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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룻의 안식  

본문: 룻기 3장 요절: 룻기3:3,18

저는 지금까지 여러분의 삶에 대해서 책망하고 바로잡는 일에 매우 소홀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교리와 훈육에 온 신경을 썼지만 성경은 분명히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의 순설로 말씀합니다. 이후로 교리를 바탕으로 책망과 바로 잡음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꼴 같지 않게 여기는 것이 바로 책망과 바로잡음이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전도서 10:6,7에 이르기를 “어리석은 짓이 크게 존경을 받으며 부자들이 낮은 자리에 앉아 있도다. 내가 보았노니 종들은 말 위에 타고 통치자들은 종들처럼 땅 위를 걸어 다니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하는 설교는 이 교회 안에 있는 여러분이 들으라고 하는 설교이지 이 교회 밖의 누구에게 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을 생각하거나 자기에게 주는 말로 받지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경우가 없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성경 어디를 펴더라도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 하는 이 4가지를 얻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 3주째 룻기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교리를 배우고, 책망을 듣고, 바로 잡혀야 하며, 의로 훈육을 받아야 합니다(딤후3:16). 말씀을 온 마음을 다해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말씀에 청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학원 수업 시간이나 T.V 연속극 보는 시간보다 더 어지럽고 산만하다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고 있음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모두 다 같이 1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녀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해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네가 잘되게 하여야 하지 아니하겠느냐?”(1) 이 말씀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재혼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 관습에 대해 조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재혼은 그냥 시집가서 그 사람과 살아 버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룻의 재혼은 그런 결혼이 아닙니다. 신명기 25:5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형제가 함께 거하는데 그 중 한 명이 죽고 아이가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남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녀에게로 들어가서 그녀를 아내로 취해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녀에게 행할 것이요”(신25:5). 나오미는 아들 둘이 모두 죽어 버렸기 때문에 룻과 결혼할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족 가운데 한 명과 결혼해서 자기 남편(기룐)의 씨를 이어야 했습니다. 혈족 개념이 강한 유대 사회에서는 이것이 보편적인 것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예수님을 시험하는 사두개인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시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2:24-27에서 일곱 형제에게 시집 간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부활하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마22:28)라고 시험하였습니다. 룻의 어머니 나오미는 바로 후사와 가계를 위해서 나오미의 결혼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성경적인 결혼과 재혼에 대해서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창2:1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독신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과는 한참 동떨어진 자기만의 생각이요, 세상의 생각입니다. 독신을 주창하는 어떤 종교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종교입니다. 여자를 만드신 목적이 남자를 돕는 것인데 귀찮다고 결혼을 포기하고 혼자 살겠다는 것은 반성경적인 태도입니다. 아무리 신학을 배우고 주를 외쳐도 그런 사고 방식을 소유하고 있는 한 주님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7:32-35) 말씀을 잘못 읽고 마음대로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은 결혼하라는 바울의 권면이지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경우 재혼은 자유입니다. 단 그리스도인과만 결혼해야 합니다(고전7:39).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외치면서도 결혼만큼은 자기들 뜻대로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어머니는 자기 딸을 불신자에게 내어 주며 “꼭 믿게나” 하고 맙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살면서 “믿게 하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런 태도를 지니고서 신앙을 운운하는 것을 볼 때 이미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목사들도 감히 결혼 문제만큼은 정확하게 지적하고 책망하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사생활 침해나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그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 전해 주어야 하며, 책망해야 하고 바로 잡아야 합니다. 성도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을 못할 때 이미 그 교회는 죽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룻은 자기 안일이나 평강이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재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10절에서 보아스가 증언하기를 “네가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젊은 남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라고 합니다. 룻은 젊은 남자를 따른 것이 아니라 가업을 이을 수 있는 성경이 말하는 그런 남자가 필요했고 그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다시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을 수박겉핡기 식으로 읽으며 횟수만 채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내가 몇 번 읽었다” 또는 “내가 몇 권의 책을 읽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 대충 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깊이 회개하십시오. 자기 집 토지 문서나 전자 제품의 사용 설명서도 그렇게 대충 읽지는 않을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충 보고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성 모독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네가 잘되게 하여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나오미는 룻의 안식을 구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룻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오미 자신이 아니라 보아스란 사람입니다.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까지 인도해 주고 가르쳐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이 후에 행해질 모든 일은 “보아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보아스에 의해서만 행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저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저희들은 나오미처럼 다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이후의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것입니다. 또 저희들이 안식을 찾는다해도 결국은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그 피의 사역으로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현재 안식이 없고 불안과 초조와 염려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까? 급하게 일이 진행되기를 바라다가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직접 일을 찾아 하려고 덤벼들지 않습니까?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자기에게 나아 올 때 누구에게나 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누구라도 주님께 나아오면 “쉼을 주겠노라” 약속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쉼을 주리라...”(마11:28-29). 앞으로 살아 갈 길은 막막하고 벌어 논 돈은 없고, 그렇다고 배운 것도 없고, 능력도 없고, 뒤를 봐 줄 사람도 없고, 들려 오는 소식은 100만 실업자 시대니 제 2의 IMF니 온통 음울한 소식 뿐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안식입니다. 삶에 시달림을 받고 걱정, 근심에 쌓인 사람, 양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사람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평안한 쉼입니다. 룻은 시아버지가 죽고 시아주버니가 죽고, 남편이 죽는 처절한 삶의 고통 가운데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우며 살고 있습니다.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룻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안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예화) 소 두 마리가 끄는 멍에---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멍에를 메고 있습니까?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와 함께하던 소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마당에서 보리를 까부르리라. 그런즉 너는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하기까지 그에게 알리지 말고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아 두었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을 드러내고 거기 누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그가 네게 고하리라, 하니”(2-4) 보리 추수 시기는 4월 말에서 5월 초입니다. 보리를 까부는 것을 볼 때 추수는 끝나고 이제 탈곡을 하고 있습니다. 룻은 모압 여인이기 때문에 유대의 법을 거의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친족 구속에 대해 룻에게 이야기 했고 (레25:25-28,신25:5-10) 룻에게 보아스를 만나서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그런즉 너는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으라”(3)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성도인 저와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깨끗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 약속들을 가졌은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깨끗케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 “이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깨끗하게 되었으니”(요15:3) ⇒ “이는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시고 정결하게 하시며”(엡5:26)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성령 충만을 의미합니다. 저희들은 성령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할 사실은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깨끗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아무에게나 선뜻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죄들에 가담하지 말며 네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라. (딤전5:22) 제가 이미 수십번 말씀드린 것같이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요한일서 2:27에서 여러분은 이 기름부음이 어디서 오며 어디에 거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가르치며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요16:13). 말씀의 물로 씻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단장한 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서 보아스를 맞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옷에 대해서 말해 줍니다. ⇒ 롬13:14--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계19:7.8-- “...또 그녀에게 깨끗하고 희고 고운 아마포 옷을 차려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고운 아마포는 성도들의 의(義)로다, 하더니” 나오미는 유대 땅의 관습과 수확을 거두어 들이는 날 들판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룻에게 상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4절의 행위는 강력한 청혼입니다.

