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요 순례자
말씀: 히브리서 11:13-14
요절: 히브리서 11:13-14
사람들은 모두 인생이 나그네 길이란 사실을 잘 압니다. 나그네란
말은 허무를 느끼게 하는 말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그런 노래가 유행을 했고, 교과서에 나온 시 중에
나그네란 시는 그나마 낭만이라도 있습니다. ‘강가루 건너서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한국 사람들은 사람이 죽을 때
‘돌아가시다’란 표현을 씁니다. 이는 매우 성경적 표현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아담에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창3:19)라고 하셨고, 시편에도
“사람들의 자녀들아, 너희는 돌아갈지어다.”(시90: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몸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종교가 있든지 없든지,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분명히 아는 영적 지식, 성경적 지식은 죽음은 ‘돌아가는 것’이란 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모든 사람들 속에 언어(말)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을 부인하는 무신론자이든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이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이 분명하게 한 가지 아는 영적, 성경적 진리는 사람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인생은 ‘공수래공수거’란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이 불교
용어인 줄로 알고, 불교적 가르침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통독하다 이와같은 표현들을 반복해서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성경이 불경보다 앞선 것이니 성경이 불경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과 종교는 성경에 조금의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성경이 세상의 모든 종교와 철학, 사상 체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다가 전설이나 신화나 타
종교의 가르침이나 사상이나 철학을 접할 때면 이전까지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떡 부스러기’를 먹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진리
그 자체를 말씀을 통해 먹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욥은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로
돌아가리라.](욥1:21)고 했고, 시편을 쓴 다윗은 말하기를,
[그가 죽을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며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하리라.](시49:17)고 했습니다. 지혜의 대왕이라 불리는 솔로몬은
[그가 모태에서 나왔은즉 나온 그대로 벌거벗은 채
돌아가고 자기의 수고한 것 중에 아무것도 손에 들고 가지 못하리니] (전5:15)라고 했습니다. 불신자들이 아는 것은 몸에 관한 것이
전부입니다. 몸은 왔던 흙으로 돌아갑니다. 영은 주님께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영을 취하시고, 혼을 거두어 가시는 날 몸은 본래 왔던 흙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영과 혼에 대한 지식은 아무나 다 갖고 있는 지식이 아닙니다. 종교인들은 영혼은 순환한다, 영원 회귀한다, 윤회한다, 영혼은
영원히 수면한다, 소멸 된다 등등의 별별 이상한 가르침을 내 놓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것은 몸이 어떻게 되는지만 알 뿐 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나마 몸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혼을 담는 질그릇입니다. 몸은
혼의 장막이요, 집입니다. 몸은 혼이 입던 옷입니다. 성도의 몸은 의의 병기입니다. 성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 성도의
몸은 하나님의 살아 있는 집입니다. 불신자의 몸은 불의의 도구입니다. 혼이 죽을 때 사람들은 땅에 묻던지, 불에 태우든지 해서 처리해 버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전도서 12:7,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靈)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전12:7).
문제는 혼입니다.
혼이 어디로 가는가? 혼이 누구에게로 가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떤 혼은 지옥으로 갑니다. 어떤 혼은 저 하늘로 갑니다.
자신의 혼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이들은 나그네가
아닙니다. 갈 곳이 없는 나그네라면 그는 나그네가 아니라 방랑자이기 때문입니다. 방랑자는 과거에 얽매인 현재가 있을 뿐 미래가 없습니다.
방랑자는 소망과 비전이 없습니다. 도망자와 방랑자의 삶은 두려움과 곤고함만이 있습니다. 주님은 죄를 범한 가인을 향해
“네가 땅에서
도망하는 자가 되고 방랑하는 자가 되리라”(창4:12) 말씀하신 이후로 가인의 후예들은 모두 도망자요, 방랑자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친히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다 내게로 오라”(마11:28) 외치십니다. 주님은 누구나 다
부르십니다. 이사야 1:18에,
[[주]께서 이르시되,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辯論)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어지리라/.](사1:18).
