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출애굽기 20:13
요절: 출애굽기 20:13
오늘은 십계명 중에 여섯
번째 계명입니다.
여섯 번째 계명은 흔히 인간 사회에서는 가장 큰 죄라고 여겨지는 ‘너는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이 계명은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살인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현재 평균 매 10분마다 어디선가 살해되고 있으며, 이곳 미국에는 매 30분마다 한 명씩 살해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미국이 총기를 허용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는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총기를 허용하지 않으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입니다. 미국의 한 대학 연구소1)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4-9시 사이에 방영되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100시간 동안 모니터링을 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그 안에는 12건의 살인자가 나왔고, 21명이 총에 맞아 죽었으며, 21건의 총기와 연관된 사고가 있었으며, 16명이 총으로 싸웠고, 37명이 주먹으로 싸웠고, 한 명이 쇠스랑으로 죽였고, 1명은 칼로 등을 찔러 죽였고, 3명이 자살해서 죽고, 1명은 자살 미숙에 그쳤고, 4명이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죽었고, 2명이 뺑소니 차량으로 죽었고, 2명은 차량으로 깔아 뭉개 죽이려는 시도를 했으며, 1명은 여객기 안에서 정신병자를 풀어서 대형 사고를 유발했으며,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매달려 있었고, 한명의 남자는 말밥굽에 깔려 죽었고, 2명의 강도가 나왔고, 한명의 여자가 기차에서 떠밀려 죽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진과 밀물과 썰물로 인해 바다에서 죽었으며, 살인 청부업자가 잔인하게 사람의 목을 자르는 장면이 방영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매일 안방이나 영화관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찍은 그림들과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13)는 말씀을 들은 성도들이라면 그런 죽고 죽이는 살인 장면들에 흥분하고, 재미있어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나는 살인하지 않았어. 그러나 살인하는 장면은 재미있어!”란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적 살인 본성을 드러내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거듭 나기 이전에 모두 살인자였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나는 살인(殺人)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살인자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수 있고 항변할 분이 계시겠지만 국가에서 정한 형법의 기준이 아닌 성경의 기준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살인을 했기 때문에 살인자 아니라 살인자로 태어나기 때문에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으로 하든, 행동으로 하든 그것은 후차적인 문제입니다. 이는 본성의 문제이지 행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죄를 짓기 이전에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과 동일한 문제입니다. 다만 살인을 행한 살인자가 있고, 아직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살인자가 있습니다. 총이나 칼, 손이나 도구로 사람을 죽여야 살인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은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色慾), 악한 눈, 신성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기 때문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7:21-23). 우리는 이 점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죄는 행위 이전에 마음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과 같은 이치로, 살인을 했기 때문에 살인자가 아니라 살인자이기 때문에 살인을 하는 것입니다. 살인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합니다. 살인자가 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가르치고, 나를 다스려야 합니다. 기록된 말씀이 내 안에서 꾸준히 거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절대 살인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살인을 범할 수는 있습니다.
지금 본문의 구약의 율법은 행동의 문제만을 다룹니다. 주님의 계명을 받아서 마음 속에 간직한다면 행동으로 나오는 살인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신약 성경에서 주님은 행동 이전에 마음을 다루는데 이는 우리가 성령의 거듭남, 중생의 새롭게 함으로 속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제 6계명에 대한 엄격한 적용을 받습니다.