5-6절 말씀을 보십시오.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을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그녀가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자기 시어머니가 명한 대로 다 하니라.” 저는 5절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조언을 듣고 그 조언을 100% 따르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이것 저것 하겠노라고 약속을 하지만 좀처럼 지키지 않습니다. 조언을 찾는 사람은 많지만 막상 조언을 해 주면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 속에 원하는 바와 조언이 같으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하지만 그 조언이 자기 생각과 어긋나면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도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설교가 나오면 은혜받았다느니, 오늘 설교 참 좋았다고 하지만 자기를 찌르는 설교나 훈계를 하면 짜증을 내거나 성질을 부립니다. 저는 저희 교회에서도 그런 꼴을 몇 번 보았습니다. “교만으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나 충고를 잘 받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잠13:10) “모든 목적한 바가 의논함으로 굳게 세워지나니 좋은 충고를 가지고 전쟁을 할지니라.(잠28:18) 저는 오랫동안 강사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또 대학 2학년때부터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10년 넘도록 사람을 가르치다 보니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다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과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의 특징이 똑 같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가르쳐 주는대로 절대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도 내가 가르치는 대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망둥이가 없기를 바랍니다. 순종과 복종은 영적 성장의 제 1단계입니다. 실패한 인간의 특징은 모두 순종을 배우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서로 복종하라.”(엡5:21) 명령했습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명령한대로 다 행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과 저의 행동을 누가 기록한다면 무엇이라고 기록되었겠습니까? “듣고는 행하지 않더라.”“말만 앞세울 뿐 행하지 않더라.” “듣고는 열받아 하더라.”등등...