[오 야곱의 집이여, 너희는 오라. 우리가 [주]의 빛
안에서 걷자.](사2:5). 성경은 죄인들을 향해 발송한 초청장입니다. 속에는 온통 “오라”는 초청의 글 귀들이 가득 적혀 있습니다. 올
때는 무엇을 가지고 와야 한다는 조건이 없습니다. 언제 와야 한다는 조건도 없습니다. 어디로 와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도망자들을 찾아
내어 반드시 벌을 주어야 하는 경찰관이나 검사의 수배장이 아니라 ‘사면장’을 들고 더 이상 도피자로 살지 말고, 더 이상 방랑자로 살지 말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세상에 보낸 전도자들을 통해 이 사실을 외치게
하십니다. 주님은 책과 문서와 테잎과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을 외치십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 누구든지 와서 말씀을 듣고, 사면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하십니다.
[오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참으로 돈도 내지 말고
값도 치르지 말고 와서 포도즙과 젖을 사라.](사55:1). 아무 것도 없어도 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고 초청하십니다. 부조 돈을 가질 필요도 없고, 좋은 파티 복을 입을
필요도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아 오기만 하면 받아 주십니다.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는 그분께서 넘치도록 용서하실 것임이라.](사55:7).
주님의 초청은 인원의 제한이 없고, 시간의 제한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행한 죄악의 정도와 수를 재어
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피로 씻으시고, 용서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시고 새 사람으로 빚으십니다. 용서를 받은 죄인은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닙니다. 목적이 있는 인생은 더 이상 방랑자가 아닙니다.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고, 뜻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 속에 계실 때 그는
도피자요 방랑자에서 나그네요,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사람들은 주님께 돌아가기 전까지 도망자요,
방랑자이지 결코 나그네요, 순례자가 아닙니다. 이곳에 계신 분들은 방랑자가 아니라 순례자들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하는 이들은 주님을 만날 때
인생의 목적지가 생깁니다. 혼의 안식처가 생깁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방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방황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저 교회를 돌아다니며 마치 구도자인 양 살아갑니다. 저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진리의 성경을 잡고서도 진리의 영의 인도함을 받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도 말씀이신 주님과의 인격적 교제가 없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겪었던 방황은 가인이 겪은 방랑자요,
도망자의 삶과 매 한 가지였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도 아니고, 전도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하라는 일은 꼬박꼬박 열심히 하는데 왜 영적 메마름과 곤고함이 밀려올까 고민한 적이 없습니까? 제 자신의 경우에는 주님께 헌신하지 않고, 주님께
lordship(주권)을 내어 드리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영적 생활을 control 하려고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영적 방황을 했습니다. 주님께
순종을 하는 대신 내 자신이 주인이 되어 말씀을 통해 배운 영적 지식을 이용해 먹고, 하나님의 능력을 내 삶의 수단으로 삼고, 성령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나의 가이드로 삼으려 했을 때 저는 오랫동안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믿음, 은혜, 능력을 성공의 보조 수단으로 삼으려 했을 때 주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주님과의 교제를 잃어 버렸습니다. 주님의 종으로 나 자신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바르게 헌신할 때 비로소
방랑을 끝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만약 신앙 생활을 하다가 찾아온 방황이라면 거의 대부분은 성장을
위한 진통이요, 단련과 성숙을 위한 과정임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과의 바른 관계성을 정립하고, 순종과 헌신을 가르치기 위한 과정입니다.
다시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고향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물다가 다시 그곳을 떠나 주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갔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은 ‘가나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아
가나안에 장막을 치고 살았지만 그 곳은 타향이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그는 타국인이었고, 나그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나그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약속의 상속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소유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장차 이 땅을 통치할 왕과 제사장들이 되었습니다(계1:6,
5:10). 하지만 지금 현재 이 땅에서 우리는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받았지만 약속된 내용은 받지 못했습니다. 13절에서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란 말은 약속의 내용, 즉 땅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3,14 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멀리서 그것들을 보고 확신하며 받아들였고 또 땅에서는 자기들이 나그네요, 순례자라 고백하였으니 그런 것들을
말하는 자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내느니라.](13-14).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이 자신들이 죽고 난
후대에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당대에는 사라의 매장지 외에는 한 평의 땅도 갖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처음에 주신 약속의 말씀들을
믿었습니다. 이 구절은 믿음의 특징이 다 나와 있습니다.
