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침례교회 ❏AV1611.net ❏Peter Yoon

글 작성자: THE WORD

성령과 십자가
말씀: 사61:1



흔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두 가지 사건은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초림이요, 그에 못지않는 또 한 사건은 성령께서 믿는 신자들 안에 임하시기 위해 저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죽으시고, 우리의 죄와 저주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를 살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이요, 살려 주시는 영이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닌 첫 사람 아담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 안에 임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마음에 영접한 사람만이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론의 문제도 아닙니다.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생명의 유무입니다.

누가 생명이 있습니까?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으며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은 왜 내가 생명이 없느냐? 고 항변할지 몰라도 주님은 그들이 죽은 자들이며, 생명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친히 선포하시고 작성해 주신 사망진단서입니다. 그들은 꼭 육신이 죽어보아야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인정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들이 생명이 없다는 사실을 알며, 우리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우리도 이전에는 죄 가운데 죽은 자들이었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5:12-13을 보십시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로 하여금 알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려 함이라.](요일5:12-13). 이 보다 더 분명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물학적, 의학적 죽음은 아직 남아 있지만 그들의 영적 생명은 완전히 죽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유무가 생명의 유무입니다. 여기에는 중립 지대가 없습니다. 아들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했으면 생명이 있고, 영접하지 않았으면 없는 것인데 “나는 아직 모르겠다”, “죽어봐야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성령과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사역을 시작하실 때 위로부터 권능을 입으셨고, 성령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행하신 모든 일, 모든 말씀은 다 성령으로 행하신 일들입니다. 구약에 주님의 사역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 하나님의 영께서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셨음이라.](사61:1). 주님께서 성령을 받으시고, 성령을 통해 일하신 것은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 모델입니다. 여기서 주님이 기름부음을 받은 이유가 있습니다.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성령은 복음 선포 사역을 위해 주어집니다. 주님은 복음 선포를 위해 성령을 기름 부어 주십니다. 성도들의 삶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고, 성령 안에서 걸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성/령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유일한 성경적 방법이 바로 성령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성령 안에서 걷고, 성령 안에서 사는 것이 이 땅에서 저 하늘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면 또한 /성/령 안에서 걸을지니](갈5:25). 모든 성도들에게 결코 결핍되어서 안 되는 것이 성령입니다. 이는 고기에게 물이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며, 사람에게 산소가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차에 개스가 없는 것이나 환자에게 피가 부족한 것이나 기계에 동력이 부족한 것이나 성도들에게 성령이 부족한 것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성령의 결핍은 치명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過度)함이 있나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하라.](엡5:18)고 말씀하십니다. “충만 하라”는 말은 가득 채움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누가 채우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성령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채움 받기를 구하고, 열망하며,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가르치신 내용은 [성령]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 가르치신 내용 역시 [성령]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불신자들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했고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성령입니다. 이들은 승천하시는 주님을 눈으로 목격하며 경배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성령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십자가의 전달자요, 부활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권능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합심해서 기도한 것은 아버지의 약속이신 성령을 받고, 성령의 권능을 입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을 너희에게 보내려니와 너희는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권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시(始)에 머물라, 하시니라.](눅24:49). 이들은 지금 전도하러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권능을 입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건축하거나 신학교를 세우거나 조직을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권능을 입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성령이 없이 행하는 어떤 일도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는 어떤 말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성령으로만 행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 기쁜 마음으로 전도를 하러 나가고, 교회 행사에 열심히 참여합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느낍니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하고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한 후에 일을 할 때 기도하기 전과는 확연히 다른 영적 열매를 거두고, 승리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기도로만도 부족한 무엇을 알게 됩니다. 바로 성령의 도우심과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행하셔야만 되는 일들을 알고 간구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다 기도하고, 성령의 강력한 권능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암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사역이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을 자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으려면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권능을 입기를 구해야 합니다. 어떤 성도들은 그런 것이 있는지 들어 본 적도 없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이단 교리가 아닐까 의심하거나 부정해 버립니다. 지금 성령의 권능을 구하는 것은 오순절에 단회적으로 일어난 역사적 성령의 강림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을 때 성령 침례도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도 받고, 성령의 인침도 받았는데 또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라고 끝을 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경험과 내적 양심이 스스로 “지금 나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뭔가 결핍되어 있다”고 증거할 것입니다. 지혜의 결핍, 능력의 결핍, 사랑의 결핍, 은혜의 부족...한없이 부족한 것들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니고, 매주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도 아니고, 기도 모임도 다 나오고, 나름대로 성경을 읽고, 때로는 전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갈증이 있고 배고픔이 있는 것입니까?

