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룻기 1장 요절:룻기 1:16,17 “룻이 이르되, 나보고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니이다. 만일 죽는 일 외에 어떤 다른 것이 나와 어머니를 갈라 놓으면 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성경 전체에서 여자의 이름을 따라 제목이 붙여진 책은 룻기와 에스더 두 권 밖에 없습니다. 에스더는 유대 여자로서 이방 남자인 왕과 결혼한 반면 룻은 이방 여자로써 유대 남자와 결혼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한 영웅이지만 룻은 죄악 가운데 버려진 볼품없는 유대인의 아낙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이 오른 여인입니다. 모압 족속이었던 이 여인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1:1을 보십시오. “재판관들이 다스리던 때에 그 땅이 기근이 드니라. 베들레헴 유다의 한 사람이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하였더니”(1a) 이 말씀은 룻기의 배경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구절입니다. 이 때는 기드온이 사사로 있었던 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여호수아 시대의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던 라합에게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재판관기 6:3-4에 따르면 기드온 때에 미디안 사람의 침입으로 기근을 겪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뜻은 “빵 집”이란 뜻임에도 불구하고 기근이 들어 식량이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이 때 엘리멜렉이란 사람이 자기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갔습니다. 여러분은 창세기를 통해서 기근으로 약속의 땅을 떠나는 믿음의 조상들의 불신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땅에 기근이 들자 이집트로 내려가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하는 죄를 범합니다. 그는 두 번이나 같은 죄를 반복하였습니다. 후에 야곱 또한 양식을 구하러 자식들을 이집트로 내려 보내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삭 또한 기근으로 인해 이집트로 내려가고자 그랄로 가 블레셋 사람들의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말해 주는 땅에 거하라.”(창26:2)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기근이 닥치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고 양식을 찾아 떠납니다. 믿음의 조상 세 명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보십시오. ‧ 아브라함: “이제 주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 집에서 나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12:1)-약속의 땅(가나안)- ‧ 이삭: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말해 주는 땅에 거하라.”(창26:2) ‧ 야곱: “또,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창28:15)
세 약속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거처는 세상이 아닌 약속의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약속은 이 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저와 여러분의 거처가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약속의 땅을 떠났을 때 그들은 모두 범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떠날 때 모두 범죄하게 됩니다. 죄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꾸준히 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멜렉은 아브라함이나 야곱이 이집트로 내려가지 말아야 했듯이 모압으로 내려가지 말아야 했습니다. 신자들의 삶의 원리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걷고 보는 것으로 걷지 아니함이라.”(고후5:7)여야 합니다. 사람은 항상 보이는대로 살고 싶어 하고 그것이 쉬워 보이지만 막상 그 길로 가보면 결코 쉽지 않는 길임을 다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한 곳으로 가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집트는 세상을 예표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은 스스로 말들을 많이 번식시키지 말 것이며 그가 말을 번식시킬 목적으로 그 백성을 이집트로 보내지 말지니"(신17:16) 라고 하셨습니다. 전에 사무엘 깁 박사 성경 강연회를 하면서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을 얻고자 이집트로 내려가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 하셨는데, 성경을 얻고자 이집트로 내려가는 일이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다 아시고 그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으로 가는 일을 하면서 옳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상의 지명을 정확히 평가하시고 묘사해 놓으셨습니다. 이집트를 ‘철 용광로’라 하셨고 모압을 ‘내 목욕통’이라고 하셨습니다(시108:9). 그러나 엘리멜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 들여서 그대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찮게 여기는 것에 대해 내가 비중있게 여기거나,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에 대해 내가 가볍게 여긴다면 결코 영적인 삶을 살 수 없습니다.