여섯 번째 계명을 다 같이 외워 보겠습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13). 짧지만 너무나 강력한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이 계명을 마음속에 숨겨두고 평생동안 살인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살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행동 이전에 마음의 문제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음 몇 가지 경우의 살인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십니다. 첫째, 과실치사입니다. 도끼로 나무를 찍는데 자루에서 빠진 도끼가 사람의 머리에 떨어져 죽는 경우와 같은 고의성이 전혀 없는 사고는 주님이 도피처를 마련하셔서 그리 피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흔히 저지르는 과실치사는 운전 사고입니다. 이것은 여섯 번째 계명인 [너는 살인하지 말라]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음주운전일 경우에는 과실치사가 아닌 살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둘째, 군대의 명령으로 적을 죽이는 행위는 여섯 번째 계명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고 해서 크리스찬이 군대를 가지 않거나 전쟁터에서 총을 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적 진리를 실행한 것이 아니라 거부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전쟁에 나간 군사에게 적을 죽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오해해서 집총(執銃)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은 신실한 하나님의 종도 아니고, 건전한 시민도 아닙니다. 셋째, 가정을 지키는 것 역시 살인에 해당하지 않습니다(삿4:18-22). 넷째, 자기 방어나 정당 방위로 일어난 살인 역시 여섯 번째 계명에 해당하지 않습니다(눅22:36-38). 미국은 모두 개인 총기를 허용합니다. 이 총을 자신의 신변과 가정을 지키는데 사용하는 것은 여섯 번째 계명과 상관이 없습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오늘날 기독교 인본주의 자들의 주장처럼 사형 제도를 폐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형 제도를 적극 지지하십니다. 하나님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한 사람들에 대해서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동시에 [사람을 쳐서 죽게 한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2)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범죄한 인간을 바로 죽일 수 있지만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드시 죽이라’고 사형 집행권을 위임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나 “...반드시 죽일지니라”는 동일한 명령입니다. 주님은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자들을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21:12-19절에는 반드시 죽일 자들을 연속해서 명기해 두셨습니다. 15절,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5). [사람을 훔쳐서 팔거나 자기 손에 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6).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7), [누구든지 짐승과 함께 눕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19). 사형 폐지론 자들이 하나님을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성경에 대해 공개적인 무지(無知)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와 목회자들, 성도들이 그런 운동에 서명을 하며, 사랑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일은 매우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은 신성 모독에 관련된 죄 외에도 살인, 도둑질, 부모에 대한 불경(레20:9), 수간(레20:16), 간통(레20:10), 근친 상간(레20:11-12), 동성연애(레20:13) 등에 대해서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명령하셨고, 정상참작이나 예외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부리는 영을 지녔거나 마술사는 반드시 죽이고(레20:27), 쇠연장이나 돌, 나무 등의 연장을 가지고 사람을 죽이면 이는 실수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민35:16-18). 주먹으로 쳐서 죽인 자 역시 반드시 죽이게 했습니다(민35:21). 살인하지 말라는 법 집행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섯 번째 계명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해야 합니까?
첫째, [너는 살인하자 말라](13)는 말씀은 말 그대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합법으로 가장한 자연스런 살인 행위는 낙태 행위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뱃속에서부터 일일이 다 지으십니다. 결혼해서 부부 생활을 하면 아이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주께서 내 콩팥을 소유하시며 내 모태에서 나를 덮으셨음이니이다. 내가 주를 찬양하리니 이는 /주께서/ 두렵고도 놀랍게 나를 만드셨음이니이다. 주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놀라우니 내 혼이 그것을 매우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중에 만들어지고 땅의 가장 낮은 부분에서 묘하게 꾸밈을 받았을 때에 나의 실체가 주께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시139:13~15).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욥 역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나를 살갗과 살로 입히시고 뼈와 힘줄로 울타리를 치셨으며](욥1:10). 주님은 우리를 모태에서 우리를 지으시는 것이며, 모태에서 우리를 나오게 하십니다. 시편 71:6에 이르기를, [모태에서부터 나를 붙드신 이도 주시며 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를 꺼내신 이도 주시오니 내가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시71:6). 모든 생명은 다 주님께 속한 것이며,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생명은 단지 생물학적 현상만이 아닙니다. 이런 성경적 진리를 안다면 낙태가 얼마나 반성경적 살인 행위인지 분명히 알 것입니다. *1963년 Roe & Wade 사건- Texas 자매, 낙태 입법 주창자였다가 현재 낙태 반대 운동을 하는 자매. 낙태와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합법적인 살인 행위는 ‘안락사’(安樂死)입니다. 크게 다치거나 화상을 입은 말이나 개나 고양이를 총으로 쏴 죽이는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안락사를 시키는 것 역시 살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입법(立法)에 반대해야 하며, 이런 것들을 권리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둘째, [너는 살인하자 말라](13)는 말씀은 살인에 동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직접 살인하지 않았지만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조했습니다. 사도행전 7:58을 보십시오. [도시 밖으로 그를 내던지고 돌로 칠 때에 증인들이 자기 옷을 사울이라 하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니라.](행7:58). 