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받은 룻
본문: 룻기 4장 요절: 룻기 4:9,10
“보아스가 장로들과 온 백성에게 이르되,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관하여 너희가 이 날에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내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상속을 위하여 그 이름을 일으켜 세워 그 이름이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와 그의 처소의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였으니 너희가 이 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흔히 룻기를 구약의 복음서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그 이유를 확연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18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미는 보아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이 날 이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안식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보아스는 룻을 구속하는 그 순간까지 쉬지 않고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시온의 의가 광채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타는 등불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안식하지 아니할 것인즉”(사62:1)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완전히 구속하시기 전 까지 결코 안식하지 않으시고 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5:17). 저와 여러분도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우리의 육신의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주와 복음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엄히 명하기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령하기를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으니”(살후3:10).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하실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한 가지 구원에 관한 한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이미 그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요19:30)-It is finished라고 선포한 일에 대해서 저희들이 무언가를 더하려 한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어제 어떤 학생에게 복음을 전해 주면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구한말 국가에서 노비 제도를 폐지하는 법률을 제정하고 선포했는데 노비들이 모여서 “노비 해방 운동”을 벌이거나 계획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1945년 8월 16일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에서 조국을 해방하겠다고 하면 말이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구원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하실 일이시며, 주님께서 완수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시기만 하면 바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들을 하리이까? 하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교회 나오는 것,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사는 것, 주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추구하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일이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뭔가를 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4:1-12절까지 룻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룻은 자신을 스스로 구속할 수 없습니다. 일은 보아스가 하는 것이며, 보아스가 룻을 구속합니다. 룻은 잠잠히 있으면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모든 일을 자신이 직접 해치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사람이 나를 도울 수도 없는 그런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져 본 적이 없습니까? 누구에게 도와 달라고 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어떻게 해 볼 길도 안 보이고, 완전히 능력 밖의 일일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성경에는 그런 예가 허다하게 나옵니다. ‧ 파라오에게 쫓기는 이스라엘(출14:10-백성들, 14-하나님 ) ‧ 앗시리아에게 침공당한 히스키야(왕하19:11-13, 기도하는 히스키야 14-19, 응답35-37)--시46:5 예레미야 애가 3:25,26을 펴 보십시오. “주게서는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과 자신을 찾는 혼에게 선하시도다. 사람이 주의 구원을 소망하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았는데, 보라,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친족이 지나가므로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어이, 아무개여, 돌이켜서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돌이켜서 앉으매 보아스가 도시의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가 돌이켜서 앉으매”(1,2)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았다’는 말은 보아스가 그 지역에서 상당한 지위와 영향력을 가진 사람임을 알게 해 줍니다. 2:1에서 보았듯이 보아스는 ‘부유하고 강력한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성문’은 재판하는 곳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롯은 소돔성의 성문에 앉아 있었는데 소돔인들이 그에게 “이놈이 들어와 머물면서 우리의 재판관이 되려 하는도다...”(창19:9)라고 합니다. 신명기 21:19-20에 보면 부모가 징계하여도 말을 듣지 아니하면 성문으로 데려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보아스는 성문에 앉아 있다가 자기 보다 촌수가 빠른 사람이 지나가자 불러 세워서 룻의 문제를 결정지으려 했습니다. 나오미의 충고대로 룻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됩니다’(3:18a).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나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으며,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모든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일하고 있는 분이 있다면 마음 가운데 진정한 안식과 위로와 평안이 깃들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 예배를 드리고 있는 바로 이 순간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아뢰라.”(빌4:6) “너희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벧전5:7).
3-4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그 친족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땅을 팔므로 내가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거주민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알려 주려고 생각하였노라. 네가 그것을 무르려면(구속하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너 외에는 무를 자가 없으며 너 다음은 나니라, 하매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니”(3-4). 모세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지파들은 다른 지파에게 자신들의 땅을 팔거나 줄 수 없습니다. 민수기 27:8-11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으며 딸에게 주고, 딸도 없으면 형제들에게 줘야 합니다. 형제도 없는 사람이라면 자기 아버지의 형제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형제도 없으면친척 가운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주어 소유하도록 했습니다. 보아스는 이 문제를 가지고 그 친척에게 의향을 물은 것입니다. --토지 판매에 관해서는 레위기 25:13-15,23-28을 볼 것. 그 친척은 나오미의 토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즉시 “내가 무르리라”(사리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첫째, 보아스는 자기 생각을 다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지금 땅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룻에게 관심이 있었지만 먼저 땅 문제를 이야기 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생각을 모두 말하되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나중에까지 지키느니라.”(잠29:11). 토지를 살 마음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모든 일은 종료되는 것입니다. 토지를 살 마음이 있다면 그 때 룻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됩니다.
