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W 토저 목사님의 글 That Incredible man에 나오는 글입니다.
한글로 '진짜인가? 가짜인가?'로 번역되었습니다.
한글로 '진짜인가? 가짜인가?'로 번역되었습니다.
“이는 육신은 성령을 거슬러 욕심을 부리고 성령은 육신을 거스르기 때문이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능히 하지 못하느니라.” (갈 5:17)
신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성령님의 활동은 무의식적이거나 자동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하나님의 자애로운 뜻에 순종하여 협력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양극단 중의 하나에 빠지고 만다. 어떤 이들은 신자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하게 되려다가 비참하게 실패한다.
또 어떤 이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수동적인 상태로 자신을 몰아넣는다. 다시 말해서, 울새가 알을 까고 나오거나 장미가 꽃을 피우기를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듯 이,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뒷짐 지고 기다린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고 애쓰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이것이 내가 언급한 불균형이다.
우리의 도덕적 반응이 없으면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 않으신다고 신약성경은 가르친다.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고 자기 절제의 훈련을 하고 하나님의 목적들을 인정하여 받아들이라. 그렇지 않으면 영적인 발전은 없다.
영적인 기형상태
거룩하게 되려고 노력하다가 오히려 잘못된 길로 가서 결국 영적인 기형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경우들이 우리 삶에서 일어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우리는 담대해지려다가 지나쳐서 뻔뻔스럽게 될 수 있다.
용기와 온유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그리스도에게 이 두 가지는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분이 그분의 적들과 대립할 때 이 두 가지가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나타났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서 바울은 아그립바왕(행 25:13-26:32참조) 앞에서 이 두 가지 성품을 잘 보여주었다. 다만 바울은 어떤 경우에는 담대함이 지나쳐서 온유함을 잃고 대제사장에게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행 23:3)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신이 한일을 깨달았을 때 즉시 사과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적 성숙함을 나타냈다.(행 23:1-4참조)
둘째, 우리는 솔직해 지려고 노력하다가 그것이 지나쳐 예의에 어긋날 수 있다.
솔직하면서도 무례하지 않는 균형이 인간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발견되었다. 자신은 언제나 숨김없이 솔직하게 다 말해버리는 성격이라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다 말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는 사랑이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말해 버리지 않는 것을 배웠다.(벧전 4:8 참조)
셋째, 깨어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 의심하는 버릇에 빠질 수 있다.
우리의 주변에는 적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는 적이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 적을 찾아내려는 경향이 있다. 오류와 싸우다보니 우리는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의를 품는 경향이 있다. 사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이단을 좇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이단에 빠지도록 유혹하다가 실패할 때 사탄은 우리가 우리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도록 부추긴다. 전자의 경우와 후자의 경우 모두 우리를 이기는 것이다.
넷째, 진지해지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우울해질 수 있다.
성도들은 언제나 진지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침울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경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자가 우울하다는 것은 그에게 죄가 있다거나 신앙이 없다는 표시일 수 있다. 이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질 수 있다. 기쁨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명약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4:4)
다섯째. 양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양심의 문제에서 지나치게 예민해 질 수 있다.
우선 사탄은 신자의 양심을 파괴하여 비양심적으로 행동하도록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서 실패할 때 그는 반대적인 전술을 써서 신자의 양심을 병들게 만든다. 이것은 신자가 양심적으로 너무 예민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까봐 두려워하기 때문에 늘 고민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간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신앙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행동들의 수를 줄여나간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일상적인 일들은 수행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을 경건의 증거라고 착각한다. 얼마나 잘못된 사람들인가!
출처: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중에서....... (P145-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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