사울은 현장에서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들의 옷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는 살인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는 그의 죽음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순교자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나도 곁에 서서 그의 죽음에 동의하고 그를 죽이는 자들의 옷을 지킨 줄을 그들도 아나이다, 하니](행22:20). 그가 돌을 집어던지지 않았다 해도 그는 분명히 돌을 던진 사람들과 한패였으며, 살인자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인에 동조함으로써 살인자가 됩니다. 살인을 정당화 해 주는 여론에 호응하고 지지함으로써 자신 역시 동일한 살인의 죄를 짓습니다. 특히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여론을 형성하는 대로 동조함으로써 어떤 사람을 죽여 마땅하다고 생각하거나 분개하는 것은 자신이 재판관이요, 심판관의 위치에 선 지극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자기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자기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며 율법을 판단하는 자니라. 그러나 만일 네가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을 행하는 자가 아니요, 판단하는 자로다. 율법을 주시는 이가 하나이시니 그분께서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네가 누구이기에 남을 판단하느냐?](약4:11-12). 사람들은 신문이나 T.V를 보면서, 아니면 누구로부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귀신은 뭐 하나 그런 놈 안 잡아가고...’, ‘그런 인간은 빨리 죽어야 하는데....’와 같은 말을 하거나 생각을 합니다. 자신이 직접 죽일 수는 없고, 죽일 힘이나 처지가 되지 않기 때문에 누가 대신 죽여주기를 바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청부를 한 적은 없지만 청부 살인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에 동조하지 마십시오. 그가 공정한 재판을 받아 법대로 처벌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농담으로라도 누구는 죽어 마땅하다거나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거나 생각함으로 저주하지 마십시오. 특히 형제를 향해서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의 영을 주셨지 미워하고 저주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셋째, [너는 살인하자 말라](13)는 말씀은 원수 갚는 것을 주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살인의 동기 중에 가장 많은 이유, 정당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어릴 때 읽었던 신화나 전설, 동화 책, 만화 책, 무협지들의 주요 내용은 대부분 부모의 원수를 갚는 내용이거나 사부의 원수를 갚은 것이었습니다. 홍콩 영화라고 해서 한국에 들어오는 대부분이 수입 영화 내용 역시 원수를 갚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신문을 보니 이번에는 배신한 애인이나 친구, 자기를 버린 아내나 남편의 원수를 갚는 내용이 수두룩했습니다. 요즘도 회교권에서는 ‘명예 살인’이란 것이 있습니다. 가족들 중에 가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법의 처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가족 가운데 누가 그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다 살인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기본입니다. 하지만 원수 갚는 문제는 신약이나 구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43-44, [/그들이/ 말한바, 너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앙심을 품고 너희를 대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마5:43-44). 이는 원수들이 잘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는 다 따로 갚아 주실 분이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갚는 일이 내게 속하였으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롬12:9). 이 말씀은 신약에서 새롭게 계시된 말씀이 아니라, “기록된바...”란 말씀에서 보듯이 구약에서부터 처음부터 있는 계명입니다. [너는 원수를 갚지 말고 네 백성의 자녀들에게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주]니라.](레19:18). 성도가 스스로 자신의 원수이든 부모의 원수이든 심지어 조국의 원수이든 간에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는 것은 사회적으로는 동정과 연민을 자아내고, 애국적인 행위가 될 수 있겠지만 성경적으로는 분명히 살인입니다. 다윗과 요압은 이 점에서 참으로 대조적인 본을 보여 줍니다. 다윗은 수많은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인 백전의 용사였습니다. 주님께서도 그가 많은 피를 흘린 사람으로 기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큰 싸움을 많이 하였느니라. 네가 내 눈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지 못하리라.](대상22:8). 그러나 그는 우리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살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겠다면 줄기차게 추격대를 편성해서 쫓아오는 사울 왕조차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는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이야말로 가장 먼저 죽여야 할 원수 중의 원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울 왕을 주님께 맡겼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이는 살인(殺人)을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요압은 왕명을 어겨가면서까지 철저히 자신의 손으로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는 다윗이 화친을 맺고 평안히 돌려보낸 아브넬을 다윗 몰래 쫓아가서 데려와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는 동생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이것은 제 6계명을 범한 살인입니다. [27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그와 함께 조용히 말하려고 그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 거기서 그의 다섯번째 갈빗대 밑을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 동생 아사헬의 피 때문이었더라. 30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이같이 아브넬을 죽였으니 이는 그가 기브온에서의 싸움에서 자기들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음이더라.](삼하3:27,30). 그 때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 뭐라고 했는지 보십시오.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에게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유출이 있는 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에 의지하는 자나 칼에 넘어지는 자나 빵이 부족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삼하3:29). 다윗은 당장 군법에 따라 죽이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손에 그가 행한 죄악을 처리해 주시도록 구한 것입니다. 스스로 원수를 갚는 일은 살인입니다.