7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울 때에 나가서 곡식더미 끝에 누우매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을 드러내고 누웠더라.” 낮 동안 열심히 일하고 먹는 저녁은 항상 즐겁습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한 후에 낮에 열심히 일을 하고 저녁에 식사를 하고 불을 끄고 천정을 바라보며 자는 기분은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보아스는 저녁을 먹고 난 후 즐거운 마음으로 곡식더미 끝에 누웠습니다. 유대인들은 들에서 수확을 하는 날이면 곡식을 지키기 위해 들에서 잠을 잤습니다. 룻은 모두 잠든 후에 조용히 그의 발을 드러내고 누웠습니다. 이 장면을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달이 밝은 밤이었는지 어두운 밤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들에서 자고 있는 보아스 곁으로 룻이 다가와서 그의 발꿈치를 덮고 있는 옷을 들추었습니다. 한참 잠을 자던 보아스는 추웠을 수도 있고 느낌이 이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8절은 말하기를 “한밤중에 그 사람이 두려워서 몸을 돌이킨즉, 보라,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웠으므로” 보아스는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서 그는 도둑인지 아닌지, 서있는지 누워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금방 구분해 내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놀람이 베어 있습니다. “그가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그녀가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skirt)으로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가까운 친족임이니이다, 하매” 이 구절을 읽으면서 수많은 목사들이 얼굴을 붉히면서 어떻게 설교할까 망설입니다. 그들은 ‘옷자락’이란 단어를 ‘이불’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항상 본문이 말하는 것 이상으로 상상이 뻗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질문 가운데 90% 이상은 우리 말을 제대로 읽지 못해서 생기는 질문입니다. 앞 뒤 구절을 차분히 다시 읽어보면 저절로 답이 나오는 구절들을 이상하게 읽습니다. 옷자락이란 허리 아래로 내려오는 외투로 비나 모래 바람을 피하기 위해, 또는 여행 중에 이불 대용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옷자락을 덮는다는 것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옷자락으로 여종을 덮으소서”란 말은 자신의 주인이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16:8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이제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가며 너를 보니,보라, 네 때가 사랑을 할 때라. 이에 내가 내 옷자락(skirt)을 네 위에 펴서 네 벌거벗은 것을 덮어주고 참으로 내가 네게 맹세하고 너와 함께 언약 속으로 들어가매 네가 내것이 되었느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16:8) 보아스는 룻이 다른 젊은 남자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단지 옳은 행위를 하고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11절에서 룻은 덕(virtue)있는 여인이란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덕(德)이란 그리스도인이 믿음 다음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외에도 너희가 열심을 다하여 너희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1:5) 오늘날 수많은 킹제임스 신자들이 덕을 빼버리고 “믿음에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덕을 빼버린 채 믿음 위에 지식을 쌓기 위해 책을 사보고, 신학원을 다니고, 성경을 읽는다면 축에 살대를 박지않고 바퀴를 만드는 꼴입니다. 그것이 달릴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그럴듯하게 만들어도 달리지 못합니다. 아무런 무게도 감당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칭찬하는 여인 상(像)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은혜로운 여인- 잠 11:16 ⇒ 덕스런 여인- 잠 12:4, 잠 31:10, 잠 31:29 - ⇒ 아름다운 여자- 잠11:22 ⇒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 렘6:2 ⇒ 지혜로운 여인- 삼하14:2, 20:16 ⇒ 주를 두려워 하는 여인- 잠31:30 ⇒ 거룩한 여인- 벧전3:5

