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고전2:4
죄의 확인이란 죄들만을 확증시켜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증거, 신성 모독](마15:19) 등과 같은 죄를 깨닫게 해 주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사회적 기준, 도덕적 기준, 법률적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의인이요,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것을 말해 줍니다. 성령의 책망을 통해 자신을 본 사람들은 누구나 욥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욥42:6). 욥은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나 의롭게 살았던지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는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욥이 주님을 만났을 때 자신을 혐오할 정도로 더러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고 회개하였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에 눈을 뜨면 구주가 보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에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죄인이란 점에 대해서 깊이 깨닫는 사람만이 구주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기 전에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되는데 이 일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의 의(義)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헛된 것인가를 깨달을 때 우리는 구원의 복음, 구원자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오직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사64:6)라고 했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의 모습입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예절 교육을 받고, 교양과 품위를 갖춘 고상한 사람처럼 자라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의 본 모습은 ‘부정한 물건’과 같고 ‘더러운 누더기’같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그 점을 지적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책망을 통해 우리는 인생을 얼마나 오래 살았든지 간에 모두 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는 우리의 범죄가 주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기 때문이요, 또 우리의 범죄가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니라. 우리의 불법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그것들을 아나이다.](사59:12).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를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눅5:8). * sinful man -죄성을 가진 사람, 죄인의 정확한 의미. 베드로는 자신이 어떤 죄를 지었고, 어떤 악한 일을 했는가 등을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성, 자신의 정체성, 자아의 실체를 정확히 본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자신을 볼 때 우리는 저주받은 자요, 영원히 지옥의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자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죄인이란 의미는 ‘죄를 그 인격적 특성으로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죄가 본성이요, 죄의 성향이 그 사람의 인격이란 뜻입니다. 자신이 죄인인지 모르는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는 모두 누구 때문이다, 무엇 때문이다, 부득이했다, 어쩔 수 없이 없었다,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등으로 변명합니다. 환경을 탓하거나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실수로 그랬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 탓 아니면 남의 탓을 하고, 탓할 것이 없으면 조상 탓이라도 하고야 맙니다.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가 현상으로, 행위로, 결과로, 열매로 드러난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는 안에 내재해 있는 죄가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는 일은 성령의 조명, 말씀의 빛 없이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대언자 이사야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았습니다. [그때에 내가 이르기를, 화로다, 나여! 이는 내가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므로 망하게 되었음이니 곧 내가 입술이 부정한 백성의 한가운데 거하면서 내 눈으로 왕 곧 만군의 [주]를 보았음이라, 하였더라.](사6:5). 우리는 남과 비교해서 죄인이란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사람들이 죄인이란 사실과 더불어 ‘갈보리에서 주님께서 치르신 희생을 거부하는 죄와 불신’은 지옥에서 영원히 저주받을 수 있는 유일한 죄란 사실을 말해 줍니다(요3:18). 죄는 육신이 죽기 전에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는 행동이 아니라 성향이며, 죄는 우리 몸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롬7:17). [이제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더 이상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거하는 죄니라.](롬7:20). 죄는 죄인의 주인으로 그 사람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죄성은 꼭 살인이나 도둑질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금욕이나 수행과 같은 종교심으로 드러나고, 엄격한 율법주의나 도덕주의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을 돕는다는 만족감과 자기 의를 자랑하려는 위선으로 드러나고, 때로는 영적으로 드러나 보이고자 하는 외식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명예심과 도덕심, 자존심을 세우는 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자신은 보통 사람과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처럼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학문과 예술과 교양을 사랑하는 사람처럼 보여지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일컬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 나쁘냐고 말할지 몰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眼目)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다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났음이라.](요일2:16). 이런 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하면 그는 죄에서 해방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주님께 구하고, 얻으려고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자신은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라면 수술을 해서라도 끄집어 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전 인격, 전 생애, 전 활동을 좌지우지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죄의 권능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이기려고 해도 이길 수도 없고, 끊어 버리려고 해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아담을 통해 들어온 죄는 인류의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고(롬5:12), 모든 사람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으며 죄의 열매와 죄의 삯을 거두고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죄는 병들지도 않고, 약해지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내가 죽어야만 해결됩니다. 법이든 죄든 죽은 자에게는 효력이 없습니다(롬7:1).
