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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더 좋은 본향

말씀: 히브리서 11:15-16
요절: 히브리서 11:15-16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본향이 있습니다. 태어난 고향이 있고, 학업이나 직장이나 기타 다른 사유로 고향을 떠나 살게 된 곳은 ‘제 2의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표가 많이 나온 곳을 자신의 ‘정치적 고장(향)’이라고 말합니다. 사업가들은 자신들의 상품이 가장 많이 팔린 곳을 고향이라고 말합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을 때면 고향을 그린다는 인간의 본성을 잘 표현한 말입니다. 특히 평생을 나그네와 순례자로 산 이들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유프라테스 강 저편에 있던 갈대아의 우르(Ur)였습니다. 그는 이곳을 떠난 후로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그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기근을 피해 잠시 이집트로 내려 간 적은 있지만 우르로 되돌아 간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머물라고 하신 땅에서 장막을 치고 아들 이삭과 손자 야복과 함께 머물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향수병이 걸렸다든가 ‘내가 죽거든 내 몸은 고향 우르에 묻어 다오.’ 했다는 등의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사람들이 음란하고 악이 가득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자기 종 ‘엘리에셀’을 불러 [오직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니](창24:4)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아들 [이삭]을 그곳으로 데려 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알지니 내 아들을 데리고 거기로 다시 가지 말라.] (창24:6). 보통 아버지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살았던 고향, 자신의 친족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자식들을 데리고 가기를 좋아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후로 몸만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완전히 자신이 태어나서 살았던 고향을 떠났습니다. *우리 말로 ‘본향’이란 말은 킹 제임스 성경으로 country(나라)이다.

그에게는 “더 좋은 고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갈 곳은 “우르”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한 도시, 하늘의 나라(하늘의 왕국)라는 그런 본향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조국의 산천이 아니라 하늘의 본향을 사모합니다. 주님께서 속히 오셔서 이 땅에 ‘의와 화평이 넘치는 그런 왕국’을 세우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철장으로 다스릴 그 나라를 고대합니다. 죄와 저주가 풀리고, 마귀가 묶이어 들어간 그런 나라를 소망합니다. 동물들이 모두 풀을 뜯고, 사막에는 꽃이 피고 시내가 흐르는 그런 나라가 속히 오기를 꿈꿉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오셔서 세우는 왕국 외에는 어떤 왕국도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의의 왕국을 기다리는 것은 아브라함이나 그리스도인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의 지리적 고향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디옥’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1:26에 보면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6b)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안디옥은 처음으로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름으로 불린 무리들이 출현한 곳입니다. 안디옥은 이방 교회, 선교, 신약 성경의 중심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고향을 안디옥이라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곳을 이교도들이 성지라고 여기는 그런 성지(聖地)라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 곳, 우리의 집이 있는 곳은 이 땅 어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 도시는 하늘의 새 예루살렘입니다. 우리의 집은 주님이 가셔서 친히 마련하시는 맨션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자신의 육신이 태어난 곳으로 마음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본향으로 마음이 갑니다. 이는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자연스런 본성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이들은 누구나 그렇습니다. 땅에서 난 이들은 땅을 그리워하지만 하늘에서 난 이들은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순례자로서 목적지, 종착지가 정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기에 육신이 태어난 곳을 그리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살 그곳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참으로 그들이 자기가 떠나온 본향을 깊이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그들에게 있었으려니와](15).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가 떠나온 본향을 깊이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르가 비록 먼 곳이라 할지라도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오늘날처럼 직장이나 자녀 교육 때문에 가나안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정치적 망명을 한 것도 아니고, 죄를 지어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도피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곳 미국으로 이민 오는 이들은 더 나은 직장, 더 나은 교육 환경을 찾아옵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부르심을 받아 떠나 온 것이 아닙니다. 흔히 이 땅을 기회의 땅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이 있지만 ‘약속의 땅’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후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했다면 그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더 이상 ‘우르’나 ‘하란’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떠난 이들과 부르심을 받아 떠난 이들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떠난 이들은 이전과 분명한 ‘단절’의 역사가 있습니다. 분리된 후에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성도들의 특징은 ‘단절과 분리’의 삶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난 후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듯이 성도들은 자신들이 떠난 곳을 향해 다시 뒤를 돌아보거나 돌아가려 해서는 안 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어떤 경우에도 이집트로 돌아가서는 안 되었습니다. 심지어 말의 종자를 얻기 위해서도 거기로는 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일단 홍해를 건넌 뒤로는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이집트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광야의 백성들은 끊임없이 이집트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도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자!”를 외쳤습니다. 그렇게 외쳤던 불신의 세대들은 이집트도 아닌 가나안도 아닌 광야에서 40년을 떠돌다 모두 죽었습니다. 반대로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가 70년을 살았던 유대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이들은 고레스의 칙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자신들이 떠나온 땅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돌아가자!”고 외쳐야 합니다. 그런데 바빌론에 머물기를 좋아했습니다. 느헤미야, 에스더, 에스라를 읽어 보면 이들은 돌아가지 않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더 좋은 본향이란 먹고 살기에 편하고 좋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복이 주어진 곳이 아니라 육신이 편한 곳을 고향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빌론에는 유대인들의 대학이 세워지고, 탈무드가 편찬되었습니다.

