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과 복음(02)
말씀. 고전2:4


성령은 가장 강력한 복음 전파자이십니다. 성령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러 오신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은 믿는 자들을 복음 전도자로 삼으시고 전하게 하십니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 전도였습니다. 그들은 나가서 전하고 또 전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주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들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에게 손을 대어 /붙잡아다가/ 일반 감옥에 가두었으나 {주}의 천사가 밤에 감옥 문들을 열고 그들을 데리고 나와 이르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백성에게 다 말하라, 하매](행5:18~20).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고생을 한 사람들을 풀어 주시면서 "좀 쉬어라, 기회를 봐서 다음에 또 하거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복음 선포는 때와 방법이 없습니다. 성령은 강력한 복음 전파자로서 현재도 복음 전파에 매진하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그가 할 일은 복음 전파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 역시 일차적 목표는 복음 선포에 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고 정의되어있지만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Gospel)입니다. 복음서라 불리는 성경이 4권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복음이란 말이 무려 100번이 넘게 나옵니다. 구주의 탄생을 기쁜 소식(glad tiding), 좋은 소식(good tidings)이라고는 하지만 ‘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일컫는 말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두가 다 복음입니다. 바울은 복음 선포자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육신적 탄생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훨씬 더 많이 선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성령께서는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 복음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한 분을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분을 어찌 믿으리요? 선포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라고 한 대로 복음은 일단 선포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선포자가 선포하는 복음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고(롬10:17), 믿을 때 새로운 출생이 일어납니다(롬3:5,7).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이 있습니다(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요6:63).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꾸준히 들을 때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듣는 이들 안에 역사하시고 믿음을 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교회에 선포자를 세우시고, 교사를 세우시며, 목회자를 세우시는데 이는 모두 복음 전파를 위한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이 선포되고, 그 복음을 마음으로 믿을 때 누구든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가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권능을 입게 됩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 복음 선포가 시작되었습니다. 복음 선포의 시작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부터 임한 성령이 주도자였습니다. 복음 전파의 주체자는 성령이시다! 우리는 단지 도구입니다. 사도들과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기 전에 기도하고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성령이 임하신 후에 권능을 받고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성령께서 복음 선포의 주도권을 잡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복음 선포 사역을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후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복음 전파의 주체는 언제나 성령이십니다.