첫째,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구약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믿음 안에서 죽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살다가 그 믿음을
가지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었던 믿음의 핵심은
“한 씨”였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모든 구약 성도들은 여자의 씨(창3:15)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네 씨”라고 말씀하신 그 씨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삭, 야곱, 요셉은 물론이요 모세를 통해 율법이 주어진 이스라엘 민족은 한 씨를 통해 이스라엘이 구속받고, 그 씨를 통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과 시편의 기록은 이 “씨”에 대한 기록이 전부입니다. 다윗 역시 그러했습니다. 다윗이
평생토록 굳게 믿었던 믿음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네 씨를 영원히 굳게 세우며 네 왕좌를 모든 세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셀라.](시89:4). 다윗은 자신의 아들들을 통해서 왕국이 영원할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실 ‘한 씨’를 통해 영원한 왕국이
세워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실 씨(the see-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왕국은 굳게 세워집니다. 왕조는 망하고, 나라는 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씨’를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받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 평안히 죽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의 멸망을 대언했던 대언자들을
보십시오. “이제 우리는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주신 씨에 대한 약속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목마른 자에게
물을 부어 주며 마른 땅에 큰 물들을 내고 내 영을 네 씨에게 내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사44:3). 하나님께서
“네 씨”라고 말씀하신 이 씨에 대한 믿음이 구약 성도들의 믿음입니다. 그들이 모두 믿음 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주님이 주실 한 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 주실 복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네가 오른쪽과 왼쪽으로 터져 나가며 네 씨가 이방인들을 상속하며 황폐한 도시들을
사람이 거주하는 곳이 되게 하리라.](사54:3). “이 사람들은 다 믿음 안에서 죽었으며”란 말씀은 씨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믿음으로 살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약속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만 멀리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은 당장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은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에 물리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땅에 속한 것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약속을 바라는 것은 영적인 vision입니다.
[환상이 없는 곳에서는 백성이 망하려니와](잠29:18a).
*환상=vision. 약속을 받으면 바라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실체들을 바라 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13:14-16,
[롯이 아브람을 떠나 분리된 뒤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제 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부터 북쪽과 남쪽과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네가 보는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씨에게 영원히 주리라. 내가 네 씨를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거든 네 씨도 세리라.] (창13:14~16). 아브라함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동서남북 사 방향으로 볼
수 있는 땅, 땅의 티끌이었습니다. 당장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통해 장차 주님께서 주실 것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평의 땅도 없고, 한 명의 자식도 없던 때에 주님은 눈에 보이는 모든 땅, 눈에 보이는 티끌보다 더 많은 자식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15:5,
[그분께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거든 세어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씨가 이와 같으리라, 하시니라.] (창15:5). 아브라함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지금 현재 소유한 것이 없고, 한
명의 자식이 없었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실 것과 행하실 것임을 믿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의 별, 바다의 모래, 땅의 티끌 등을 통해
‘네 씨’를 이와 같이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창22:17). 별, 바다, 티끌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이 본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소유하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고급 호화 빌라를 보면서 동시에 우리는 하늘에 있는 훨씬 더 좋은 맨션을 생각합니다(요14:1). 영화로 만들어진
슈퍼맨을 보면서 우리는 저보다 훨씬 더 나은 몸을 입게 된다는 것을 봅니다. 세계의 대도시들을 보면서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새
예루살렘을 봅니다. 올림픽이나 노벨상 수상자들을 보면서 우리가 받게될하늘의 상급들과 왕관들을 봅니다. 세상의 쓰레기 소각장을 보면서 동시에
불타는 지옥이 보입니다. 우리는 약속들을 언제든지 바라 볼 수 있습니다.
