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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Pastor. Yoon
이 글은 순전히 자료 차원에서 수집해 둔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으며, 설교하는가? 등을 한 눈에 알게 해 주는 글이다. 일목 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 만약 성령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다면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에서 강의한 '성령을 알자'를 보기를 권한다. 총65회에 걸쳐 강의한 내용이 있다.


21세기 성령운동 어디로 갈 것인가? [심층기획]현대 성령운동 진단 ② / 통합적 성령론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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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본철 / 성결대학교 교수, 성결신학연구소장

현재까지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는 ‘성령세례’에 대한 매우 난해하고 다양한 해석들이 소개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 주장하는 이들의 신학적 계보도 매우 복잡하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국교회 성령세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의 과정을 통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성령세례론의 여섯 가지 유형을 정리할 수 있었다.

성령세례론 유형 분석

1.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
봉사의 능력(power for service)에 핵심을 둔 성령세례론은 주로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의 한 특색이라고 본다. 아사 마한(Asa Mahan)이 1870년에 발행한 <성령세례>(The Baptism of the Holy Ghost)에서는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봉사와 거룩한 삶에 있어서의 능력을 받게 된다고 하였다.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의 저술인 <능력의 부여>(The Enduement of Power)에서도, 성령세례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인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초기 한국교회에 파송되었던 영미 선교사들에게 좀더 친숙했던 성령세례론의 영향은 무디(Dwight L. Moody)와 그의 동역자인 R. A. 토레이(Reuben Archer Torrey)의 무디 성령학교(Moody Bible Institute) 사역을 통해서도 많이 나타났다. 무디는 자신이 1881년에 저술한 <은밀한 능력>(Secret Power)에서 특히 신자는 봉사의 능력을 얻기 위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디에 의해서 강조되어지던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체계화 한 토레이는 성령세례가 죄로부터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의 능력을 위해서 주어진다고 강조하였다.

1960년대 이후에도 한국 개혁파 신학계에서는 성령론에 있어서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하나의 큰 노선이 있었다. 여기에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를 강조하여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설교가로는 로이드 존스(D. M. Loyd-Jones)를 또한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이 신자들로 하여금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토록 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이인한을 필두로 하고 차영배, 박영선, 안영복 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는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의 학풍은 일반적으로 ‘봉사의 능력을 위한 성령세례’를 지지하고 있다.

2.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
존 웨슬리(John Wesley)로부터 출발한 완전 성화의 교리는 순간적인 체험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정결하게 씻음을 받게 되고, 이 원동력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랑과 봉사의 승리하는 삶을 가능케 해준다고 하였다. 이 같은 전통적 입장에 새로운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선구자인 팔머(Phoebe Palmer)를 통해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에 대한 강조가 많이 부가되었다.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성령세례론이 한국교회, 특히 초기 성결교회에 접목되는 과정에서 크게 영향을 주었던 책은 토마스 쿡(Thomas Cook)의 <신약성결>(New Testament Holiness), 힐즈(A. M. Hills)의 <성결과 능력>(Holiness and Power), 조지 왓슨(George D. Watson)의 <성결요람>(A Holiness Manual)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는 성결교회 내에서 김상준, 이명직, 김응조 등의 저술들, 그리고 <활천>, <성결> 등의 정기간행물들을 통하여 그 전통이 계승되었다. 이렇게 하여 근대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특성은 ‘정결과 능력의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데서 찾게 된다.

3.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
이 노선은 근대 개혁파 성령운동에 근거를 두었지만, 무디나 토레이와는 달리, 성령세례의 주된 목적을 그리스도에 의한 전인적 통치에 둔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보드먼(William E. Boardman)은 그리스도께 대한 온전한 헌신을 하고 난 후 신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의식적인 증거’( a conscious witness of Christ's indwelling)를 얻게 되는데, 이를 그는 두 번째 회심으로서의 ‘성령세례’라고 불렀다. 또 고든(Adoniram Judson Gordon)은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케 하고, 또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연합된 유익을 깨닫도록 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이 외에도 F. B. 마이어, 앤드류 머레이와 같은 케스윅 운동의 지도자들 역시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였다. C&MA의 창시자인 A. B. 심슨(Albert Benjamin Simpson)도 역시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리스도의 전인적 통치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는 저자들 중에 특히 머레이와 심슨은 한국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4. 중생 = 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
<신학지남>에 Stanley T. Soltau(蘇逸道), G. Engel(王吉志) 등의 성령론이 처음 연재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이다. 이들 선교사들의 성령세례론은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자라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신자가 성신의 권능 또는 성신의 충만을 받아야 할 것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박형룡의 성령론이 <신학지남>에 실리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인데, 그는 중생한 자는 이미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은 중생과 관계된 성령의 최초적 은사인 성령의 세례와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형룡의 저술을 필두(筆頭)로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의 저술들이 신성종, 김해연, 박형용 등을 통해 한국 신학계에 잇달아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성령론 노선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외국 신학자들로는 우선 찰스 핫지(Charles Hodge)나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 등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성령 은사의 중단성(中斷性)과 중생과 연관하여 성령세례의 단회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iper), 리차드 가핀(Richard B. Gaffin), 존 스토트(John R. Stott) 등의 영향도 역시 이 노선에 힘을 주었다. 특히 대중적으로 국내에 큰 영향을 끼친 CCC의 빌 브라이트(Bill Bright)이나 부흥사 빌리 그래함(Billy Graham)도 역시 명확한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의 노선을 견지하였다.

