, 바탕입니다. 부활의 믿음, 부활의 생명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삶이 곧 승리의 삶이요, 믿음의 삶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부활 신앙의 소유자들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특히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는 아브라함은 부활 신앙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17-19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삭을 바쳤으니 곧 약속들을 받은 그가 자기 독생자(獨生子)를 바쳤느니라. 이 아들에 관하여는 /주께서/ 전에 이르시되, 네 씨가 이삭 안에서 부름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실 줄로 그가 생각하였으므로 또한 그는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모형으로 받은 것이니라. ](히11:17-19).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면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켜 주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는 순례자의 삶을 사는 동안 죽음을 넘어선 부활 신앙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들로부터 그를 일으켜 세우실 줄로 그가 생각하였으므로(Accounting)”(19). 아브라함이 시험받을 때에 이삭을 기꺼히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시험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부활 신앙은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 입증하는 표지요, 믿음의 증거를 받는 도구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영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이 은혜로 되게 하려고 믿음에서 나나니 그 목적은 그 약속을 모든 씨에게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은 곧/ 율법에 속한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들에게도 /그 약속을/ 확고하게 하려 하심이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라.](롬4:16). 아브라함은 육신적으로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믿음으로 거듭난 모든 자녀들의 영적 조상이기도 합니다. 다음 말씀을 볼 때 더욱 분명합니다. [그런즉 믿음에 속한 자들 곧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인 줄 알지어다.](갈3:7).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갈3:29).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아브라함이 가졌던 부활 신앙을 가짐으로 믿음의 승리를 쟁취하고, 믿음의 시험을 거뜬히 통과하여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입니다.

모세 역시 부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주님은 호렙 산의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를 부르시면서 맨 먼저 부활 신앙을 심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출3:6). 이 말씀은 분명히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이 친히 해석해 주시기를, [죽은 자들이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는 너희가 모세의 책에서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속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다, 하신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그런즉 너희가 크게 잘못하고 있도다, 하시니라.](막12:26-27). 만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고 없다면 주님은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느니라’고 말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전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시제에 주목할 것). 살아 계신 하나님은 자신만 영원히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성도들 역시 영원히 살아있게 하시는 부활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했던 사두개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어 지하에 묻혀 있고, 그 뼈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살아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오라비의 죽음 앞에서 슬퍼 울던 마르다가 슬픔을 거두는 일은 바로 주님이 누구신가? 부활 신앙이 무엇인가를 아는데서 시작됩니다. 영적 부활을 경험한 성도가 육신의 죽음 앞에서 울 이유는 없습니다. 영이 거듭난 성도가 죽는 일은 죽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으로 가는 기쁘고 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모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사역의 원동력, 주님의 종으로서 일하기에 앞서 부활이신 주님과 깊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고 이끄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더 부활 신앙이 분명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마귀의 권세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은 부활의 권능 밖에 없습니다.

구약의 3대 의인으로 꼽혔던 욥의 부활 신앙을 보십시오. [이는 내가 알기에 내 구속자(救贖者)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니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땅 위에 서시리라. 내 살갗의 벌레들이 이 몸을 멸한 뒤에도 내가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 콩팥이 내 속에서 소멸될지라도 내가 직접 하나님을 보리니 다른 것이 아니요, 내 눈이 바라보리로다.](욥19:25-27). 욥은 자신의 부활에 대한 소망과 믿음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몸이 다 썩어 버린다 해도 ‘내 육체 안에서 하나님을 보리라’고 말합니다. 육신이 부활하지 않는다면 육체가 썩은 뒤에 ‘내 육체 안에서’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욥은 분명히 육신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내 콩팥이 내 속에서 소멸된다 할지라도’ 욥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바라보리라고 말합니다. 콩팥이 썩으면 눈도 썩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자신의 육신이 부활한 몸에 있는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을 것임이니라.](출33:20). 이런 이유로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도 어느 때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1:18a). [어느 때고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되...](요일4:12a). 그런데 욥은 계속해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리라고 말합니다. 이는 욥이 부활을 믿고, 부활한 몸을 입은 상태에서 주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하늘의 천사들과 같은 몸이며, 영광스런 몸입니다. 몸이 고통스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소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늙고 병들고, 지치고, 죽는 몸에서 쇠하지도 더럽혀지지도 않는 몸을 입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욥은 지금 육체에 극심한 질병을 지닌 상태에서 부활을 소망했습니다.

욥은 너무나 부유하고 평안하고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파산했습니다. 갑작스런 환경의 변화는 사람을 흔들어 놓습니다. 어느 정도 먹고 살 것은 남겨두고 파산한 것이 아니라 한 푼도 남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이 몰살했습니다. 자신의 몸에는 살과 뼈가 떨릴 정도의 고통을 동반한 피부병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의 집요한 책망과 비난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이 모든 재앙의 원인과 이유에 대해서도 정확히 몰랐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자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만은 분명했습니다. 그가 평소에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던 것은 바로 이런 부활 신앙이 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부유할 때이든 파산이 나고 모든 것을 잃었을 때이든 그를 지탱하는 힘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부활을 믿는 믿음은 평소에는 완전하고 곧바르고, 악을 피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란 평가를 받게했고, 시험의 때에는 마귀를 이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이 죽는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믿음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주는 유익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했고, 자신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이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소망 중에 안식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 혼을 지옥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하여금 썩음을 보지 아니하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9-10). 이 구절은 자신의 신앙 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예언입니다.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알았습니다. 다윗 자신 역시 부활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수없이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고, 왕이 된 후에도 생명의 위협과 늘 함께 있었던 다윗이었지만 그는 부활의 주님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詩)를 지었던 다윗은 누구보다 고난과 죽음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윗 왕을 생각하면 권세와 영광을 누렸던 사람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의 일생을 보면 슬픔과 고난이 영광보다 훨씬 더 컸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다윗이 가졌던 믿음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가 흔히 목자의 시편으로 알고 있는 시편 23편에는 부활의 실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조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다닐지라도/walk through/ 참으로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위로하시나이다.](시23:4). 죽음이 두렵지 않는 이유가 바로 죽음의 순간에도, 죽음 이후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를 통과해야 합니다.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몸이 썩습니다. 그곳은 빛도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권세와 지옥의 권세가 나를 해할 수 없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생을 마감하는 임종의 순간 사망의 그늘진 골짜기로 걸어 들어가지만 잠시 후에 우리는 영광스런 부활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고백한 부활의 노래입니다.