2절과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베들레헴유다의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 거기에 계속해서 머물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 두 아들이 남았더라.” 엘리멜렉이란 뜻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란 말입니다. 이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은 나의 왕이시며 주시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 도움을 구하러 떠나는 사람과 같습니다. 역경은 마음의 거울과 같아서 여러분의 마음 상태를 그대로 드러 내 보여줍니다. 역경의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거나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마음 상태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모압"에서 먹을 것을 구했던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회개하며 아버지가 계시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엘리멜렉은 모압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잠시를 생각하며 모압으로 가지만 한번 들여 놓은 발은 점점 깊이 빠지고 헤어나지 못합니다. 오늘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만한 준비를 다 해 놓은 다음 몇 살 때부터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들은 절대 그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할 것입니다. 40세가 되면 주의 일을 하겠다. 50세가 되면 주의 일을 하겠다고 하지만 그들은 엘리멜렉과 같이 세상 가운데 죽고 말 것입니다.
젊은 시절 주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가정과 자신의 문제로 그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 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죄와 슬픔 가운데 계속 머물다가 죽어 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증거하지만 나중에 믿겠다며 발뺌을 하다가 결국 죽어서 지옥으로 가고 맙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먹을 것을 찾아 모압으로 갔지만 그는 죽었고 두 아들은 이방 여인과 결혼해야 했으며, 그 두 아들마저 모압 땅에서 장사 지내야 했습니다.
4절에 며느리의 이름이 나오는데 오르바와 룻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부를 좇아 먼 땅으로 이민을 왔다가 남편과 아들 둘을 잃어 버린 과부가 되었습니다. 꿈을 좇아 왔던 모든 삶은 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눈에 현명한 사람, 자기 눈에 옳게 보이는 길이 꼭 옳은 길이 아님을 성경은 수없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10년간 모압에서 기거하는 동안 아주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베들레헴유다(빵과 찬양의 장소)에서 고생하는 게 모압(이집트의 모형)에서 배부른 채 죽는 것보다 더 나았을 것입니다. 야고보는 “세상과 친구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약4:4)
이에 대해 맥스웰(L.E. Maxwell, 1895-1984)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세상이 내게서 나를 미워하거나, 세상 무리에서 나를 고립시킬만한 어떤 구실도 찾지 못하였다면, 그때는 내가 주의 친구들의 회중에서 그리스도를 배신하여 그분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이 세상과 친구 관계로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그 더러운 생각을 버리시오!" 나오미가 남편의 죽음 이후에도 모압을 떠나지 않았던 이유에 관해 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 가지 "고통"(20절)을 교훈으로 받고서야, 맨 처음부터 떠나서는 안 되는 그 장소로 다시 돌아가곤 합니다.
주님을 떠난 주님의 자녀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었을 때 불쌍한 나오미의 심령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이 두 가지 일이 네게 임하였으니 누가 너를 위하여 슬퍼하랴? 곧 황폐함과 파멸과 기근과 칼이니 내가 누구를 통하여 너를 위로하랴?”(사51:19). 이렇게 절망한 자를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여러분이 이런 절망과 방황 가운데 빠져 있다면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위로자이십니다. -요14:16,26,15:26,16:7(위로자이신 성령)/모두 찾아 같이 읽을 것.