5.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
찰스 파햄(Charles F. Parham)은 방언을 성령세례 받은 단 하나의 증거라고 최초로 강조하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1901년 토페카와 1906년 시무어(W. J. Seymour)가 이끈 아주사 거리의 부흥에서는 물론, 현재까지 방언을 성령세례와 직결시키는 전통 오순절주의(Classical Pentecostalism) 신앙의 전 세계적 확산을 가져오게 하였다. 국내에는 하나님의성회가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주장하는 전통 오순절주의의 대표적 교단이다. 이 노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자로서는 조용기 목사를 들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1960년대에 일어난 은사갱신운동은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를 권장하지만, 그 강도가 전통 오순절주의보다는 선택적이다. 국내에서 은사갱신운동가들의 저서들이 최초로 번역되어 소개되기 시작한 때는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존 쉐릴(John L. Sherill), 데니스 베네트(Dennis J. Bennett), 프랜시스 맥너트(Francis MacNutt) 등의 저서들이 번역되어 일반 독자들 사이에 친숙하게 소개되었는데, 이들의 저서에서는 방언을 거의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표현이 많이 발견된다.

6. 중생 = 성령세례, 이후 은사적 성령충만
일반적으로 ‘제 3의 물결’에서는 ‘성령세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 또는 ‘성령 안에서의 세례 받아지는 것’(being baptized in the Holy Spirit)이라는 용어 대신, ‘성령충만’(filled with Holy Spirit) 또는 ‘성령에 의한 능력의 덧입힘’(empowered by the Holy Spirit)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 이유는 제 3의 물결 운동가들은 대부분 회심과 성령세례가 동시적 경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중생하게 될 때 성령께서 내주하신다. 하지만 저절로 그분의 능력과 은사들을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노선은 앞의 ‘중생=성령세례, 이후 성령충만’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에서 개혁주의신학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그러나 반면에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크게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또한 개혁주의신학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앞으로 ‘제 3의 물결’에 대한 개혁주의신학의 평가와 적용이 어떻게 진전될지 기대가 된다. ‘제 3의 물결’은 국내에 잘 알려진 존 윔버(John Wimber),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찰스 크래프트(Charles H. Craft), 베니 힌(Benny Hynn) 등의 사역과 저서의 영향으로 현재 많은 독자층과 지지자들을 얻고 있다.

성령세례의 양 차원

필자는 앞에서 제시한 여섯 가지 유형의 성령세례론이 영적 사실과 경험의 ‘성령세례의 양 차원’으로 정리될 수 있다고 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전제해야 할 것은, 성령세례라는 경험의 내용이 신자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좀더 부언하자면, 죄성의 제거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성령의 매개를 통한 십자가의 연합의 진리 속에 이미 포함된 것이다. 또 봉사의 능력으로서의 성령세례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서의 성령이 지닌 능력의 범주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성령은 이미 거듭날 때 내주하시는 것이다. 방언의 표적을 중시하는 성령세례라 할지라도, 그 방언 체험이라는 현상은 이미 거듭난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인 것이다.

성경에는 분명한 영적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속에서는 이 영적 사실에 대한 다양한 경험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영적 사실(spiritual truth)의 차원과 함께 경험(experience)의 차원 역시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성령세례의 양 차원’은 신자의 삶 속에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이미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교리를 따르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이 정말 자기들의 삶 속에 적용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형식적으로만 ‘제 2의 축복’ 교리를 되뇌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영적 사실에 대한 앎에 근거해서 성령세례의 능력이 그들의 삶에 나타나기를 위해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한편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교리적 노선의 사람들도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의 능력이 그들의 삶 속에 ‘경험의 차원’으로 구현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이에게 ‘당신은 이미 성령세례 받았으니 더 이상 구할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때로는 영적 태만을 방치시켜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거듭난 자는 당연히 성령세례의 능력을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현재까지도 한국 개혁주의신학 내에서 해결 짓지 못하고 있는 성령세례론의 양 노선간의 갈등은 충분한 조화의 길을 찾을 수 있다. 어느 노선이든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장점은 손상되지 않는다.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노선에서는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을 보전하고 있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노선에서는 성령세례의 ‘경험의 차원’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상대방 노선의 강조점을 자신의 노선에 용인함에 있어서 무리가 일어날 리 없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구분하는 입장에서는 ‘성령세례의 영적 사실의 차원’에서의 능력을 확인해 나가면 된다. 한편 중생과 성령세례의 동시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도 역시 ‘성령세례의 경험의 차원’을 삶 속에서 실증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성령세례의 양 차원’에 대한 이해는 한국교회 내의 성령운동의 혼잡함과 성령론에 있어서의 불협화음을 치유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적용성을 지닌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이해에 근거한 성령운동의 확산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적 성령세례의 능력을 한국교회 내에 풍성히 구현시켜 나갈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