나는 성령의 은사가 없어. 성령의 열매가 없어. 성령의 권능이 없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간에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면 주님 앞으로 그 문제를 들고 나와서 해결 받아야 합니다. 교리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성령을 받았음에 틀림없지만 현실에서는 성령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저 역시 그런 체험을 오랫동안 많이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변화되지 않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한 적이 참으로 많습니다. 성장과 성숙, 열매 맺음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 안에 기쁨과 평강, 주님과의 친교는 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의 기초로 돌아가서 다시 한번 차분히 진리를 살펴보고, 은혜를 얻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마음에 받아들인 사람들 위에만 임하십니다. 성령이 먼저가 아니라 십자가가 먼저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죄인 된 내가 처리되고, 육신이 못 박혀야 거룩한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와 계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흔히 겪는 오류는 성령의 권능과 황홀한 체험을 기대하면서 정작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죽음이 없이 부활이 있을 수 없듯이, 십자가의 체험 없이 성령의 체험을 기대한다면 그는 100 중 99는 마귀에게 속을 것입니다. 성령은 말 그대로 거룩한 하나님의 영입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시기에 그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 사람 위에만 임하는 것입니다. 반면 더러운 영, 불결한 영은 죄악된 육신 안에 그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가? 마귀의 전이 되는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정한 영이 사람에게서 나와 마른 곳으로 다니며 쉴 곳을 구하나 찾지 못하므로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어 있거늘 이에 가서 자기보다 더 사악한 다른 영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나쁘게 되니라.] (눅11:24~26). 마귀는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말합니다. 마귀는 당당히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신들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을 것입니다. 신이 내렸다. 신이 들렸다는 등의 말은 점쟁이들, 무당, 점성술가들, 무속인들, 마술, 신접자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들입니다. 마귀들을 섬기는 종교인들 중에도 신들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귀 들린 자들의 이야기가 매우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도들 중에서 성령이 아니라 마귀의 영을 받아들이는 일이 허다한 것입니다. 금식 기도, 산기도, 새벽 기도, 특별기도 등을 하면서 기도에 전념하면서 성령을 받았다는 분들 중에는 그 증거와 드러나는 현상이 너무나 성경과는 달라서 도저히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없는 것들을 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들은 성령을 받기를 너무나 열렬히 구하고 구한 끝에 성령이 아니라 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대신 곧 바로 저 하늘의 영광을 구하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과 마찬가지로 체험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갈보리로 가야 합니다. 거기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의 죄와 죄인된 자아를 처리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를 씻음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와 함께 나 자신 역시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다음에는 무덤에서 장사지낸바 되고, 부활의 동굴을 나온 다음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앞의 과정이 생략된 채 곧 바로 하늘을 바라볼 때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권능이 아니라 마귀로부터 오는 권능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십자가를 제쳐두고 능력을 구하게 합니다. 은사를 구하게 합니다. 십자가 없이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은혜를 받을 수 있고, 권능을 받을 수 있고, 다양한 은사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기대하게 하고 그렇게 열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설령 기이한 체험을 했다고 인정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신(神)이 내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 전에 제자들에게 결코 성령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마음에 완전히 자라잡기 전에는 결코 성령의 완전한 임재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저는 오순절 교회나 은사주의 교회 집회를 통해 “성령을 받았다, 은사를 받았다, 능력을 받았다”는 분들을 수없이 접해 보았습니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친다는 분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마귀를 쫓아낸다는 성도들도 많이 접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체험이나 이들이 맺는 열매를 통해 판단해 볼 때 도무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의 사역이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기도원을 차리거나 부흥사를 자처하면서 돈벌이를 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말을 따르게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아를 십자가에서 처리하고, 완전히 죽어 본 경험이 없이 바로 성령의 권능만을 사모하고, 성령을 요술방망이처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무엇입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요16:8). 성령의 꾸짖음을 들어 본 적이 없이 곧 바로 성령의 위로만 받았다면 그가 받은 것은 성령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환하게 비추어 줌으로써 우리를 두렵게 하며, 떨게 합니다. 시몬 베드로를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이르되, 오 {주}여, 내게서 떠나소서. 나는 죄 많은 사람이니이다, 하니](눅5:8). 자신의 죄인됨을 발견했을 때 그는 황홀경이나 은혜를 체험한 것이 아니라 마음에 찔림을 받고, 통회하고 자복했습니다. 자신이 완전한 의인인 줄로 알았던 욥은 하나님을 뵙고 난 후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더라.] (욥42:5~6). 일반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뵙고 나면 기쁘나이다. 황홀하나이다. 