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중립, 상황 윤리?
현대의 교육학의 기본은 절대 기준에 대한 믿음이 없는 고로 무엇이든지 상대적이다.
우리는 이것을 가치 중립, 상황 윤리라고 부른다.
이전에 우리 조상들은 무엇이든 선악의 2분법이었다. 흑백 논리였다.
선악,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합법과 불법, ...
조화, 균형, 타협, 포용, 일치 등을 주장하는 현 세상에서 선악의 2분법 잣대는 분열과 분리, 다툼만을 불러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상대성 이론이 나온 이후부터 절대란 말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상대성 이론은 단지 물리학의 용어가 아니라 모든 학문, 삶의 모든 가치 영역에 다 적용되었다. 어떤 일은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다. 선일 수도 있고 악일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절대란 것은 없다는 것이다. 실용성을 기준으로 두면 유익하고, 이익이 되기만 하면 그것은 무엇이든지 선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좋은 마술사, 나쁜 마술사가 있을 수 있다.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면 좋은 마술사, 해를 끼치면 나쁜 마술사이다. 그러나 성경은 마술사는 모두 죽이도록 되어 있다. 좋은 마법, 나쁜 마법이란 없다. 마법 자체가 불법이요, 사악한 짓이다. 인간의 공리, 실용, 이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세상 사람들에은 무엇이든지 그 쓰임새를 따라 판단한다. 어떤 유령을 보면 좋은 마귀들과 나쁜 마귀들이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천사들이 있고, 마귀의 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맞지만 좋은 마귀들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물은 소가 먹으면 젖이되고, 뱀이 먹으면 된다. 아무리 독이라도 바르게 쓰면 약이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물과 독에는 선악의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돈이나 물질을 비롯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면 영적인 것이요, 마귀를 위해 사용하면 악한 것이다. 내 몸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 이것이 핵심이다. 그 자체는 선악을 논하지 않는다. 몸(body)과 육신(flesh)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몸은 누구에게 드리느냐에 따라서 의의 병기가 될 수 있고, 불의의 병기가 될 수 있다. 주님께 드리면 산 제물이 된다. 죄에게 내어 주면 죄의 종이 된다. 그러나 육신은 그렇지 않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이는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그것을 어떻게 행할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노라.](롬7:18). 하나님께서 이미 분명하게 판단해 주신 것들, 밝혀 놓은 것들에 대한 가치 기준을 무시하고 자기 철학과 가치관대로 가치 중립을 선언하고 적용하는 것이야 말로 인본주의의 핵심이다.
동양 철학에서는 중용을 중요시한다.
항상 중립, 중간적 가치가 균형과 조화의 극점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흑백 논리, 선악의 2분법은 비타협, 분리주의자, 편협한 외골수란 욕을 먹는다.
성경은 가치 중립이란 없다. 빛과 어둠은 조화를 이룰 수 없다. 함께 걸을 수도 없다.
그리스도 vs 적그리스도, 성령 vs 악령, 의 vs 불의, 선 vs 악 etc ...
성경을 따라 기준이 분명히 정립된 사람, 가치관이 확립된 사람들에게는 삶이 모호하지 않고,
생각이 혼란스럽지 않다. 일이 끝난 후 결과를 봐야 판단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일이 끝나서 자신에게 어떤 결과가 드러나는 것으로 판단하지만 성경은 그 동기와 과정에서 이미 판단한다. 일을 판단하기 전에 마음을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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