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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작성자: THE WORD
성령과 마귀(01)
말씀. 사59:19


성령과 마귀는 저 하늘이나 외계의 어느 공간에서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현재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전쟁을 수행합니다. 성도들과 교회를 사이에 두고 싸웁니다. 빛과 어둠의 전쟁, 생명과 죽음의 전쟁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과 죄와 사망의 법(롬8:1-2)의 싸움입니다. 성령이 마귀에게 지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성령을 의지해야 할 성도가 성령을 의지하지 않음으로써 마귀에게 지는 일이 허다합니다. 성도들은 모두 ‘마귀를 대적하라’(약4:7)는 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마귀와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마귀의 일들을 멸하려 하시는 것이라.](요일3:8b).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을 바탕으로 성도들 안에 일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은 살과 피에 함께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에 참여하셨으니 이것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시고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2:14-15). 주님께서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음의 권능에 삼킴을 당한 것이 아니라 사망마저 삼켜 버린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으심을 내가 믿을 때 나는 죽음에서 해방됩니다. 죄 가운데서 죄성을 지닌 채 태어난 인간,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사람이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죄에 대해 죽는 죽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기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권능은 너무나 강합니다. 마귀는 죄의 권능, 사망의 권능을 가지고 인간을 종으로 부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왜 인간의 몸이 필요하셨습니까? 왜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까? 죽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음으로서 죽음의 권능을 가진 마귀를 멸하시기 위함입니다(히2:15). 죽은 자에게 마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아무 권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이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믿는 자들 안에 동일한 죽음이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주님이 한 번에 영원히 이루신 일을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 안에 현재적 사건이 되며, 실제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즘은 무선 통신이 발달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일이라도 실시간으로 자료가 전송되고 사진과 음성이 전달됩니다. 저장을 해 두면 몇 년 후에 다시 쓸 수도 있습니다. 미력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과 피는 성령을 통해서 2000년이 아니라 20,000년이 넘어도 영원히 동일한 효과, 권능이 지속됩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그 피를 믿는 자는 즉시 마음과 양심이 깨끗해집니다. 죄가 완전히 제거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주님은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번 죽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흘리신 보혈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단 한번으로 족합니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 제사장마다 날마다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희생물들을 드리되 이것들은 결코 죄들을 제거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이 사람은 죄들로 인하여 한 희생물을 영원히 드리신 뒤에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사](히10:10~12). 주님의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 사람 역시 완전히 죽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곧 믿는 그 사람의 죽음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진리가 나와 함께 죽었다는 진리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죽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죽기를 바랍니다. 마치 레이저로 몸 안에 있는 병균을 죽이듯이 죄만 죽여주시면 좋겠다! 생각하거나, 자신은 죽지 않고 마귀만 죽여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자신이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진리가 환영받지 못하고 거침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절반의 복음만 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위해 죽음이다! 아멘.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받아들이고 좋아합니다. 십자가 위에 내가 달려 죽어야 한다는 진리는 싫어합니다. 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죽음입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과 마귀를 모두 멸하실 날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죄가 죽은 것이 아니라 죄인인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주님은 마귀를 멸하시겠지만 현재 마귀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천년 왕국이 끝난 후에야 완전히 멸망합니다. 치과 의사가 썩은 충치를 뽑아내듯이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뽑아 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처리해 버리시고, 새 생명을 주심으로 새롭게 살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입니다. 주님은 고쳐서 쓰지 않으시고 이전 것은 없애 버리시고 새 생명을 불어 넣어 새롭게 창조해서 쓰십니다. 마귀는 계속해서 자아를 죽일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고치면 된다고 말합니다. 종교적 수행이나 기도나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의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 있으면 성도는 언제나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령은 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 안에 새 생명을 불어 넣으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새 창조를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얼마나 놀라운 진리입니까? 죄를 이기려고 애를 써 본 사람들은 무슨 수를 써도 죄를 이길 수 없었다는 고백이 그의 간증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받아들임으로써 완전히 죄에서 해방됩니다. 자신이 죽은 줄 모르는 사람은 마귀와 싸울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죽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결코 죄의 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해방된 상태가 아닙니다. 1)