넷째, [너는 살인하자 말라](13)는 말씀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은 살인입니다. 주님은 절대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상속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게 할지니 이와 같이 하면 그 피가 네게 돌아가지 아니하리라.](신19:10). 무죄한 피란 순교자의 피를 말합니다. 주님은 최초의 순교자 아벨을 ‘의로운 아벨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은 무죄한 피를 흘린 살인자였습니다. 주님은 아벨로부터 성전 제단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눅11:51/대하24:20)를 무죄한 피로 규정하시고, 그에 해당하는 피를 이 세대에게 요구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바알 숭배를 하기 위해 하나님의 대언자들을 죽였습니다. 악한 왕들은 유난히 무죄한 피를 많이 흘린 살인자들이었고, 백성들은 그 죄에 동참했습니다. 특히 아합이나 므낫세같은 왕은 얼마나 많은 무죄한 피를 흘렸는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므낫세가 [주]의 눈앞에서 악한 것을 행하여 유다로 하여금 범죄하게 한 그 죄 외에도 또 무죄한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왕하21:16), [또 /이것은/ 그가 흘린 무죄한 피로 인함이었으니 이는 그가 무죄한 피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주]께서 이 일을 용서하려 하지 아니하시니라.](왕하24:4). 이스라엘이 주님을 떠났을 때 위로는 왕들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까지 모두 살인자가 되었고,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살인에 광분했습니다. 우리는 팍스의 순교사화란 책을 통해 초대 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무죄한 피가 흘렀는지 상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종들을 죽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까지 바알과 몰렉에게 희생물로 바쳤습니다. [무죄한 피 곧 자기 아들딸들의 피를 흘려 가나안의 우상들에게 희생물을 드려서 그 땅을 피로 오염시켰도다.](시106:38). 그러나 마음이 죄악으로 기울고, 타락한 사람들은 마치 피 맛을 본 짐승들처럼 계속해서 피를 흘리기를 좋아합니다. 인류 최대의 살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건입니다. 그들은 모두 살인에 광분해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를 외쳤습니다. 그 순간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히려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빌라도 앞을 가득 메웠습니다. 살인은 그들의 본성이었고, 기질이었으며,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네 눈과 네 마음은 오직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리는 것과 학대와 폭력만을 바라며 그것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렘22:17). 예수를 사형에 처해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먹을 것이 없다고 아이들을 잡아먹는 일은 별로 놀랄 일도 아닐 것입니다.
다섯째, [너는 살인하자
말라](13)는 말씀은 형제를 미워하지 말라.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십계명을
재해석해 주셨고, 그 입법취지와 목적을 정확하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옛 사람들이 말한바, 너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
한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아무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라가라 말하는
자는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되거니와 누구든지, 너 어리석은
자여, 하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마5:21~22).
주님은 여섯 번째 계명의 강도를 훨씬 높여 주셨습니다.
사람을 죽이면 심판의 위험에 처하는 것이 아니라 ‘까닭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기만 해도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여’라고 말하면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살인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9빛 가운데 있다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도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 11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가운데 있고 어둠 가운데서 걸으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2:9,11). 이는 매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심각하고도 중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둠의 권능에서 건져내사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기셨습니다(골1:13). 주님은 빛이십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은 구원받았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옮겨졌다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옮겨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금까지 어둠 가운데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자란 것입니다(요3:19). 요한일서 3:15, 4:20을
보겠습니다. [3:15누구든지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원한
생명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줄 너희가 아느니라.
4:20누구든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직접 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찌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리요?](요일3:15,4:20).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진리를 봅니다.
①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다(요일3:15).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살인을 했다, 안 했다와 같은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살인자란 것입니다.
②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요일4:20).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여섯 번째 계명인 [너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결코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엄히 명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섯째, [너는 살인하지 말라](13)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계명이 그러하듯이 여섯 번째 계명 역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 주고,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것은 표면적으로 로마의 공권력, 유대인들의 모함과 정략에 따른 것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각자의 죄입니다. 주님께서 로마 때문에 죽었다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때문이었다면 그 죽음과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모욕을 받으시고, 못 박히사 피를 흘려 죽으신 것은 우리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나의 죄로 인해 죽으셨다면 주님을 죽게 한 것은 바로 나란 뜻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죄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할 수 없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들을 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들. 결국 우리의 죄가 주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범죄들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불법들로 인함이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사53:5). 예수님을 죽인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나의 죄였으며, 내가 바로 주님을 죽인 살인자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죽인 우리를 용서해 주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제거해 주셨으며,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6)는 계명은 결국 우리를 살인자임을 증거해 주는 말씀이며,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죄인임을 자백할 때, 우리를 복음으로 인도하는 훌륭한 선생인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계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니라.](롬3:20). 이 세상의 아무리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성경에 기록된 어떤 계명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나는 살인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나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주님이 이 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訓育)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3:24). 이것이 진정한 십계명의 힘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살인자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살인자”로 기소될 것입니다. 이 죄는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우리를 율법의 권능에서 해방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계명을 통해 속박의 멍에를 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도함을 받아 진정한 생명의 성령의 능력을 얻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너는 살인하지 말라](13).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이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숨겨 두십시오. 죄를 피하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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