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만약 부활이 없다면(05)
-살리는 영-
말씀: 고전15:45
요절: 고전15:45


오늘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부활절이란 절기를 지키는 날입니다. 부활절은 주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로서 교회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부활절은 기독교의 행사가 아니라 이교도의 행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누구도 부활절을 절기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비성경적인 실행을 일삼을 때 이런 역사적 사실과 배경을 아는 고고학자들, 인류학자들, 사학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 성경의 무오성은 여지없이 공격을 당하고 맙니다. 부활절이 이교도의 풍습임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들마다 떠들썩하게 지내는 부활절이야 말로 하나님과 성경을 조롱할 풍성한 원인을 제공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교회가 성경적으로 분별하여 부활절이야말로 이교도의 풍습이란 것을 제대로 알고 분별하고 교회에서 뿌리 뽑고, 대신 철저히 부활 신앙을 가르칠 때 영적 생명력이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흔히 Easter라고 하는데, 유대절기인 유월절과 당시 로마를 비롯한 이교 문화에서 땅의 갱생일로 기념한 춘분 축제(봄의 여신축제)에서 기인했습니다. 원래는 튜튼족 여신(Eastre)의 날이 토착화되어 영어로 Easter이 된 것입니다. 부활절을 뜻하는 명칭인 Easter에서 알수 있듯이, 그 기원은 춘분때 봄의여신 Easter 축제의 변형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당시 유월절이나 봄의 여신을 기념하는 일은 태양력이 아니라 음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해마다 날짜가 변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만 이스터(Easter)가 유월절이 아닌 이방 종교의 축제일임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유일한 성경입니다. 이스터란 에오스트레(Eostre), 오스테라(Ostera), 아스타르테(Astarte), 또는 이쉬타르(Ishtar)의 현대적 표현이며, 성경에서 나오는 농경 여신 아스다롯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오스테라는 발할라 신전의 문을 열어 발데르를 맞이하는 여신이다. 발데르는 그의 순수함 때문에 백색의 신이라 불리며, 그의 이마로 인류에게 빛을 비춰주기 때문에 태양신이라 불린다" [The American Book of Days]라고 되어 있습니다.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초판에 보면 "신약성경이나 사도적 교부들의 저술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절을 지켰다는 암시는 없다. 특정한 날을 거룩히 여기는 것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예수나 사도들도 이 축제일이나 기타 다른 어떤 축제일도 지키라고 명한 바가 없다." 고 말합니다. 오늘날 로마 캐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도들까지 크리스마스, 부활절, 추수감사제 등과 같은 절기를 기독교의 행사 중 하나인 것처럼 지키는 일은 매우 가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어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만약 이스터란 단어를 웹스터 사전에서 찾아 본다면, "1. 고대 이교도들의 봄 축제, 2.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일로서 3월 21일 춘분이 지난 뒤에 오는 만월을 기준으로 해서 그 다음에 오는 일요일에 거행된다. 부활절은 춘분과 음력이 연결된 일자이기 때문에, 그 날짜는 매해 달라진다." [웹스터의 신국제 사전 제3판.(Webster's 3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라고 정의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스터란 명칭은 "새벽과 봄의 여신인 오스테르라는 이교의 신에게서 따온 것이다."[Medieval Holidays and Festivals / Piatkus]라고 합니다. 카톨릭에서 A.D 325년 그리스 동방 정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교회가 니케아 공회에서 춘분축제에 맞춰 부활절을 정했습니다[카톨릭 백과사전, p. 505]. 부활절에 달걀을 나눠 먹는 행위 역시 이집트와 중동의 춘분 축제 때 있었던 관습입니다. 달걀은 생명이 싹트는 봄의 생명의 부활을 상징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알에 대한 신화와 전설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거대한 달걀로부터 여신 아스다롯(Astarte-Easter)이 부화되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달걀은 거룩한 성물의 일종이 되었습니다.”

몇 몇 민족에 있는 달걀의 전설을 보면 이렇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과 그리스인들은 종교의식에서 알을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비밀스런 목적을 위해 사원에 알의 형상을 만들어 바쳤습니다. 영국의 고대 드루이드교도(Druids)들은 달걀을 우상 숭배하는 자기들 단체의 거룩한 상징으로 지니고 다녔습니다. 로마의 풍작의 여신 케레스(Ceres) 행렬에서는 달걀이 앞서 나갔습니다. 아테네에서는 박카스 제전이나 디오니시아카의 제전 때 달걀을 성별하여 바치는 종교행사가 거행되었습니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금빛을 띤 창조의 알을 숭배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황금 달걀과 색칠한 달걀을 썼는데, 황금 달걀은 태양신을 상징했고 채색한 달걀은 제물로 사용했습니다.

로마 캐톨릭은 국교로 정착하면서 많은 이교도들을 캐톨릭으로 자연스럽게 개종시키기 위해 이교도들의 풍습을 근절하는 대신 교회에서 그 이교도들의 풍습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렸던 것입니다. 세상과 분리되기를 거부하고 세상과 하나되려는 캐톨릭 교회의 이런 노력은 다이아나를 마리아로 바꾸었고, 아스다롯의 숭배를 이스터 즉 부활절로 바꾸는 것과 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습니다. 부활절은 특히 변환하기 쉬운 일이었습니다.