성령께서 마귀를 직접 상대해서 이기는 일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마귀를 직접 대면해서 싸우시는 일은 힘든 것도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또 주께서 자신의 입술의 호흡으로 친히 마귀들을 멸하실 날도 있습니다. 현재 교회 시대에서 주님은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마귀와 싸우십니다. 구약에서는 유대 민족을 통해서 세상에 자신의 권능을 드러내신 것처럼 이 시대에는 교회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온 세상과 저 하늘에까지 주님의 지혜와 신비들을 드러내십니다(*엡3:9-10). 마귀에게 속한 이 세상을 이기도록 하심으로써 성령은 마귀를 대적하십니다. 어떻게 이깁니까? 주님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살면 됩니다.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 [신실하도다 이 말이여, 이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이요,](딤후2:11).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치시는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면 된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골2:20).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늘” 이것이 성도들이 세상사는 기초입니다. 자아가 죽은 채로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율법도 효력이 없고, 죄도 효력이 없고, 그 무엇도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갈2:20a)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런 사실 관계를 왜곡하고 속이려 듭니다. ‘너는 죽은 적이 없다’고 속입니다. 이전에 나의 주인 노릇했던 기득권을 여전히 주장하려고 합니다. 사실은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진리를 왜곡하고, 믿지 못하게 하여 속입니다. 믿지 않으면 어떤 영적 사실도 체험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으면 권능도 생기지 않기 때문에 마귀는 줄기차게 불신을 조장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하면 마귀는 물러납니다(약4:7,벧전5:9). 진리를 믿고 싸우든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나 체험을 주장하며 굴복하든가는 전적으로 자신의 선택이요, 책임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라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아니라고 합니다. 성령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마귀는 죽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령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합니다. 마귀는 ‘이해되냐? 느낄 수 있냐?’고 의심을 던집니다. 이것이 성령과 마귀의 싸움입니다. 성령은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믿기만 하면 주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 되고, 주님의 부활은 우리 자신의 부활이 됩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입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 빛이 임할 때 어둠이 물러나는데 수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빛이 임하는 순간 어둠이 걷힙니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죄와 사망의 권세는 일순간에 걷히고, 그들의 권능은 폐해지고 맙니다. 그것은 단숨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도들이 의의 종이 되느냐? 죄의 종이 되느냐? 는 자신을 누구에게 드려 복종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알고, 그렇게 여기고, 주님께 자신을 드리면 의의 종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죄의 종으로 살다 한 평생을 마감합니다. 성령께서 마귀를 이기시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승리하려고 하십니다. 우리를 제쳐둔 영적 전쟁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 육신을 자극함으로써 성령을 이기려고 합니다. 육신은 성령을 거스르고, 대적합니다. 육신은 성령께 복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으로 살게 하여 성령을 소멸시키고, 성령을 근심케 하고, 성령을 슬프게 할 줄 압니다. 누구든지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기로 작정한다면 그는 수많은 마귀의 시험과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제 구체적인 예로 들어갑니다. 성령이 영이신 것처럼 마귀 역시 영입니다. 성령은 생명을 살리는 권능을 가지고 있고, 마귀는 사망의 권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요일 5:6), 약속의 영, 생명의 영, 은혜의 영, 영광의 영(벧전4:13,14), 지혜와 계시의 영, 하나님이 보내신 위로자, 양자의 영, 믿음의 영(고후4:13) 등으로 불리는 반면 마귀는 죽음과 저주를 불러 오는 영입니다. 세상의 영이며, 악한 영이며, 더러운 영(불결한 영)입니다. 마귀는 거짓말의 영이요, 파괴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의와 빛의 열매를 맺고 살며, 하나님께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습니다. 성령으로 살 때 사람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반면 마귀로 말미암는 삶은 거짓과 위선과 악함과 더러움으로 점철된 삶을 살게 됩니다. 마귀는 매우 종교적이어서 주님 한 분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지 믿게 합니다.

