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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

말씀: 히브리서 11:12
요절: 히브리서 11:12

성경은 [사라]를 일컬어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바닷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이 나왔느니라.](12). 이는 의학적으로 식물인간이란 뜻이 아닙니다. 의식이 없다거나 움직일 수 없는 그런 병든 자란 뜻도 아닙니다. 사라는 태의 열매인 아이를 낳는 문제에 관해서 죽은 자와 다름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현 시대와는 달리 당시에는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팔, 다리가 없는 신체의 불구보다 더 큰 불구로 여겼고, ‘수치’로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젊을 때에는 언젠가 낳겠지 하는 희망이라도 있고, 기적을 기대할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 버리면 그런 기대 자체를 접어야 합니다. 여자 나이 90세에 아이를 낳는다는 이야기는 ‘기네스 북’의 기록에도 없는 일입니다. 얼마 전 67세인 스페인 여성이 쌍둥이를 낳아 최고령 출산 기록을 세운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종전의 최고령 출산 여성은 66세이던 지난해 딸을 낳은 루마니아의 ‘아드리아나 일레스쿠였’으며 그 이전에는 62세로 사내아이를 낳은 이탈리아 여성이 최고령 출산 기록 보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90세의 할머니가 아이를 낳은 기록이 있는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입니다. 이 나이에 누가 임신하면 의사들은 즉각 ‘인공 유산’이나 임신 중절을 권할 것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일정 나이(50세)가 넘으면 출산을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안이 있습니다. 임신해도 낳을 힘이 없기 때문에 산모가 도리어 위험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라는 ‘믿음으로 수태하는 힘을 받아’ 산부인과 의사들이나 어떤 약물의 도움 없이 건강하게 출산했습니다. 사라의 출산 비결은 현대 의학의 개가가 아닙니다. 사라의 놀라운 체력이나 몸을 잘 관리한 건강 덕분이 아닙니다. 성경은 당시 90세의 노인이었던 사라는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히11:12)이었다고 말합니다. 몸의 상태나 체력적으로 볼 때 임신이나 출산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통계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습니다. 사라가 수태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기적], 하나님의 역사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라는 무슨 힘으로 수태하고 아이를 낳은 것입니까?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고 낳은 것은 [믿음을 통해] 수태하는 힘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말씀을 통해 주님의 책망을 받고 바로 잡힌 후에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갖게 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때가 되자 사람의 태 안에 생명이 들어섰고 사라의 믿음은 놀랍게 성장했을 뿐 아니라 크고 강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몸 안에 어떤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말씀을 믿지 못해서 웃기도 하고, 주님 앞에서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도 했지만 막상 몸 안에 태기가 돌고, 아이가 들어섰을 때 사라는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사라가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11절에 ‘이는 그녀가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신 분으로 판단하였음이라.’(11b)는 말씀을 통해서 사라가 무엇을 어떻게 믿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사라가 죽은 자와 다름없다는 사실은 남편 아브라함이나 사라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갑자기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도 아니고 순례의 여정 동안에 노화가 정지되었던 것도 아닙니다. 세월의 깊이만큼 몸도 마음도 늙어 갔습니다. 힘은 쇠약해져 갑니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젊음을 유지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몸이 늙고 약해지고, 점점 죽어가는 만큼 자신의 몸에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망도, 믿음도, 기대도 사라져 갔습니다. 사람의 몸 안에 태만 죽은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살아 있어야 할 믿음도 함께 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몸의 상태가 아니라 믿음의 상태였습니다. 마침내 사람의 믿음은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이란 말은 사람의 몸 상태와 육체적 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역시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6-18장을 읽을 때 자식에 관한한 아브라함과 사라는 완전히 믿음이 죽은 자와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주님이 자식을 준다는 말씀에 웃어 버리고 말았던 것을 볼 때 이제 더 이상은 ‘자식’은 기대조차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믿음으로 수태하는 힘을 받고, 믿음으로 죽은 자신의 태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만남 이후입니다. 하나님께는 어려운 것이 없고, 불가능이 없다는 사실을 안후입니다. 약속을 받고 신실하신 주님을 믿을 때 그녀는 자신의 태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은 몸이 되살아났고, 수태하는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사라의 믿음은 ‘부활’의 믿음이요,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는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동일한 교훈을 줍니다.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이 죽은 것과 방불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실제적인 문제들 앞에서는 믿음도 소망도 죽은 듯이 보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오지만 설교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힘도 지혜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은혜도 위로도 없이 교회에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들 만나는 것이 전부인 성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시간도 없고,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비전도 없고, 힘도 없고 그나마 가능성마저 없다면 포기하는 것 외에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멀리만 있는 것 같습니다. 꿈도 죽고, 믿음도 죽어 버립니다. 