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태하는 힘을 받아
말씀: 히브리서 11:11
요절: 히브리서 11:11 히브리서 11장에는 창세기의 7명의 남자를 믿음의 본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7은 4와 3으로 나누어집니다. 사라는 4와 3사이에 [믿음의 여인]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사라는 약속의 자녀를 낳은 거룩한 여인,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 부르며 순종한 여인으로 언급되어 있으며, 모든 자매들의 본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을 통해 수태하는 힘을 얻은 사라]의 믿음을 함께 살펴 보고자 합니다. 사라는 믿음의 동반자로 아브라함과 함께 순례의 길에 올랐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돕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하는 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씨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 문자 그대로 성취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믿음을 소유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 16:2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이제, 보소서, 주께서 나를 막으사 수태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하녀에게 들어 가소서. 내가 혹시 그녀로 말미암아 아이를 얻을까 하나이다,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더라.] (창16:2). 그래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육신의 지혜대로, 세상의 전통과 방법대로 사라는 생각하고 행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도 이 순간에는 아내의 말에 동의하고 동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과 실행은 불신입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곁에 있는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아담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문에는 이렇게 씌여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령한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창3:17). 아내들은 각별히 스스로 주의해서 마귀에게 속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자들은 쉽게 속습니다. 여자들은 남편에게 그릇된 조언을 해 놓고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바가지를 긁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 86세였습니다. 그는 이 문제로 하나님께 나가지 않았습니다. 남편들은 아내에게 어떤 제안을 받으면 곧 바로 그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인간적인 수단으로,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성취해 보려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철학이야 발로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쉽게 아내에게 동조해 버린 결과 아브라함과 사라는 목표한 자식은 얻었지만 하나님과의 친교는 놓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후로 13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육신을 신뢰했을 때, 영적 교제는 여지없이 단절되었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은 곧바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를 다루고 있습니다.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지만 믿음으로 행하는 대신 육신 안에서 걸을 때 주님과의 친교는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아들됨(sonship)과 교제(fellowship)를 잘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sonship은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부터 영원토록 변하지 않습니다. 이는 법적인 지위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fellowship)는 내가 주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야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모여 기도하고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님과의 친교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성경이 말하는 영적 교제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주님과의 교제는 복음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너희가 복음 안에서 교제하였음이라.](빌1:5). 복음을 떠난 교제는 유흥(entertainment)이지 영적 교제가 아닙니다. 교회는 교제의 장소입니다. 형제, 자매들이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십거리와 사업 이야기 등 온통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다면 교회는 사교 클럽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모든 교제는 복음 안에서 해야 합니다. 둘째, 성령의 교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안위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무슨 인정인 긍휼이 있거든.](빌2:1). 성령의 교제란 성령의 위로를 받고, 인도하심을 받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교제입니다. 육신대로 생각하고 행하면 성령을 억누르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성령을 슬프시게 하게 됩니다. 불순종하면 성령을 거역하게 됩니다. 믿지 않을 때 성령을 제한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령에 대해서 다양하게 죄를 지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 [성령의 무슨 교제]든지 다 잃어 버리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십시오. 셋째, 고통의 교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권능과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fellowship of suffering) 을 알고자 하여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빌3:10).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자들이 되고, 동참자가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함께 고난을 받을 때 주님은 영광을 함께 상속하게 해 주십니다. 사람들은 함께 고생한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고, 친해지고, 친교가 깊어지듯이 하나님 역시 복음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을 가장 사랑하시고, 기뻐하십니다. 넷째, 신비의 교제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사람들로 신비의 교제가 무엇인지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감추어졌던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심이라.](엡3:9).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말과 행동을 통해서 주님과 맺어진 신비의 교제를 보게 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신격과 위엄을 몸소 보여 주는 등불로서 빛나야 합니다. 다섯째, 마귀와의 교제가 있습니다. 고사나 제사를 지내는 행위는 마귀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방인들이 희생으로 드리는 것은 마귀들에게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자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0). 