한 사람을 두고 성령과 마귀는 모두 치열한 쟁탈전을 벌입니다. 성령은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하도록 하십니다. 마귀는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마귀 역시 뒤따라옵니다. 이런 예는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성경적으로도 정확한 예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때가 되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침례인 요한에게 나아와 물로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이 때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마귀와 대적했습니다. 마귀는 주님을 시험했습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마귀의 시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받은 후에 성도는 마귀의 시험을 받고, 마귀의 공격을 받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받은 직후 마귀와 싸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마귀와 싸우도록 인도함을 받고, 마귀의 공격과 시험을 받는 것이 영적 원리요, 법칙입니다. 보통 성도들은 자신들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더 이상 마귀의 공격은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성령 충만은 더욱더 크고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를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며 능력이 주어진 것이지 원수들의 공격이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 말씀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즉시 마귀의 시험과 불같은 공격을 맞게 마련입니다. 이 때 받은 은혜와 능력으로 승리하면 됩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는 놀라운 성령의 계시와 인도와 조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나니 그 까닭은 이것을 네게 계시한 이가 혈과 육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마16:17). 베드로의 이런 고백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마귀 역시 이때에 베드로에게 왔습니다. 베드로는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마귀에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성령으로 주님을 고백한 후에 곧 바로 사탄으로 말미암아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돌이키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실족하게 하는 자로다. 이는 네가 하나님에게서 난 일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에게서 난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로다, 하시니라.](마16:23). * 하나님에게서 난 일-- 십자가를 지는 일, 죽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난 일-- 자기 영광을 취하는 것. 주님이 주신 사역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에게서 난 일을 좋아했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의 노림수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게 하고 추구하게 합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의 일, 세상의 일, 자기만을 생각하게 하고 추구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이 왜 마귀 들린 일인지 깨닫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귀는 언제 찾아옵니까? 성령의 빛과 조명을 받고, 진리를 안 즉시 옵니다. 마귀는 지체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대적자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성령의 역사가 있는 그곳에 있습니다. 이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는 욥기에 이런 장면을 봅니다. [그때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주]를 뵈려고 왔는데 사탄도 그들 가운데 오니라. [주]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에서 오느냐? 하시니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에서 여기저기 다니고 또 그 안에서 위아래로 거닐다가 왔나이다, 하매](욥1:6-7).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함께 왔습니다. 사탄의 활동 무대를 보십시오. “땅에서 여기저기 다니고, 또 그 안에서 위아래로 거닐다가” 라고 합니다. 그의 활동 무대는 전 지구상의 모든 곳입니다. 지상에서 주님이 주목한 한 사람이 욥이었습니다. 마귀 역시 주님만큼이나 욥을 주목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자랑스럽게 여길만한 믿음의 사람이 된다면 그는 사탄에게도 동일한 표적이 된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마귀는 별볼일없는 사람들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칭찬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을 주목합니다.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온 교인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고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누가 있었습니까? 사탄으로 충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야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고 땅값의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으로 자신들을 채우는 대신 마귀로 자신들을 채우고 말았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은 모두 세상에서 나온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에 끌릴 때 그는 마귀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이들이 성도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가라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거듭난 신자들이었고, 한 때는 성령으로 충만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 멤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인생의 자랑을 위해 땅을 팔아 일부를 숨기고 마치 전부인 것처럼 내어 놓고, 완전한 헌신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마귀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육신을 자극하고, 정욕에 이끌리게 하며, 인생의 자랑을 위해 살게 합니다. 성령은 자아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도록 인도하시지만 마귀는 자아를 드러내고, 은근히 자랑하고, 뽐내고, 멋지게 보이게 하도록 유도합니다. 성령과 마귀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성령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인도하십니다. 마귀는 무엇이든지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모든 일 심지어 먹고 마시는 일까지도 주의 영광을 위해 하도록 인도하시지만 마귀는 기도, 전도, 금식, 성경 읽기, 찬양과 예배조차도 자신의 기쁨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성령은 늘 하나님을 위해 일하라고 하시지만 마귀는 절대 사탄을 위해 일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늘 자기를 위해 일하라고 할 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일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살도록 유혹하는 마귀에게 쉽게 속는 것입니다.