저희 가운데 어떤 분은 가족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어떤 분은 전에 다니던 교회 형제, 자매들에게 상처를 입고, 어떤 분들은 자기 자신의 변화되지 않는 삶과 인격, 반복되는 죄로 인해 절망과 낙담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고생을 하고 낙담을 해도 오늘의 나오미 만큼이야 하겠습니까? 나오미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분은 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욥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와 하는 모든 말이 욥에게 위로가 되었습니까? “그런 것들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너희는 다 형편없는 위로자로구나.” (욥16:2). 여러분에게 누가 상담을 해 주는데 들을수록 짜증이 날 때 이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잠언 25:11입니다. “때에 적절한 말은 은 그림들에 있는 금 사과들 같으니라.” 위로자시요, 상담자이신 성령의 인도함을 적절한 말씀들을 보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 여인이 주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그들에게 빵을 주셨다 함을 모압 지방에서 들었으므로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자기가 있던 곳에서 떠났으며 두 며느리도 그녀와 함께 하더라. 그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 오려고 길을 가더니” 나오미는 지금도 빵이 있는 곳을 찾습니다. 그녀는 빵이 있는 곳이면 모압이든 베들레헴이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배가 그녀의 신이었고 탐욕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그녀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여러분, 주님이 생명의 빵이란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씨 뿌리는 자에게 씨를 주시는 분께서 너희의 양식으로 빵도 주시고 너희가 뿌린 씨도 번성하게 하시며 너희의 의의 열매도 늘어나게 하시나니”(고후9:10). 나오미는 이제 값비싼 교훈을 배우고 드디어 자신이 있던 곳을 떠나 유다 땅으로 돌아 옵니다. 동사 세 개를 주목해서 보십시오. 일어나...떠났으며...돌아오려 길을 가더니... 이것이 바로 회개의 순서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자신이 머물던 죄와 타락의 장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엉덩이를 무겁게 붙이고 끝나기를 기다리지 말고 벌떡 일어나 그 곳을 떠나십시오. 그리고 두 발로 빛이 있는 곳으로 길을 가십시오. 하나님을 피해 도망한 요나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고 순종을 배웠습니다. 요나3:3을 보십시오. “요나가 주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누가복음 15:18의 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을 거슬러 아버지 앞에 범죄하였사오니...” 회개는 항상 마음의 변화 이상입니다. 회개는 항상 두 가지 동작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교회들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백만 하면 되지 회개는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이 눈을 뜨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인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9)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는 것”은 마음에 두고도 실행에 옮기기 쉽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서울을 떠나 인천으로 오는데 꽤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직도 저의 자매는 서울에 미련을 두고 있습니다. 떠나기로 결정했다면 절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으며,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천사들은 롯에게 식구들과 함께 빨리 떠날 것을 명했지만 롯은 머뭇거렸습니다(창19:12,16). 떠나기 싫어하는 롯을 주님은 강제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결국 롯은 나오미와 같이 잃어 버린게 너무 많았습니다. 소돔에서 두 딸과 사위를 잃어 버렸고, 평지에서 아내를 잃어 버렸습니다. 나머지 두 딸은 산에서 잃어 버렸습니다. 그는 손자인지 아들인지 모를 씨를 남겨 두었는데 그 자손의 이름이 모압과 암몬인 것입니다. 그는 IMF로 퇴출당한 기업의 실업자보다 더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엘리멜렉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갔고, 일찍 떠났어야 했습니다. 그는 생명과 재산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지위마저도 잃었습니다. 역대기 상과 마태복음 1장에는 엘리멜렉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본래 엘리멜렉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룻이 대신 들어가 있습니다. 교훈) 땅에서 절망하면 하늘을 더욱 사모하게 된다.
8-10절의 대화를 보십시오.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너희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내게 친절히 대우한 것 같이 주께서 너희에게 친절히 대우하시기를 원하며 주께서 너희로 하여금 각각 너희 남편의 집에서 안식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에게 이르되, 우리가 반드시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 돌아가겠나이다, 하니” 나오미는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혈혈단신 유다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제 더 잃어 버릴 것도 없는 그런 상태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두 며느리와 시어머니인 나오미 사이가 매우 좋았다는 사실입니다. 15절에 따르면 이들은 섬기는 신이 달랐습니다. 며느리들은 결코 유대교로 개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만큼 나오미의 가족이 세상과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자기 아버지를, 딸이 어머니를,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여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마10:35) 하셨습니다. 세상과 친해질수록 하나님과는 멀어집니다. 10절을 통해 두 며느리는 나오미와 같이 돌아가기를 희망하고 있음을 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이르되 돌아가라. 내 딸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려하느냐? 아직도 내 태에 아들들이 있어서 너희 남편이 되겠느냐?” 나오미는 며느들을 가도록 간곡히 설득합니다. 