셋째, 믿음으로
약속들을 확신했습니다(persuaded).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들을 보았을 뿐 아니라 확신했습니다. 로마서4:21에
[약속하신 그것을 그분께서 또한 능히 이행하실 줄로 온전히 확신하였으니](롬4:21)라고 말합니다. 확신이란 강한 믿음, 장성한 믿음,
열매 맺은 믿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주님이 바라보게 하신 것들을 확신했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확신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65:5,
[오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땅의 모든 끝과 멀리 바다에 있는 자들의 확신이 되시는 주께서
의로운 중에 두려운 일들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시65:5),
[[주]께서 네 확신이 되시므로 네 발을 지켜
/거기/ 걸려들지 아니하게 하시리라.](잠3:26). 주님은 아브라함의 확신이 되셨고, 아브라함은 받은 약속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하는 그런 확신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이 세계를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 확실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일도 사람도 믿을 수 없습니다.
친구는 물론이고 가족도 믿을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믿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반면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고, 없는 것들을 소유한 것처럼 확신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절대 확실한(infallible) 하나님의 약속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확신을 갖고 싶다면 주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면 강한 확신이 있나니 그분의 자녀들에게는
피난처가 있으리라.](잠14:26).
넷째, 믿음으로
약속들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embrace). 여기서 ‘받아 들이다’란 말은 ‘포옹하다, 껴안다’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들은 크고 보배롭습니다. 주님의 약속은 거룩합니다. 주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런 약속들을 들을 때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약속을 불신하고 배척하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들을 껴안았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말씀을 대할 때 마치 귀한 보석들을 기쁜 마음으로 챙기듯이 그렇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가슴에 안고 교회로 들어 옵니다. 성경 책을 그렇게 품에 품고 다니듯이 우리 마음 속에 말씀을 품을 때 믿음이 크고 강해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자식을 품에 안듯이, 남편이 아내를 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들을 기꺼이 환영하고 받아 들임으로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됩니다.
다섯째, 믿음으로
자신들이 타국인이요, 나그네임을 고백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땅이 영원한 곳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곳에서
영원히 산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은 모두 지옥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롯은 소돔을 향해 그 땅에 반했지만 아브라함은 그 땅에 반하지 않았습니다.
외국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햇빛과 풍성한 먹을 것에 감탄을 하지만 우리에게 이곳은 더워서 살기에 짜증나는 더러운 도시에
불과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살아 생전 계속해서 이 말을 반복합니다. 창세기 23:4,
[나는 나그네요, 너희와 함께 머무는 자라](창23:4a).
다윗은 유대인들의 왕이었지만
[...나는 주와 함께 하는 나그네요, 내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는 자니이다.](시39:12b)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와 함께 하는 나그네”란 표현에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이 지구의 창조주이시고 온 땅의 주인이시지만 예루살렘 성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땅에 잠깐 왔다 가신 나그네이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기를,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영구한 도시가 없고 우리가
다가오는 도시를 찾나니](히13:14)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자신이 타국인이요, 나그네임을 고백하는 자들로서 살아야 합니다.
땅이나 집과 같은 부동산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자식들에게 이런 것들을 유산으로 남겨 주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약속의 상속자’로서
주님이 주신 약속을 물려 주면 됩니다.
여섯째, 믿음으로
분명히 선포했습니다(declare). 아브라함은 자신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었습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냐? 물으면 아직은 없다, 장차 올 도시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그 도시를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나라, 하나님이 세울 도시를
자식들에게, 이웃에게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들이 믿고, 바라고, 확신하며 받아 들인 것들을 분명히 선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독특한 백성들’(peculiar people)로 드러냅니다. 돈을 벌지만 그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필요에 의해 집을
구하지만 비싸고 좋은 집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하고 학교에 다니지만 교육을 숭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조만간 하늘의 왕국(heavenly kingdom)으로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한 올바른
자세입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동일한 믿음의 자세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