둘째, 보아스는 자기가 힘있는 자요, 가진 자란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조용하게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려 했습니다. 조금만 힘이 있고, 가진게 있어도 그것을 십분 활용하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설령 옳은 일, 선한 의도로 하는 일일지라도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잠언 기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자기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비뚤어진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잠12:8). 바울 사도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고전14:40) 영적인 일,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내세우느라 목소리를 높이고, 형제를 향해 얼굴을 붉히는 일은 올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5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는 죽은 자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에게서도 반드시 그것을 사서 그 죽은 자의 상속을 위하여 그의 이름을 일으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라”(5) 그 친척이 토지를 사겠다고 하자 룻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친척은 나오미의 땅만 사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룻과 결혼해서 죽은 형제의 후사를 세워주고 그집의 유업을 잇게하는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그 여자는 유대인도 아닌 모압 여인이었기에 그의 마음은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에 그 친족이 이르되, 나는 내 상속에 손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나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니라.” 그 친족은 나오미의 땅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이방 여인 룻을 구속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재물을 늘리는 일은 좋아했지만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은 싫어 했습니다. 손해나는 일은 결코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구절에서 깊은 영적인 원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더럽고 추한 이방 죄인들을 구속하는데 기꺼이 자신의 손해를 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엄청난 손해를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온 몸이 으스러지도록 채찍을 맞으시고 머리와 수염을 뜯기시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상하셨던지 이사야 52:14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얼굴이 누구보다도 더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으므로 많은 사람이 너로 인하여 놀랐느니라.”(사52:14)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위해 모든 손해를 당하시고 치욕과 수치와 조롱거리가 되시고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받아 놓고도 주를 위해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성경 공부를 하는 것까지는 좋아하지만 “이런 저런 일도 해야 하네”라고 가르쳐 주면 즉시 이 친족과 같은 태도를 취합니다. “나는 못하겠네” 주와 복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 조그마한 희생을 요구해도 ‘나는 못하겠다’를 연발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 가까운 친족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축복에만 관심이 있고 주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분들은 모두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6절을 다시 한번 잘 살펴 보십시오. 가까운 친족은 계속해서 ‘나’를 연발합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남에게 선을 베풀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항상 더 큰 영적인 축복을 잃어 버리기 마련입니다. 가까운 친족이 하기 싫어하는 이 일을 보아스는 기꺼이 하였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보아스는 가까운 친족을 대신하여 나오미의 땅과 룻을 사기로 증인들 앞에서 확증했습니다. 신을 벗어 자기 이웃에게 주는 습관은 예전 이스라엘의 관습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등기 권리증과 같은 것입니다.
9,10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장로들과 온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bought) 일에 관하여 너희가 이 날 증인이 되었고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purchased) 내 아내로 취하고 그 죽은 자의 상속을 위하여 그 이름을 세워 그 이름이 그의 형제들 가운데서와 그의 처소의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였으니 너희가 이 날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매” 9절에서 보아스는 모든 것 즉 소유를 샀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룻을 샀다고 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말로 「산, 사서」라고 되어 있는 이 두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아스처럼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 자신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 마13:45,46- “또 하늘의 왕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으니 그가 매우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bought) 여기서 진주는 교회이며 상인은 보아스가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진주를 주웠다고 하지 않고 값을 치르고 사셨습니다. 진주는 보석 중에 유일하게 유기체입니다.
‧ 고전 6:20- “이는 주께서 값을 치르고 너희를 사셨음이라. 그런즉 하나님의 것인 너희 몸과 너희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룻은 가진 것이 없는 여자였고 팔 것도 없는 여자였습니다. 나오미는 남편을 따라 모압으로 갈 때 땅을 저당잡혔기 때문에 그녀의 소유가 없었습니다. 보아스는 그 저당잡힌 땅을 되사주고 그에 속한 모든 것을 샀던 것입니다. 주님도 우리가 가진 것이 없고 오히려 이 세상에 잔뜩 빚만 지고 있었을 때, 우리를 값주고 사셨습니다. 이 값은 은과 금같은 재물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피였습니다.
