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입은 룻
본문: 룻기 2장 요절: 룻기 2:10,12 [이에 룻이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타국인이온데 어찌하여 당신의 눈에 은혜를 입게 하시며 나를 인정하시나이까?” 하니...]
I. 보아스의 밭으로 간 룻(2:1-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가운데 부유하고 강력한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보아스더라.”(1) 나오미의 친족 가운데는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부자였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보아스란 이름은 “그 안에 힘이 있다”라는 뜻이며, 율법에 유력한 자란 뜻입니다. 신약 성경은 부자를 그렇게 좋게 평가하지 않습니다만 구약 성경에는 부자란 곧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부를 얻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얻는 법입니다. 술과 여자를 팔아서 돈을 버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을 시키고 삯을 주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약5:4). 발라암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다고 합니다(벧후2:15). 사도행전 19:25에 보면 “다이아나를 위한 은 성물함”을 만들어 이득을 취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보다 더 사악하게 돈을 버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킴으로써 이득을 취하는 것”입니다.(고후2:17) 복권이나 경마, 카지노는 모두 땀 흘리지 않고 돈을 벌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입니다. 주식(株式) 투자도 그런 경우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교회를 일컬어 주식회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의가 없는 부는 의가 있는 적은 소득보다 못합니다. 모두 잠언16:8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적게 가지고도 의가 있는 것이 많은 소득을 가지고도 의가 없는 것보다 나으니라.” 보아스는 그런 부류의 부자가 아니라 의를 지닌 부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셨습니다. 악을 행하고, 불의를 행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말하지만 두 손으로 땀흘려 일할 때 주님은 먹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I.M.F나 대우 부도 사태와 같은 외적인 문제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오직 너는 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분께서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8:18) 하셨고, “또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부와 재물을 주사 그것을 먹고 자기의 소유를 취하며 자기의 수고한 것을 즐거워 할 권능을 주셨나니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로다.”(전5:19)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열심히 일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것이 많든 적든 그 소득에 만족하십시오. 일할 수 있는 환경과 능력과 그런 여건을 주신 것에 감사하십시오. 바울 사도는 천막을 만들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화) 30만원짜리 중장비 기사, 대학 교수에서 페인트 공으로...삼미 부회장에서 롯데 호텔(서 상록씨)에서 써빙을 합니다. 청주 지검 검사에서 병원 영안실 시체 닦이(김이삭 선교사), 리어카 장수, 중견 기업체 직원에서 목욕탕 떼밀이... 자신이 하는 일이 불의(不義)한 직종이 아니라면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오. 불법이 아니라면 부끄러워 하지 마십시오. 외판원이 부끄럽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가 죽은 적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저는 저희 교회 성도들은 아무 일에나 맡은 바 최선을 다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장사를 하든, 인쇄를 하든, 화장품을 팔든, 설거지를 하든...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며 살되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룻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집안이 몰락해서 시어머니를 따라 왔지만 먹고 살 길이 없었습니다. 날품팔이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녀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누가 밥을 먹여 주겠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밭에 가도록 허락하소서. 내가 누구의 눈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녀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은 오늘날 한국의 여자들처럼 공주병이나 왕비병에 걸려 누가 먹여다 주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스스로 일을 찾아 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집은 복이 넘치고 가세가 살아 납니다. 잠언 31장의 덕있는 여인이 바로 룻과 같은 여인입니다. 잠언31:10에 “누가 덕스런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녀의 값은 루비보다 더 나가느니라.” 했습니다. 룻이 바로 그런 여인입니다. “그녀는 양털과 아마를 구하여 기꺼이 자기 손으로 일하며”(잠31:13)- 성경은 분명히 ‘자기 손으로 일하며’ 라고 말합니다. 부자집 외동딸처럼 모든 일을 남의 손으로만 처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 자매들이 이 점에서 너무 훌륭하다 못해 남자들이 쪼다같습니다. 저희 교회 자매들 가운데 일하지 않는 자매들이 없습니다. 모두 죽도록 일합니다. 형제들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7-11을 보십시오. “함께 읽을 것” 일하지 않는 자매들은 모여서 수군대며, 남의 일에 간섭하며 분열만 일삼습니다. 룻은 자기 손으로 일해서 어머니를 공양해야 했습니다. 팔자가 사납고 박복한 여자라고 생각되는 자매들이라 해도 룻을 생각하면 복있는 여자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여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가? 자신의 처지와 환경에 불평이 없고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룻과 같은 처지에서 감사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달리 봅니다. “모든 일을 행하되 불평이나 시비가 없게 할지니...”(빌2:14). 룻은 은혜를 찾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의지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잘못 인도되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룻이 가서 곡식 베는 자들을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인 보아스에게 속한 밭의 일부를 만나니라.” 룻은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마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바로 남의 추수 밭에서 이삭을 줍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타국인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이삭을 줍게 해 두셨습니다(출22:21,22, 레19:10). 룻이 나가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방에 처 박혀서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가서 이삭을 주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서 나가서 교회로 와야 합니다. 교회에서 나가서 전도하러 가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날마다 나가야 합니다(히4:16). “너희는 가서...”(마28:19)라고 말씀하셨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행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편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모두 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요, 인도하심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말하기를 ‘‘성경에서 사람들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말씀은 요한복음 3:16이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말씀은 로마서 8:28이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룻이 이삭을 줍는데 그 밭이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이게 우연인 것 같습니까? 사람 편에서는 모든 것이 우연입니다. 이 우연을 섭리로 바꾸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다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이란 사실을 믿으신다면 불평 불만이 있을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이 여러분의 주요 그리스도란 사실을 인식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나를 위해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나를 황무지를 버려 두듯이, 거지를 버려 두듯이, 이방인을 대하듯이 대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땀을 흘린 것도 귀중하게 생각하고, 피를 흘려 얻은 것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가장 값비싼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 저와 여러분을 사셨는데 당연히 눈동자처럼 지키고 돌보지 않겠습니까?
