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의 상속자
말씀: 히브리서 11:7b
요절: 히브리서 11:7b
히브리서 11 장에 장로들이라 불리는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2) 좋은 평판을 받았습니다. 아벨은 “의로운 자”(4)라는 증거를 얻었고,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라는 증언(5)을
얻었습니다. 노아는 ‘의의 상속자’란 평가를 들었습니다. ‘의’는 말씀을 듣고 믿을 때 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얻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길은 ‘믿음’ 뿐입니다.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는 율법을 행할 때 의롭게 되었지만 사람은 아무도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이는 산 자 중 주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임이니이다.](시143:2b).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을
통해,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갈2:16a),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는 하나도 없느니라.](갈2:16c)고
말합니다. 또 말하기를,
[오직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3:11)고 합니다. 육신의 행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의 일관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아벨은 의로운 자였다’(2)는 증거를 봅니다. 노아는 의로운 자요, 완전한 자라는 평을 받았습니다(창6:9).
이는 노아의 인간성이 남달리 뛰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가 좋은 환경에서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종교성이 탁월했다는 말도 아닙니다. 노아가
율법을 잘 지켰다는 말도 아닙니다. 노아가 의롭고 완전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고로 받았고, 두려움으로 움직였습니다.
성경에서 “은혜”란 말이 노아에게 처음 사용되었음에 주목하십시오.
노아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주님은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주가 말하노라. 오직
나는 가난하고 통회하는 영을 가진 자, 내 말에 떠는 자는 내가 보살피느니라.](사66:2b). 노아는 주님의 경고를 받고, 두려워
떨었기 때문에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눈에 은혜를 입는 방법이 이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두려움으로 주를 섬기고 떨며
기뻐할지어다.](시2:11). 성도들이 주와 주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면 그는 악을 미워하지 못할 것입니다(잠8:13). 악을
떠나지도 못할 것입니다(욥28:28). 그 말은 결국 지혜와 명철이 전혀 없다는 뜻이 됩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주를 두려워하므로 내
육체가 떨며 내가 주의 심판들을 무서워하나이다.](시119:120)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불신자들, 배교자들, 타락한 자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3:18). 현대 교회의 신자들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는 사악한 자요, 어리석은 자란 뜻 외에 달리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 오늘날 성도들이 노아와
같이 주의 말씀을 경고로, 두려움으로 받지 않는 것입니까? 그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경을 통해 배교한
이스라엘, 타락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반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배교하고, 타락할 때의 모습은 대언자들을 통해 선포되는 주의 말씀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주님은 대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그런즉 네가 주 네 하나님을 버린 것과 네 속에 나를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악한 일이요, 쓰라린 일인 줄 알고 주의하라.](렘2:19)고 경고하셨습니다. 우리는 경고를 받고 두려워하는 믿음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긍휼과 진리로 말미암아 불법이 정결하게
되며 주를 두려워함으로 사람들이 악을 떠나느니라.](잠16:6). 악에 대한 징벌이 두려운 이들은 악을 행할 때 주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주를 두려워할 때 악을 떠나게 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고, 세상을 두려워하면 죄를 짓지만 주를 두려워하면
생명에 이르게 됩니다.