인간적으로 본다면 나오미는 훌륭한 성품과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며느리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슬픔과 고통을 겪게 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12절에서 다시 한 번 더 “돌아갈, 내 딸들아, 갈지어다...” 간곡히 부탁합니다. 유다로 함께 돌아간다해도 아무런 소망과 꿈이 없었기에 함께 갈 수 없었습니다. 13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주의 손이 나와서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마음이 괴롭도다, 하매” 나오미는 남편과 아들들이 죽은 이유를 주의 징계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시편 39:10-13절에 “주의 징벌을 내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시므로 내가 소멸되었나이다. 주께서 불법으로 인해 사람을 책망하여 바로 잡으실 때에 그의 아름다움을 좀이 먹는 것같이 소멸하시나니 참으로 사람은 다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하는 나그네요,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는 자이니이다. 오 주는 나를 아끼사 내가 여기를 떠나 없어지기 전에 기력을 회복하게 하소서” 죄악으로 인해 철저히 징계를 받고 더 잃어버릴 것이 없을 때, 그 때 주를 바라보게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라. 오르바는 자기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되 룻은 그녀에게 굳게 붙으므로” 두 여인의 선택을 보십시오. 이들의 가치관이 극명하게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함께 먹고 같이 울고 같은 처지에 있었지만 선택의 순간 그들은 정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믿음으로 더 좋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파라오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기를 거절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 받기를 선택했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죽음을 선택하며 왕에게로 나아 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영웅들은 모두 다 위에 있는 약속들을 바라 보며 그것을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잠시 보이다가 사라질 이 땅의 것들에 애정을 두고 그것들을 좇아 사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 앞에 항상 선과 악을 두시고 어느 것을 선택하는지 보십니다. “보라, 내가 이 날 생명과 복과 및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신30:15). 우리는 모두 솔로몬과 같이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닫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나로 하여금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9). 이 세상은 선, 악의 구별을 점점 더 흐리게 하고 없애고 있습니다. 선악을 따지면 흑백 논리라며 손가락질 합니다. 선악에 대한 가치 판단을 물어보면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 라며 답변을 유보합니다. “화 있을진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고 어둠으로 빛을 삼으며 빛으로 어둠을 삼고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이여!”(사5:20).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에 함께 가리라 고백했지만 결국 돌아가고 맙니다.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 복음들고 가오리다” 노래하지만 그에 따르는 희생과 댓가를 알고 나면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누가복음 9:57-62에 보면 주의 종이 되고 싶어 했지만 결코 종이 되지 못한 청년이 나옵니다.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싶지만 손해나는 장사, 자기에게 다가올 부담과 희생을 알게 되면 결국 포기하고 마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와 복음을 위해서 한 가지라도 진정으로 희생한 것이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는 늦잠을 자는 쾌락과 가족과 함께 나들이 하고 싶은 욕심과 T.V 중계를 통해 방송되는 sports game, 친구의 전화 한통화에도 주일 예배가 흔들립니다. 믿음있는 사람이란 인정을 받고 싶지만 결코 참된 믿음을 소유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선택의 순간 갈라 서게 됩니다. 지역 교회, 지역 교회 입에 달고 다니다가도 막상 지역 교회가 생기면 입을 싹 씻고 돌아 가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 말씀해도 막상 킹제임스 성경을 들이대면 돌아 가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오르바의 후예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주의 제자로서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르바야 말로 두 마음을 품은 그리스도인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왜 이런 많은 차이가 있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두 딸들이 나오미를 부둥켜 안고 울었습니다. 룻은 앞을 바라본 반면(빌4:13) 오르바는 뒤를 바라보았습니다! 오르바는 마음의 소원만 있었지 의지의 결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선택과 자유의지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만 가지고 있지 의지의 결단이 없어서 지옥으로 갑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변명 가운데 한 가지는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어야 할 것 같고, 이해도 되는데 마음에는 안 와 닿아서 아직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믿음은 의지의 결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왜 그렇게 변명이 많은지 모릅니다. 해야 할 것 같은데 안 하는 이유는 모두 의지의 문제입니다. 룻은 이 점에서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오르바는 고백만 있었는데 반해 룻은 그 고백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딤전2:10 고백/ 붙들라. -딤전6:10 -히10:23
14절의 룻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룻은 시어머니에게 "붙었다"(cleave)라고 말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에서 "clave"란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단어는 "달라 붙다"(cleave), "고수하다(adhere), 메달리다(cling), 충실하다(be faithful to)"라는 말입니다.
