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고전6:17
오늘은 [성령과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어떤 분이셨는가?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저희들은 지금까지 성령이 누구신가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미 선포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첫 시간에 우리는 성령은 하나님이심을 선포했고, 성경을 통해 입증했습니다.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오, 인격성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성령은 이성과 지성과 감성과 의지를 모두 지니신 분이십니다. 기뻐하시기도 하시고, 슬퍼하시기도 하시며, 분노하시기도 하십니다. 성령은 분명한 의지를 지니신 분으로서 자신의 뜻대로 은사들을 나누어 주시며, 명령하시기도 하시며, 책망하시기도 하십니다. 때로는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소망을 갖게 하십니다. 이는 성령께서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우리 안에 말할 수 없는 기쁨,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갖게 하시며, 평강을 주십니다. 때로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슬픔과 연민과 격한 감정이 일어나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죄에 대해 깊은 찔림을 주시고, 영의 메마름을 주시기도 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성경의 저자이십니다. 성령은 계시를 주시는 분이시며, 성경의 해석자이심을 선포했습니다. 요셉이 말하기를, [해석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그 꿈들을 고하소서, 하니](창40:8b)라고 했는데 꿈을 해석하시고, 난해한 것들, 어둠에 속한 것들, 이전에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말씀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기록된 말씀을 우리 마음에 계시해 주시고, 조명해 주십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믿을 때 말씀은 생명이요, 영으로 체험되고 실제가 되며 열매로 맺힙니다. 진리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말씀해 주실 때 우리가 어떻게 받는가? 그것이 핵심입니다. 믿음으로 받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을 때 성령은 자유롭게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며 다양한 은사와 열매를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시지만 불순종할 때 성령은 소멸되고, 슬퍼하시며, 모독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시며, 새 생명을 주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3:3)고 하셨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사역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말씀의 씨앗은 성령을 통해서만 자라나고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성령은 에너지나 정신적인 힘이나 영적인 氣와 같은 무형의 물질이 아닙니다. 성령은 무소부재한 하나님이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성령을 대할 때 인격적으로 듣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거역하지 말고, 반역하지 말고, 모독하지 말고, 슬프시게 하지 말고, 억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기를 소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는 외적이나 육체적으로는 이 땅에 있지만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 받아 그분의 몸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遲體)이기 때문이라.](엡5:30). 성령께서는 현재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심으로 머리되신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힘과 영양과 모든 것을 공급받게 하셨습니다. 이 진리가 여러분의 마음 속에 믿어져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렇구나! 과연 그러하구나!”란 깊은 깨우침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미 어떤 구절들은 수십번, 수백번 들었을지라도 마음에 빛으로 임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질 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와 권능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조직 관계, 상하 관계, 주종 관계, 군신관계, 부모와 자녀 관계, 친구 관계, 목양 관계 등 다양한 관계로 설정하셨지만 이런 관계가 영과 생명으로 이루어진 유기체적인 관계란 것입니다. 머리와 몸의 관계,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인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肢體)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전6:15). 이것을 육체적으로 보면 이해할 수없는 진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분명한 진리요,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와 결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고전6:17).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이나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 기도하고 깨우쳐 주시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주신 영적 진리들, 말씀들을 깨닫도록 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구하지 않고 매일 자신의 일신의 일들, 육신적인 것들, 세상적인 것들만 구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은 이교도들이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여럿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요, 서로 지체가 되느니라.](롬12:5).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요, 형제들 간에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주는 하나님이시다.” 란 점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이라도 여러분이 이 점에 눈을 뜨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제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개별적으로 다 지체라.](고전12:27).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그분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는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 그들 가운데 거닐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고후6:16b). 우리는 구약 성도들처럼 따로 성전을 짓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몸이 바로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殿)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전6:19). 여러분은 이 사실에 눈을 뜨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시고, 우리 몸이 성전이란 이 진리가 믿어집니까? 믿어지지 않으면 이 시간 이 진리를 계시해 주시고, 확증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런 진리를 아는 것이 신학 박사 학위를 몇 개씩 받은 사람보다 바른 진리의 지식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진리를 알지 못할 때 꾸짖으시고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이 진리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 몸을 성전으로 삼으신 하나님이란 사실을 기억하고 명심하십시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그를 멸하시리니 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며 너희가 곧 그 /성/전이기 때문이라.] (고전3:16~17). 하나님은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을 가득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채움 받지 못하면 우리 안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텅 빈 공간에는 누가 들어 옵니까? 마귀들이 들어 옵니다. 악한 영들이 떼거지로 몰려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성령으로 채우시는 하나님이시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채워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모든 지혜로 풍부히 거하게 하여 시와 찬송가와 영적인 노래로 서로 가르치고 훈계하며 너희 마음 속에서 은혜로 {주}께 노래하고](골3:16). 말씀이 속에 가득히 채워지면 입으로 나오게 됩니다. 노래로도 나오고, 시로도 나오고, 선포하고 싶어집니다. 