우리 민족은 유난히 마귀와 친교가 두텁습니다. a. 사업 시작 b. 건물 신축 c. 장사를 시작 d. 신학기 시작(대학가)- 대동제. 여섯째, 복음을 증거하고 함께 성경을 이야기함으로써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밝히 드러냄은 너희로 하여금 우리와 사귐을 갖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라.](요일1:3). 일곱째, 빛의 교제입니다.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 이는 성도와 성도의 교제 역시 주님과의 관계에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친히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할례의 언약을 세우시고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어 그녀에게서도 네게 아들을 주리라. 참으로 내가 그녀에게 복을 주리니 그녀가 민족들의 어머니가 되고 백성의 왕들이 그녀에서 나리라.](창17:16)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이전에 말씀하신 바 약속을 성취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약 2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주님은 한결 같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 속으로 이르되, 백 세인 사람에게 어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리요? 구십 세인 사라가 어찌 낳을 수 있으리요? 하고](창17:17).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여느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마찬 가지로 상식과 자신의 이성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 의학으로 생각해 보아도 100세인 남편과 90세인 아내 사이에서 정상적으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이런 반응은 지금 앞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이신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알면 알수록 깊어집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깊어집니다. 창세기18:10절에 보면 사라도 동일한 반응을 보입니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생명의 때를 따라 내가 확실히 네게 돌아 오리니 보라, 네 아내 사라에게 한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의 뒤에 있는 장막 문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창18:10).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주이십니다. 모든 생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문제는 말씀을 들은 사람이었습니다. 다 늙은 노인에게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말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는 침례인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으며 이르되, 내가 늙었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니](창18:12). 하나님은 불가능한 가운데서만 역사하십니다. 인간은 조금의 가능성만 있어도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을 맨 나중에 창조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했다고 주장할까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사라는 도저히 임신할 수가 없는 몸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연로하고 또 사라에게는 여인들의 관례에 따른 것도 멈추었으므로](창18:11). 하나님께서 90세의 늙은 사라에게서 자식을 낳게 하는 것이 쉽습니까? 홍해를 가르는 것이 쉽겠습니까? 38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병자를 일으키는 것이 쉽습니까?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는 것이 쉽습니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쉽습니다. 창세기 18:14에서 주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주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 있겠느냐?]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입으로는 쉽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외치면서 마음 가운데는 불신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만이 불신과 의심에 쌓였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얼마나 많은 경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합니까? 자신의 불신을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고 합리화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습니까? 구약의 대표적인 선지자였던 모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주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이루어지는지 그렇지 아니한지 보게되리라, 하시니라.](민11:23).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 슬프나이다. 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주께서 주의 크신 권능과 펴신 팔로 하늘과 땅을 만드셨사오니 주께는 너무 어려워 할 수 없는 일이 없나이다.](렘32:17).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의 믿음 없음을 도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느니라.](눅1:37). 하나님께 불가능한 일이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도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는 자신이 믿는 신(神)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는데 목적을 둡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하려고 합니다.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하나님을 움직이는 기도?...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전능은 고사하고 침묵의 하나님이시거나 무능한 하나님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만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에게 말하여 여기서 저 산너머로 옮겨가라, 하면 옮겨 갈 것이요, 또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으리라.](마17:20). 사라가 90세의 나이에 자식을 낳은 것은 하나님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의 불신을 책망하시고 바로 잡아 주심으로 바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와 히브리서를 잘 비교하면 사라를 통해 저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창세기 18:13을 보십시오.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사라가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확실히 아이를 낳으리요, 하느냐?] 주님은 사라를 불러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책망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미 전에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자식을 낳을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창17:19), 아직도 사라가 불신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자신이 웃었던 불신의 웃음에 대해서 회개하고 아내의 믿음을 도와야 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내 사라로부터 자식을 얻을 것이며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작명까지 해 주었습니다. [남편들아, 이와같이 너희도 지식에 따라 아내와 동거하고...](벧전3:7). 