사도행전에는 복되신 성령님의 이런 사역을 분명히 보여주는 일곱 가지 예가 나옵니다.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행2:22,23,37)은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디오피아 내시(행8:29-38)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복음 전도자 빌립을 통해 복음을 듣고 그 자리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다소의 사울(행9:1-6)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듣고 회심했습니다. 이방인 고넬료라는 백부장(행10:44)은 천사의 지시를 받아 사도 베드로를 초청하여 베드로가 전한 복음을 듣고 성령을 선물로 받고 거듭났습니다. 빌립보의 간수(행16:25-34)는 바울과 실라를 지키다가 그들에게 복음을 듣고 온 집안이 다 침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총독 벨릭스(행24:24,25)는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 벌벌 떨었습니다. 아그립바 왕(행26:1,23-28)은 바울의 확신에 찬 복음 선포를 듣고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에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도다, 하매](행26:28). 비록 그가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움직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모두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은 복음 전파자로서 지금도 전 세계의 곳곳에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활동, 그들의 사역에 대한 기록이지만 실제로는 성령께서 그들을 통해 일하신 사역을 그린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역은 2,000년 교회사를 완전히 관통하고 있으며, 현재도 강력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 말씀을 선포해 주시는 분은 목사나 전도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귀에 들려주는 것이 전부이지만 그 내용을 마음에 심어주고, 깨닫게 하고, 자라나게 하시며, 열매 맺게 하시며, 믿게 하시는 분은 전적으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성경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확신을 가지고 믿지도 못할 것입니다.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2,000년 전에 예수란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는 정도가 전부입니다. 유대에서 있었던 한 사건이 역사를 통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무슨 이유에선지 그 죽음을 추종하는 자들이 기독교라는 거대한 종파를 이루었다는 것이 불가사의한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통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현재적 예수 그리스도, 바로 나의 주님이시오, 생명이신 주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를 대신한 죽음이요, 나의 죽음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고 믿게 됩니다. 그분이 흘리신 피가 나의 죄를 남김없이 깨끗하게 제거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됩니다. 전에는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마음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나고 믿기지 않던 것이 믿겨지는데 그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많이 들었고, 교회에 여러 차례 갔어도 별로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던 진리가 내 마음 속에 빛으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때부터 그는 성경의 말씀은 읽고, 공부하는 독서용 책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영적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말하기를 ‘성경은 읽는 책이 아니라 먹는 책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읽는 책은 읽기 싫으면 안 읽으면 그만이지만 먹는 책은 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먹기 시작할 때 영[속 사람]은 자라고 강건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복음을 전해 주실 때 복음은 2,000년 전에 이루어진 역사적 진리,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내 안에 있는 죄를 해결해주고, 생명을 풍성히 공급해 주는 현재적, 실제적 진리가 됩니다. 더 이상 추상적이고 영적이고 애매모호한 목사들의 설교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나의 생명과 삶을 바꾸어 놓고, 영적 권능을 부여해 주는 진리가 됩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사람들은 누구나 육신적이며, 잘 깨닫지 못합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을 때는 율법에는 박사였던 니고데모조차 ‘거듭남’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출생 VS 육신의 출생”. 주님과 1:1로 말씀을 듣던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이 말씀한 생수를 우물 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성령의 생수 VS 우물에서 나는 물” 생명의 빵에 대한 진리를 듣던 유대인들은 제발 그런 빵을 주시기를 구했습니다. “생명의 빵 VS 육신의 빵”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계속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이 영이요, 생명인 주님의 말씀을 헷갈려하고 오해하고 깨닫지 못했던 것처럼 오늘날 교인들 역시 대부분 그들과 마찬가지로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한 말씀은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영적인 것은 육적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복음의 진리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복음 전파의 주체는 성령이란 이 한 가지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전도를 많이 한다고 해도 그 전도의 주체가 성령이 아니라 나의 지혜와 말로 하는 것이라면 듣는 사람은 결코 영적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만 하나님의 것들을 계시하시고,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된바,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이 보지 못하였고 귀가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우리에게 그것들을 계시하셨으니 이는 성령께서 참으로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들까지도 살피시기 때문이라. 사람의 것들을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람의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것들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2:9-12). 성령께서 우리 안에 말씀해 주실 때 십자가는 그냥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죄를 해결한 십자가임을 알게 됩니다. 주님의 피는 나의 죄를 깨끗하게 한 피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이 도움대신 신학교를 세워서 인간적 지혜와 지식으로 신학을 발전시켜 논리적 해답을 구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체계화된 신학의 변증으로는 누구의 생명도 살릴 수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전해 주시는 복음만이 죽은 영을 살리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사역자들을 친히 세우시고 보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들이 {주}를 섬기며 금식할 때에 성령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서 시킬 일을 위해 그들을 내게로 구별하라, 하시니](행13:2). 선교사를 세우시고 파송하는 일이 바로 성령의 사역임을 봅니다. 성령께서는 교회 내에도 다양한 직분을 주시고, 그들을 세우심으로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사역자들을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십니다. 감독자들을 세우십니다. 조직을 세우고, 세력을 확장하라고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으로 그들을 먹이라고 보내십니다(행20:28).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지명하는 것은 비극적인 실수를 합니다. 성령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이 지명하신 사람은 거의 없고 고용된 목사는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웅변과 논리와 변증으로 된 복음 선포는 많지만 영과 진리와 생명으로 전해지는 복음 선포는 거의 없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지 않는 설교는 아무리 선포되어도 생명의 변화, 삶의 변화를 낳지 못합니다. 교인들은 양산해 낼 수 있어도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복음의 씨앗은 성령을 통해서만 생명으로 나타나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복음이 마음 속에 임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변화되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아무리 인간적으로 호소하고 설득하고 무슨 짓을 해도 변하지 않던 사람이 복음을 받을 때 변화됩니다. 복음은 반드시 성령의 능력으로 전해져야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사람의 지혜의 유혹하는 말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과 권능을 실증(實證)함으로 한 것이니](고전2:4). 성령과 권능을 실증함으로 전해진 복음은 생명을 낳고 변화를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삶과 열매를 보여 줍니다. 사람의 지혜와 그럴 듯한 말로 전해진 복음은 교회 건물을 세우고, 출판 사역을 하고 학교를 짓고, 병원을 만드는 일은 하지만 생명을 낳지는 못합니다. 성령이 복음을 전해 주시는 것은 학교 짓고, 병원 짓고, 교회 건물 짓는 건축업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인격과 권능과 지혜를 가지고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먼저 사람을 사역으로 부르십니다. 다음으로 성령께서는 그 종으로 하여금 그 사역을 수행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쉽게 말해서 성령의 기름부음은 능력의 부여입니다. 이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주는 영적 권위이며 하나님께서 하라고 주신 일들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령은 복음 선포를 통해서 모든 일을 하십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지체들을 경고하십니다(딤전4:1). 성령은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돕습니다(행15:28). 성령은 필요에 따라 저주하시기도 하며, 수고에 대해 복 주십니다(계2:7). 오늘날 교회들은 종종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이미지를 고양하는데 너무 많은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관심은 늘 바로잡아 주고 적절한 자격을 부여해 주신 그분께로 향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입니다. 성령은 감찰하시고 복음 전도자들의 노력에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계22:17). 성경의 마지막 장에서 듣는 자들과 생명수에 참예할 자들을 향해 마지막 초청이 다시 한 번 나오는 것은 매우 필연적입니다. 성령은 잃어버린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께로 오도록 촉구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매우 짧은 말이지만 긴박한 초청의 음성입니다. -“오라”-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보혈을 통해 어떤 죄인일지라도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화시켜 버릴 수 있습니다. 저는 주변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딴 사람이 된 예를 많이 보았습니다. 술주정뱅이가 술을 끊은 정도가 아니라 전도자로 변한 경우도 보았고, 매일 싸움만을 일삼던 사람이 변화되어 목회자가 된 사람도 보았습니다. 성령의 도구는 복음이요, 복음의 권능은 성령입니다. 이 둘은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 위선자가 진실한 사람이 되고, 거짓말쟁이가 정직한 사람이 되고, 자신만을 알던 사람이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복음이 성령을 통해 그 마음 안에 뿌려지고 자라날 때만 가능한 일들입니다.