성령은 죄의 세상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냥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죄의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죄의 잘못을 깨닫게 하십니다. 죄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죄의 더러움을 깨닫게 해 줍니다. 죄는 일시적인 쾌락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쾌락을 따라갑니다. 죄는 권능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죄의 종으로 삼아 버립니다. 아무리 죄를 주인으로,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은 영적이나 나는 육신적이어서 죄 아래 팔렸기 때문이로다.](롬7:14). 이것이 우리의 본 모습입니다. 죄는 죄인들 안에서 왕 노릇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 같아도 알고 보면 죄의 종이 된 자들을 죄로 이끄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죄는 속임수가 있습니다. 죄는 모든 것을 다 속입니다. 죄의 속임수에 속아서 죄를 짓게 될 때 그 끝은 사망이요, 멸망입니다. 죄는 죄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죄는 죄의 삯을 요구합니다. 죄의 법이 있어서 죄인들은 그 법에 따라 살게 됩니다. 마귀는 죄의 사람입니다(살후2:3). 그러므로 모든 죄인은 죄의 사람 마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죄인들은 진리를 거역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게 됩니다. 성령은 모든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 앞에 유죄임을 입증해 주십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모두 죄를 섬기는 죄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죄를 타고난 사람들, 죄를 안고 사는 사람들, 죄의 종노릇하는 사람들, 죄의 지배를 받고, 죄를 섬기는 사람들, 죄로 이끌리는 사람들, 죄의 쾌락을 즐기고, 죄의 속임수에 속는 사람들,... 그들을 한 마디로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본질이요, 저의 본질입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이며, 우리 가족의 이야기이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근본 문제가 바로 이것(죄)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제거하시기 위함입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오시는 것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로다.](요1:29). 죄의 종들이 죄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오셔서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는 그리하였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세상 끝에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음이니라.](히9:26). 주님은 자신의 몸을 통해 죄를 제거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피와 그 죽음을 통해 내 안에 있던 죄를 흔적도 없이 제거해 주신 것입니다. 이는 몸속에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나 악성 종양이나 암 세포를 제거해 주신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믿을 때 죄는 깨끗이 사해집니다. 죄는 깨끗이 제거됩니다. 양심은 정결하게 씻기고, 마음 역시 순수하게 씻음 받습니다. 단지 주님을 믿고 영접하기만 했을 뿐인데 주님은 죄로 더러워진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죄로 특징져지던 인간을 의로 특징 지워지는 인간으로 바꾸십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바꾸십니다. 죄의 종이 의의 종으로 바뀌고,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며, 은혜가 우리를 다스립니다.
성령은 죄인들과 다투십니다(창6:3). 성령은 죄인들을 심문하십니다(겔20:35,36 렘2:35). [그러나 너는 말하기를, 나는 무죄하니 그분의 분노가 분명히 내게서 떠나리라, 하거니와, 보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다, 하므로 내가 너를 법대로 심문하리라.](렘2:35). [너희를 인도하여 백성의 광야에 이르러 거기서 너희와 얼굴을 마주 대하여 법대로 심문하되 내가 이집트 땅 광야에서 너희 조상들을 법대로 심문한 것같이 너희를 심문하리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겔20:35-36). 성령은 죄인들을 이끄십니다(요6:44,12:32). 성령은 죄인들을 초청하십니다(계22:17). 복음을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은 죄인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복음 전도자였던 제임스 스튜어트는 말하기를, ‘성령께서는 조사하시는 분이시다. 얼마나 철저히 조사하는지 그 사람의 관심사 및 생각과 삶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관통해 내신다. 심지어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까지도 끄집어 내셔서 끔찍한 죄의 실체들을 깨닫도록 하시는 분이시다.’라고 했는데 이는 정확한 사실입니다. 죄를 깨닫게 하신 후에는 책망하십니다. 책망하다(요16:8)란 단어는 확신을 준다는 뜻입니다. 이는 구주와 관련하여 영접하고 배척하는 것의 차이, 삶과 죽음의 어떤 문제와 관련하여 마음과 생각 가운데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확신을 주다’란 이 단어의 깊은 의미는 유죄가 입증된 사람을 변호사가 반대 심문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도 합니다. 심문은 사람을 구원하기 전단계로 성령께서 취하는 필수적인 조처입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죄성과 절대적으로 구주가 필요함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주님을 부를 때 구원이 임하게 됩니다.
