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61:1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습니다. 이는 우리가 보고 듣고 늘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죽음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밝히든 간에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은 주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하나님은 죄 때문에 사람들에게 죽음을 정하셨습니다. 이는 죽음의 원인이 죄라면, 죄의 유일한 해결책이 죽음이란 것입니다. 죽음 외에는 죄의 삯을 지불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죄가 들어옴으로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창세기에 나온 인류의 역사를 영적으로, 신학적으로 그 정확한 의미를 적용하고 풀어 주는 책은 로마서입니다.
창세기 2-3장의 사건을 여러분은 다 잘 알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주로 우화나 신화로 돌리고 싶어 하는 내용이지만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건임을 압니다. 흘러간 역사가 아니라 현재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그런 사건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당대의 문제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와 앞으로도 계속해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모두 아담의 죄성을 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1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君臨)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라.](롬5:14)고 합니다. 죄는 한 사람을 통해 들어 왔습니다. 죄를 통해 들어온 사망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모든 사람 위에 군림했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는 너무나 강해서 아무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군림하였은즉.](롬5:17a). 죄가 그러하듯이 사망 역시 한 사람을 통해서 군림한다고 말합니다. 핵심적언 어휘는 ‘죄와 사망’입니다. 이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세상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육신의 출생으로 아담 안에 있던 모든 것을 그대로 물려받듯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우리 안으로 고스란히 옮겨 주시고, 물려 받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출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능력과 성품을 우리의 것이 되게 하며 그리스도의 신분을 우리의 신분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십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 안에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지금은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한 알의 밀알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신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이 시간은 전 시간에 이어 [성령과 십자가]에 대해 다루겠습니다.
십자가의 피는 죄를 깨끗하게 씻어 주며, 흔적도 없이 처리했습니다. 십자가의 피가 들어가면 아무리 추한 죄, 더러운 죄, 오래된 죄, 뿌리 깊은 죄라도 남김없이 씻어집니다. 자신의 죄를 자신의 종교성으로, 어떤 행위로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제가 저의 죄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힘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경건도 믿음도 의로움도 아닙니다. 성령을 거역하고, 주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신성 모독입니다. 주님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와 그 피로 씻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긴다는 것은 말이 될 것 같지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나에게 힘을 주시고, 권능을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죄를 이기도록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를 이기도록 하는 방법은 우리를 갈보리의 십자가로 인도하여 그 피를 믿는 믿음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공로와 피의 능력을 믿게 하심으로 죄를 이기게 하십니다. 때로 믿음 좋아 보이는 형제들이 죄로 고민하고, 갈등하고 번민합니다. 이는 기도와 성경 공부와 선교와 금식과 같은 종교 행위들을 일찍부터 보고 배워왔기 때문에 이런 자신들의 종교 행위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말합니다. 기도도 해 보았고, 성경도 읽어 보았고, 금식도 해 보았고, 모임이란 모임에는 다 나가 보았지만 제 속에서 솟아오르는 죄성을 이길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침 시간에 말씀드렸지만 저의 간증이기도 합니다. 신학교를 가고 목사가 되어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신학으로 죄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내가 죄를 이기겠다는데 주님께서 놀라운 능력과 힘을 주셔서 이기게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데 자꾸 패배하고 넘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는데, 왜 너는 자꾸 살겠다고 힘을 달라고 하느냐?”고 하십니다. 성령의 능력은 저의 육신을 살리는데 사용되는 능력이 아닙니다. "너의 육신을 죽일 터이니 자아를 내어 놓아라, 십자가에 못 박을 테니 내어 놓으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래 교회를 다니고, 자신이 나름대로 성경대로 살려고 애썼다는 사람들일 수록 자신의 자아를 굳게 붙들고 죽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에 내어 놓으십시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놓으심으로써 첫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생명의 성령은 먼저 우리 옛 사람, 겉 사람, 본성에 속한 사람(natural man)을 일단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죽임으로써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채 태어난 사람들”인 것입니다.