육신의 힘과 지혜로 무엇인가를 해 보려 했던 모든 것이 허무하게 되어 버린 순간에 도달할 때 나는 죽은 자와 다름없는 상태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감옥에 갇혀 풀려 날 소망도 없이 지낸 죽은 자와 같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집요한 공격을 피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가 또 다시 생명의 위협을 당하자 “그들 앞에서 자기 행동을 바꾸고 그들의 수중(手中)에서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휘갈겨 쓰며 침을 수염에 흘리며”(삼상21:13) 죽은 자와 같이 되어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산 이들 가운데 살았으나 산 것이 아닌 그런 삶의 고통과 무기력함을 체험하지 않은 이가 적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버림 받은 자 같고 만물의 찌꺼기와 같았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와 다름없던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새롭게 받고 믿을 때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 생명을 낳는 놀라운 은혜를 입게 됩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그분의 약속들 안에 들어 있고, 우리가 믿을 때 권능이 우리 속에 전달되고 일합니다. 자신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을 때 죽은 육신을 보지 않고, 죽어 있는 내 자신의 믿음의 상태를 보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롬4:17)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 보는 것]이야 말로 모든 해답입니다. 때로 어떤 이는 믿음에만 집착해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데 모든 신경이 빼앗깁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선포하기를, [주를 찬송할지로다. 그분께서 친히 약속하신 모든 것에 따라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셨으니 그분께서 자신의 종 모세의 손으로 약속하신 바 자신의 모든 선한 약속 중 한 말씀도 이루지 아니하신 것이 없도다.](왕상8:56)고 했습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약해질 수 있고, 겨자 씨 한 알보다도 작아서 없는 듯이 보일 수 있고, 죽어 버린 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때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책망하시고, 바로 잡으시고 약속의 말씀을 불 일 듯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라의 믿음입니다. 사람의 약속은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도 있고, 마음은 있지만 환경이나 능력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사정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 말씀은 변하거나 폐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 있다면 것은 바로 인간의 ‘불신’입니다. 사라는 자신의 태가 죽었다는 객관적인 사실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생긴 후로는 자신의 태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 로마서 4장을 보십시오. 히브리서 1:11-12절의 말씀과 짝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그가 백 세쯤 되었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여 이제는 죽은 자기 몸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또 사라의 태가 죽은 것도 고려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이 없음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에 관하여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분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분께서 또한 능히 이행하실 줄로 온전히 확신하였으니](롬4:19-21). 아브라함과 사라는 동일한 약속, 동일한 하나님을 믿었기에 동일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노아의 가족이나 아브라함의 가족이 복된 것은 같은 믿음, 같은 영으로 하나된 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의 상태를 잘 알았지만 약속의 말씀을 믿은 후로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믿은 후에도 자주 “힘이 없다, 지혜가 없다, 자본이 없다, 환경이 좋지 않다, 사람이 없다, 때가 좋지 않다... ” 등등 없는 것들을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전부란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안에 모든 것”(all in all)이란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뜻을 두신 분도 주님이시고, 과정과 결과를 모두 이루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입니다. 주님이 시작이시고, 주님이 마지막입니다. 자 몇 구절을 보십시오. [활동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같으시되](고전12:6).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곧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니라.](엡1:23).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시느니라.](골3:11).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행하시고,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고,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뭐가 없다,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있는 것입니다. 없는 것들이 100 가지가 넘는다 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성도들은 실제로 뭘 좀 해보려고 해도 뭐가 있어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무엇이 없어도 됩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창조주이시고, 없는 것들을 만드시고, 부르시고, 존재하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무엇을 들거나 고치거나 새롭게 하는데 어떤 재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약속의 말씀’과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고, 그것을 받는 믿음이 있으면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을 때 그 약속을 능히 이행하실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힘으로 성취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기도와 금식으로 투쟁해야 할 어떤 기도 제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힘과 지혜로 붙들고 이루어야 할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친히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인내로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의 상태, 환경, 능력, 돈, 지혜, 조직 등을 총동원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히 믿음으로 안식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돌이켜 안식하여야 구원을 받으며, 조용히 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터이나...](사30:15a).