경이롭기 한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욥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아마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의 작품 속에 대화라고 한다면 “가문의 영광입니다. 자자손손 오늘을 기념하겠습니다”라고 처리해야 할 부분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입니다. 이사야 역시 그러했습니다. 영광 이전에 자신의 죄를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첫 번째 사역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충만했던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은혜와 황홀경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찔림, 양심의 가채, 성령의 꾸짖음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으로 찔려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게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까? 하거늘](행2:37). 찔렸다는 말이 영어로는 cut(자르다)입니다.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잘랐던 것입니다. 성령은 죄인들의 마음을 책망합니다. 꾸짖습니다. 찌릅니다. 상하게 합니다. 그들의 죄에 대해서 울게 하시며 통회하게 하십니다. 흔히 성경은 믿음의 종교이지 감정은 상관없다고 말하지만 죄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마음이 상하지도, 찔리지도, 슬프지도 않는 사람이라면 복음의 은혜가 감격으로 다가올 수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인식했고, 죄인된 자신들을 분명하고 생생하게 인지했습니다. 이것은 감정과 이성에 분명하게 인식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했던 침례 요한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눅3:10). 이들 중에 아무도 나는 “내가 죄인이란 사실을 믿을 뿐 느낄 수는 없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와 죄인됨은 느낄 수 있고, 알 수 있고 날마다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죄인들의 지식과 이성과 마음 등 전인격적으로 죄에 대해 인식하고 알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 율법으로 정죄하시고, 저주하십니다. 그 때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성령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저주가 대신 주님을 보여 주시고, 갈보리 십자가로 인도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피와 죽음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성령의 음성을 듣고도 거부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상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의논하더니](행5:33). 대제사장들, 관원들은 설교하는 베드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의 위로가 아니라 책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꾸짖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평안을 느낀 것이 아니라 죄가 드러나고, 죄인됨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상하여 그를 향해 이를 갈거늘](행7:50). 이들 역시 격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감정만 폭발한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가 모두 동원되었습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니지만 우리의 구원에 감정적 요소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기쁨, 희락, 즐거움 등은 모두 구원의 결과로 오는 요소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말할 수 없는 기쁨, 즐거움을 말합니다. 성령님의 기쁨이란 말이 분명히 나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구원의 기쁨, 성령의 교제 등에 대해 아무런 기쁨도, 즐거움도, 경이로움도 없이 산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압니다. 성령의 책망에는 찔림과 슬픔과 고뇌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을 때는 다툼과 불화가 있습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회개하지 않았을 때, 그는 온 몸과 영과 혼이 다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고생했습니다. [내가 잠잠할 때에 하루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나이다. 이는 밤낮으로 주의 손이 나를 무겁게 누르므로 내 진액이 여름 가뭄에 /마른 것같이/ 되었음이니이다. 셀라.] (시32:3~4). 죄에는 일시적인 즐거움과 쾌락이 있고, 오랫동안 고통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구원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 역시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감정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은 완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은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영적 진리와 사실에 기초합니다. 그러나 감정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것은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여러분이 성령이라고 말할 때마다 방언이나 신유나 대언과 같은 은사를 생각하기 전에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고 죄인됨을 직시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죄를 책망하고 갈보리 십자가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누구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하고,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시간이라도 자신의 죄악됨을 깊이 깨닫고, 발견한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인 것입니다. 성령께서 빛을 비추실 때 드러나지 않던 죄들, 숨겨진 더러움들로 인해 자신을 혐오하고 미워하게 되며, 불결함을 깊이 깨닫고 통회하고 자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일단 갈보리 십자가로 인도하시며 거기에 못 박혀 계신 그리스도,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십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십자가는 평생토록 삶의 좌표가 되며, 항상 거기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은 그리스도의 죽음 위에서만 활동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나의 자아는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장사 지내 버리고 새 생명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는 성령으로 충만할 수도 없고, 성령의 권능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 부활의 생명과 권능을 맛보게 하소서! 사역을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소서!’ 이 셋은 끊어질 수 없는 연결고리처럼 하나로 묶여져 있습니다.