‧ 벧후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거짓 대언자들이 있었던 것같이 너희 가운데도 거짓 교사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영벌 받을 이단 교리들을 몰래 들여와 심지어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기까지 하고 자기들 위에 신속한 파멸을 가져오는 자들이라.” 이 말씀에 따르면 거짓 교사들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 가운데 있으며,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교회마다 이런 이단 교리들이 몰래 스며 들어 있습니다.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나 천년 왕국은 실제하는 왕국이 아니라 영적인 왕국이라는 등의 교리는 모두 이단 교리들입니다. 주의 재림이 가까우니 일할 필요가 없다거나 직장을 잡기 위해 공부하거나 유학 준비를 하거나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금하는 일 따위는 모두 이단 교리입니다. 주님이 내일 오신다고 해도 30-40년 뒤를 계획하고 공부하고 일해야 합니다. 항상 매 순간 신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샀다고 할 때 샀다는 말은 영어로 purchased입니다. purchase란 단어는 ‘희생을 치르고 사다’란 뜻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실 때 돈과 재물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주고 사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댓가로 내 주셨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 20:28에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자신과 모든 양떼에게 주의를 기울이라. 성령님께서 너희를 그들의 감독자로 삼으사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먹이게 하셨느니라.”(행20:28) 이 피는 무죄한 피일 뿐만 아니라(마27:4) 보배로운 피(벧전1:18,19)였습니다. 이 피는 사람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피였습니다. 이 피는 우리를 구속하시고 구원하신 피였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들로부터 전통으로 물려받은 헛된 행실에서 너희가 구속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썩을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의 피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바울은 에베소서 1:14에서 우리를 “값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신 이상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소유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룻이 보아스의 계약을 깨뜨릴 수 없듯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약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룻은 이제 보아스가 자신을 소유한 소유주요 주인이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보아스는 부유하고 강력한 자였지만 모압 여인 룻을 아내로 삼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볼품없는 이방 여인, 일찍 남편을 잃고 사는 과부에 불과한 룻을 구속한 보아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보아스는 룻이 없다고 해서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굳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친족이었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방 여인으로서 소망없는 과부에 불과한 룻이 보아스의 아내가 됨으로써 보아스의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보아스의 아내로 일컬음을 받습니다. 룻은 보아스로 인해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룻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애씀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보아스가 준 일방적인 은혜의 결과였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11절을 보면 장로들 뿐만 아니라 성문에 있는 온 백성들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룻을 위해 기도하고 보아스를 위해 기도하고 그 가문을 위해 기도했습니다.(11-12)
룻기에서 보아스는 어떤 존재입니까? 보아스는 “부유하고 강하신 주, 추수의 주, 필요를 공급하시는 주, 유업을 주시는 주, 안식을 주시는 주, 구속의 주, 신랑되신 주”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부자인 보아스가 관심을 가진 것은 오직 룻의 안식과 유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자신을 위해서 일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모든 풍성하심을 따라 저희를 구속하시는 것을 잘 예표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유한 신랑, 여러분을 사랑하는 신랑되신 주를 두고 불안과 염려로 근심하고 부족함으로 호소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겐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신랑되신 사랑의 주 하나님이 계십니다.
룻은 결혼을 하지만 자신의 수중에는 결혼식을 올릴만한 지침금이나 혼수품 마련할 돈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몸만 가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룻이 뭔가를 좀 모아서 가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유하고 강력한’ 보아스와 걸맞는 결혼을 하려고 한다면 영원히 불가능할 것입니다. 주님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으십니다. 룻이 바로 저와 여러분을 예표하는 여인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룻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 아들이 바로 메시야의 족보에 등장하는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날개 아래로 의지하러 온 이방 여인(룻2:12)에게 충분히 보상해 주셨습니다. “보라, 자식들은 주의 유산이요, 태의 열매는 그분의 보상이로다.”(시127:3) -주의 축복을 거부하는 세대/신세대
14절을 보십시오.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주를 찬송할지로다. 그분께서 이 날 네게 친족이 없게 내버려 두지 아니하셨도다. 그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결혼을 할 때는 기도가 있었으며 자식을 낳을 때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떠나지 말아야 했던 땅을 떠나 남편과 자식 둘을 다 잃어 버린 채 돌아 온 나오미가 여인들에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파산하고 집안이 몰락한 가운데 이방 여인의 며느리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 왔을 때 그녀의 탄식을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1:20)고 울부짖던 그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축복을 받는 장면은 마치 happy ending으로 끝나는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손자 아이를 품에 안고 그를 키우는 기쁨 가운데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고 있습니다.(16)
15절을 보십시오. “이 아이는 네게 생명의 회복자가 되며 네 노년에 너를 봉양할 자가 되리니 곧 너를 사랑하며 네게 일곱 아들보다 더 나은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인생의 질고와 슬픔으로 지칠대로 지친 노인에 불과한 나오미에게 손자는 생의 기쁨이며 젊음을 돌려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룻이 얼마나 훌륭한 며느리로 평가 받는가를 보십시오. 일곱 아들보다 나은 며느리라고 합니다. 사랑의 유대 관계는 혈연의 유대보다 훨씬 강한 것입니다. 자식보다 나은 며느리가 있고 형제보다 나은 이웃이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이 먼(멀리 있는) 형제보다 나음이니라.”(잠27:10)
마태복음 1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보면 보아스와 룻이 다 등장합니다. 주님께서는 보아스와 룻의 이름을 얼마나 높이셨는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과부인 모압 여인을 아내로 취하는 것이 가문의 수치가 될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메시야 계보에 그를 포함시키심으로 이스라엘의 어떤 가문보다 더 영예롭게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