저와 여러분이 받은 말씀이 있다면 우리는 그 말씀의 성취를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조용히 신뢰하면 힘을 얻습니다. 주님께서 신실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며, 능히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면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사역입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우리는 말씀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인내로 소망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많은 이들이 말씀을 받을 때 기쁨으로 받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을  대할 때 마치 무효가 된 것처럼, 폐기된 것처럼 지내는 것을 봅니다. 아브라함은 씨에 대한 약속을 받고 하란을 떠난 지 25년 뒤인 100세에 이삭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약속을 받은 이의 믿음이 충분히 자라고, 연단되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걸리는 시간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자신들의 힘으로 자식을 낳았다면 이삭을 [믿음]으로 얻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라의 나이가 들어 태가 죽은 후에, 그것도 주님께서 ‘내년 이맘 때’란 구체적인 약속을 통해서 얻었기에 이삭은 ‘약속의 상속자’로 의심할 바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주시기 전에 언제나 먼저 말씀을 통해 약속을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약속을 받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사라를 통해 자식을 주신다고 하셨고, 그를 통해 영존하는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았을 때 후에 그는 이삭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습니다. 사라가 이 말씀을 믿었을 때 비록 몸이 늙었지만 ‘수태하는 힘’을 받아 이삭을 낳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며, 놀라운 힘을 줍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으로 받으면 그 약속은 주님이 친히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은 말을 바꾸지 아니하십니다. 주님은 변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나는 주라 변치 아니하나니](말3:6a). 여러분은 주님이 주신 약속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들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주님이 주신 약속은 국가에서 발행한 어떤 증서보다 더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주님의 신실하신 성품이야 말로 우리가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너는 주 네 하나님 그분이 하나님이시오, 신실한 하나님이신 줄 알라.] (신7:9a)고 선포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하나님은 ‘신실한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의 언약을 지키시고, 변하지 않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며,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13:8). 이 하나님의 속성, 성품, 인격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 기록된 모든 말씀은 보배로운 약속들로 마음에 간직될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쉽게 “나는 믿는다”고 말하거나 “아직은 믿음이 약해서 다 믿지는 못합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라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 전지하시다. 신실하시다. 은혜로우시다... 등등을 믿지 않는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건, 나의 일에 관련되면 그 믿음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는 거의 없지만 내가 현재 겪고 있는 문제, 나의 어려움을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는지 알 수 없고,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목자이시며, 인도자란 사실은 믿지만 과연 나의 진로, 나의 취업 문제, 배우자 문제 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은 없습니다. 자신과 관련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믿기가 쉬운데 막상 자신의 일상의 생활에 들어오면 확연이 달라집니다. 사라가 말씀을 믿을 때 수태할 힘을 얻었고, 자신의 몸의 상태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듯이 우리 역시 믿을 때 힘을 얻고, 우리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무시해 버릴 수 있습니다. 자신이나 현재 처한 환경을 보면 믿음이 약해지고, 사라집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했을 때는 물 위를 걸었지만 거친 풍랑을 보았을 때 바다에 빠지고 말았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신뢰할 때 불가능한 환경이나 부족한 재원, 연약한 나의 능력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 볼 때 믿음은 쉽게 파선되어 버립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시편에 [오 주 만군의 하나님이여, 누가 주와 같이 강하신 주시니이까? 무엇이 주를 둘러싼 주의 신실하심에 견줄 수 있나이까?](시89:8)라고 했고, 이사야는 [오 주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주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으므로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정하신 계획들은 신실과 진리이니이다.](사25:1)라고 했습니다. 주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며, 경이로움의 대상입니다. 사라가 약속하신 주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판단하여 믿음을 통해 수태할 힘을 받았듯이 우리 역시 주님을 신실하신 분으로 판단하고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일상 생활은 믿음의 삶이 될 것입니다. 육신적인 삶이 아니라 영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에 견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약속의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믿고 우리가 받은 모든 약속들을 흔들림 없이 굳게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를 부르사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도다.](고전1:9). 사라는 아브라함과 함께하는 동안 자신이 직접 겪은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적으로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우르를 떠나 순례의 길을 걷는 동안 하나님은 늘 신실하셨고, 마침내 약속대로 자식을 낳게 해 주시겠다고 직접 찾아 와서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라는 하나님을 신실하신 분이라고 판단할 일들을 많이 체험했고, 목격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13, [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분은 항상 신실하시니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느니라.](딤후1:13)는 주님의 말씀대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때로 불신에 빠져 여러 가지 죄악을 저지르기도 했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언제나 항상 하나님께 신실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신실하셨고, 처음에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넘어질 때도, 시험에 빠질 때도 주님은 신실하십니다(고전10:13). 자, 한 구절 보겠습니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사라가 믿음의 길을 걷는 동안 체험한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허다한 별과 바닷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이 나왔느니라.](12).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생명을 낳을 수 있는 육신의 힘이 완전히 죽고 사라졌을 때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힘과 지혜를 그치지 않을 때 종교 생활은 잘 할 수 있지만 영적 생활은 영위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과 지혜로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합니다. 종교적 열정이 크면 클수록 교회에 관련된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적 힘이 다 빠지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백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나의 무능함을 깨닫게 될 때 주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나의 무지함이 밝혀지고 드러날 때 주님의 지혜가 임합니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면 알수록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 됩니다.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인식이 깊을수록 주님의 은혜 또한 더욱 풍성하게 임합니다.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을 통해 하늘의 허다한 별과 바닷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사람을 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사람, 자신이 뭔가 된 줄로 아는 사람을 쓰시지 않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것도 아니면서 스스로 무엇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자기를 속이나니](갈6:3). 우리는 모두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자란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5:30a)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아가 살아있고, 옛 사람이 살아있고, 옛 성품이 그대로 살아 있다면 우리는 죽은 자와 같이 될 때까지 오랜 세월이 필요할 것입니다. 가진 것이 좀 있고, 능력 많고, 똑똑한 사람들일 수록 하나님 앞에서 많은 연단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능, 무지, 무가치함을 잘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의 가치는 십자가에 처형되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자각이 없고,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다면 주님의 은혜 또한 크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지 않는다면 부활의 능력 역시 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모두 부활의 권능을 일상의 삶에서 필요로 합니다. 주님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 순간이 아니라 현재 우리는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 권능에 참예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빌3:10) 우리는 우리 자신은 죽은 자와 같고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그런 체험과 능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 일하셨습니까? 죽은 자와 다름없던 한 사람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실하신 하나님, 부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자신을 맡기고 내어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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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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