성령은 복음으로 우리를 낳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십니다(약1:18). 그리스도인이란 교육이나 인간성 개발이나 개혁이나 수련이나 수행이나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남’으로만 됩니다. 성도란 진리를 배우고 익힌 사람이기 전에 “진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사람”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성령으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는가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성도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분을 영접한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니라.](요1:12~13).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경험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종교성이 투철하고 신학에 정통하고 기도와 금식을 철저히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죄인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교인들이 매우 많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주시오, 하나님이신 것은 맞지만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아니십니다. 율법에 정통한 유대인들 그 중에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종교성이 유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십시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모든 소유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18:12). 바리새인들에게 이 정도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 바리새인 중에 한 명이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께로 나아와서 무엇인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일컬어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3:2)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무엇인가 가르침을 받아서 자신의 내면 문제, 종교 문제,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문제 등 산적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조언이나 해답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정말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언제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을 이룰 수 있는가?란 문제였습니다. 주님은 니고데모가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니고데모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3:3). 이것이 모든 개인이 안고 있는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각 가정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이며, 유대 사회 뿐 아니라 현 세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입니다. 의식 개혁, 민중의 계몽, 철저한 율법 교육, 정치 제도의 개선, 군사력과 경제력의 증강 등이 아니라 “다시 태어남”으로만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죄인이든 어떤 부류의 의인이든 간에 그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구분 없이, 차별 없이, 예외 없이”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세리나 창녀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방법이나 서기관, 율법사,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방법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아담의 후손이요,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새 생명을 낳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녀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시듯이 육체의 출생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우리의 영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신체적 출생이 있어야 육체의 삶이 가능하듯이 영적 출생이 있어야 영적인 삶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 태어난 새 생명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약1:18),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는 자신의 풍성하신 긍휼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다시 낳으사 산 소망에 이르게 하시며](벧전1:3). 영적 출생이 없다면 그는 종교인이지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죄인이란 무엇입니까? 죄를 지었다, 죄를 행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죄의 결과요, 죄의 현상이지 죄의 본질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할 때 그는 자신이 죄 가운데서 태어나 죄를 인격적 특질로 하는 사람이요, 죄성이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죄성이란 하나님의 성품과 배척되는 것이며, 원수되는 것입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할 때 죄인이란 자신의 본질이 죄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인격적 속성이 죄란 사실을 알 때 자신의 어떤 행위도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하는 첫 번째 사역이 바로 죄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고, 죄인이란 사실을 자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압니까? 무슨 죄를 얼마나 지었느냐? 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본질, 인격적 특질, 자아의 정체성이 죄란 사실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압니다. 죄를 이겨 보려고 애를 써 본 사람,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도무지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는 자신의 본성, 인격적 특징, 자아의 정체성의 기초가 죄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고백하기를, [보소서, 내가 불법 중에서 형성되었으며 내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수태(受胎)하였나이다.](시51:5)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불법 중에서, 죄 중에서 형성된 자아의 인격적 정체성을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좀처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고치면 고쳐 질 줄로 생각합니다.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인이란 사실은 고칠 수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욥기에도 이르기를, [누가 정결한 것을 부정한 것 가운데서 가져올 수 있나이까? 아무도 없나이다.](욥14:4)라고 했고, [사람이 무엇이기에 깨끗하겠느냐?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가 무엇이기에 의롭겠느냐?](욥15:14)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본질을 갈파한 말씀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이런 죄인이란 사실을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죄는 단지 용서 받아서 해결될 문제 이상이란 사실을 알게 하십니다. 죄인의 죄는 아무리 용서해 주어도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죄인 된 사람을 해결해 주시지 않고는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죄인들을 처리해 주시기를 결정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시고, 못 박히심으로 몸으로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의 몸(롬6:6), 사망의 몸(롬7:24)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피만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히10:10, 벧전2:24). 기독교란 종교를 믿는 사람들, 교회에 다니지만 거듭남을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십자가의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희생이요, 사랑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란 것입니다. 정확한 말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정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사는 것만으로도 성자의 삶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인식과 믿음이야말로 진정으로 영적 생활의 기초입니다.