모압 여인이요, 몰락한 집안의 남편 없는 과부로써 괄시받고 무시받을 수 밖에 없는 이 여인이 먹고 살기위해 이삭을 주우러 왔을 때,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룻의 인품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룻은 겸손의 본입니다. ② 룻은 근면의 본입니다. ③ 룻은 효도의 본입니다. ④ 룻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보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와서 곡식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주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주께서 당신에게 복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4) 보아스는 훌륭한 주인의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나발이나 어리석은 부자와는 격이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축복하였고 그들 또한 주인을 축복했습니다. 그는 졸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구절을 오늘날 저희에게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밭’은 일반적으로 세상을 가리킵니다. 일꾼은 저희들입니다.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일꾼들은 마땅히 밭에서 일해야 합니다. 보아스가 왔을 때 일꾼들은 일을 하고 있었고 주인을 부끄럼없이 맞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인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희들도 주님이 오실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마25:21,23)란 칭찬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곡식베는 자들을 감독하는 자기 종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그 때 보아스는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는 누구의 소녀냐?” - 한 마디로 누구의 마누라냐?란 말입니다. 이 소녀란 말은 girl이 아니라 damsel로써 성경에는 51번이 나옵니다. 이 말은 나이 어린 여자, 젊은 여자를 나타낼 때 쓰는 말로써 룻이 매우 젊은 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곡식베는 자들을 감독하는 종이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이온데 그녀가 말하기를, 청하노니 나로 하여금 곡식 베는 자들을 따라가며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것 외에 지금까지 계속 줍는 중이니이다, 하매”(6,7)
여기서 룻의 객관적인 인적 사항은 첫째, 이방인이었으며 둘째, 보아스의 집안과 관계가 있는 집안 사람이었으며 셋째, 엘리멜렉의 아내인 나오미를 따라 왔다는 것입니다. 룻은 어머니를 따라 나설 때 이미 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혈연 개념으로 묶여진 혈족 공동체가 아니라 종교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개종을 하면 유대인이 됩니다. 허락을 받고서야 이삭을 주운 것을 볼 때 룻은 매우 예의바른 여인이었습니다. 룻은 매우 부지런했습니다. 낮에 햇볕이 뜨거울 때 잠깐 쉬었을 뿐 아침부터 그때까지 줄곧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 구절을 교회사로 적용하자면 많은 수확을 얻었던 필라델피아 교회 시대라기 보다는 이삭을 줍는 라오디케아 교회 시대의 모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는 룻과 같이 아침부터 나가서 부지런히 이삭을 주워야 합니다.
II. 보아스의 친절(8-17)
보아스는 룻에게 파격적인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은혜를 구하러 온 이방 여인을 대하는 보아스의 태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8절에서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다른 밭에 가면 자신이 보호해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밭에 가봐야 이곳 보다 좋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보아스는 청년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못하게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이 길어 온 물을 마시게 하고 14절에서는 식사 때에 빵을 먹게 했으며, 식초를 찍어 먹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볶은 곡식을 주고 배 불리 먹고도 룻이 남겼을 정도로 풍성히 주었습니다.