만약 누가 어느 날 갑자기 성령의 능력을 받고 나서 “모든 죄를 순식간에 다 이겼다, 내 속에 있는 죄의 뿌리가 뽑혔다, 이제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는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란 십자가의 피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는 “죄를 정결하게 하는 피”입니다. 계시록 1:5에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로부터 우리를 씻으시고](계1:5b). 죄는 피로 씻기어 집니다. 다른 것으로는 결코 씻을 수 없습니다. [율법에 따라 거의 모든 것이 피로써 깨끗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赦免)이 없느니라.](히9:22). 또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히13:12). 우는 주님의 피로써 씻기고, 피로써 깨끗하게 되며, 피로써 거룩히 구별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를 정결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갈보리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입니다. 누가 성령의 불이 떨어져 자신의 죄를 남김없이 태웠다고 간증하는 것을 듣지만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1:7에서 [만일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요일1:7)고 말합니다. 거룩하신 성령께서는 철저히 십자가의 피를 통해 죄를 처리하신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피와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 안에 더욱 깊이 각인하는 일을 하십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2000년 교회사에 사도 바울보다 더 영적이고 성령 충만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감히 없을 것입니다. 그의 고백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나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그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은 계시가 풍성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에 대한 가르침을 가장 많이 서신으로 남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는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진리가 혼미한 시대입니다. 성령화 대회, 성시화 운동, 성령 강림 성회 등 성령에 대한 가르침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인지 마귀의 영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언제나 갈보리 십자가라는 잣대를 통해서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의 피와 피의 능력이 강조되면 될수록 성령의 역사입니다. 반면 피가 사라지고 성령만 외쳐지고 있다면 마귀의 영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현장입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강력한 도구는 십자가의 피입니다. 성령은 주님이 행하신 일, 그 피와 죽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심을 명심하십시오. 오늘날 십자가의 기초가 없는 성도들이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부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비극을 넘어서 끔찍하고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인 된 육신, 옛 사람, 자아를 처리하는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달린 십자가는 우리의 사형 집행 장소이며, 저주와 모욕과 수치를 받는 장소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어디로 가자고 말씀하시는지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자기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 (히13:12~13). 우리가 누구의 수치를 짊어져야 합니까? “그런즉 우리가 그분의 수치를 짊어지고” 십자가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닙니다. 절대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갈보리는 예루살렘 성내가 아니라 진영 밖에 있습니다. 성문 밖으로 가자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곧 성문 밖 갈보리 언덕으로 길을 안내하신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끌림을 받아 갔는데 가보니 갈보리 언덕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이거나 헤롯의 궁전이거나 산헤드린 공회원이라면 성령이 아니라 마귀의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외식과 위선과 율법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율법의 정신보다 형식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헤롯의 궁전은 탐욕과 재물과 세상 권세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마귀는 교회를 이런 쪽으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은 주님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살인자들의 회합 장소요, 의논 장소입니다. 여러분들이 종교 회의나 교단이나 성경이 아닌 어떤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고자 한다면 이곳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그런 곳으로 성도들을 인도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오직 진영 밖에 있는 갈보리 언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거기에 있는 십자가로 이끌어 주십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의 현장이지만 이 십자가를 질 때만 우리는 성령의 정확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으며,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육신의 자아를 온전히 못 박힌 채(갈2:20)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만 살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와 풍성한 복들을 절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으로 만들어 나가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 즉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으로 빚어 나가십니다(롬8:28). 성령은 자신에게서 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것을 받아서 말씀하시고 보이신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무엇이든지 듣는 것만을 말씀하시며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 그분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시리니 이는 그분께서 내 것을 받아 너희에게 보이실 것임이라.](요16:13-14). 자 생각해 봅시다. 성령께서는 누구를 영화롭게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의 것을 받아 보이십니까? “내 것을 받아” 성령은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그 입에서 그리스도가 나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리스도를 높이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우리 안에 그대로 형성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인격, 성품, 그분의 능력을 우리 안에 실체화 하는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성령과 십자가]란 이 설교가 여러분의 가슴 속에 깊이 새겨지고 살아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불로 인을 치듯이 이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 판에 새겨 주시기를 빕니다. 저는 어느 누구보다 성령의 권능과 지혜가 모든 성도들과 저의 속에 강하게 임재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 바른 신앙, 바른 진리를 갖출 때까지 절대로 주시지 않기를 또한 소원합니다. 십자가의 중심성에서 벗어난 성도가 금식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 간에 성령의 권능, 성령의 은사를 구하는 동기와 이유를 충분히 살펴 보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가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을 구령하고 쟌 웨슬레나 죠지 휫필드나 챨스 피니 같은 사람이 수백만 명을 주님께로 인도한 것을 읽고 볼 때면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능력에 대한 욕망이 생기는 것은 성령의 욕구가 아니라 육신의 자연스런 본성입니다. 우리가 오직 능력이란 것에만 관심을 가질 때 자신을 극히 위험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바로 그런 틈을 타서 모조품을 주기 때문입니다. 은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방언, 신유, 대언 등의 은사들을 열망하는 가운데 거짓 은사들을 소유한 예는 우리 주변에도 허다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최상의 열망은 사랑이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을 구하는 것 역시 성경적인 동기와 분명한 목적에 기초해야 합니다. 육신이 처리받지 않는 자아는 항상 그럴듯한 대의명분으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하고 숨긴 채 구합니다. 주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아무리 그럴듯한 말과 명분과 동기와 목적을 대면서 합리적으로 구해도 그 중심과 영을 달아 보시며, 살펴보십니다.