첫째,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타락한 본성, 타락한 사고, 타락한 애정, 타락한 의지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의롭고, 경건하고 훌륭하다 해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완전히 까막눈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14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 까닭은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요,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 까닭은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세상 지혜와 철학으로는 도저히 성령의 일들을 알 수 없습니다.

둘째, 우리는 타락한 애정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미워해야 마땅한 것들을 사랑하며, 사랑해야 마땅한 것들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사랑하는지 보십시오. 돈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더러운 욕정을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죄를 사랑합니다. 그것이 본성에 부합되고 자연스럽고 끌리기 때문입니다.

셋째, 우리는 모두 비뚤어진 의지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7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까닭은 육신적인 생각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참으로 그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롬8:7). 하나님의 것, 진리는 본성적으로 거부하고 반역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거듭났을 때는 생명의 말씀이지만 구원받기 전에는 심히 짜증이 나고 불쾌한 소리가 됩니다. 말씀만을 주장하면 교조주의자라고 욕이 나오고 기독교 정신이 중요하다고 강변합니다. 말씀 자체보다는 기독교적인 분위기, 사랑과 희생과 봉사와 같은 기독교 정신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참다운 종교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의 가치를 전혀 모릅니다. 비뚤어진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영접할 때 반역과 거부하려는 불순종의 의지가 진리에 순종하려는 유순한 마음과 의지로 바뀌게 됩니다. 자발적으로 진리를 따르려는 마음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기쁘게 하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꼭 범죄나 정욕과 같은 나쁜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세련되고 고상한 높은 도덕률일 수도 있습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고, 도둑질이나 거짓이나 간음을 행치 않고 어떤 추잡한 것이나 더러운 것들을 멀리하며, 문화적인 것, 음악, 예술 따위의 고상한 것들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야 말로 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자신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배역하고 반역하는 의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에 대한 유일한 바른 태도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완전히 순복하는 것입니다. 삶의 전인적 목표가 자신의 만족이 아니라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지적으로, 애정적으로, 의지적인 모든 것이 타락한 가운데 나왔다면, 새로운 출생에서는 무슨 일이 있습니까?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은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부여해 주십니다. 돈을 주시거나 건강을 주시거나 내가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무엇을 잔뜩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새 생명, 은혜, 지혜, 죄를 미워하는 마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건전한 생각의 영, 평강, 기쁨 등을 주십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돈이나 감각적 쾌락, 즐거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새로운 지적 성품,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눈이 멀었던 대신 하나님의 진리에 눈을 뜬 새로운 이성(지각)을 주십니다. 우리는 지성만 새로워진 것이 아니라 애정도 새로워졌습니다. 옛날 취향 대신 새로운 취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옛것을 사랑하던 대신 새 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던 것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한때 우리가 미워했던 것을 지금은 사랑하며, 한 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을 지금은 미워합니다. 나의 삶 가운데 이런 경험이 얼마나 분명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저의 삶을 되돌아 볼 때,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5:17에서 말씀하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성령을 통해 거듭나게 될 때, 우리의 지성과 애정 외에 우리의 의지도 새로워집니다. 즉 자원하는 의지를 가지게 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그의 의지는 더 이상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됩니다. 정말 바라는 것은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전부가 됩니다. 우리 주님이 그 안에 살면 그는 남은 때를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도 않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음이니 오직 /이것은/ 기록된바, 주를 모욕하는 자들의 모욕이 나를 덮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롬15:3).