만약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오순절의 성령의 능력과 이적을 기대한다면 그는 마귀에게 속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마귀의 사역자들이 의의 사역자들로 가장해서 교회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그냥 넘겨 버린 채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의 권능과 외적인 표적들과 은사들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먼저 십자가의 진리에 굳게 서고, 부활의 권능을 붙잡으려 한다면 성령 충만은 자연스런 결과로 맺어질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두려운 것 중에 하나는 [십자가 없이 성령]을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지 않는 사람들,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성령의 경험을 구하는 것은 영적 망상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참으로 의인이었습니다. 죄를 많이 지으면서도 자신이 선하고 의롭고 경건한 축에 속한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나 같은 사람만 살면 법이 필요 없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와 같으면 세상에 종교가 왜 필요한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자칭 의인이었습니다. 죄의 유혹을 이겨 본 적도 없고, 이기려 해 본 적도 없으면서도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했으니 ‘죄에 눈이 먼 의인’이라 할 만했습니다. 그러다 복음을 접하고 성경의 빛이 속에 쏟아져 들어왔을 때 저는 제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갈보리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면 나갈수록 죄는 더 크고 선명합니다. [전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내가 살아 있었으나 명령이 오매 죄가 되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하려고 정하신 명령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임을 내가 알았나니 이는 죄가 명령을 통하여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음이라.] (롬7:9~11). 저는 갈보리 십자가에 저의 죄를 처리하신 주님 앞에 죄를 내려놓기 보다 더 열심히 종교 생활을 함으로써 죄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자백하고 회개하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복음을 영접하는 대신 기도, 전도, 성경 읽기 등을 좀 더 많이 함으로써, 신앙 서적을 좀 더 많이 읽고 영적 지식을 쌓아 나감으로써 죄인 된 자신을 의인으로 탈바꿈 시키려고 갖은 노력과 시도를 다 했습니다. 성경을 백번쯤 읽으면 성경을 저절로 통달하게 되고, 완전히 성화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야로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신앙에서 승리한 사람들, 위대한 부흥사들, 위인들의 간증을 읽으면서 단숨에 이들의 경지에 도달하리라 마음먹고 독서에 매진했습니다. 1,000권 정도는 기본으로 읽어야겠다고 생각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는 생명과 평안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어둠이 짙었습니다. 전도를 많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매일 전도했습니다. 간혹 열매를 맺는 기쁨이 있었지만 여전히 제 안에는 고뇌와 번민, 갈등과 고민, 걱정과 근심, 삶에 대한 탄식이 깊은 한숨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제는 남은 카드가 별로 없습니다. 40일 금식 기도 정도가 남았는데 이 역시 별 소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학교를 자퇴하고 신학교로 편입해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를 배워서 원어 성경을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성경의 도(道)를 깨쳐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편입할 신학교를 기도 중에 물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바른 말씀, 순수하게 보존된 킹제임스 성경에 눈을 떴습니다. 와...이제 이 성경으로 새로 시작하면 되겠구나! 광명을 발견한 것처럼 기쁘게 갔지만 이전보다 죄를 더 많이 지었습니다. 야간 신학교에도 등록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드리면 되는 그 단순하고 쉬운 길을 버리고 계속해서 나의 방법, 나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수도승 같은 십여 년의 암흑의 신앙 생활로 얻은 것은 내 힘으로는 결국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권능을 받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성령의 침례를 받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인침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이런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런 것들은 다 내 안에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그런데 왜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고 열매가 없는 것입니까? 십자가 없이 곧 바로 성령의 은사, 권능, 지혜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에게 결코 자신의 권능을 부어 주시지 않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철저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란 중심 좌표에서만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자유와 진리는 바로 십자가에서 자아를 처리하고, 그리스도께 자신을 내어맡김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과한 성도들 안에 능력 있게 일하시며, 열매를 맺으신다는 진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저의 이 짧은 간증이 여러분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신다는 진리를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간단하고 쉬운 진리라도 깨닫지 못하면 짐승같이 되고 맙니다. 오랫동안 헛수고를 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알기로 결단한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성령을 알기로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예수를 알기를 결단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시선을 항상 그리스도와 십자가로 이끄십니다. 우리의 눈은 예수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의 형상을 따라 변화되며,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는 근거가 바로 십자가에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잠시 후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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