십자가에 자아가 못박힌 사람이어서 더 이상 자신을 위해서는 영광도 자랑도 칭찬도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시지만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갈보리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국의 위대한 부흥사로 쓰임 받았던 D.L 무디는 성령의 권능을 받기 위해 몇 달 동안을 쉼없이 기도했는데, “오 하나님, 나의 마음을 준비시키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내게 침례를 베푸소서”라고 했습니다. 순서에 주목하십시오. 마음이 올바르지 않으면서 능력을 가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이 환상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을 우리를 충만케 하는 것, 권능과 지혜를 주시는 것은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무엇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모진 십자가로 인도하시고, 십자가의 원리를 삶에서 구현해 내도록 하시며, 믿음의 시련을 보내시며, 원수 마귀와 싸우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길이 꼭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순간 이동하는 길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교회와 세상을 볼 때 큰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연약한 교회, 열매 없는 교회, 향기 없는 교회, 빛이 없는 교회, 맛이 없는 교회, 뜨거움이 없는 교회, 살았는지 죽었는지, 깨었는지 잠자는지 모를 이런 교회를 보면서 마음에 아픔과 눈물과 통곡이 나오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성령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쾌락주의로 물든 세상의 거친 파고를 보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영적 문둥병자나 다름없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면 주님이 느끼는 마음, 주님의 생각, 주님의 가치관이 곧 나의 것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적 쾌락주의자들은 성령님이 완전한 행복을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며, 그렇게 가르칩니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행복하며, 슬픔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진리에서 그보다 더 큰 오해는 없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주의 영이 임했던 사람들, 대언자들과 사도들이 얼마나 큰 슬픔과 고난과 눈물과 시련을 당했는지 생생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을 보면서, 죄악된 백성들을 보면서 그들은 울었으며, 탄식했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산다면 세상은 여러분을 강력하게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이전에는 아무 감각 없이 살아왔는데 어느덧 강력한 대적자들이 내 주변에 서 있고 옥죄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필연적으로 근심과 슬픔, 고난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께 성령을 충만케 해달라고 구할 때, 이미 마음속은 세상과 죄와 육신과 원수로서의 전쟁을 선포한 것과 매 한가지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동역자나 신자들이 여러분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다면 자주 마귀의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사는 삶은 십자가를 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죽은 사람은 사람들이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고 높여 주어도 기쁨을 누리지 못하며,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욕해도 슬픔을 느끼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에만 기뻐하고, 성령이 슬퍼하시는 것에만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고통 중에서도 기뻐할 것이며, 폭풍이 몰려오는 것을 보아도 평온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평온하고 기쁨을 유지하는 여러분을 보면서 놀라고 말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의 실체에 대해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령으로 산다는 말, 성령으로 걷고, 성령 안에서 행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잡히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이 아니고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이거나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침례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 단번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순간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끝을 내었습니다. 육신이 못 박혔습니다. 육신에 대한 애착과 육신의 정욕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행위도 한 일이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며, 우리는 믿음으로 동참한 것이 전부입니다.
아무도 자기가 자신을 못 박을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이를 악물고 자신을 못 박는다면 먼저 양발을 못 박고, 한 손으로 나머지 한 손을 못 박은 후에도 못 박히지 않는 한 손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을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결코 못 박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손톱 밑에 있는 작은 가시 하나를 파내려고 해도 자기 손으로는 차마 못 파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남이 하면 아프게 하지만 자기는 자신을 안 아프게 한다고 직접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 손과 발끝에 침을 찔러 피를 내는 일도 자기 손으로는 차마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손으로 자기 발을 못 박고, 나머지 한 손을 못 박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수 있겠습니까? 자살하려는 사람들도 어차피 죽는 목숨인데도 고통 없이 죽으려고 방법을 찾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자기 몸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자신이 누구를 위해서나 기꺼이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으로 인해 목 베임도 당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아내를 위해(엡5:30) 죽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요일3:16).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요10).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리스도께 속하여 [육신과 함께 그 애착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는 말씀대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행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과 십자가의 관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은 십자가를 철저히 우리 안에 실체화하고 삶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십자가에 완전히 자아가 못 박힌 상태로 사는 삶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성령 충만한 성도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란 기본적인 진리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성도들은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을 “육신에 속한 사람들”과 “영에 속한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같이 하였노라.](고전3:1). 이는 영적 계급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않고, 십자가의 원리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육신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육신적이란 말은 다툼과 시기가 있고, 파당이 있고, 분열이 있고, 자기를 자랑하고, 헛되이 우쭐대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름은 그리스도인들이지만 차마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절대 다수의 대부분이 영적으로 갓난 아이들이며, 육신적인 성도들입니다. 이들은 교회로 침투한 불신자들과 함께 보조를 맞추어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합니다. [(이는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이기 때문이라.](빌3:18). 이들은 결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들은 십자가를 장식용으로 걸어 놓거나 목걸이로 만들어서 달고 다니긴 하지만 결코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하면서 성령의 인도함과 은사들과 열매를 구할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으로 채움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구하십시오. 성령 충만과 권능과 지혜를 부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새롭게 해 주시기를 구하시고, 내 안에 새로운 영,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기도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