누구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득하면 성령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도록 강권하십니다. [이는 내게 말할 것이 가득하며 내 안에 있는 영이 나를 강권하기 때문이로다.](욥32:18). 말씀은 타오르는 불같아서 성령의 바람이 임할 때 활활 타오르게 마련입니다. 예레미야의 간증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그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그분의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불 같아서 내 뼈 속에 사무치니 내가 참기에 지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노라.](렘20:9). 다윗의 고백 역시 이를 입증합니다. [내가 침묵하며 말을 하지 아니하고 잠잠하되 선한 말마저도 하지 아니하였더니 내 슬픔이 복받쳤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우므로 내가 생각에 잠길 때에 불이 붙으니 이에 내가 내 혀로 말하기를,] (시39:2~3). 주님이 주신 말씀이 마음 속에 있으면 기도로, 찬양으로, 복음 선포로 흘러나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충만케 하시고 쏟아 내시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말씀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벙어리가 아니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자신을 숨기시고, 침묵하시는 하나님이신 것 같지만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말씀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주의 영이 임하여”란 말씀과 “주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란 구절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주의 영이 임하면 대언자들은 “주의 말씀”을 받았고, 그것을 전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임했다는 것 역시 주님께서 성령으로 말씀해 주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주]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란 구절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께서는 말씀하시는 분이란 사실은 요한계시록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계2:7, 11). 말씀을 보내셨다는 것은 성령께서 대언자들 위에 임하여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매 이 말씀이 이스라엘 위에 임하였으므로](사9:8). 자, 보십시오. 우리 역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들을 수 있도록 마음과 귀에 할례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성령은 기름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론은 주의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이후로 주의 기름부음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역을 담당하는 왕, 제사장, 대언자들 위에 부어졌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주의 사역을 위해서 반드시 주어져야 하는 것인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예외 없이 주의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세우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하나님이시니](고후1:21).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성령으로 기름을 부어주심으로 여러 가지 사역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교회 내에는 기름부음 받은 성도가 없어 보일 정도입니다. 빛도, 향기도, 열기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두 사울같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 이슬이나 비가 내리지 아니하며 헌물을 낼 밭도 없을지어다. 이는 거기서 강력한 자의 방패 곧 사울의 방패가 비참하게 버림을 받았음이니 마치 사울이 기름부음을 받지 아니한 것 같았도다.](삼하1:21). 사울은 분명히 사무엘을 통해 주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는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 것처럼 살다가 갔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순간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지만 몇 일이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기름부음을 받지 않는 것처럼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다 보면 평생 교회를 다니지만 성령이 자신 안에 계시는지 임재조차 인색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눈을 활짝 열어 주시기를 빕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깨우침을 받을 때 그것이 바로 참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부활의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우리 주님을 동굴의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 때 죽어 있던 뼈들이 살아나 주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성령은 죽은 성도들을 부활시켜 영광스런 새 몸을 입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의 권능과 부활의 산 소망을 우리 안에 심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이신 주님을 우리 안에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이 땅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중보자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저 하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대신해 중보하시는 중보자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이는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중보(仲保)하시기 때문이니라.](롬8:26).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향으로 드려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을 쭉 아뢰고 일어서는 것이 기도는 아닙니다.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도록 간절히 비는 것은 이교도들도 다 하는 일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뜻을 우리 안에 계시하실 때, 우리가 그 뜻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의 첫 번째 요건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향을 열어 볼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향은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출애굽기 강해 시간에 다루었습니다만 향은 오직 주님께만 드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냄새를 맡으려고 그와 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지리라.](출30:38). 이것이 기도의 원칙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엉망인 것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할 것인가?(기도 시리즈 1번 참조)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우리의 기도는 그냥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은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고, 인도함을 받아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되 모든 성도를 위하여 모든 인내와 간구로 이 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엡6:18). 명문의 장황한 기도를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그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흘려듣지 말고, 저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열렬히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 안에 말씀해 주십니다. 이 말씀은 여러분이 어떻게 받느냐? 에 따라서 긴요한 기도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받지 않는 자들은 그냥 청중의 한 사람처럼 듣고 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소원으로 붙잡는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너희 자신을 세우며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고](유1:20).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을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는 방언 기도가 아닙니다. 무아지경에서 횡설수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하는 기도는 성령님이 내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깨닫고, 믿고, 받아들이면서 나의 소원으로 생각하고 붙잡는 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되셨습니다. 