부활절 토끼 역시 동일한 원리입니다. 토끼는 이교도의 상징이고 항상 다산의 상징이 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플레이 보이지란 음란 잡지의 상징이 왜 토끼인지 생각해 보면 간단합니다. 고대 이집트인과 다른 백성들이 지닌 전설들에는 이 토끼가 달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토끼와 계수나무 이야기와 같은 전설이 있습니다. 토끼라는 이집트인들의 말 'um'이 역시 열려 있는(open)것과 기간(period)을 뜻하고 있는 사실을 통하여 이 토끼는 달과 사람 쌍방에는 주기성 사상으로 또 청년 남녀에게는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관계되어 있어 다산의 상징과 새로운 삶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부활절과 함께 사순절 역시 이교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부활절의 절기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가 아니라 담무스(Tammuz)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담무스는 죽임을 당한 후 이쉬타르(하늘의 여왕)에 의해 봄에 신비하게 소생했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이방 종교는 이스라엘에도 광범위하게 퍼졌는데,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백성들이 이교도의 부활절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나를 데리고 북쪽에 있는 [주]의 집 문의 입구에 이르시니, 보라, 거기에 여자들이 앉아서 담무스를 위하여 슬피 울고 있더라.](겔8:14). 바빌론의 풍습은 담무스가 부활하기 전 40일간의 금식기간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받아들인 사순절입니다. 이러한 풍습은 바벨론인 뿐만 아니라 페니키아인, 이집트인, 이스라엘인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후에 교황은 6세기 경에 사순절 준수를 공식적으로 명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금요일이라고 주장하면 금요일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금요일(Friday)이란 말은 프레야(freya)란 이름으로부터 왔는 바, 이 프레야는 평화, 기쁨 및 다산의 여신 즉, 다산의 상징인 물고기로 알려졌습니다. 옛날부터 물고기는 중국인, 앗시리아인, 페니키아인, 바벨론인 및 그 밖의 사람들에게 다산의 상징이었습니다. "물고기(fish)란 말은 번식 혹은 다산을 암시하는 다그(dag)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비너스(Venus)는 로마인들 중 성적 다산의 여신으로 불리워졌습니다. 성병(veneral disease)이란 이 말에서와 같이 veneral이란 말은 이 비너스(Venus)여신이란 말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금성 (planet venus)이 금요일의 첫 시간을 다스린다고 신봉하여 비너스의 날(dies Veneris)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금요일을 비너스의 거룩한 날로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의미를 완전하게 말한다면, 비너스에게는 물고기가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물고기 문양을 마치 기독교의 상징인 것처럼 달고 다니지만 그것은 기독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절의 절기를 준수하는 일이 교회를 강하게 하지 않습니다. 부활절에 계란을 나누고, 부활 성극을 보는 일로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고 의미를 부여하며 우스운 짓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마음 가운데 있는 주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며, 영적 능력을 급격히 약화시키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 부활절을 맞아서 부활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번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지만 한 줌 흙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썩음을 보지 않으시고 일어나셨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관에 방부제를 넣고, 시체의 썩음을 보지 않기 위해 천으로 둘러싸서 미이라가 되었지만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습니다. 수많은 영웅 호걸들이 칼을 들고 정복 전쟁을 벌이며, 사람들의 목숨을 죽였지만 그들 중 누구도 죽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었지만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전쟁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산 자의 죽음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들리는 곳에는 죽은 자의 살아나는 부활의 역사가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들이 발을 딛는 그 곳에는 어김없이 죽은 자들의 부활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산 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며 죽음을 정복하는 진정한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소식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김없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의 영적인 부활이 일어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어있던 사람들의 영혼을 깨웠으며 장차 자신의 죽을 몸도 일어날 것이란 강한 믿음과 영광스런 소망을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신 부활은 자신 혼자만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살려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부활의 주님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기에 누구든지 자신의 뜻대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죽은 영을 살리시고, 죽은 몸도 살리십니다. 요한 복음 5:21, [이는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사 살리시는 것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기 때문이니라.](요5:21). 주님은 지상 생애 사역동안 3명의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심으로 자신이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란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사도들을 통해 역시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심으로 여전히 생명이요, 부활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복음을 통해 저희의 죽은 영을 살리시는 영적 부활의 역사였습니다. 죽음을 정복한 주님의 부활 기사는 듣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한 생명을 공급함으로써 사망의 권세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주었습니다.