‧ cleave: 신 10:20, 신 11:22, 신 13:4, 신 30:20, 수 22:5, 수 23:8, 수 23:12, 왕하 18:6 바울은 로마서 12:9에서 "사랑에 꾸밈이 없게 하라. 악한 것을 몹시 싫어하고 선한 것에 붙어 있으라(cleave)."(롬 12:9)라고 했습니다. 룻은 시어미에게 달라 붙음으로써 축복을 받았고 육신을 따라간 오르바는 주께로부터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었습니다.
1:15-18을 보십시오.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자기 백성과 자기 신들에게로 돌아갔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룻이 이르되, 나보고 어머니를 떠나며 하거나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강권하지 마소서. 당신이(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당신이(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당신의(어머니의) 백성이 내 백성이 되고, 당신의(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리니 당신(어머니)께서 죽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니이다. 만일 죽는 일외에 어떤 다른 것이 나와 당신을(어머니를) 갈라 놓으면 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룻이 자기와 함께 가려고 굳게 결심한 것을 보고,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1:15-18)
룻의 결심은 다섯 가지로 요약됩니다. 여기서 어머니라고 되어 있는 곳이 킹제임스 성경은 모두 당신이란 2인칭 대명사(thee, thou)로 되어 있습니다. 존칭어 문제로 모두 실명사로 받아서 번역하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떠나가게 하려고 했지만 룻은 무엇때문인지 죽음도 함께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친족과 가족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현실에 발을 두고 눈을 앞을 바라 보았습니다. 열왕기상 2장에 엘리사는 엘리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따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벧엘로 가는 동안 엘리사에게 길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만 엘리나는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여리고로 가는 동안 엘리사에게 벧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지만 엘리사는 다시 한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며 따라갑니다. 마지막으로 엘리야는 요단으로 가는 동안 엘리사더러 여리고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하나 엘리사는 그와 떨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엘리야에게 엘리야의 영의 두배의 분량을 얻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왕상 2장).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이어받고 그의 장자가 되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신21:17). 영적인 거룩한 열망은 절대 성취할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확실하게 구했고 그것을 얻었습니다.
나오미의 간청은 딸을 치료해 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하던 수로페니키아 여인의 탄원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마15:21-28). 하나님께 도움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탄원, 간구는 결국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heart-beating pray(가슴을 치는 기도)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문제를 두고 주님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응답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지수표를 제공하는 분이십니다. 시편기자인 다윗은 시 37:4에서 "또 주를 기뻐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 마음의 소원들을 네게 주시리라." 라고 말한다. 룻은 소원(desire)이 있었고 그 소원은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그 소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서 마음의 결심을 보았습니다. 마음을 "굳혔다"(steadfast)는 단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룻이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그 일에 확고 부동하다는 점입니다.
굳혔다(steadfast) 바울의 권고- 견고하라(be stedfast)-고린도전서15:58 마음을 굳히는 정도에 따라 오르바가 되느냐? 룻이 되느냐? 결정납니다. 데마냐? 디모데냐? 결정됩니다. 마가냐? 실라냐? 결정납니다. 예수님- 예루살렘에 올라 가실 때(눅9:51) 베드로- 성도들에게 경고(벧후3:17)
1:19-22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들은 마침내 고향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금의 환향이 아니라 쪽박차고 돌아온 부끄러운 귀향이었습니다. 온 도시가 이들의 귀향에 흥분했습니다. 떠난지 수십년이 지나 돌아왔으니 얼굴도 변했을 것입니다. 고생으로 인해 알아 보지 못할 정도로 수척해졌던지 “이가 나오미냐?” 하고 물었습니다. 링컨은 말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40세가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인생의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20년간 성경을 읽고 주님과 사귐을 가진 사람의 얼굴과 세상의 신문, 잡지와 죄에 찌든 얼굴은 절대 같을 수 없습니다.