주님이 공생애 동안 보여준 사실은 온통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해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한 자도 빠짐없이 아셨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어 주시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계시된 뜻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의 실제적인 예가 바로 주님의 기도 생활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성도를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우리를 갈보리 십자가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만사형통의 길이거나 눈에 보이는 물질, 건강, 좋은 것들을 풍족하게 받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실망하고 말 것입니다. 처음부터 곧 바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나가려 한다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들어가려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 자신을 철저히 절망하게 하시며 오직 능력의 근원이시오,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만 의지하도록 하십니다. 성령은 진리로만 이끄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 우리의 소원과 뜻을 꺾어 버리십니다. 자신의 명철을 더 이상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십니다(잠3:5). 성령은 우리에게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고, 주님만을 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기쁨, 구주를 영화롭게 하는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때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일신의 영광을 구하거나 자신의 기쁨을 구한다면 그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다른 종교를 가져야 합니다. 성령은 성도들을 고난의 길로 인도하신 후에 영광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 순서는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아무도 이런 박해로 인해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런 박해를 받도록 세우심을 받은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아느니라.](살전3:3)고 했습니다. 박해를 받도록 세움 받았다! 이것이 성도들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다 핍박을 받을 터이나](딤후3:12). 이것이 성령께서 성도들을 인도하시는 방법입니다. 고난, 박해를 통해 우리는 순수해지고, 단련되어지고, 성숙과 성장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일치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는 이 점이 성령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라고 믿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셨음이니 이것은 그분으로 하여금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나신 분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29). 우리를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역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주님의 어떠하심과 같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아들의 형상을 빚어 나가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십니다. 고로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에 동참하게 하여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우리는 모두 죄의 본성을 타고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채 태어났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고,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좋은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그가 지닌 형상은 타락한 아담의 형상이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아담은 자식을 낳을 때 이미 자신 안에는 하나님이 형상이 죽어 버리고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백삼십 년을 살면서 자기 모양대로 자기 형상에 따라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더라.](창5:3). 하나님의 형상은 노력이나 수고와 수행이나 선행이나 어떤 종교 행위로도 결코 획득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인위적으로 유사품을 만들어서 비슷하다! 만족한다! 이 정도면 되었다! 는 식으로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전혀 받지 않으십니다.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찾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들일 때 우리는 에덴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첫 사람 아담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라.](고후4:4b). [이 아들께서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形像)이시요,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나신 분이시니](골1:15). [이 아들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분의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라.](히1:3).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인격의 정확한 형상이시므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이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믿는 자들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최고의 뜻이 이것이며, 최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이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재산이나 노력이나 어떤 행위에 관심을 두고, 업적을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아들의 형상으로 빚어졌는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형상이 되었는가? 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시기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하여 산고(産苦)를 겪노라.](갈4:19). 바울의 관심은 하나님의 관심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미 새롭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로 빚어질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사람들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10).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이것은 출발입니다. 구원이 영적 생활의 목표가 아니라 시작인 것과 같이 새 사람을 입은 것, 새로워진 것은 이미 완성이나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요, 시작이요, 출발선에 놓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을 통해 날마다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가리지 않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바라보며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나니 /이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니라.](고후3:18). 변화를 받는 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리라.](고전15:49). 몸까지 완전히 변화되어 주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유일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도록 빚어 가시는 일을 하시며,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합력해서 그 일을 이루는데 사용하시는데 이것을 성경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열매를 맺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믿는 신자들이 자신을 주님께 굴복하고 내어드릴 때 맺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성령의 열매를 더욱 많이 맺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는 가지가 스스로 만들 수 없습니다. 가지는 열매가 맺히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주님의 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꾸준히 거하면 그만입니다.