보아스가 이렇게 룻을 높이 평가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룻이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절하며 물었습니다. “나는 타국인이온데 어찌하여 당신의 눈에 은혜를 입게 하시며 나를 인정하시나이까?하니”(10) 룻의 이 말은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겸손이 마음 가운데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나는 타국인이온데...” 정통 유대인들에게 타국인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님은 수로페니키아 여인에게 ‘개’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바나바는 갈라디아 교인들과 식사를 하는 것을 형제들에게 보일까봐 피했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에게 “내 딸아...”(7)라고 불러 주었습니다. 이는 친족 관계를 그대로 인정해 주는 말입니다. 보아스가 모압 여인인 룻을 자신의 친족이라고 인정하고 부끄러워 하지 않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저와 여러분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룻과 같이 모두 타국인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타국인을 모국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2:13)
룻은 보아스의 은혜와 친절에 더욱 겸손해 합니다. “땅에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타국인이온데 어찌하여...” 여기서 저는 잠시 겸손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주를 두려워 하는 것이 지혜의 훈계이니 명예 앞에 겸손이 있느니라.”-잠언15:33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14:11 “그러므로 하나님의 강한 손 밑에서 겸손하라. 정하신 때가 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
저는 우리 교회를 보고 있으면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모래 위의 성(城)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이 교회의 기둥이지...” 형제들끼리 판단하는데, “왜 저 형제는 매일 교회에 늦는건가?” “왜 저 형제는 일도 안하고 매일 노는건가?” “왜 저 형제는 점심만 먹으면 놀다가 가는가?” 서로 판단합니다. 이는 모두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영적 여정을 따라 가 보겠습니다. “나는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서투를지 모르나 지식에 그렇지 아니하니...”(고후11:5,6) 라고 당당히 밝힌 사도 바울이 실상은 “이는 내가 사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임이라....”(고전15:9) 이라 고백했고 후에 “모든 성도(사도가 아닌 성도) 가운데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3:8)라고 했습니다. 인생의 말년에 쓴 디모데전서 1:15에는 “죄인들 중에서 내가 우두머리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알아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을 더 정확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고깃 덩어리에 불과한 짐승같은 저희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알게 하시고 믿도록 도우시고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룻과 같은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정신 나간 사람일 것입니다. 여기 앉아 계신 분 중에 피상적으로 교회만 왔다 갔다 할 뿐 “내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제게 은혜를 베푸시나이까?” 하며 자신의 죄악됨을 고백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구원받았다 하나 깊은 은혜의 세계가 아닌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깊이 생각하시오며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 오시나이까?(시8:4) 고백했습니다. 살인자 바라바를 연호하며 자기를 못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그들을 향해 아무 감정이 일어 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온 몸을 채찍으로 휘 갈기고 머리에 찔레 가시로 엮은 관을 짓 눌러 씌운 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게 만드는 그 사람들, 연민이나 동정 대신 야유와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손가락질하던 그 사람들 가운데 저와 여러분도 똑 같이 서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가운데 예수대신 바라바를 외치며 지금도 그분을 모독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바로 그런 무지와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당신을 주님은 깊이 생각하시며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보아스가 룻에게 그토록 은혜를 베풀었던 것은 룻이 고향을 떠나 하나님을 찾았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그녀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뒤에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가 고국을 떠나서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을 내가 분명히 보았느니라. 주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해 주시기를 원하며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그 날개 아래 의지하러 온 네게 충분히 보상해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니“(12).
보아스는 룻이 보아스를 온전히 알기도 전에 룻과 룻이 한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다니엘도 예수님이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요1:45-49). 여러분도 마찬 가지입니다. 지금 내 속을 알 사람이 누가 있을까? 고민하지만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룻을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인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 자체가 불법입니다. 그러므로 룻은 남편이 살아있다 해도 그다지 떳떳하거나 당당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마저 죽어 버렸는데 보아스란 한 사람에 의해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히11:6). 룻은 자신의 수고와 행위에 대해 하나님의 보상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의 행위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사랑의 수고 곧 너희가 지금까지 성도들을 섬기며 지금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지 아니하심이라.”