예화)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에 대한 일화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하였습니다. 동생 챨스 웨슬레가 만든 홀리 클럽에 들어가 병든 자, 가난한 자, 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는 일과 함께 성경연구, 기도, 자기반성을 위한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성공회 목사로 일하다가 1735년 미국의 조지아주로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배를 탔습니다.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자 선체가 기울고 물결이 갑판 위로 휩쓸려 왔습니다. 웨슬레와 영국인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모라비안 교도들은 찬송을 부르고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물었다. "당신들은 폭풍우 가운데서 두렵지 않습니까?" "아니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까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음날 모라비안 목사가 웨슬레에게 질문했다. "웨슬레 선생,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그가 이 세상의 구주임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그가 당신을 구원해 주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요?" 부드러운 이 말에 그는 혼란을 느꼈다. "나는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다. 오, 그러나 누가 나를 구원해 줄 것인가? 나는 그저 미지근한 신앙만 갖고 있구나." 결국 그는 실망과 환멸 속에 이 년 뒤 영국으로 돌아왔다. 웨슬레는 부활한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영적 부활을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신학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설교하기 위해 선교사로 가지만 정작 자신은 그 부활의 주님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죽음 앞에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대서양의 파도에 흔들리는 뱃 전에서 그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과 시련, 위기를 겪을 때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남김없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불과 물을 통과하는 믿음, 고난과 역경을 이기는 믿음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부활의 사건을 인정하고, 이해한다고 해서 그런 믿음이 내 안에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사건을 믿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주님이 내 안에 살아 계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들은 누구라도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새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변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부활이 악한 현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그리스도인 답게 사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성경대로 사는 삶, 기도하며 사는 삶, 전도하는 생활, 성령 충만한 삶, 영적인 삶, 욕심을 버리는 삶, 정직하게 사는 삶 등 다양한 의견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조금 배운 사람들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2:20)입니다. 매 순간 내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사시고, 주체가 되시고, 내가 그분의 종이 되어 살 수 있다면 그는 가장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도의 수련자들이나 탁월한 믿음의 선진들만이 살 수 있는 특권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듭난 성도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며, 살아야 하는 평범한 삶입니다.

예) 중국의 한 산간에 사는 부부가 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하루 민박을 허락했는데, 그는 마침 전도자였습니다. 그를 통해 그 부부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부부는 결혼 후 수십년 동안 늘 함께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치면 남편은 늘 부인에게 반주를 가져 오게 해서 한 잔씩 마시는 것이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날 남편은 평소대로 식사를 마치고 한 잔의 반주를 마시려는데 뭔가 마음이 껄끄럽고, 평소와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인에게 “오늘은 이상하게 마실 기분이 나지 않네!”라고 하자, 부인이 ‘그냥 마시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마시려고 술을 입에 갖다 대었는데 더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몇 일후 시장에 나갔다고 자신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를 만나 자신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내 안에 주인이 계신 것 같습니다. 술을 못 마시게 합니다.’라고 하자, 그 전도자는 ‘앞으로 평생동안 당신 안에 계신 주인이 시키는대로 사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 전도자가 바로 웟치만 니였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주인을 안에 모시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평생동안 그 주인의 말씀에 따라 사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사신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바로 가장 성도다운, 가장 복음 적인, 가장 성경 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냉철하게 자신을 바라볼 때, 현실을 볼 때, 우리 교회를 볼 때 과연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랫동안 성경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지만 참된 열매를 맺는 제자 양육에는 번번이 실패해 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성도들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권능으로 생명력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 저는 소명(calling)이 흔들립니다. 그런 제게 주님이 한 가지 가르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19,[(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그 뒤에 거듭난 성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이 자라도록, 성도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도록 다시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계란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해도 그 계란 속의 생명이 병아리로 형성되기까지 어미 닭이 품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은 생명의 씨앗을 마음 가운데 품고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한 채 그대로 있습니다. 예수를 믿은 성도들 안에는 분명히 생명의 성령이 거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 안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영적 훈련의 유무와 상관없이, 지적 수준에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십니다. 이 사실에는 차이가 없고,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각 성도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된 정도는 제 각기 다 다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를 겪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골로새서 1:24에서 “교회를 위하여 받는 그리스도의 고난들 뒤에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려면 먼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동시에 저희 마음 가운데, 저희 영 안에 계시는데 날마다 우리 안에 부활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아무도 영적 생명이 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살리는 영이 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을 살리셨습니다. 요한복음 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영의 부활을 경험하지 못한 성도는 결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육신의 부활을 경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적인 생명의 부활이 먼저입니다. 거듭난 영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거듭난 영으로 주님과 친교를 나눕니다. 거듭난 영의 성장을 통해 우리는 점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영이 살아난 성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만 몸의 부활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천년 왕국 후에 악인들의 부활이 있겠지만 이들은 다시 죽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들은 부활한 후 다시 죽지 않습니다. 그들의 몸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영광스런 몸이 됩니다.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 세우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분의 영을 통하여 너희의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적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은 모든 믿음의 기초입니다. 이보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살리셨으며, 내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역사적 사건인 동시에 나의 현재적 죽음이 되어야 하듯이, 부활 역시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시면서 살리는 영이 되셨기에 모든 것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마귀는 모든 것을 죽이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살리십니다. 우리는 부활을 경험한 자들로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로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매진해야 할것입니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율법 조문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이는 율법 조문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기 때문이라.](고후3:6). 그리스도인들은 새 상속 언약의 사역자요, 영의 사역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바로 부활의 증거자로서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활의 증거자,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