우리는 떠나자! 돌아가자! 란 구호를 정확히 쓸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를 떠나야 합니까? 모든 성도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속주의를 버리고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율법에서 떠나 복음으로 들어온 유대인들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성전, 제사, 절기 준수, 금욕 등은 천한 초등 원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교회는 구약 시대로 돌아가 안식일을 지키거나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지 않습니다. 특별히 정해진 음식 규례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안 뒤에 혹은 하나님께 알려진 뒤에 어찌하여 너희가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갈4:9).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옛 전통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토정비결이니 점술이니 사주팔자니 궁합이니 운세니 따위를 전혀 보지 않을 뿐 아니라 믿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에 관심 자체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 결혼 등을 하는데 길일(吉日)을 잡는다든지 갖가지 미신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조금이라도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만약 성도들이 교회는 교회대로 다니지만 여전히 전통과 관습에 따라 이런 저런 옛 관습대로 산다면 그는 성도들이 누리는 자유나 평안, 능력, 기쁨을 전혀 누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그러나 참된 잠언(箴言)의 /말씀/과 같이,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겨진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2:22). 특히 로마 캐톨릭을 떠난 이들은 다시 그리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시대는 ‘믿음에서 떠나는 이’들이 속출하는 시대입니다. 조금이라도 믿음이 자라고, 강해지고, 커지기를 원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소원일 것 같은데 믿음에서 떠나 버립니다. [이제 /성/령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셨으니](딤전4:1). 성도들이 말씀을 버리고, 교회를 버리고 떠납니다. 어떤 자매들은 남편이 싫다고 떠나 버리고, 어떤 형제들은 아내가 싫다고 떠나 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가난한 삶이 싫다고 떠나 버립니다. 어떤 이들은 형제가 싫다고 교회를 떠나 버립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머물러 있어야 할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떠나 버립니다. 성경을 떠나지 말라. 가정을 떠나지 말라. 교회를 떠나지 말라. 어떤 이유로 이런 것을 떠난 이들은 마귀의 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떤 자들이 이미 사탄을 따라 돌아섰도다.](딤전5:15). 남편이나 아내를 떠나고 자녀들을 떠나는 일은 ‘사탄을 따라 돌아 선 것’입니다. 이는 영적 생활에서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오늘날 가정 문제에서 대부분은 ‘음행과 돈’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을 떠나게 하는 것,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은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니 어떤 자들이 돈을 탐내다가 잘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많은 고통으로 자기를 찔러 꿰뚫었도다.](딤전6:10). 돈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데 드는 시험과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믿음에서 떠난 이들은 롯이 소돔을 향해 떠났듯이 잘못 떠난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돌아 가자!”를 외칠 때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떠나 종교 생활을 이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자!” 외쳐야 합니다. 믿음에서 떠난 이들은 다시 믿음 안에 거하기 위해 돌아 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육신적으로 사는 성도들은 모두 회개하고 “돌아가자”를 외쳐야 합니다. 첫 사랑을 떠난 이들은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돌아 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 서는 일이야 말로 가장 복된 일입니다. 마땅히 떠나야 할 것들에 그냥 머물고 돌아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타락입니다. 주께로 돌아가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결단입니다.

16절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 (16). 아브라함과 사라가 사모한 나라는 이 땅에 있는 어떤 나라가 아닙니다. 당대에는 이집트가 세계의 중심이요,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바빌론, 그리스, 로마와 같은 제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의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경치가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나라, 천연 자원이 많은 나라, 문화 예술이 발전한 나라 등등 우리는 어떤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어떤 나라도 그곳이 더 좋은 *본향(country-나라/kjv)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산업이 발전하고, 사회 복지가 잘되어 있는 나라, 부강한 나라에 살고 싶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더 좋은 본향은 이 땅의 선진국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라고 말할 때 더 좋은 본향은 ‘하늘의 본향’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왕국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실 왕국, 하나님이 친히 세우실 도시를 바랐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주의할 내용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나 신학자들, 설교자들이 본문을 설교할 때, 아브라함이나 구약 성도들이 바란 더 좋은 본향(country)을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새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도시인데 유대인들과 아무 관련이 없고, 유대인들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씨에게 주신 약속은 가나안 땅에 하나님이 친히 세우실 왕국, 도시입니다. 즉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이나 새 예루살렘에 대한 약속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주님께서 친히 세우실 왕국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대언자들과 시편에 기록된 것이기도 합니다. 에스겔, 다니엘에 나오는 한 왕국, 한 도시는 이 땅에 세워질 왕국이지 저 하늘에 세워질 어떤 왕국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하늘의 본향’ ‘하늘’(heavenly)이란 말에 현혹되어 하늘에 있는 나라,하늘에 있는 도시라고 말해 버립니다.