지성, 감성, 의지 외에 더욱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부여해 주신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신성)이 우리 안에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옛 본성이 새 본성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본성을 부여해 주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새 성품을 주실 때 쓰는 도구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1:4은 이점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곧 주께서 이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느니라.](벧후1:4). * sinful nature ➠ divine nature.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외모와 본성을 닮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듯이 성령을 통해 거듭나게 된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과 동일한 성품에 참여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늘 사용하시는 방법이며, 거듭남, 새로운 출생 때에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 안에 심어주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도구인 것은 사실이나 성경을 읽기만 하면 거듭나는 것은 압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완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성품, 새로운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자 하는 소원이 있다면, 설교나 성경 공부 또는 개인 구령을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 사람 안에 정확하게 심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그분이 친히 그 일을 하도록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성령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믿는 죄인들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와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새 생명을 부여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피와 죽음이 없다면 성령께서는 죄인들에게 임하실 수도 없고, 죄인들을 새롭게 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라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 죽음의 근거 위에서만 죄인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이루어진 일들,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우리 안에 실제가 되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주님의 것을 가지고 우리 안에 일하십니다.

중생(거듭남)은 단지 옛 사람을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새 사람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 그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성품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 몸을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십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요일4:13). 성령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늘에 계시는 주님이 바로 우리의 몸 속, 즉 영 안에 처소를 정하시고 영원토록 거하십니다. [그러나 너희 안에 하나님의 영께서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 안에 있지 아니하고 성령 안에 있나니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롬8:9). 하나님의 영, 성령, 그리스도의 영이란 말이 차례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모두 들어와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는 일은 복음을 받아들일 때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이야말로 모든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의 내적, 외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요, 방법입니다. 가장 시급하고도 절박한 해결책입니다. 지금 돈 문제로 집안이 쪼개지게 생겼고 회사가 부도나게 생겼고, 나라가 망하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냐? 고 말할지 몰라도 그런 순간에도 그 가정과 회사와 국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복음입니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신음하는 병자들, 곧 죽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한 병의 귀한 약, 수술할 수 있는 유능한 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단연 복음입니다. 복음은 병자에게 약보다 중요하며, 파산 지경에 처한 사람에게 돈보다 중요합니다. 좋은 약이 환자를 살리고, 많은 돈이 기업을 살리고, 좋은 기술이 돈을 벌어다 주겠지만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내 안에 영이 해결되면 외적인 모든 문제는 복음의 권능으로 인해 저절로 해결됩니다. 암 환자에게 암에 대한 특효약보다 복음이 훨씬 더 위대한 영약입니다. 모든 물질은 영이신 하나님의 작품이요, 하나님의 호흡으로 주어졌습니다. 만물의 근원은 원자나 중성자나 양자가 아니라 영이신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물질이 만들어졌고, 생명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올 때 그 영은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충만케 하는 충만이 되는 것입니다.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는 위로가 주어지고, 안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안식이 주어지고, 불안한 사람에게는 평강이 주어지고, 낙담한 자에게는 샘솟는 기쁨이 주어지고, 절망한 자에게는 산 소망이 주어지고, 약이 필요한 자에게는 채찍에 맞으신 주님의 몸이 치료의 약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모든 것이 되어 주십니다.

성질이 급한 사람에게는 여유로운 마음을 주시고, 분노하는 자에게는 냉철한 마음을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이것저것 많이 있지만 그것들의 목록을 적어서 주님께 달라고 구하는 대신 복음을 믿고 주님을 영접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모든 것이 되어 주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문제 해결에 매달리거나 집착하지 말고 주님을 믿고 주님께 더욱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주신 참된 복음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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