주님은 피와 살을 둘 다 말씀하셨습니다. 영적 생명은 십자가의 정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몸과 피에 대한 믿음으로 생성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요6:51). 주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입니다. 제자들과 유대인들은 육신의 빵을 더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광야의 만나처럼 하늘에서 그런 빵이 내려오기를 기대했고, 주님께서 그런 빵을 주시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이 빵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하매] (요6:34).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생명의 빵이지 육신의 빵이 아니었습니다. 영이요, 생명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살을 먹으라는 것이 육신의 입으로 인육을 먹으라는 말로 들었던지라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하시니라.](요6:51)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아멘!, 할렐루야! 라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대신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하매] (요6:52).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진리를 들었을 때 [어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3:9)라며 당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진리는 알아듣지 못할 때 머리는 혼란해지고, 마음은 어지러워지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살을 주시겠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죽을 자신의 몸이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요, 세상 사람들의 [영의 양식]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신약 교회의 규례로 정할만큼 중요한 진리로 선포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나누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하시고](눅22:19).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영적 양식입니다. 그 몸이 우리를 대신해 죄와 저주를 받으신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몸으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몸으로 죄를 지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벧전2:24). 주님은 몸으로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이제는 그분께서 죽음을 통하여 자기 육체의 몸으로 너희를 화해하게 하사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아버지/의 눈앞에 드리고자 하셨으니](골1:22). 핵심은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루신 일들에 주목하십시오. [바로 이 뜻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모든 사람을 위해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히 구별되었노라.](히10:10). 그리스도의 몸이 채찍에 맞으셨고, 몸이 못 박혔고, 몸이 창에 찔리셨으며, 몸에서 피와 물을 쏟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받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피로써 죄가 정결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죽임을 당함으로 우리 역시 죽은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게 되었으니](롬7:4a). 주님의 몸으로 당하신 고난과 피 흘림과 죽음은 우리가 믿을 때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성령은 주님이 몸으로 당하신 모든 것들을 우리 안에 그대로 적용하시고, 실제가 되게 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주님의 죽으심과 피를 죄인들 위에 적용하십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죄가 없는 곳에는 아무리 귀한 보혈이라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란 사실이 주님의 피를 요구하고, 주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이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의 용도요, 목적입니다. 주님의 죽으심 역시 그러합니다. 죄성을 지닌 죄인에게만 그 죽음의 효력이 필요하고, 그 죽음이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란 사실이 주님의 죽음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죄인 된 나의 자아를 필요로 하십니다.
이제 이 사실을 듣고 마음에 받아들이십시오. 진리를 받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피를 통해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불법과 더러움과 불의는 일거에 남김없이 제거되고, 죄에 지배받던 옛 사람은 죽음에 처해짐으로써 죄와 율법의 권능이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그래서 육체의 남은 때를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은혜 아래 살며, 의의 통치를 받으며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전해준 복음입니다.
쉽고 단순한 진리,
말씀침례교회(http://av1611.net)
Pastor. Peter 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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