에덴의 동산에서 여자는 마귀를 위해 금지된 나무의 실과를 먹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먹었습니다. 자기 개발, 자기 발전, 자기 영광, 자신의 성장, 자신의 변화 등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법을 어기면서라도 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자기의 유익과 자랑이 되는 일이라면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마귀는 자아를 부추김으로써 주님을 배반하게 하고, 죄를 짓게 하며, 불법을 행하도록 합니다. 마귀는 항상 사람들에게 자아를 추구하게 합니다. 현 세대의 모든 교육은 남이 아니라 자기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문화요, 마귀의 권세 아래 있는 세상의 모습니다. 세상의 영은 철저히 자아(self) 중심입니다. 반면 성령은 철저히 하나님 중심입니다. 자아는 십자가의 죽음에 넘겨주고, 자아의 애정은 못 박아 버린 채 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타고난 본성을 너무나 거스리는 일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이요, 만족인 줄 알지만 그것이 마귀의 길이요, 성령을 대적하는 길입니다.

성령이 일하시는 곳에 반드시 마귀의 역사가 있습니다. 주님이 씨를 뿌리고 가면 마귀 역시 와서 씨를 뿌리고 갑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다른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하늘의 왕국은 마치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그의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고 가매 잎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그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주인에게 이르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나이까? 하매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하니] (마13:24~28a). 밭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받고, 은혜를 받은 때에 누군가 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마귀입니다. 마귀는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의 사역을 철저히 방해합니다. 여러분이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면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마귀는 언제나 말씀을 빼앗는 일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씨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마음 속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가는 자들이요,] (막4:14~15). 마귀는 지체하지 않습니다.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란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들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 마귀가 즉시 와서 빼앗아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경 말씀이 아닌 다른 책들이나 이야기들을 들을 때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는 한 번 들으면 평생 가기도 하고,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 설교는 지난 주의 것이 이번 주에는 생각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아무리 읽어도 처음 보는 구절들이 나옵니다. 이는 마귀들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마귀들은 지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성령과 마귀는 대적합니다. 성령은 말씀을 믿고, 깨닫게 해서 열매 맺도록 도우시는 반면 마귀는 그것을 빼앗거나 다른 씨를 뿌려 성장을 방해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성령과 마귀의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우리가 성령께 순종하면 마귀는 패배합니다. 마귀에게 순종하면 성령은 소멸됩니다.

주님은 공생애 사역의 시작부터 마귀와 싸우셨고, 전 생애를 마귀를 물리치시는데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이나 정치 제도나 종교 집단과 싸우신 것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들, 마귀들, 영적 악에 대항해서 싸운 것입니다. 우리는 광야에서 주님이 마귀와 싸우신 위대한 영적 전투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 기록되었으되]라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히4:12, 엡6:17). 성도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너희가 마귀의 간계(奸計)를 능히 대적하고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全身甲胄)를 입을지니 이는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을 대적(對敵)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政事)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라.] (엡6:11~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강력하고, 예리한 검입니다. 소위 레이져 광선이라고 불리는 전자 장비도 마귀에게는 무용지물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정사들, 권능들, 어둠의 치리자들, 영적 사악함을 대적하고 격파할 수 있습니다.

만약 성령의 검이 없다면 무엇으로 전쟁을 하겠습니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검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검을 잡고 싸우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모범을 보여 주셨고, 제자들 역시 그 검으로 싸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성령의 검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진리에 굳게 서는 것이 성령의 권능을 입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귀를 이기는 길입니다. 진리의 말씀 없이 혼자 고민하고, 고뇌하고, 걱정하고, 번민하고, 갈등하는 일은 영적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시달림을 당하는 중입니다. 마귀의 간계에 속고(엡6:11), 마귀의 정죄에 빠지고(딤전3:6), 마귀의 올무(딤후2:26)에 사로 잡혀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 승리하는 방법은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 들려지고, 내가 그 말씀에 반응해서 아멘으로 화답하고 열망하며 주님께서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할 때 성령의 권능으로 모든 마귀의 강력한 진이 파해지고 빛과 생명과 자유가 임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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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의 사항: 중생이 육신의 다시 태어남이 아니듯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힘, 함께 죽음’ 역시 육신의 죽음이 아니다. 때로 성도들이 이 진리를 오해하는 것은 거듭남에 대한 니고데모의 오해와 동일한 오해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죽음을 자꾸 육신의 죽음으로 이해하려고 하다 깨닫지 못한다. 깨닫지 못하면 믿음도 오지 않는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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