[주를 두려워함이 생명에 이르게 하나니 그것을 지닌 자는 흡족히 지내고 재앙의 징벌을 받지 아니하리라.](잠19:23).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감, 공경심’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이는 막연한 실체 없는 공포가
아닙니다. 포악한 군주를 무서워하는 신하, 잔혹한 상관을 두려워하는 종이 갖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 권능을 아는데서 오는 영적 지식입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지혜와 지식이 네 시대의 확고함이 되고 구원의 힘이 되고 주를
두려워함이 그의 보배가 되는도다.](사33:6)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주의 경고를 받아 두려움으로 움직인 노아는 방주를 예비했고, 자기
집을 구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의 믿음을 말할 때, 노아는 아직 자신이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경고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고후5:7). ‘보지 못한 것들’을 믿는다고 해서 몰상식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믿음이 반지성, 반이성을 주창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경고를 받았을 때 그 일이 일어날
것이란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동반합니다. 믿음은
지식을 초월한 이해를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지성은 더욱 날카로워지고, 빛을 발합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깨닫나니’(히11:3)란 말씀대로 우리는 말씀을 믿을 때 그 말씀의 내용을 알고 깨닫습니다. 그 때에 노아의 감성은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 우리는 지성이 반응하고, 감성이 반응합니다. 믿음은 두려움이든 기쁨이든 즐거움이든 슬픔이든 어떤 감정적 작용을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감정적 흥분과 체험을 정도 이상으로 강조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감정을 지나치게 배척함으로써 영적 균형을
잃어버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노아는 자신의 의지를 복종시켜서 주님이 명령한 대로 모든 것을 다 행하였습니다. 의지의 합당한 반응이 ‘믿음의
순종’입니다. 이런 면에서 노아는 이성(지성), 감성, 의지의 전인격적 반응과 순종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겼고, 비록 그가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한 것들이라도 능히 받아 들였을 뿐 아니라 두려움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믿음 없는 순종은 외식이요, 순종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노아의 순종하는 믿음은 그의 가족들을 구원했습니다. 노아의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동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노아가 믿었듯이 가족들도 노아가 믿은 주님과 주의 말씀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고 해도 가족들에게 그 믿음이 자동으로 전이(轉移)되는 것이 아닙니다. 노아를 통해 그 믿음이 가족들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는 노아와 롯을 통해서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가족들에게 자신이 받은 은혜와 믿음의 말씀을 전파했고
그들을 모두 믿음의 가족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롯은 믿는 신자였지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고, 전파하지 않았기에 임박한 심판에 대해 경고를
주었지만 비웃음을 당했을 뿐입니다(창19).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믿는 믿음이 먼저 가족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 점을 분명하게 명하셨습니다.
[이 날 내가 네게 명령하는 이 말씀들을 네 마음속에 두고 그것들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네가 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걸어갈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그것들을 말할 것이며](신6:6-7).
아버지들은 가족의 제사장이며 가족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할 교사들입니다. 가정은 최소의 교회입니다. 돈 벌어서 먹고 살게 해 주고, 학교 보내
주는 것이 의무를 다한 것이 아닙니다. 음란하고 비뚤어진 현 세대에서 말씀으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의를 전파하는 것이야 말로 참된 교육이요, 양육인
것입니다.
자, 다 같이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로부터 경고를 받고 두려움으로 움직여 방주를 예비함으로 자기 집을 구원하였으니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 노아는 믿음으로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세상은
악합니다.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악한 세상을 조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노아가 세상을 정죄했다는 것은 세상을
악하다고 증거 했으며, 주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세상을 보는 바른 성경적 기준, 영적 가치관이
확립되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노아의 날들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 후에 물이 그들을 덮칠 때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갔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의의 선포자 노아의 말이나 행동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의구심도 없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세상이
교회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합니다.
‘불신 지옥!’을 선포하면
누가 믿습니까? 온 세상이 불로 타 버릴 것이란 사실을 누가 믿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의 혼이 지옥에서 영원히 불탈 것이란 사실을 누가
믿습니까?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그런 곳입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무엇이라고 말해도 우리 주님의 증거는 이것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음을 우리가 아노라.](요일5 19). 세상은 사악함 가운데 있기에 ‘악한 현
세상’이라고 말합니다(갈1:4).
노아는 믿음으로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우리 주님 역시 세상을 정죄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산 성도들은 모두 이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히브리서
11:38을 보십시오.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게 합당치 아니하였느니라.)](히11:38a). *합당치 아니하였다-Of whom
the world was not worthy(KJV). 그래서 성도들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요일2:15). 세상과 친구가
되지 않습니다(약4:4). 세상과 일치하지 않습니다(롬12:2). 세상에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장차 우리는 세상을 판단할 것입니다. 세상을 정죄한 노아와 같이 정죄하지 않았다면 그는 세상을
이길 수도 판단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함으로써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노아가 세상을 위해 말씀을 선포하는
것 외에 달리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을 구해 달라고 울부짖거나 기도하지 않았음은 물어 볼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바울도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요한도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세상에 대한 성경의 증언은
“악한 현 세상”입니다. 반면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했고, 바울을 정죄했고, 요한을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그로 인하여 세상이 나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나도 세상에게 그러하니라.](갈6:14).