반면 성경은 이와반대로 『악한 여인, 게으른 여인, 수치를 끼치는 여인, 어리석은 여인, 음란한 여인, 향락 속에 사는 여인』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룻은 섹시한 여자라거나 살림 잘하는 여자가 아니라 덕있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저희 그리스도인 자매들은 룻과 같이 믿음에 덕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하여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나니”-벧후 1:3

12-14절을 보십시오. 룻에겐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철저히 말씀에 따라 행동하며 룻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생각이 불순하고 성경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13,14절을 읽으면서 룻과 보아스의 러브스토리를 생각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룻은 ‘덕있는 여인’(virtuous woman)이었고 보아스는 주의 율법을 준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요셉이 마리아에게 행했던 것처럼 룻을 위해 일어난 일들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보아스는 품위를 지키며 질서있게 일을 해 나가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것(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고전14:40)

룻은 새벽까지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전에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침 6:00부터 저녁 6:00까지를 낮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 시각은 아침 6:00 전이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을 그냥 보내지 않고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서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본문 말씀을 저희에게 적용해 보면 이렇습니다. 룻의 행동은 신자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모습을 예표합니다. 저희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 교제를 하고 싶다면 우리는 그분의 피로 씻겨져야 하며, 말씀의 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나러 간 것은 낮이 아닌 밤이었고 보아스와 교제한 시각도 밤이었습니다. 지금 교회 시대는 밤입니다. 우리는 아침이 될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발 아래서 그분과 교제하며 우리의 할 일을 해야 합니다. 밤 동안 우리가 거할 적절한 위치는 그분의 발치입니다. 결혼을 약속받았지만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로써 종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주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영적 양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절대 빈 손으로 돌려 보내는 법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주님과 깊은 친교를 가졌다면 주일에 성도들과 나눌 수 있는 영적 양식을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교제합니다. 주일에 성도들과 깊은 교제를 나눈 후에 교회를 나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보아스가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보리를 여섯 번이나 되어 주었듯이 주님은 여러분의 손에 설교와 간증과 성도의 교제를 통해 영적 양식을 쥐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16절을 보면 룻이 돌아오자마자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았습니다(16). 룻은 지금 흥분한 상태입니다. 술을 먹고 취해도 이정도 흥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상태가 바로 지금 룻과 같은 상태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녀는 보아스의 친절과 자신에게 해 준 일들을 말했숩니다. 아마 종일토록 이야기하래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일이 어떻게 되는지 네가 알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이 날 이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안식하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이제부터 룻이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은 보아스가 할 것이요, 보아스가 일을마칠 때까지 룻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야 합니다. 아담 이후로 인류는 죄와 사망으로부터 혼을 구속해 줄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정하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온 인류의 혼을 구속하시기 위해 갈보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외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다 이루었다”는 외침을 듣고 구원받았습니다. 반면 지금 저희들은 십자가 상에서가 아닌 하늘의 보좌에서 “다 이루었다”(계16:17)는 외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결코 안식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성도들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 열매맺기 힘든 것이 있다면 바로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내는 시간을 요구합니다. 특히 성격급한 한국인은 뭐든지 단숨에 해치우고 단숨에 결과를 보고 싶어합니다.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저는 매일 겪고 있습니다. 뭐든지 “빨리, 빨리”입니다. 느린 것을 싫어합니다. 다같이 예레미야 애가 3:25,26을 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게서는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과 자신을 찾는 혼에게 선하시도다. 사람이 주의 구원을 소망하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애33: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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