성령은 은사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은 자신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다양한 은사를주십니다. 은사를 주신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며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 하심이라. 이로써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長成)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엡4:12~13). 이런 이유로 성령께서는 성도들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성령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를 새롭게 재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4). 우리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 주신 새 사람을 입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우리의 거듭난 영, 새롭게 된 영을 말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영도 사람이고, 혼도 사람이고, 몸도 사람입니다. 사람의 인격적 특질은 주로 혼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은 영이 가장 중요합니다. 영은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이며, 주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로 죽어 버린(엡2:4)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처리해 버리시고, 새 사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은 우리 안에 새로운 사람을 창조해 주시고, 그 사람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전 사람을 개선하거나 고치거나 보수한 정도가 아닙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로 완전히 처리해 버리시고, 새 사람을 창조해서 우리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이전의 행실에 관하여는 너희가 속이는 것으로 가득한 욕심들에 따라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너희의 생각의 영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하신 새 사람을 입었도다.](엡4:22~24).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모두 그의 신성과 인격대로 새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서로 거짓말하지 말라. 너희가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3:9-10). 이 점이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기초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 근거이며, 토대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자신의 옛 사람을 갈고 닦고 조금 고쳐 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전부이지만 주님은 옛 사람을 처리하시고, 새 사람을 창조해서 우리 안에 넣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옷에 비유해서 “입는다”고 말합니다. 몸의 옷은 몸을 보호하고, 따뜻하게 해주며, 자신의 신분이나 직업을 잘 드러냅니다. 경찰 복장, 소방 복장, 군인 복장 등은 모두 그들의 직업을 보여 줍니다. 일을 시작하거나 끝낼 때, 자신의 역할이 바뀔 때 사람은 옷을 갈아입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는 염려도 말고, 구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대신 우리 안에 멋진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는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음이요, 또 너희 가운데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음이라.] (갈3:26~27). 그리스도로 옷 입은 것이 성도들입니다. 궁중 복장을 하고 있으면 궁궐에서 나온 사람들인 줄 알듯이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을 때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여전히 주님이 주신 옷을 입지 않고 예전에 입었던 옷을 입고 있으면 누구도 그를 알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결혼식에 가면 신랑이나 신부를 금방 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옷은 확연히 다릅니다. 그런데 예복이 아닌 복장을 하고 있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복을 입으면 눈에 잘 띕니다. 그리고 예복이 더럽혀 질만한 쓸데없는 헛짓을 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으면 그는 자신을 절제하게 됩니다. 자신의 옷을 더럽힐 일을 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오직 너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육신의 정욕을 채우기 위하여 육신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 (롬13:14)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은 늘 자신의 영을 살피고, 깨어 있게 마련입니다. 반면 가짜들은 항상 몸에 걸치는 옷, 치장에만 신경 쓰고 그 옷이 더럽혀지는 것에만 신경 씁니다. 자매들은 복장에 더 민감합니다. 내적인 복장이 제대로 안 된 사람들이 몸의 옷에만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영의 단장에 신경을 쓰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단장(丹粧)하는 것은 머리를 땋고 금으로 치장하며 옷을 차려 입는 외적인 단장으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감추어진 사람으로 하되 썩지 아니하는 것 곧 온유하고 조용한 영(靈)의 장식으로 할지니 이것은 하나님의 눈앞에서 지극히 값진 것이니라.] (벧전3:3~4).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 안에 제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성령의 강림은 없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십자가를 통과한 성도들에게 부어집니다. 성령의 권능 역시 그러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시며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만 일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시고, 계시하시며, 그분의 일들을 알리십니다. 우리가 살펴본 성령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와 분리될 수 없음을 배웁니다.
잠시 뒤에 [그리스도와 성령]에 대해 좀 더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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