아내가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남편들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와 지식에 따라 동거하십시오. 롯을 기억하십시오. 롯은 아내에게 충분한 믿음을 심어 주지 못해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아담은 아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먹지 말아야 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못하도록 충분히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 가장은 집에서 기도와 말씀에 본을 보이고 온전히 아내와 자녀를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잘 다스려야 합니다. 창세기 18:15을 보십시오.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18:15).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구체적인 죄를 지적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는 모습은 간데 없고, 발뺌을 하는 사라의 모습은 죄를 지은 인간들의 반복되는 행동 pattern (사라는 웃었고, 두려워 했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을 보여 줍니다. 아마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이런 실랑이가 벌어질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하지 아니하였나이다.][아니라, 네가...했느니라.] 이러한 사라의 불신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기자의 기록은 사뭇 다릅니다. 히브리서 11:11을 보십시오. [믿음을 통해 사라 자신도 나이가 지났을 때에 씨를 수태하는 힘을 받아 아이를 출산하였으니 이는 그녀가 약속하신 분은 신실한 분으로 판단하였음이라.](히11:11).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책망을 받은 사라는 바로 잡혔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불신에 빠질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책망 받을 때 바로 회개하고 바로 잡혀야 합니다. 전도서 7:5에 이르기를, [지혜로운 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어리석은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사람에게 나으니라.]했습니다. 잠언 27:25은 이렇게 말합니다. [드러내어 꾸짖는 것이 은밀하게 사랑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27:5) 주님은 사라의 불신에 대해서 아브라함을 책망하시고, 사라를 꾸짖으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7). 사라는 주님이 떠난 후 입덧을 하면서, 신김치가 먹고 싶을 때부터 10개월 동안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후 아들의 이름(이삭-웃음)을 부를 때마다 자신의 불신의 웃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나이 들어 임신을 하게 되면 걱정이 앞섭니다. 40세만 넘어도 임신과 출산은 위험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프랑스에서는 50세 이상 된 여인의 출산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산모에게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려온 자식이지만 좀 더 힘 있고 젊을 때 낳으면 모를까 90세에 배가 불러 온다면 그것도 걱정거리입니다. 하지만 임신한 후의 사라와 임신 전의 사라와는 전혀 딴 사람이었습니다. 사라는 믿음을 통해 나이가 지났을 때 씨를 수태하는 힘을 받았습니다. 요즘 젊은 여자들도 조금만 힘이 들면 겁을 먹고 제왕 절개를 하는 판국에 사라야 말로 얼마나 큰 믿음의 소유자로 성장했는지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약한 믿음을 소유하고 살아가다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신앙이 급성장하는 turning point를 맞게 됩니다. 그 때 믿음으로 이기면 믿음은 급속도로 자라납니다. 반면 그런 때 육신으로 영적인 것을 대신하려 하면 몇 년, 몇 십년의 시간이 더 걸리게 됩니다. 시험이 닥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밀착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정에, 교회에, 직장에 문제가 있습니까?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지 마십시오. 흔히 처음 몇일은 믿음으로 인내와 절제를 발휘하다 내가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면서 뭔가를 하려고 합니다. 그때 일을 다 망쳐 버립니다.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조용히 있을지니라.](출14:14). 그러면 다시 몇 개월, 몇 년이 지나 같은 문제가 터집니다. 번번이 같은 문제에 실패를 거듭하다보면 믿음은 제자리 걸음입니다.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요, 조용히 신뢰하여야 너희가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이를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을 타고 도망하리라...](사30:15,16).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뭔가를 해야 평안을 얻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이후엔 뒤돌아보지 말고 하셔야 합니다. 그것을 믿음의 행위라고 합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 이 점에 대해 생생한 예를 보여 줍니다. ?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바란 광야에서 곧 바로 가나안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안에 있는 거인들과 높은 성벽에 기가 죽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했습니다. 곧 바로 들어가야 할 가나안 입성은 40년이 연기되어 버렸습니다(민13,14). 이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신 다시 인간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주께서 약속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 하매](민14:40). 이들은 뒤늦게 믿음을 발휘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또 한 번 어기고 말았습니다. ? 야곱과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힘으로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아 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몇 십년을 타향에서 보내야 했고 혹독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 믿음의 사도였던 바울은 말년에 주님의 뜻을 거역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주님의 뜻을 거역하고 동족 유대인에게 집착한 그의 인간적인 욕망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육신의 정욕이요, 죄였습니다. 세 번에 걸친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 목표한 유대인의 복음화에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신 소아시아의 다른 지역이나 곧바로 로마로 갔더라면 사도행전은 지금보다 훨씬 더 길어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영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죽은 자와 같습니다. 능력도 소망도 없습니다. 둘째, 혈과 육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기적적인 출생을 이루셨습니다. 이는 구령의 원리도 동일합니다. 나의 언변과 지식으로 전한 복음은 감동과 동의를 구할 수 있어도 영적인 출생을 이루지 못합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