예화) 범죄자의 길은 험난하다!(잠13:15) 레오나르도(1452-1519)라는 화가를 알고 있는가? 그 역시 두 개의 그림으로 유명한데, 모나리자와 마지막 만찬이다. 여기서 나는 두 번째 즉, 마지막 만찬을 언급하고자 한다.. 다음을 읽어 보라.
"... 그는 자기가 그릴 그리스도의 모델을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 마침내 로마의 한 교회 성가대원에서 찾게 되었는데 그 모델은 아름다운 삶과 그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이름은 피에토 반디넬리(Pieto Bandinelli)였다.
여러 해가 지났으나 아직도 그 그림은 미완성이었다. 모든 제자들을 다 그려내었지만 아직 한 사람(유다 이스카리옷)을 그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죄로 굳어지고 틀어진 얼굴 생김새를 가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이윽고 로마의 거리에서 한 거지를 찾았는데, 그의 몰골은 완전히 악당 같아서 야비한 사람 같아 보여 보기만 해도 몸이 오싹해질 정도였다. 다빈치는 그를 고용하여 앉아있게 하고, 자신의 칸바스에 유다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후에 다빈치는 그를 떠나 보내기 전 물었다. "아직까지 당신의 이름을 안 물어 본 것 같소." "피에토 반디넬리요. 전에 그리스도를 그리기 위해 당신의 모델로 여기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요." 그는 대답했다." 범죄자의 길은 험난한 법이다!
나오미는 자신을 알아 본 사람들에게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께서 나를 매우 괴롭게 하셨음이라’(20) 마라의 뜻은 쓰라림(bitterness)입니다. 나오미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분이요(잠3:11), 고통을 통해 하나님을 찾게 하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다윗과 같은 찬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하오니 이로써 내가 주의 법규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나오미는 히브리서 12:11의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징계가 그 당시에는 기쁜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고 슬픈 것으로 보이나 나중에는 그로 말미암아 단련된 자들에게는 의의 화평한 열매를 맺느니라.” 저는 우리 교회 형제, 자매님들의 어려운 처지를 들으면 동정과 연민이 갑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매우 기쁩니다. 여러분이 겪는 모든 어려움, 고난들을 그냥 흘려 보내지 마십시오. 나에게 징계가 임했다면 나에게 불순종의 요소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찾아서 제거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을 살펴 보십시오.
나오미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21절입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으나 주께서 나를 빈손으로 집에 돌아오게 하셨느니라.주께서 나를 대적하는 증거를 보이셨고 전능자께서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21) 나오미는 자신이 받아야 할 것을 받았으며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네 자신의 사악함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타락함이 너를 꾸짖으리라. 그런즉 네가 주 네 하나님을 버린 것과 네 속에 나를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 악한 일이요, 쓰라린 일인 줄 알고 주의하라. 주 만군의 하나님이 말하노라."(렘2:19).
성경은 여러분에게 교리와 책망과 바로 잡음과 의로 훈육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딤후3:16). 만일 당신이 성경에서 벗어난다면 삶의 여정을 통해서 책망 받고 바로 잡혀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참으로 쓰라린 일일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회개하고 돌이킬 때까지 어떤 이는 교통 사고로 온 몸을 짜 집었으며, 어떤 이는 불치의 병에서 몇 년을 투병 생활하며, 어떤 이는 자식이 죽고, 어떤 이는 집이 파산하며, 이혼과 사별과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모압으로 가서 기쁨으로 금의환향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나오미와 룻이 돌아 오던 시기는 “보리 수확을 시작할 때”였습니다.이 시기는 4월 중순 경으로 유대력으로는 첫 째달(아빕 월)로써 출애굽하던 달입니다(출13:1-5). “수확”이란 말은 항상 마지막 때를 가리키는 말임을 알고 있습니다(렘8:20,요엘3:13, 마13:39, 계14:15 etc). 막9:36-38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룻은 추수를 하는데 뒤에서 이삭 줍기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예표하는 여인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도전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룻과 같이 굳게 붙으십시오(14)
2. 룻과 같이 굳게 결심하십시오(18)
3. 뒤를 돌아 보지 말고 앞을 보십시오.
4. 더 소중한 것을 선택하십시오.
잠깐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