하늘의 왕국(kingdom of Heaven)은 이 땅(지구)에 세워질 ‘천년 왕국’을 말하는 것이지 저 하늘에 세워지는 왕국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바라고 소망한 도시, 약속으로 받은 도시는 이 땅에 세워질 도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볼 수 있는 바로 그 땅이었고, 그 땅에 세워질 도시입니다. 우리는 에스겔 40-48장에 이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거기 계시다](겔48:35)란 이름의 이 도시는 천년 왕국의 수도이자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새롭게 건축될 예루살렘입니다. 이는 신약 성도들이 소망하고 바라보는 도시인 ‘새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어린 양의 신부인 신약 성도들이 믿고, 바라보고, 확신하고, 껴안는 약속은 이 땅에 세워질 예루살렘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자세히 묘사된 이 도시는 우리가 가야할 본향입니다.

우리는 구약 성도들이 하늘에 있는 도시가 아니라 땅에 세워질 왕국을 사모했다는 것은 복음서와 사도들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땅에 세우실 메시야 왕국, 이스라엘의 회복을 열망했지 셋째 하늘에 있는 무엇을 열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오순절 이후 성령을 받고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기 시작했는데 이는 교회의 신비를 안 뒤부터입니다. 골로새서 3:1-2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났거든 위에 있는 그것들을 추구하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愛着)을 두고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라.](골3:1-2). 성도들의 소망은 모두 땅이 아니라 저 하늘 즉 위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더 좋은 본향은 하늘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더 좋은 집, 더 좋은 도시, 더 좋은 나라는 모두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하늘에 대한 소망이 넘치고, 하늘에 가기를 열망하는 이들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원이 “...내가 원하는 바는 /몸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빌1:23b)라고 말했던 하늘입니다. 거기에는 우리 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십니다. 하늘의 거룩한 천사들은 하늘에 있습니다. 의인들의 영은 모두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성경에 계시된 것들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곳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는 우리가 입어야 할 영광스런 몸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40, [또한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다르니라.](고전15:40). 우리가 장차 입게될 몸이 하늘에 있습니다. 거룩하고 영광스런 몸이 거기에 있습니다. 약하지도 쇠하지도 더럽지도 썩지도 않는 그런 몸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입으셨던 바로 그 몸입니다(빌 3:21). 하늘에는 우리가 거해야 할 맨션이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저택들)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14:2)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 우리의 혼이 입을 집인 영광스런 몸이 있고, 살게 될 맨션이 있습니다. 하늘에는 우리가 살 도시가 있습니다(히12:22). 하나님이 친히 건축하신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상상으로 만들어낸 어떤 도시보다 더 아름답고 뛰어난 도시입니다. 여행을 많이 다닌 이들이 지구촌 곳곳의 아름다운 광경들에 대해 찬미하지만 하늘의 영광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성도들이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해 너무 무지하기 때문에 하늘에 대한 소망을 둘 수 없다고 합니다.

모세는 성막을 지을 때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을 보고 지었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하늘에 있습니다. 악한 것, 더러운 것을 빼고는 모두 다 저 하늘에 있습니다. 금, 은, 보화는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도 있습니다. 진주는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있습니다. 빛은 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도 있습니다. 물과 불같은 것들은 땅에만 존재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하늘에도 천둥이 있고, 번개가 있습니다. 사람이 처음에 하나님의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이 땅은 사람이 거주하기에 맞도록 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땅이 하늘의 모형이란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대해서 너무나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영적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늘은 물리적, 시 공간적으로 존재하는 곳이며 우리가 살 곳입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왕관들이 있고, 보상이 있는 곳입니다.

자, 보십시오. 다시 16절입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의 본향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분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느니라.] (16). 믿음으로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는 이들에게 이 땅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일 뿐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아브라함의 마음을 빼앗지 못합니다. 세상의 권력, 명예, 돈, 지위는 물론이요 그 어떤 것도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는 이들에게는 무가치한 것일 뿐입니다.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는 이들에게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 세상과 친구 되지 말라, 세상에 일치하지 말라...” 등등의 모든 말들이 자연스럽게 성취됩니다. 지금 현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친히 예비해 두신 한 도시를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라면 믿음의 삶은 즐거운 순례의 길이 됩니다.

우리가 잠시 동안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선교사로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대사](고후 5:21)로 파송된 하늘의 고위 공무원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고향으로 돌아갈 일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들고 선교하기 위한 것이 전부입니다. 주님께서 고향 친족에게로 보낸 예는 그 한 가지 뿐입니다. 마가복음 5:18-19, [그분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마귀 들렸던 사람이 그분과 함께 있을 것을 구하였으나 예수님께서 그를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네 친지들에게 돌아가 {주}께서 너를 위해 큰 일들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지들에게 고하라, 하시니](막5:18~19). 주님은 제자로 자원하여 주님을 따르고자 할 때 언제든지 받아 주셨지만 이 경우에는 예외였습니다. 누가복음 9장에 나오는 이들은 즉시 따르지 않고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따르겠다고 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습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족, 친지들에게 다시 갈 경우에는 선교사로 가는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가 다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란 점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17:18).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시니라.](요20:21). 이것이 현재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의 신분이며, 지위입니다. 우리는 때가 되어 주님이 본향으로 소환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미련없이 이 땅을 떠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 인생에는 이 땅에서나 저 하늘에서나 후회가 없습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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