이제 ‘의의 상속자가 된 노아’에 대해서 말씀을 살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11:7c). 노아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물에서 나온 새로운 세상을 노아에게 주셨습니다(창9:1). 그는 세상을 정죄하고 버렸지만 그 보상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9: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창9:1),
[너희는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에서 풍성히 내고 그 안에서 번성하라, 하시니](창9:7). 주님은
아담에게 주셨던 지상의 왕권을 노아에게 주셨습니다. 악한 현 세상을 거슬러 살며,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던 노아는 새로운
세상을 상속으로 받았습니다. 이는 장차 노아와 같이 믿음으로 산 이들이 받게 될 상속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는 모형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이
땅을 상속으로 주시고자 ‘상속자’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상속자’의 자격을 부여 받아야 합니다.
*의의 상속자란 말은 첫째,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세상을 버렸지만 세상을 다시 얻는 노아와 같이 우리 주님은 세상을 정죄하고 버렸지만 이 세상의 모든 왕국을 다시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의 상속자이십니다.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이 아들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히1:2). 노아가 의의 상속자였듯이 우리 주님은 ‘의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상속으로 주십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로서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며,
다스리는 지배자이십니다.
*
의의 상속자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전가 받은 모든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노아가 주의 눈에 은혜를 입고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 이들은 다 의의 상속자들이 됩니다. 누가 상속자인가? 갈라디아서 3: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갈3:29).
[그러므로 네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상속자니라.](갈4: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속을 받을 수 있는 ‘상속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들을 다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입니다. 이 신분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물의 상속자요, 세상의 상속자’(롬4:13)로 삼으시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상속자로 삼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상속자는 혈연 관계이거나 특수 관계로 맺어져야 합니다.
현대에 들어 상속(相續)은 재산에 한해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나마 상속을 불로 소득이라고 규정해서 50%에 가까운 무거운 세금을 부과해 버립니다.
상속을 [부의 세습]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러나 본래 상속이란 재산 뿐만 아니라 신분과 권세, 영광, 지위 등 모든 것을 다 물려
받는 것입니다. 왕정 국가에서 아버지가 왕이면 세금도 없이 왕족으로서의 신분과 권위와 재산과 역량을 다 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식이라면 다 상속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상속자는 ‘이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무어라
말하느냐? 노예 여자와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라. 노예 여자의 아들이 자유로운 여자의 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갈4:30).
노예 여자의 아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상속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이스라엘은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모든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의의 상속자는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육신이나 율법이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상속자로서 자격이 박탈 당한 예는 또 있습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입니다. 에서는 이스마엘과 달리 노예 여자에게서 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합법적인 상속자로서 아무 결격 사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상속자로서 자격을 잃어 버렸습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 뒤에 그가 복을 상속받고자 하였으되 거절당하였으니 이는
그가 눈물을 흘리고 염려하며 뜻을 돌릴 곳을 구하였으나 그것을 찾지 못하였느니라.](히12:17). 아버지 이삭은 분명히 장자였던
에서에게 복을 빌어 주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합법적인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입니다. 주님은 믿는 자들을 공동 상속자로 지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니 우리가 그분과 함께 고난당하면 이것을 우리가 함께 영광도 받으려 함이니라.](롬8:17).
하지만 상속자로서 합당하게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상속자로서의 특권을 포기해 버리고, 세상에 던져 버립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의의 상속자가
되어 세상을 상속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으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의를 위해 고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는 의의 상속자들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자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상속은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속자가 되는 것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상속은 보상입니다.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께로부터 받을 줄 아나니 이는 너희가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4). 상속은 그리스도를 섬길 때 받는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보상입니다. 성도가 된 후에 육신적으로 살고, 죄악만 일삼을 때 그는 구원과 몸의 변화와 같은 값없이 주어지는 보상은 받겠지만 다른 ‘상속의
보상’을 구하여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계21:7).
상속은 승리자의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 때 승리자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 때 우리는 노아와 같이
‘의의 상속자’로서 세상에서 천년 동안 왕과 제사장(계1:10)으로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의의 상속자란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받은 구원은 단지 홍수로부터 일시적으로
육체가 살림을 받는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영적 구원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물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다가올 세상에는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잃어버린 죄인들이 영원한 지옥 불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복음을 증거하면서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노아에 비해 방주를 짓는데 걸리는
시간만큼이나 더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을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기를 빕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