이사야의 부활 신앙을 보십시오. 이사야 25:8-9절입니다. [승리로 사망을 삼키시리라. {주} [하나님]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신의 백성을 향한 책망을 온 땅에서 제거하시리니 이는 [주]께서 그것을 말씀하셨음이니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나님이시로다. 우리가 그분을 기다렸나니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분은 [주]시로다. 우리가 그분을 기다렸나니 우리는 그분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하리니](사25:8-9). 이 구절은 맨 마지막 원수인 사망과 지옥을 멸하신 뒤의 천년 왕국에 대한 노래입니다. ‘승리로 사망을 삼키시리라’는 말씀은 부활을 노래한 것입니다. 주님은 더 이상 사망이 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부활은 사망에 대한 승리입니다. 대언자 이사야는 이 사실을 기쁘게 노래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장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여 주님의 재림 때에 성취될 부활의 몸에 대해 기록하기를,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주께서 /승리로 사망을 삼키시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고전15:54)고 했습니다.

이사야 26:19을 보십시오. [주의 죽은 자들은 살겠고 그들이 나의 죽은 몸과 함께 일어나리이다.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할지어다. 주의 이슬은 풀잎의 이슬 같사오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어 놓으리로다.](19). 이사야 대언자는 자신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이사야는 몸이 죽어 흙 속에 묻혀 있는 것을 가리켜 ‘흙 속에 거하는 자들아’라고 말합니다. 흙 속에서 죽은 것이 아니고 흙 속에 거하기 때문에 마치 이슬이 내리고, 비가 내리면 땅 속에 있던 씨앗들이 자라 열매를 맺음같이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슬은 생명의 부활을 주는 이슬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가 백합같이 자라겠고 레바논같이 뿌리를 뻗으리라.](호14:5). 땅속에 있는 씨앗이 이슬을 받아 싹을 내듯이 땅 속에 죽은 자들은 주의 이슬을 통해 일어납니다. 천사장의 호령 소리와 함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무덤에서 잠자던 자들은 홀연히 일어날 것입니다. 어느 날 흙 속에서 파랗게 싹이 돋아 나 있는 것처럼, 무덤들이 갈라지고 잠자던 성도들이 다 일으킴을 받습니다.

매일 저녁과 아침마다 내린 이슬을 통해 꽃과 풀, 나무가 자라듯이 성도들 역시 이런 이슬을 받아 영적 성장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죽었던 영이 부활한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내 가르침은 내리는 비요, 내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내리는 가는 비요, 풀밭에 내리는 소나기로다](신33:2). 누구라도 주의 말씀을 받아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에스겔 역시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보라, 오 내 백성아, 내가 너희 무덤들을 열고 너희로 하여금 너희 무덤들에서 나오게 하며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겔37:12). 주님은 완전히 패망한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다시 자기 본토 땅으로 돌아 올 수 있는지 말씀해 주셨습니다. 바빌론 포로기에 전 민족이 포로로 잡혀갔고, 땅은 황폐화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이 나버린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 주님은 에스겔에게 주신 한 마디 말씀이 바로 부활입니다. 주님은 마른 뼈들의 골짜기로 에스겔을 데려가셔서 마른 뼈들을 살리시는 이적을 통해 부활의 실체를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개인이든 민족이든 원하시는대로 언제든지 살리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뼈들은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잃어버린바 되었으며 우리로 말하건대 우리는 끊어졌다...](겔37:11) 할 때 주님은 무덤들을 여시고 그들을 살리십니다. 생명의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부활의 주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이스라엘의 고난의 역사의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강물처럼 그들을 지탱해 주는 힘이요, 능력이요, 소망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고난과 절망에서도 기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호세아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보십시오. 호세아는 주님께 질문이 많았던 대언자였습니다. 주님은 호세아를 통해 [내가 그들을 무덤의 권세에서 속량(贖良)하며 사망으로부터 구속(救贖)하리니, 오 사망아, 내가 네 재앙이 되리라. 오 무덤아, 내가 네 파멸이 되리라. 뜻을 돌이키는 것이 내 눈에서 숨으리로다.](호13:14)고 말씀하셨고, 이 일의 실체는 고린도전서 15:54에서 주님의 부활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이제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모든 성도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죽음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자들이나 이교도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믿었던 성도들은 처음부터 부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우리는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부활 신앙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의 부활 신앙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부활의 첫 열매를 보지 못하였지만 그 믿음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저는 구약 성도들의 부활 신앙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현재 지니고 있는 이 신앙이 오래된 것이며,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요, 뿌리가 깊은 것임을 보여 드렸습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주님의 부활을 예언하고 기록하고 믿었던 성도들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실체가 드러났고,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적인 부활을 받았습니다. 몸의 구속과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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