(히6:10) 모압 여인에게 신을 섬기는 일이란 그저 울고 불고 뭘 갖다 바치고, 신의 진노와 벌을 피하기 위해 애쓰는 종교요 마귀에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룻이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에 대해 듣고 그분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기로 한 것은 그녀가 일생동안 내릴 수 있는 결정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연애하고 중매할 때 남편 잘못 골라 고생하고, 그 남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라곤 머리도 나쁘면서 성질도 좋지 않고, 직장 잘못 얻고, 내리는 선택마다 꽝을 뽑는 사람이라해도 예수를 나의 하나님으로 삼기로 결정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성공한 것입니다. 룻은 인생에서 가장 암흑기일 때, 앞을 볼 수 없는 어려움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룻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그에 대한 결과나 축복이나 보상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주님은 무한대로 축복하셨습니다. 시편91:4-6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깃털로 너를 덮으시리니 네가 그분의 날개 밑에서 그분을 신뢰하리로다. 그분의 진리는 너의 큰 방패와 작은 방패가 되시나니 네가 밤에 임하는 두려움과 낮에 날아 다는 화살과 어둠 속에서 퍼지는 역병과 한낮에 황폐하게 하는 멸망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여러분이 어렵다, 힘들다 한 숨을 내쉬어도 말씀에 따르면 잠잠히 주의 날개 아래 쉬시면 다 해결될 문제입니다. “이는 주께서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그런즉 내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기뻐하리이다.”(시63:7)
13절을 보십시오. 룻은 더욱 겸손합니다.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의 눈 앞에서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여종들 가운데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나를 위로하시고 당신의 여종에 친절히 말씀하셨나이다, 하니라.” 룻은 자신이 남들보다 낫지 못하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특별한 대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단지 은혜를 원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합니다. 룻은 지금 자신이 정도에 넘치게 과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룻과 같이 자신에게 늘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의 넘치는 은혜를 오히려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계속해서 뭔가를 더 얻을 수 있는데 주지 않는 주님을 원망하며 주님을 인색한 분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그러지 마십시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내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은 내게 모든 것을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하실 일은 내가 주께로부터 무엇을 받았는가, 나의 양손에 주어져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14-17절을 보십시오. 보아스는 룻을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이는 주님이 성도들을 돌보는 것을 예표하는 것과 같습니다. 14절에서는 먹는 것을 돌보아 주었습니다. 15절에서는 그녀의 이삭 줍는 일을 형통하게 해 주었습니다. 16절에서는 더 많이 주울 수 있도록 아예 일부러 이삭을 떨어 뜨려 주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영광 가운데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빌4:19). “하나님께서 능히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항상 모든 일에서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선한 일에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9:8)- 이 두 말씀에 따르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수많은 기도는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데서 오는 불신의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5에 “오직 우리의 만족이 하나님에게서 남이니라.”-여러분이 이 말씀을 이 시간 깨닫는다면 삶에서 걱정하거나 마음이 움츠려 들거나 쓸데없는 기도를 하는데 수많은 시간을 드리는대신 바른 기도 생활을 하며 풍성한 영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16절 말씀에서 of purpose란 말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있습니다. 흠정역에서는 이 단어를 번역하지 않았는데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일부러, 목적(의도)를 가지고”란 말입니다. -purpose:롬8:28,엡1:11을 비교할 것-
Ⅲ. 시어머니에게 보고한 룻 (2:17-23)
룻은 하루 종일 주은 것을 떨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탈곡을 한 것인데 보리가 일 에바 정도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도량형으로 하면 22리터(한말 두되) 정도 되는 양이었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많은 양입니다. 룻은 그것을 가지고 도시로 들어가 자기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낮에 먹다 남은 볶은 곡식을 드렸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룻에게 어디서 어떻게 일했는지를 물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보아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증거하는 한 마디를 합니다. “그가 산 자와 죽은 자에게 친절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는도다.” 보아스는 예전부터 엘리멜렉에게 매우 잘 해 주었고 지금도 잘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오늘 하루 룻에게만 잘 대해 준 것이 아니라 온 집안을 다 잘 돌보아 주었던 것입니다. 자기 가족과 친족을 돌보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게으르면 안됩니다. 고통과 빈 손으로 돌아와 살 길이 막막했던 나오미에게 주님은 큰 복을 주셨습니다. 나오미가 주님 앞으로 돌아왔을 때, 주님은 그들을 복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크게 쇠락해 있고 앞으로 먹고 살길이 막막한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주님께로 돌아 오십시오. 주님이 돌보십니다. 다시 십자가를 붙드십시오. 주님은 지난 일을 묻지 않으시며 다시 돌아 온 그 자체를 받으십니다.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 옆에 가까이 있으며 보리 수확과 밀 수확을 끝마치기까지 이삭을 줍고 자기 시어머니와 함께 거하니라.” 보리 수확은 4월 중순경에서 5월 초순까지이며, 밀 수확은 6월 중순에서 7월 초순까지 이어지므로 장장 4개월에 걸쳐 이삭 줍기를 하였습니다.
작은 베들레헴 성읍에서 모압 여인 룻의 이삭 줍기를 통해서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배우셨습니까?주님께서 룻에게 복을 주셨다면 여러분에겐 훨씬 더 큰 복을 준비해 두셨음이 믿기지 않으십니까? 주님은 모든 것이 풍족하셔서 주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2:10,12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